‘로켓’처럼 날고 뛰는 밤샘배송 9시간…콜라가 밥이었다
2020 노동자의 밥상
[한겨레] 글 엄지원 기자, 사진 김명진 기자 | 등록 : 2020-01-01 05:00 | 수정 : 2020-01-02 00:33
45초. 아파트 동 입구에 트럭을 주차해둔 조찬호(44)가 4층에 올라가 택배 상자를 현관 앞에 두고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이다. 트럭이 멈추면, 조찬호는 차 문도 닫지 않은 채 아파트 안으로 튕기듯 사라진다. 현관 앞에 상자를 놓아두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뒷걸음질로 나오면서 고객에게 보낼 인증 사진 촬영도 잊지 않는다. 초를 다투며 트럭으로 복귀한 조찬호는, 이내 가쁜 숨을 헐떡인다. 12월 밤공기가 차갑게 얼굴을 할퀴었지만 그 틈에도 땀은 솟아올라 있었다. 아파트단지 불이 하나씩 꺼져가는 새벽 1시, 출근한 지 겨우 세 시간이 된 조찬호는 벌써 ‘로켓’ 같은 추진력이 방전된 듯 보였다. 잠시 트럭 의자에 묻혀 늘어지려던 조찬호는 불쑥 몸을 일으키더니 콘솔 박스에 놓아둔 ‘검은 연료’의 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검은 연료는, 콜라다.
“밥까지 챙겨 먹으면 시간 안에 배송 못 해요. 밤새워 달리는데 밥 먹으면 속도 안 좋고요.” 12월 17일 밤, 경기 김포의 한 아파트단지에서 만난 조찬호가 솜씨 좋게 택배 상자를 쌓으며 말했다. 그는 온라인 유통업체 쿠팡의 배송기사인 ‘쿠팡맨’이다. 지난 2월부터 쿠팡이 새벽 배송을 시작하면서 그는 낮과 밤이 뒤집힌 삶을 살고 있다. 날마다 밤 10시에 출근해 아침 7시에 배송을 마친다.
전날 찬거리를 주문하고 잠든 이들에게 눈뜨면 문 앞에 상품이 와 있는 편리한 아침을 선사하기 위해 조찬호는 밤새워 도시를 내달린다. 자정 직전에 상품을 주문해도 아침 7시 전까지는 배송을 끝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아침 밥상을 챙기기 위해 도시를 누비는 조찬호는 정작 자기 몸을 위해선 간식조차 챙기지 못한다. 기자와 9시간 동행하는 내내 그는 땀으로 흘러나가는 수분과 로켓처럼 움직이며 빠지는 에너지를 당분이 가득한 콜라로 벌충했다. 트럭 콘솔 박스에 350㎖ 콜라 두 병이 상비약처럼 놓인 까닭이다.
밤사이 조찬호는 150건을 배송한다. ‘베이스 라인’(할당량)이다. 여느 택배 회사와 달리 쿠팡은 ‘가구별’로 배송 건수를 헤아린다. 가구별로는 150건이지만 실제 택배 물량은 300여개에 이른다. 이날 조찬호의 고객 중에는 중량 20㎏이 넘는 가구를 주문한 이도, 음료수 12상자를 한꺼번에 주문한 이도 있다. 일반 택배처럼 일정한 부피를 넘긴 상품에 초과 수수료를 물리지도 않는다. 1만9800원 이상 샀다면 배송비는 모두 공짜다.
당일 배송을 뜻하는 쿠팡의 ‘로켓배송’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로켓처럼 움직여야 가능한 서비스다. 물류센터의 일용직들이 로켓처럼 물품을 분류하고, 현장의 배송직들이 로켓처럼 차를 몰며, 로켓처럼 아파트 위아래를 달려야 한다. 모든 것은 ‘당일 아침 7시’라는 제한 시간 압박이 낳은 결과다. 조찬호가 1초도 허투루 쓰지 않는 까닭이다. 식사를 위한 휴게시간 1시간을 쓰기는커녕 숨도 돌릴 수 없다고 푸념하면서도 조찬호는 “내 속도가 100명 중 10등 이내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조찬호는 계속 몸을 움직였다.
지난해 7월 조찬호가 입사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사람이 로켓처럼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똑, 똑, 똑. 안녕하세요, 고객님. 쿠팡맨입니다.” 회사 강사가 조찬호에게 처음 가르쳐준 고객 응대법이다. 강사는 “여러분은 배송직이 아니라 서비스직”이라고 강조했다. 몇 해 전 조찬호가 아직 수학 강사로 일할 때, 쿠팡은 배송기사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남다른 친절 서비스를 펼치겠다고 홍보해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이내 서비스는 속도로, 혁신은 불안으로 빠르게 대체됐다. 현재 5천여 명의 쿠팡 직원 가운데 정규직 비율은 20%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강도 때문에 1년 안에 10명 중 7명은 그만둬요.” 역시 비정규직인 조찬호가 말했다.
쿠팡 같은 기업들은 끊임없이 혁신을 경쟁한다. 기술이나 아이디어로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이 혁신인데, 혁신의 수혜자는 고객과 기업 관리자들뿐이다. 고객을 위한 혁신 경쟁에 현장 노동자는 ‘소모재’로 쓰인다. 기업 관리자들을 위한 혁신 경쟁에는 쿠팡의 노무관리가 대표적이다. 쿠팡맨들 사이에는 ‘계급’이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구분만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노멀’과 ‘라이트’ 등급으로 나뉜다. 노멀 등급의 75% 수준만 배송하는 라이트 등급은 역량평가를 거쳐야 노멀 등급으로 올라설 수 있다. 라이트 등급의 급여는 최저임금 수준이다. 두 등급이 전부가 아니다. 물량 단위로 계약하는 ‘플렉스’는 직원이 아니다. 최근엔 하루 단위로 고용하는 일용직 ‘프리쿠팡맨’도 신설했다.
라이트 등급이 생긴 뒤, 노멀 등급은 물량을 맞추지 못하면 은근한 압박을 받는다. 관리직들은 실적이 낮은 노멀 등급 노동자들에게 “힘들죠?” “자기 물량도 소화 못 하면 동료들에게 민폐죠”라고 말하며 라이트 등급으로 옮길 것을 ‘종용’한다. 하루 200만 개 이상의 물량을 배송하는 쿠팡의 확장세에 비례해 혁신은 급속히 쿠팡맨들을 갈라놓고 있다. 6개월 전만 해도 “이만한 직장 없다”던 동료는 진저리를 치며 다른 직장으로 옮겼다. “고객들이 물건을 한 달 써보고 반품하듯이, 쿠팡맨도 한번 쓰고 쉽게 반품해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협업’이라는 미명으로 지역의 배송직원 30명을 1개 조(캠프)로 묶어둔 것도 혁신적 노무관리 중 하나다. 조원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한 마음이나 조원들보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마음이나, 주어진 할당량을 무리하게 완수하도록 강제한다는 데서 차이는 없다. 마감 시각인 아침 7시가 다가오면 회사는 15분에 한 번씩 지역 내 남은 배송량을 조원들에게 전송한다. 본인의 할당량을 넘긴 배송을 처리하면 1건에 고작 700원을 더 받는다. 하지만 조원 내부에서 조장이 상대평가로 점수를 매길 때 이런 점이 참조되면 ‘레벨업’이 되어 월급에 반영된다. 손이 느려 할당량을 처리하지 못하는 이가 있어도 쿠팡이 배송직원 1명당 할당량을 꾸준히 높여올 수 있었던 까닭이다.
‘로켓배송’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조직에서 노동자의 안전은 배려받을 여지가 없다. 회사는 화물 무게 ‘25㎏’이 넘어야 외주를 주기로 했다. 조찬호는 4~5개씩 택배 상자를 나를 때도 카트를 쓰지 않는다. 허리가 굽도록 무게를 감당했다. “프로세스를 다 지키면 시간 내 배송을 할 수가 없어요. 카트에 쌓고 끌고 할 시간이 어딨어요. 들고 뛰어야지.”
트럭 짐칸을 가득 채웠던 상자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검은 하늘에 파르스름한 여명이 비치자 조찬호가 안도감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이슈 없이 끝났습니다.” 오배송이나 할당량 달성 실패 등 특별한 사고가 없었다는 뜻이다. 어느덧 350㎖ 콜라 두 병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아침 7시에 배송을 마치고 8시에야 퇴근한 조찬호는 같은 캠프(지역) 주간 조에서 일하는 후배 서영범(42)을 만나 설렁탕과 공깃밥 두 그릇을 비웠다. 조찬호는 대개 아침 퇴근 뒤 집에 가서 주린 속을 달래지만, 가끔은 주야간 쿠팡맨들과 만나 회식 겸 ‘새벽 해장국’을 같이 먹는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하는 서영범은 설렁탕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만큼 회사의 압박이 거세지 않았던 때, 출근길이 설레고 동료들과 유대감도 있었어요.” 숟가락이 오가는 설렁탕 뚝배기처럼, 그 감정들도 점점 빈 그릇이 되고 있다.
새해 첫날을 앞둔 섣달 그믐밤에도 조찬호의 트럭은 콘솔 박스에 350㎖ 콜라 두 병을 싣고 어김없이 김포 구석구석을 찾았다. 이날 그의 트럭엔 새해 만복을 빌 가족들의 가래떡(떡국 떡)이 가득 쌓였을 것이다. 1월 1일부터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이 주문한 운동기구도, 영어 공부를 하겠다 계획한 이들의 책도 실려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아침부터 즐거움을 안겨줄 물건을 싣고 달리는 조찬호의 트럭 앞 문짝에는 ‘건강 스트레칭’ 안내도가 붙어 있다. 택배 노동자의 고질병인 근골격계 질환에 이어 새벽 배송을 하면서 역류성 식도염과 위염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 말을 하는 조찬호에게 안내도에 적힌 대로 언제 몸을 펴 운동할 수 있는 건지, 기자는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출처 ‘로켓’처럼 날고 뛰는 밤샘배송 9시간…콜라가 밥이었다
2020 노동자의 밥상
[한겨레] 글 엄지원 기자, 사진 김명진 기자 | 등록 : 2020-01-01 05:00 | 수정 : 2020-01-02 00:33
▲ 달리는 기관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는 철도노동자의 밥상.
밥은 삶을 지탱한다. 50여년 전 평화시장 봉제공장 노동자 전태일은 버스비를 털어 굶주린 재단 보조(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었다. 발전소 노동자 김용균과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구의역 김군은 컵라면을 밥 삼아 품고 다녔다. 그렇게 ‘밥 아닌 밥’들이 시간을 가로질러 노동자의 삶을 웅변하는데도, 노동하는 삶은 여전히 남루하다.
<한겨레>는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는 2020년, 기획 르포르타주 ‘노동자의 밥상’을 통해 우리네 삶 주변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일꾼들의 밥과 노동, 삶을 기록한다. 타인의 아침 식사를 위해 찬거리를 새벽 배송하는 노동자, 종일 아이들의 점심 밥상을 차리고 치우는 급식노동자, 달리는 기관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는 철도노동자, 새벽에 지하철을 닦는 청소노동자의 밥상은 나와 너의 밥이고 나와 너의 삶이다.
이 시리즈는 밥보다 밥상의 이야기다. 우리가 만난 노동자들은 버젓한 ‘식탁’에서 밥을 먹지 못했다. 운전석이나 휴게실, 기관실 등과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차림 없이 혹은 납작한 밥상에 찬을 얹어두고 밥을 먹었다. ‘노동자의 밥상’은 그 밥상의 높이만큼 낮은 곳의 기록이다.
<한겨레>는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는 2020년, 기획 르포르타주 ‘노동자의 밥상’을 통해 우리네 삶 주변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일꾼들의 밥과 노동, 삶을 기록한다. 타인의 아침 식사를 위해 찬거리를 새벽 배송하는 노동자, 종일 아이들의 점심 밥상을 차리고 치우는 급식노동자, 달리는 기관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는 철도노동자, 새벽에 지하철을 닦는 청소노동자의 밥상은 나와 너의 밥이고 나와 너의 삶이다.
이 시리즈는 밥보다 밥상의 이야기다. 우리가 만난 노동자들은 버젓한 ‘식탁’에서 밥을 먹지 못했다. 운전석이나 휴게실, 기관실 등과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차림 없이 혹은 납작한 밥상에 찬을 얹어두고 밥을 먹었다. ‘노동자의 밥상’은 그 밥상의 높이만큼 낮은 곳의 기록이다.
▲ 노동자의 밥상.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밤샘 배송하는 ‘쿠팡맨’의 야식인 콜라, 화장실에서 쌀을 씻는 지하철 청소노동자, 식판에 담은 학교 급식조리원의 밥상, 고려인 이주노동자의 아침 밥상, 지하철 청소노동자의 밥상, 강남역 철탑 위에서 고공농성 중인 삼성 해고노동자의 밥상, 캄보디아에서 온 농촌 이주노동자의 밥상, 폐지 줍는 노인의 점심인 두유와 카스텔라 빵.
45초. 아파트 동 입구에 트럭을 주차해둔 조찬호(44)가 4층에 올라가 택배 상자를 현관 앞에 두고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이다. 트럭이 멈추면, 조찬호는 차 문도 닫지 않은 채 아파트 안으로 튕기듯 사라진다. 현관 앞에 상자를 놓아두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뒷걸음질로 나오면서 고객에게 보낼 인증 사진 촬영도 잊지 않는다. 초를 다투며 트럭으로 복귀한 조찬호는, 이내 가쁜 숨을 헐떡인다. 12월 밤공기가 차갑게 얼굴을 할퀴었지만 그 틈에도 땀은 솟아올라 있었다. 아파트단지 불이 하나씩 꺼져가는 새벽 1시, 출근한 지 겨우 세 시간이 된 조찬호는 벌써 ‘로켓’ 같은 추진력이 방전된 듯 보였다. 잠시 트럭 의자에 묻혀 늘어지려던 조찬호는 불쑥 몸을 일으키더니 콘솔 박스에 놓아둔 ‘검은 연료’의 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검은 연료는, 콜라다.
▲ 배송 노동자 ‘쿠팡맨’ 조찬호씨가 지난 17일 새벽, 경기 김포시 장기동 한 아파트 단지에서 새벽 배송을 하던 중 콜라를 마시고 있다.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일하는 조씨는 시간 안에 배달을 마치기 위해 밥 대신 탄산음료로 당을 보충하면서 일한다.
새벽 배송이 바꿔놓은 삶
“밥까지 챙겨 먹으면 시간 안에 배송 못 해요. 밤새워 달리는데 밥 먹으면 속도 안 좋고요.” 12월 17일 밤, 경기 김포의 한 아파트단지에서 만난 조찬호가 솜씨 좋게 택배 상자를 쌓으며 말했다. 그는 온라인 유통업체 쿠팡의 배송기사인 ‘쿠팡맨’이다. 지난 2월부터 쿠팡이 새벽 배송을 시작하면서 그는 낮과 밤이 뒤집힌 삶을 살고 있다. 날마다 밤 10시에 출근해 아침 7시에 배송을 마친다.
전날 찬거리를 주문하고 잠든 이들에게 눈뜨면 문 앞에 상품이 와 있는 편리한 아침을 선사하기 위해 조찬호는 밤새워 도시를 내달린다. 자정 직전에 상품을 주문해도 아침 7시 전까지는 배송을 끝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아침 밥상을 챙기기 위해 도시를 누비는 조찬호는 정작 자기 몸을 위해선 간식조차 챙기지 못한다. 기자와 9시간 동행하는 내내 그는 땀으로 흘러나가는 수분과 로켓처럼 움직이며 빠지는 에너지를 당분이 가득한 콜라로 벌충했다. 트럭 콘솔 박스에 350㎖ 콜라 두 병이 상비약처럼 놓인 까닭이다.
밤사이 조찬호는 150건을 배송한다. ‘베이스 라인’(할당량)이다. 여느 택배 회사와 달리 쿠팡은 ‘가구별’로 배송 건수를 헤아린다. 가구별로는 150건이지만 실제 택배 물량은 300여개에 이른다. 이날 조찬호의 고객 중에는 중량 20㎏이 넘는 가구를 주문한 이도, 음료수 12상자를 한꺼번에 주문한 이도 있다. 일반 택배처럼 일정한 부피를 넘긴 상품에 초과 수수료를 물리지도 않는다. 1만9800원 이상 샀다면 배송비는 모두 공짜다.
당일 배송을 뜻하는 쿠팡의 ‘로켓배송’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로켓처럼 움직여야 가능한 서비스다. 물류센터의 일용직들이 로켓처럼 물품을 분류하고, 현장의 배송직들이 로켓처럼 차를 몰며, 로켓처럼 아파트 위아래를 달려야 한다. 모든 것은 ‘당일 아침 7시’라는 제한 시간 압박이 낳은 결과다. 조찬호가 1초도 허투루 쓰지 않는 까닭이다. 식사를 위한 휴게시간 1시간을 쓰기는커녕 숨도 돌릴 수 없다고 푸념하면서도 조찬호는 “내 속도가 100명 중 10등 이내일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조찬호는 계속 몸을 움직였다.
▲ 배송 노동자 ‘쿠팡맨’ 조찬호씨가 지난 17일 새벽 경기 김포시 장기동 한 아파트 단지에서 배송을 하기 위해 뛰어가고 있다. 조씨는 전날 밤 10시부터 아침 7시까지 정해진 배송물량을 마무리하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렸다.
혁신은 불안으로 대체됐다
지난해 7월 조찬호가 입사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사람이 로켓처럼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똑, 똑, 똑. 안녕하세요, 고객님. 쿠팡맨입니다.” 회사 강사가 조찬호에게 처음 가르쳐준 고객 응대법이다. 강사는 “여러분은 배송직이 아니라 서비스직”이라고 강조했다. 몇 해 전 조찬호가 아직 수학 강사로 일할 때, 쿠팡은 배송기사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남다른 친절 서비스를 펼치겠다고 홍보해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이내 서비스는 속도로, 혁신은 불안으로 빠르게 대체됐다. 현재 5천여 명의 쿠팡 직원 가운데 정규직 비율은 20%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강도 때문에 1년 안에 10명 중 7명은 그만둬요.” 역시 비정규직인 조찬호가 말했다.
쿠팡 같은 기업들은 끊임없이 혁신을 경쟁한다. 기술이나 아이디어로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이 혁신인데, 혁신의 수혜자는 고객과 기업 관리자들뿐이다. 고객을 위한 혁신 경쟁에 현장 노동자는 ‘소모재’로 쓰인다. 기업 관리자들을 위한 혁신 경쟁에는 쿠팡의 노무관리가 대표적이다. 쿠팡맨들 사이에는 ‘계급’이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구분만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노멀’과 ‘라이트’ 등급으로 나뉜다. 노멀 등급의 75% 수준만 배송하는 라이트 등급은 역량평가를 거쳐야 노멀 등급으로 올라설 수 있다. 라이트 등급의 급여는 최저임금 수준이다. 두 등급이 전부가 아니다. 물량 단위로 계약하는 ‘플렉스’는 직원이 아니다. 최근엔 하루 단위로 고용하는 일용직 ‘프리쿠팡맨’도 신설했다.
라이트 등급이 생긴 뒤, 노멀 등급은 물량을 맞추지 못하면 은근한 압박을 받는다. 관리직들은 실적이 낮은 노멀 등급 노동자들에게 “힘들죠?” “자기 물량도 소화 못 하면 동료들에게 민폐죠”라고 말하며 라이트 등급으로 옮길 것을 ‘종용’한다. 하루 200만 개 이상의 물량을 배송하는 쿠팡의 확장세에 비례해 혁신은 급속히 쿠팡맨들을 갈라놓고 있다. 6개월 전만 해도 “이만한 직장 없다”던 동료는 진저리를 치며 다른 직장으로 옮겼다. “고객들이 물건을 한 달 써보고 반품하듯이, 쿠팡맨도 한번 쓰고 쉽게 반품해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협업’이라는 미명으로 지역의 배송직원 30명을 1개 조(캠프)로 묶어둔 것도 혁신적 노무관리 중 하나다. 조원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한 마음이나 조원들보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마음이나, 주어진 할당량을 무리하게 완수하도록 강제한다는 데서 차이는 없다. 마감 시각인 아침 7시가 다가오면 회사는 15분에 한 번씩 지역 내 남은 배송량을 조원들에게 전송한다. 본인의 할당량을 넘긴 배송을 처리하면 1건에 고작 700원을 더 받는다. 하지만 조원 내부에서 조장이 상대평가로 점수를 매길 때 이런 점이 참조되면 ‘레벨업’이 되어 월급에 반영된다. 손이 느려 할당량을 처리하지 못하는 이가 있어도 쿠팡이 배송직원 1명당 할당량을 꾸준히 높여올 수 있었던 까닭이다.
‘로켓배송’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조직에서 노동자의 안전은 배려받을 여지가 없다. 회사는 화물 무게 ‘25㎏’이 넘어야 외주를 주기로 했다. 조찬호는 4~5개씩 택배 상자를 나를 때도 카트를 쓰지 않는다. 허리가 굽도록 무게를 감당했다. “프로세스를 다 지키면 시간 내 배송을 할 수가 없어요. 카트에 쌓고 끌고 할 시간이 어딨어요. 들고 뛰어야지.”
▲ 쿠팡맨 조찬호(44)씨가 17일 아침 경기 김포시 운양동에서 샛별배송을 마친 뒤 후배 서영범(42)씨와 만나 먹은 곰탕 한 그릇.
아침 7시 설렁탕 회식
트럭 짐칸을 가득 채웠던 상자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검은 하늘에 파르스름한 여명이 비치자 조찬호가 안도감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이슈 없이 끝났습니다.” 오배송이나 할당량 달성 실패 등 특별한 사고가 없었다는 뜻이다. 어느덧 350㎖ 콜라 두 병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아침 7시에 배송을 마치고 8시에야 퇴근한 조찬호는 같은 캠프(지역) 주간 조에서 일하는 후배 서영범(42)을 만나 설렁탕과 공깃밥 두 그릇을 비웠다. 조찬호는 대개 아침 퇴근 뒤 집에 가서 주린 속을 달래지만, 가끔은 주야간 쿠팡맨들과 만나 회식 겸 ‘새벽 해장국’을 같이 먹는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하는 서영범은 설렁탕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만큼 회사의 압박이 거세지 않았던 때, 출근길이 설레고 동료들과 유대감도 있었어요.” 숟가락이 오가는 설렁탕 뚝배기처럼, 그 감정들도 점점 빈 그릇이 되고 있다.
새해 첫날을 앞둔 섣달 그믐밤에도 조찬호의 트럭은 콘솔 박스에 350㎖ 콜라 두 병을 싣고 어김없이 김포 구석구석을 찾았다. 이날 그의 트럭엔 새해 만복을 빌 가족들의 가래떡(떡국 떡)이 가득 쌓였을 것이다. 1월 1일부터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이 주문한 운동기구도, 영어 공부를 하겠다 계획한 이들의 책도 실려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아침부터 즐거움을 안겨줄 물건을 싣고 달리는 조찬호의 트럭 앞 문짝에는 ‘건강 스트레칭’ 안내도가 붙어 있다. 택배 노동자의 고질병인 근골격계 질환에 이어 새벽 배송을 하면서 역류성 식도염과 위염까지 얻었다고 한다. 그 말을 하는 조찬호에게 안내도에 적힌 대로 언제 몸을 펴 운동할 수 있는 건지, 기자는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출처 ‘로켓’처럼 날고 뛰는 밤샘배송 9시간…콜라가 밥이었다
'세상에 이럴수가 > 정치·사회·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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