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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다시 떠오른 의문사 논란]2012년 오늘 ‘의문사 망령’은 살아있다

[특집| 다시 떠오른 의문사 논란] 2012년 오늘 ‘의문사 망령’은 살아있다
박정희 시대 ‘장준하 사망’에서 ‘민주노동당원 자살 사건’까지
공권력 개입 의혹 사망 사건들

[주간경향 991호] 백철 기자 | 2012 09/04


사람은 죽었지만 책임지는 자는 없었다.

사건은 급히 ‘사고사’로 마무리됐고, 목격자 1명을 제외한 관련자들은 입을 닫았다. 장준하의 사망이 사고사인지 타살인지 명확히 가려지지 않은 채 진실은 수십년간 잠을 자고 있었다.

지난해 폭우로 독립유공자이자 박정희 유신 반대운동을 펼쳐온 재야인사 장준하의 묘가 무너졌다. 유족들은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으로 장준하의 묘를 옮겼고, 이 과정에서 처음으로 장준하의 유골이 공개됐다. 두개골 오른쪽 귀 뒤쪽에 지름 5~6㎝ 크기의 원형 모양으로 파인 흔적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2000년, 2002년 두 차례 진행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장준하의 사망 원인을 ‘규명 불능’으로 발표했다. 국가정보원, 국군기무사령부 등 정보기관에서 ‘국가안보’, ‘개인의 인격권 보호’ 등을 이유로 장준하와 관련된 정보기관 기록물 제출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의문사위 보고서에 따르면, 기무사는 자료 제출을 전면 거부했으며, 국정원은 장준하의 사망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자료로는 ‘오직 한 장 분량의 보고서’만을 제출했다.

▲ 2004년 2차 의문사 진상규명위가 장준하의 미공개 시신 사진을 공개했다. | 의문사제공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는 장준하의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도운 바 있는 김용환씨뿐이다. 김씨는 2004년 2차 의문사위 조사가 끝난 뒤 <월간조선>과 만나 “장준하 선생님 사건은 1분만 이야기하면 끝난다”, “누가 뭐래도 진실은 하나다. 장준하 선생님은 등반 중에 실족하셔서 돌아가셨다. 내가 현장에서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2차 의문사위는 김씨의 의견이 사실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장준하의 사망 원인이 추락이 아닐 수 있고, 사고 당일 김씨의 행적이 미심쩍다는 이유였다. 의문사위는 국정원의 비협조 때문에 김씨가 거짓진술을 하는 이유에 대해 실체적 진실을 규명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김용환씨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한 조사관이 “당신이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정보부에 보고한 문건”이라며, 조그만 종이 크기의 문건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2차 의문사위에서 장준하 사건을 담당했던 고상만 전 의문사위 조사관은 “전혀 엉뚱한 이야기이고, 그런 문건은 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의문사위는 장준하를 비롯해 박정희 정권에 있었던 수많은 의문사 사례를 다뤘다. 상당수의 경우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명확히 규명되진 않았다. 공권력에 의한 타살로 인정된 경우 역시 정황과 증언에 따른 결과였다. 의문사 당사자들은 느닷없이 달리던 기차에서 추락하거나, 약물중독으로 사망했다. 건강했던 사람이 어느날 옥중에서 갑자기 병사하는 일도 있었다.

의문사위와 이후 여러 차례 벌어진 진실규명의 노력은 박정희 시대의 어둠을 단편적으로나마 드러냈다. 추락사와 의문의 실종 직전에 공권력의 부당한 감금, 감시, 협박 등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실종과 의문사 직전엔 공권력 개입 있었다

1971년 의문사한 김창수는 전남 목포의 선거관리위원이었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 후보에게 힘겨운 승리를 거둔다. 곧이어 제8대 총선이 열리자 박정희는 김 후보의 고향 목포에서 선거대책회의를 여는 등 공화당 후보를 측면에서 지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후보가 속한 신민당의 후보가 목포에서 당선되자 공화당은 신민당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의문사위는 당시 경찰이 김창수를 여관에 감금한 채 선거부정이 있었다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도록 한 사실을 밝혀냈다. 허위자백이 이뤄진 다음날인 6월 21일 저녁, 김창수는 추가 조사를 위해 경찰관 2명, 공화당원 2명과 함께 서울로 가는 급행열차에 몸을 실었다가 중간에 실종됐다. 김창수는 몇 시간 뒤인 6월 22일 새벽에 전북 김제역 인근에서 상의가 벗겨져 찢어진 채 신음하고 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김창수는 며칠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다 사망했는데, 당시 경찰은 김창수가 실족사한 것으로 발표했다.

의문사위는 1971년 한 일본 법의학자가 김창수의 시체에 있는 상처가 망치로 구타당한 것이라는 소견을 냈다고 밝혔다. 또한 김창수와 같은 칸에 탄 것은 공화당원 조모씨였으며, 경찰들은 다른 칸에 타고 있었다는 점을 들어 의문사위는 김창수의 죽음에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가 있었다고 결론내렸다. 당시 경찰이 김창수의 죽음을 사실상 방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10월 유신에 반대하던 재야인사들은 불법사찰을 당했다. 1972년 교련 반대운동, 1974년 유신정부 반대 학내 철야농성을 주도한 경북대생 심오석씨는 1976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잠적한 이후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 경상북도 경찰이 심오석씨를 ‘문제학생 C급’으로 분류해 감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심오석이 본격적으로 유신 반대활동에 나섰던 1972년 2학기부터 경찰이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지인들의 증언, 대구 남부서 대공형사들이 심오석의 집을 매복·감시하고 있었다는 당시 경북대 담당 형사의 증언을 토대로 의문사위는 심오석이 공안기관으로부터 감시를 당해왔다고 인정했다.

청주에서 유신체제에 반대하고 노동자·농민 권익향상 운동을 이끌었던 도시산업선교회의 정진동 목사(2007년 사망)는 1 대 1 감시를 당했다. 당시 청주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은 정 목사의 집회 참석을 막을 목적으로 정 목사의 집안에까지 들어와 잠을 잤다고 의문사위에 진술했다.

그러던 1978년 7월 정 목사의 아들 정법영이 급작스런 약물중독으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당시 정 목사는 노동자 처우개선 등을 주장하며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었다. 경찰은 선교회가 위치한 건물의 부동산 사무실에 7~8명의 정보과 형사를 상시적으로 배치하고, 선교회 정문에서 농성 참가자들을 감시했다.

▲ 1979년 8월 12일 경찰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고 있던 YH무역 노동자들을 해산시키고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당시 청주경찰서 정보과 형사였던 오모씨는 정 목사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법영에게 접근했다고 증언했으며, 정법영이 “경찰이 자꾸 술을 마시자고 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의문사위는 정법영이 아버지에 대한 공권력의 탄압, 자신에 대한 공권력의 접근 시도에 심리적 부담을 느껴 음독자살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국정원의 자료제출 비협조” 때문에 사인 규명이 어려웠다고 밝혔다.

박정희 정권에서 비전향 장기수를 전향시키기 위해 폭력을 동원한 사실도 드러났다. 1974년 벌어진 최석기 사건이 대표적이다. 최석기는 1955년 전라남도 벌교를 통해 남파됐으나 곧 붙잡혀 법정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1974년 4월 4일 최석기는 독방에서 사망했는데, 과거 수사 결과에 따르면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의문사위는 최석기가 사망하던 날 좌익 수형자를 전향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격리사동’에 이동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73년부터 대전교도소는 전향공작반을 설치했는데, 1년간 200명 가까운 사람을 전향시켰다. 최석기가 죽던 날에도 9명이 전향했다.

대전교도소가 사용한 방법은 ‘주먹’이었다. 교도소 측은 격리사동에 일명 ‘떡봉’으로 불리던 조모씨 등 2명을 함께 수용했다. 이미 조씨는 폭력을 사용해 여러 명의 좌익 수형자들을 전향시킨 전력이 있었다.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 조씨 등 2명은 최석기의 입에 수건을 물린 상태에서 한 명은 가슴, 한 명은 다리에 올라타 주먹으로 온몸을 구타한 사실이 드러났다. 폭행사실을 본 교도관 전모씨가 이 사실을 상부에 알렸으나 상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최석기가 사망한 이후 28년간 이 사건은 ‘비전향 장기수가 옥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교도관 전씨와 상관 손모씨만 각각 감봉 1개월, 견책 1개월의 징계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2010년까지 활동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유신 말기에 경찰이 진압과정에서 노동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뒤 이 사실을 은폐한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1979년 8월 9일 YH무역 노조원들은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회사 운영 정상화를 외쳤다. 농성 이틀째인 8월 11일 새벽 2시 경찰은 전격적으로 진압작전을 시작했는데 이와 거의 비슷한 시간에 노조원 김경숙이 추락사한 채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진압작전 30분 전 김경숙이 동맥을 스스로 절단한 채 투신자살했고, 진압작전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국보법 피의자에 대한 ‘전향 공작’도 진행중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 당시 경찰의 발표는 사실과 다르다는 점이 드러났다. 신민당사가 관할지역이었던 마포경찰서는 진압작전 직후 김경숙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당시 진압작전에 투입됐던 경찰들도 진압작전 이후에 김경숙의 사망을 알게 됐다고 증언했다. 진실화해위는 경찰이 신민당사 진입 후 노동자들을 폭행하였고, 김경숙은 폭력을 피해 달아나다가 추락사했다고 결론지었다.

김경숙의 동료이자 진실화해위에 사건을 진정한 최순영 전 민주노동당 의원은 “시체가 발견된 곳도 경찰 발표와 다른 곳이었다. 계속 의문사로 남을 뻔했는데 당시 진실화해위가 조사를 잘 해줬다”고 말했다.

마지막 의문사위 활동이 끝난 지 8년이 지났고, 의문사 사건이 발생한 지는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벌어진 공권력의 민간인 불법사찰, 강제전향 등 인권침해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 8월 7일 민주노동당 총선 후보를 지낸 엄윤섭씨가 우울증 끝에 자살했다. 엄씨는 국군기무사령부의 민간인 불법사찰 피해자였다. 2009년 8월 경기도 평택에서 열린 쌍용차 파업 관련 집회를 촬영하다 집회 참가자들에게 붙잡힌 기무사 수사관은 민주노동당 당원, 시민단체 관련자들을 사찰한 자료를 갖고 있었다.

기무사의 사찰자료 중에는 엄씨가 자신의 공방에서 일하다가 밖으로 나와 담배를 태우는 모습, 엄씨의 아내 안모씨가 약국으로 출근하는 모습 등 이들 부부의 일상이 담긴 테이프도 있었다. 엄씨의 지인인 이동영 통합진보당 서울 관악구위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엄씨가 기무사의 계속된 감시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자신에 대한 사찰이 주위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만날 때마다 미안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형식은 비교적 부드러워졌지만 국가보안법 피의자들에 대한 ‘전향 공작’도 계속됐다. 지난 1월 서울구치소는 왕재산 사건 피의자들에게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질락의 ‘전향 수기’를 나눠줬다. 또다른 국가보안법 수감자인 이병진씨는 교도소 측으로부터 지난해 9월 알몸 검사를 당한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출처 : [특집| 다시 떠오른 의문사 논란] 2012년 오늘 ‘의문사 망령’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