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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노동과 삶

일은 못해도 첫 정규직…절반의 승리라도 행복해요

일은 못해도 첫 정규직…절반의 승리라도 행복해요
[토요판/커버스토리] 기륭 8년만의 복직, 그리고 한 달
[한겨레] 김민경 기자 | 등록 : 2013.06.07 20:28 | 수정 : 2013.06.09 11:13


▲ 계약해지 방식으로 ‘해고’됐던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회사에 직접 고용된 정규직으로 복직했다. 그러나 복직 뒤에도 회사 쪽은 “일이 없다”며 업무 배치를 하지 않고 있다. 5일 서울 대방동 기륭전자 앞에 선 민주노총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7명. 왼쪽부터 유일한 ‘청일점’ 이인섭(45)씨, 김소연(43)씨, 유흥희(43) 분회장, 오석순(47)씨, 윤종희(43)씨, 이미영(33)씨, 강화숙(43)씨다. 취재 김민경 기자, 사진 박종식 기자

▶ ‘정규직화 쟁취, 노조탄압 중단, 파견법 철폐.’ 2010년 11월1일 만난 김소연씨의 빨간 조끼 위에 붙어 있었던 빛바랜 구호들이 생각납니다. 이날은 기륭전자 노사가 정규직 복직에 합의했던 날이었습니다. 실제 정규직 복직에는 5년2개월5일의 싸움과 2년6개월의 기다림이 필요했습니다. 복직 뒤에도 업무 대기 중인 이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저 빛바랜 구호들이 여전히 유효한 재능교육 종탑 농성장도 다녀왔습니다.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1895일 기나긴 투쟁 끝에
2010년 합의를 이끌어 내고
2년 6개월의 유예기간 지나
드디어 정규직으로 돌아왔다

“회사 돌아온 건 좋지만
일 못하고 기다리고 있네요”
한달째 업무 대기 상태다
5월 월급도 나오지 않았다
4대보험도 가입되지 않았다


▲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기륭전자 본사에 3일 한때 전기가 끊겼다. 불 꺼진 7층 중역실을 복직한 기륭 조합원 한 사람이 밖에서 들여다보고 있다. 노조는 회사에 노사협의회를 제안했지만 주주총회 이후에 보자며 거절했다. 아직까지 노조는 회사와 만나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박종식 기자

건물 안은 온통 깜깜했다. ‘관리비를 납부하지 않아 2013년 6월1일부로 단전·단수됨을 알려드립니다’라고 쓰인 알림문이 건물 입구에 붙어 있었다. 지난 3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기륭전자(현 기륭이앤이) 8층 회의실에는 최근 복직한 민주노총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기륭분회) 조합원 10명이 모여 있었다. 단전된 탓에 휴대전화, 노트북 모니터가 유일한 조명이었다. 전기는 이날 오후에 다시 들어왔다.

“첫 출근날 회사는 8층 회의실로 우리를 안내했고, 우리는 그날부터 여기에서 계속 대기해왔어요. 며칠 뒤 회사는 우리 때문에 회의실 사용을 못하면 업무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으니 6층으로 옮기라고 다시 요청하는 거예요. 가봤더니 유배지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회사가 쓰지 않는 공간이었거든요. 유령취급 하지 말고, 신경 좀 써 달라고 회사 사람들이 함께 쓰는 8층 회의실에 있겠다고 했죠.” 유흥희(43) 기륭분회장이 말했다.

기륭전자 노동조합 투쟁일지 (※. 그림을 누르면 큰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할 수 있는 생산 라인을 만들어 달라”

1895일을 싸우고 다시 2년6개월을 기다린 끝에 찾아온 복직이었다. 회사는 다시 돌아온 이들에게 업무를 주지 않았다. 지난 3일 기륭분회 조합원 10명의 하루는 길었다.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점심시간이 되자 조합원들은 각자 싸온 도시락을 손에 들고 회사 옆 공원으로 향했다. 29살부터 51살까지, ‘청일점’ 이인섭(45)씨 외엔 모두 여성이었다.

비정규직 투쟁 1895일 만인 2010년 11월1일, 기륭분회와 회사는 정규직 복직에 합의했다. 이때 회사가 생산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해 1년6개월의 유예기간을 뒀다. 경영상의 이유가 있으면 1년6개월을 추가로 연장할 수도 있었다. 2012년 5월께 회사는 ‘국내에 생산시설이 없다’며 1년 추가연장을 요청했다. 다시 1년 뒤 복직 협의 자리에선 회사는 ‘들어와도 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첫 출근날이요?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하고 그랬어요. 예전에는 건물 안으로 한번 들어오려면 엄청나게 싸워야 했는데 이젠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잖아요. 그것도 정규직으로. 다만 복직을 위해 8년을 기다린 건데, 와서는 아직 일을 못하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네요.” 벌써 옛일처럼 느껴지는 한달 전 첫 출근길의 소회를 묻자 지난 3일 강화숙(43)씨가 말했다. 2005년 8월24일 전면파업 뒤 7년9개월 만의 첫 출근이었다. 강씨는 이제 기륭전자 ‘정규직’ 노동자다.

“아직 월급을 못 받아서 그런 거 아냐?” 옆에 있던 윤종희(43)씨가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5월치 월급은 나오지 않았다. 4대 보험에도 아직 가입되지 않았다.

지난 5월2일은 모두가 설렜던 좋은 날이었다. 서울 신대방동에 있는 기륭전자 본사 앞에서는 이날 오전부터 축제가 펼쳐졌다. 강씨 등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10명의 복직 기자회견이 열린 날이었다. 7년9개월의 투쟁 끝에 찾아온 ‘승리’였다. 강씨 등에게 꽃다발이라도 걸어주겠다며 기륭 앞을 찾은 재능교육 특수고용직 노동자와 쌍용자동차 해고자, 콜트·콜텍 해고자 ‘동지’들은 “우리도 기륭분회의 기를 받겠다”며 기륭전자 정문 앞에서 앞다퉈 기념촬영을 했다. 정규직 노동자로서의 첫 출근은 그들이 꿈꾸는 미래이기도 했다.

“3개월짜리 파견 노동자가 정규직이 되는 데 8년이 걸렸어요. 긴 세월 포기하지 않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한은 푼 거죠.” 윤종희씨의 말에 유흥희 분회장이 “몇 단계 신분 상승이 한번에 된 거지”라고 웃으며 대꾸했다.

기륭전자는 한때 잘나가던 회사였다. 위성 전파를 수신해 듣는 디지털 위성 라디오를 주로 만들었다. 이를 미국 등 외국에 수출해 돈을 벌었는데, 공시자료를 보면 2005년 매출은 1650억원, 2006년 매출은 1674억원에 이르렀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2002년 50명이던 생산직 노동자 수는 2004년 300명으로 6배로 늘었다. 그러나 2006년과 2007년, 2008년 3차례 경영권이 이전되는 부침을 겪었다. 2005년 76억원이었던 영업이익은 지난해 160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지난 5월28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회사는 90% 무상감자를 결정했다.

승리의 기억은 한달 전 일이었고, 기륭분회 정규직 노동자 10명은 아직 회사로부터 업무 지시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달째 ‘업무 대기’ 상태다. 어쨌든 회사 사정이 좋지 않으니, 앞날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하다. 복직의 기쁨과 미래에 관한 불안이 뒤섞인 이유다. 기륭전자 사쪽 관계자는 지난 5일 “직원들 월급도 못 줄 정도로 회사 상황이 좋지 않다. 복직자에게 줄 일감이 없다”고 말했다. 최동열 대표이사와의 전화통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기륭분회는 회사 상황이 어렵지만 무리한 복직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회사 사정을 고려해서 유예 기간을 둘 수 있게 양보했어요. 그런데 그 2년6개월 동안 회사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죠. 경영 문제는 경영진이 책임져야 합니다.” 김소연(43)씨가 말했다. 기륭분회는 2008년 최동열 대표이사 취임 뒤 무리한 회사 인수 등 경영 실패가 이어지며 회사 상황이 악화됐다고 보고 있다.

기륭분회는 복직자 10명이 해고 당시 생산직 노동자였던 만큼 사쪽에 생산라인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가 ‘생산 의지가 있다’고 말했었어요. 중국 공장도 매각한 상황에서 기륭전자가 제조업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생산라인은 필요해요. 기륭은 완제품을 만드는 회사예요. 대규모 생산 시설이 아니더라도 샘플을 만들고 사후서비스(AS)를 할 수 있도록 관련 라인을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죠. 이곳은 전기전자 업종이라 생산시설 설치가 복잡하지 않고 공간이 크지 않아도 돼요.” 유흥희 분회장의 지적이다. 복직 뒤 노사는 함께 만나 현재 상황에 대해 논의한 적이 없다. 노조는 회사 쪽에 노사협의회를 제안했지만 사쪽은 주총 이후 보자며 거절했고, 아직까지 만나자는 이야기는 없다. 노조는 지금껏 없었던 단체협약도 맺기를 바라고 있다.

기륭전자 노동조합 투쟁일지 (※. 그림을 누르면 큰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말대답했다고 잘린 3개월짜리 비정규직

위성 라디오 포장 라인에서 일했던 윤종희씨와 오석순(47)씨는 2005년 4월30일 같은 날 해고됐다. 윤씨는 일한 지 3개월, 오씨는 2개월째 되던 날이었다. 오씨가 꼽는 해고 사유는 잡담, 곧 ‘쓸데없는 소리’였다. 윤씨가 생각하는 해고 원인은 ‘입바른 소리’였다. “포장해야 할 물건이 한참 밀려 있는데 계속 물건을 보냈어요. ‘밀려 있는데 계속 투입하면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말했더니 ‘어디 파견직 주제에 문제제기를 하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 그 주에 잘렸어요. 월급이 적었지만 일 오래 하면 정규직 시켜준다고 해서 찾아온 곳이었어요. 3개월 동안 정말 매일 코피 흘려가며 열심히 일했고요. 그런 저를 잘못도 없는데 해고시킨 거예요. 그 순간 들었던 감정은 서글프고, 화도 나고, 어떻게 표현이 안 돼요. 내가 얼마나 못났으면 비정규직, 파견직에서도 해고되나….”

1895일, 그러니까 5년2개월5일. 재능교육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이 2월26일로 1895일을 넘기면서 지금은 밀려났지만, 기륭전자 투쟁은 그 전까지 최장기 비정규직 농성으로 기록된 싸움이었다. 이 긴 투쟁의 시작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기륭전자 생산직 노동자 300여명 중 290명이 계약·파견직 여성 노동자였다. 이들의 평균 월급은 최저 임금에 가까운 64만1850원이었다. 차별대우뿐 아니라 해고도 잦았다.

“주말에 특근하고 돌아가면 휴대전화로 해고를 통보했어요. 해고가 다반사라 월요일에 안 보이면 ‘또 해고됐구나’ 했죠. 근무기간은 상관없었어요. 물량이 줄면 자르고, 늘면 또 고용하고. 그러다 2005년 4월에 목 디스크 때문에 업무 배치를 바꿔달라고 했다고 한명을 해고했어요. 정말 힘든 라인에서 열심히 일하던 분까지 잘리는 걸 보고 ‘나도 잘릴 수 있구나’ 싶었던 거죠.” 김소연씨도 느꼈던 열악한 노동환경과 만성적인 해고에 대한 분노는 노동조합 기륭분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2005년 7월5일 기륭분회가 만들어지자 200여명이 가입했다. 노조 결성 뒤 회사는 계약직·파견직 노동자들을 계약해지 방식으로 그해 7월31일부터 ‘해고’하기 시작했다. 8월24일 전면 파업 이후에는 노조를 상대로 54억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 긴 싸움이 이어졌다. 단식은 일상이었다. 2008년 김소연 당시 기륭분회장은 94일을 단식하고 쓰러졌다. 공장 옥상 점거, 서울시청 앞 하이서울페스티벌 16m 조명탑 고공농성, 포클레인 위 농성 등 땅과 하늘에서의 농성은 기륭전자 주 거래사인 미국의 시리우스사 원정투쟁까지 낳았다. 삼보일배, 삭발, 촛불문화제, 기도회,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만인 선언…. 그사이 투쟁 날짜는 500일, 1000일, 1500일 부지런히 흘렀다. 200여명의 조합원이 10명밖에 남지 않을 만큼 길고 고된 싸움이었다.

2010년 11월1일 노사 합의 당시 기륭분회장이었던 김소연씨는 “똑같이 일하고도 월급은 적고, 마음대로 자를 수 있고, 벌레 보는 듯한 눈빛으로 가득 찬 그 끔찍한 삶으로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고 말했다. 그 간절함은 윤종희씨와 오석순씨가 2~3개월 일한 직장에 돌아오기 위해 5년을 싸웠던 원동력이 됐다.


‘불법 파견’ 회사는 벌금 500만원 내고 끝

▲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10명이 3일 낮 서울 대방동 기륭전자 옆 공원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박종식 기자
싸우면서 내 탓이지, 내 잘못이지 하며 감내했던 노동 조건과 해고의 문제를 사회 전체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투쟁은 한 사업장의 싸움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의 싸움이 됐다. 나만 정규직 되면 끝나는 게 아니라 모든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어야 끝날 수 있는 싸움이 됐다. 그런 문제의식으로 오석순씨는 2010년 6월 지방선거에 서울시의원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섰고, 김소연씨는 2012년 대통령 선거 후보가 됐다. 그래도 너무 길었다. 조합원 중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병으로 세상을 떠나보낸 사람도 나올 만큼 길었다.

“과거에는 한달만 싸워도 장기 투쟁이었는데, 지금은 비정상적이고 비인간적일 만큼 길어졌어요. 입법·사법·행정이 모두 손 놓고 있는 사이 우리 사회가 몇명 되지 않는 기륭전자 노동자에게 불법파견 문제 해결이라는 십자가를 지웠던 거죠. 기륭전자 싸움은 정규직 복직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지만,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고된 싸움이었습니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의 평가처럼, 기륭분회의 투쟁은 임신한 조합원까지 단식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비인간적’ 싸움이었다. 왜 그렇게 길어진 걸까. 오석순씨는 불법파견 노동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관심을 지적했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이 문제에 관심없었어요. 노동부는 2005년 ‘기륭전자의 비정규직 노동자 고용 형태는 불법 파견’이라고 판단한 뒤 아무것도 안 했죠. 검찰? 불법파견에 대한 500만원 벌금 결정하고 끝냈어요. 법원에선 부당해고가 아니라고 판결했어요. 우리한테는 폴리스라인만 넘어도 집시법 위반이라며 벌금 내라고 하면서 불법 파견한 사업주는 벌금 500만원이 끝이에요. 당시 연매출이 1600억이 넘은 회사한테 500만원이 벌금이에요? 껌값이지. 법이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무시하니까 회사도 우릴 무시했어요. 처음 파업했을 때 회사 쪽에 교섭에 나와달라고 요구하면서 한달을 굶었어요. 아주 소박한 걸 요구하기 위해서도 목숨을 걸어야 했죠.”

만성적 해고와 노동환경에
분노한 기륭 비정규직들은
2005년 7월 노조 만들고
‘불법파견 정규직화’ 싸움
분회장은 94일 단식을 했다.
미국 원정투쟁도 다녀왔다

“이렇게 싸워놓고 복직 못하면
연대해준 분들이 실망했겠죠”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상징이 됐던 기륭 싸움은
‘하면 된다’는 희망을 줬다


기륭전자는 2002년부터 휴먼닷컴과 도급 계약을 맺어 생산직 노동자를 충원했다. 그런데 기륭전자 직원들이 휴먼닷컴 소속 노동자들에게 업무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노동부는 2005년 8월3일 ‘불법 파견’ 판정을 내렸다. 여기까지였다. 회사는 500만원 벌금을 내고 생산라인을 합법적인 도급으로 바꾼 뒤 “법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일은 원청업체에서 하면서 근로 계약은 하청업체와 맺는 고용 형태가 간접 고용이다. 대표적인 간접 고용으로는 파견과 사내하도급(하청) 등이 있다. 파견은 원청 관리자가 하청 노동자에게 직접 업무 지시를 할 수 있지만, 도급의 경우 원청 관리자가 하청 노동자에게 직접 업무 지시를 할 수 없다. 노동부는 불법 파견 노동자의 경우 고용을 강제할 수 있는 법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고용 여부와 관련한 입장을 내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시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에서는 ‘파견 근로 2년 이상인 노동자’만 원청에 직접 고용된 것으로 간주했다. 기륭 조합원들은 대부분 2년 미만 단기 파견 노동자였다. 불법 파견에 대한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고, 불법 파견 노동자를 구제할 법 조항도 없어 이들의 싸움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파견법은 그 뒤 2007년 7월 개정을 통해 2년 이상 된 파견 노동자의 경우 원청이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고용 의무’ 조항을 마련했다. 불법 파견 노동자의 경우는 2년 이상 근무했을 때만 고용 의무가 발생한다고 했다. 이 조항은 2012년이 돼서야 불법 파견 노동자면 근무기간에 관계없이 원청이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개정됐다.

“저희 요구는 ‘불법파견 정규직화’였어요. 기륭 조합원 가운데에는 2년 미만의 단기 근무자가 많았는데, 우리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면 다른 업체도 영향을 받을 수 있었어요. 정부와 기업은 우리 문제를 노동 시장 전체의 문제로 본 거예요. 노동과 자본의 대리전이 된 거죠. 그런데 우리에게는 힘이 없잖아요. 나를 희생하지 않으면 아무도 듣질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희생의 수준이 점점 높아졌죠.” 윤종희씨의 말처럼 지금도 재능교육 해고자들은 성당 종탑 위에,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철탑 위에 올라가 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연대의 힘

기륭 노사간의 합의는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를 회사가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기로 한 첫 사례였다. 1997년 외환위기 뒤 비정규직이 양산됐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의 핵심 의제로 떠오른 건 기륭 조합원들의 투쟁 이후였다. 그 뒤 ‘비정규직 철폐하자’며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왔다. 케이티엑스(KTX) 여승무원, 코스콤 노동자, 이랜드 노동자…. 기륭 조합원들의 싸움은 모든 비정규 노동자 투쟁의 선봉이자 상징이었다.

힘든 싸움을 이어가던 2008년, 시민들은 1000일이 넘어가던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을 외롭게 두지 않았다. ‘기륭여성비정규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다른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예술인·변호사·교수·촛불시민까지 기륭 싸움에 함께했다. “당사자들의 의지와 사회적 연대의 힘으로 ‘정규직 직접 고용’을 얻어낸 겁니다. 비정규직 문제에는 정규직화 외엔 다른 대안이 없어요.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알려준 게 기륭이었죠. ‘봐라, 기륭도 하는데 너희도 할 수 있다’고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거예요.”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이 말했다.

기륭분회 조합원 10명의 정규직 복직은 ‘10명의 승리’를 넘어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의 작은 승리이기도 했다. 재능교육 해고노동자인 여민희(39)씨는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성당 종탑 위에서 말했다. 여씨는 과거 기륭 조합원이 그랬던 것처럼,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121일째 고공농성중이었다.

“고마웠어요. 정작 복직한다 해도 기륭 언니들 앞에 꿈같은 미래만이 펼쳐지진 않을 거란 사실을, 우리는 다 알고 있었어요. 정작 들어가도 언제 끝날지 모를 업무 대기가 기다리고 있고, 어쩌면 다시 싸워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기륭 언니들은 그걸 알면서도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거예요. 그 언니들이 그런 선택을 한 거예요.”

기륭분회 노동자들에게는 출근만큼 중요한 일정이 또 있다. 다른 투쟁 사업장들에 대한 연대다. 합의 뒤 2년 반 동안 10명의 조합원 중 7명이 노조 상근자로 일하며 전국에 연대를 다녔다. 업무 대기 상태에서도 연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번주도 지난 3일 쌍용차 정비지회 출근 투쟁, 5일 현대기아차 전국 동시다발 1인시위, 7일 콜트·콜텍 해고자들 지지 방문 등의 일정이 있었다.

“저희는 처음에 정말 어렵게 투쟁했어요. 그러다 1000일 지나고, 촛불집회 이후로 주목을 많이 받았죠.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막아내자’는 구호 아래 연대도 많았어요. 이렇게 싸워놓고 복직 못 했다면 그분들이 많이 실망했겠죠.” 오석순 조합원이 말했다.

그래서 기륭의 또다른 이름은 ‘희망’이다. “불법 파견 정규직화를 우리가 처음으로 해냈어요. 포기하지 않으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어요. 복귀하던 날 많은 기자들이 온 것도 기사로 알릴 가치가 있는 기쁜 소식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꿈꿀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윤종희씨가 말했다.

정규직이 돼 회사로 돌아오는 데 5년2개월5일의 싸움과 2년6개월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아직 이들에게 맡겨진 일감은 없다. 승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오석순씨가 말했다. “완전 승리는 아니고 ‘쬐끔’요. 회사가 잘 돌아가서 일할 수 있다면 완전 승리겠지만, 유예기간도 2년 반이었고 돌아와서도 대기하고 있잖아요. 회사가 일 시킬지 안 시킬지 모르니까 완전 승리는 아니죠. 그래도 행복해요. ‘진짜 해결 안 될 거야’라고 생각했던 가족, 지인들에게 ‘나 복직했어, 정규직이야’ 하며 회사에서 셀카 찍어 보내면 깜짝 놀라요.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농성장을 지키거나 선전전할 때 사람들이 출퇴근하는 모습이 부러웠거든요. 근데 저도 이제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병원 가려면 외출증도 끊고 가야 하고, 퇴근시간 6시5분 전에 ‘퇴근 준비합시다’ 말하는 것도 좋아요.”

서울 대방동 기륭전자 8층에서 한층을 더 올라가면 옥상이 있다. 기륭분회 노동자 10명은 복직 뒤 옥상 텃밭에 고추·토마토·상추·케일·깻잎 모종을 사서 심고 물을 줬다. 얼마나 먼 곳을 돌아왔는지 모를 그 씨앗들은 지금쯤 유월의 쨍쨍한 햇살을 받으며 땅속으로 부지런히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


출처 : 일은 못해도 첫 정규직…절반의 승리라도 행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