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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누군가 자신을 버니 샌더스와 닮았다고 말하려면

누군가 자신을 버니 샌더스와 닮았다고 말하려면
샌더스의 월가 개혁이 한국 재벌에 던지는 메시지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최종업데이트 2016-02-06 10:56:52


지난주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나는 버니 샌더스를 닮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샌더스 열풍이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강타하자 한국의 수많은 정치인들과 언론이 그의 돌풍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정녕 한국 사회가 샌더스 돌풍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버니 샌더스가 겨냥하고 있는 미국 최대의 기득권층이다. 샌더스의 총구는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60%를 차지하는 월가의 금융자본을 향해 있다.

“If they’re too big to fail, they’re too big to exist!”
(만약 그들이 파산하기에 너무 크다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샌더스의 연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구다. 여기서 ‘그들’이란 바로 GDP의 60%를 장악한 상위 6개의 금융기관들이다. 샌더스는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월가의 금융자본을 축소하거나 해체할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언제나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Absolutely(당연하죠)!”

▲ 미국 대통령선거 민주당 경선에 출마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지난달 14일 버지니아주 린치버그 리버티 대학에서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좌파 성향의 샌더스 후보는 2월 1일 아이오와와 코커스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박빙의 승부를 벌여 사실상 승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뉴시스/AP


만약 한국에서 어떤 대선 후보가 “나는 버니 샌더스를 닮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 GDP에서 5대 재벌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미국 6개 금융기관과 마찬가지로 60%가 넘는다. 그들 역시 파산하기에는 너무 거대하다. 그리고 파산하기에 너무 크다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재벌의 규모를 축소하거나 해체할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언제나 강한 어조로 “당연하죠!”라고 답할 자신이 있는가? 그래야만 그 정치인에게 “나는 버니 샌더스를 닮았다”고 말할 자격이 주어진다.


미국의 금융자본과 한국의 재벌

‘파산하기에 너무 큰 존재(too big to fail)’는 샌더스에 의해 알려지기 전부터 있었던 말이다. 한국에서는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로 종종 번역됐다. 2008년 미국 발 전 세계 금융위기를 불러왔던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비판한 영화의 제목도 바로 ‘too big to fail’이었다.

샌더스는 이렇게 말한다. “파산하기에 너무 크다는 이유로 기껏 공적자금을 투입해 구제해 놨더니, 은행 네 곳 중 세 곳이 그 당시(2008년 금융위기 직후)보다 더 커졌다. 의회는 그들을 규제하지 못한다. 그들이 의회를 규제하지.”

1998년 외환위기 직후 한국 재벌들의 계열사 숫자가 공개됐을 때 한국 사회는 경악에 빠졌다. 알려지지 않았던 계열사들이 속속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시 1위 재벌 현대그룹의 계열사는 무려 79개였다. 그런데 빅딜과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겨우 계열사를 줄여놨더니, 2015년 4월 한국의 재벌은 과거보다 더 커졌다. 삼성은 67개, SK는 82개, 롯데는 80개, GS그룹은 79개의 계열사를 거느린다. 한국의 의회는 재벌을 규제하지 못한다. 재벌이 의회를 규제할 뿐이다.

“월스트리트는 10년에 50억 달러-5억 달러가 아니고 50억 달러(한화 약 6조 원)-꼴로 금융권 규제 완화를 위한 로비에 돈을 써왔고, 그 결과가 2008년 경제위기로 돌아왔다.”라고 샌더스는 말한다. 한국의 재벌들도 일해재단을 통해, 혹은 삼성 비자금 사건 등을 통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돈을 정치권에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으로 한국 사회는 1998년 외환위기를 맞았고, 2016년 극심한 소득 불평등이 벌어지는 중이다.

이처럼 한국의 재벌과 미국의 대형 금융기관은 너무도 비슷하다. 그런데 미국에는 “그들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글래스-스티걸법(1933년 대공황 당시 시행된 금융규제법으로,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떼놓은 법) 같은 규제가 필요하고, 이런 거대한 금융기관들을 쪼개야 한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샌더스가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는 “재벌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용기 있는 유력 대선 후보가 없다.


버니 샌더스였다면 최태원을 풀어줬을까?

한국의 재벌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절대 처벌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5년 안기부 X파일 사건이 터졌을 때, 이건희 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 이학수 삼성 부회장 등이 정치권과 검사들에게 뇌물을 준 사실이 국가기관(안기부)에 의해 확인됐는데도, 당시 수사를 맡았던 황교안 검사(우리가 아는 그 황교활이 맞다)는 그 세 사람을 모두 무혐의 처리했다.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진 후 이건희 회장은 특별검사에 의해 2009년 8월 배임과 조세 포탈죄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딱 4개월 뒤에 이명박 정부는 오로지 이건희 단 한 명만을 사면하는 이른바 ‘원 포인트 1인 사면’을 실시했다. 명분은 IOC 위원이었던 이건희가 사면돼야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 한 명만을 위한 사면 조치가 내려진 때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2015년 8월에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황당한 명목으로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사면됐다. 그는 2003년 SK글로벌에서 1조 5,000억 원 규모의 분식회계를 진두지휘해 구속됐고, 10년 뒤인 2013년 또다시 SK텔레콤과 SK C&C 등 주요 계열사로부터 497억 원을 빼돌린 횡령 혐의로 법정 구속됐다. 초범이 아니라 재범이다. 동종전과 가중처벌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한국 정부는 이런 사람에게 ‘경제 살리기’라는 막중한 책임을 주며 감옥에서 풀어준다.

▲ 특별사면을 받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해 8월 14일 자정 경기 의정부 교도소에서 출소하며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뉴시스


버니 샌더스라면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샌더스는 “오바마 행정부는 지난 경제 위기에 책임이 있는 월스트리트 경영진들을 기소하지 않은 것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신이었다면 그들을 감옥에 보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또다시 “Absolutely(당연하죠)!”라고 답한다.

“이미 7년이 지났지만, 당시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었던 수많은 고위급 경영진 중 단 한 명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 마리화나를 피운 청소년들은 전과기록이 남는데 거대기업의 경영진은 그렇지 않다. 어떤 종류의 범죄를 저지르던 이들은 감옥에 가지 않는다. ‘감옥에 가기엔 너무 큰 존재’라서 그런가?” 이게 샌더스의 설명이다.

샌더스는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나는 취임 첫날 즉시 월스트리트 범죄 수사를 위한 특위를 구성할 것이다. 특위 활동은 신속할 것이고, 죄가 발견되면 구속될 것이다. 이 나라에선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고 천명했다. 이제 우리가 던진 질문의 답이 분명해졌다. 샌더스였다면 결코 최태원 회장을 풀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라면 특위를 구성해서라도 이건희, 정몽구, 최태원, 김승연 등의 경제 범죄자들을 다시 수사할 것이다.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샌더스의 신념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이건희건 정몽구건, 최태원이건 김승연이건, 그들은 ‘감옥에 가기에 너무 큰’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이 결코 법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나는 샌더스를 닮았다”고 말하려면, 그가 지금 어떤 확고한 신념으로 미국의 거대 금융자본과 맞서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닮아야 한다. 미국에 거대 금융자본이 있다면 한국에는 거대 재벌이 있기 때문이다.

샌더스의 정치 혁명을 부러워하는 한국의 정치인들과 자신이 샌더스와 닮았다고 자화자찬하는 유력 대선 후보에게 묻는다.

당신은 샌더스가 그랬던 것처럼 당당하게 한국의 재벌에 맞서 싸울 용기는 있는 건가?


출처  누군가 자신을 버니 샌더스와 닮았다고 말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