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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노동과 삶

뭉툭한 그의 손에서 죽음이 그려졌다

뭉툭한 그의 손에서 죽음이 그려졌다
[조선계 블랙리스트를 아십니까 ②] 그는 왜 노조 위원장을 맡았나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 | 2017.05.05 10:01:47


"누가 대통령이 된들 우리 삶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문재인, 안철수 등 유력 대선 후보들 중에서 하청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이명박·박근혜가 만든 적폐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사회의 진짜 적폐인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노동적폐'를 청산하는 날이 오긴 올까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6차선 차도를 씽씽 달리는 대형차들이 인도까지 한 대야 물을 튀겼다. 마이크를 쥐고 있던 하창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의 신발, 그리고 바지는 젖은 지 오래였다.

지난 4월 11일 새벽 조선소 하청 노동자 두 명이 20여 미터 높이 하늘로 올랐다. 현대중공업 그룹 내 현대미포조선 하청노동자가 울산 염포산터널 입구 고가도로 교각(교량 상판 밑 기둥)에 오른 것. 하청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원직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이 퇴근하는 시간. 마이크를 들고 연신 떠들어대는 하창민 지회장. 대부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고공농성을 시작한 뒤, 매일 아침저녁 거르지 않고 진행하는 선전전이었다.

"조합원 숫자가 거의 0에서 시작했는데, 다시 0으로 돌아갈 판이다 아닌교. 어렵게 조합원 가입시키면 뭐하노. 이리 쉽게 솎아내는데..."

하청 노조의 위원장인 하창민 지회장의 속은 새까맣게 타 있었다. 블랙리스트로 인해 그나마 조직했던 조합원도 이젠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의 한숨이 깊어진 이유다.

▲ ⓒ프레시안(허환주)



그의 손에서 죽음이 그려졌다

하늘에 매달린 노동자들이나 그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신세였다. 그 역시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현대중공업에서 쫓겨났다. 이후 지금까지 하청 노조 위원장 역을 하고 있다.

기자가 하창민 지회장을 만난 건 2015년이다. 당시 나는 2014년 현대중공업 그룹 내에서 일하다 죽은 노동자를 취재 중이었다. 어떻게 한 해 동안 그룹 내에서 열 세 명의 노동자가, 그것도 모두 하청노동자가 사망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기자를 울산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기사는 말할 것도 없이, 노동부 특별감독 보고서에도, 국정감사 자료에도 죽음의 이유는 드러나 있지 않았다. 사고 직후 현대중공업에서 작성한 두 장짜리 사건 경위서가 전부였다. 거기서도 언제, 어디서, 누가 죽었는지만 이야기할 뿐 사고 원인은 없었다.

유가족들을 만나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이미 회사와 합의한 뒤였다. 잊고 싶은 기억을 들쑤셔 내는 기자는 불편하다. 고민 끝에 만난 인물이 하창민 지회장이었다.

지회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하 지회장은 소파에서 막 잠이 깬 몰골로 목을 긁적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여긴 뭐더러 왔느냐’는 표정이었다. 만사가 귀찮은 얼굴로 등 긁개로 연신 등을 긁으며 마뜩잖게 나를 바라봤다.

'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소상히 아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말로만 설명하면 기자 양반이 몬 알아들으니 내 직접 그림을 그려 가면서 설명할 테요. 잘 보소."

뭉툭한 손가락에 꽉 쥐어진 펜이 움직이며 그들의 죽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와 연을 맺었다.


사람 목숨을 개미 목숨으로 생각하는 회사

하창민 지회장은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공고를 다니다 중퇴한 뒤 우여곡절 끝에 작은 공장에 용접공으로 취직해 이십대 절반을 보냈다. 이후 1996년 울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여기서 그는 현대자동차 하청업체에 들어가 3개월 일한 뒤, 석유화학단지로 이직해 약 2년을 있었다. 그러다 조선소에서 일하면 돈을 더 준다는 이야기에 현대미포조선소에 취업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IMF가 터졌다. 대다수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았고 하창민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99년 1월, 회사에서 더는 나오지 말라고 했다.

생계도 생계였지만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한번 쓰고 버리는 게 노동자인가 싶었다. 더는 이곳에 발붙이고 싶지 않았다. 안정적으로 살고 싶었다. 네 살과 두 살 아이가 있었다. 그해 1월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한참 어린아이들과 섞여 공부했다. 결과도 좋았다. 그해 3월 공무원 필기시험에 붙었다.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손쉽게 붙을 거로 생각했던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철모르던 시절 폭행 사건으로 벌금형을 받았던 일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경찰 공무원 시험도 치렀다. 설마 또 떨어질까 싶었지만 최종 면접에서 또다시 같은 이유로 고배를 마셨다. 그해 9월, 강원도 지방 경찰직 시험에도 응시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이번에도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다. 지금은 돌아가신 장인이 그 소식을 듣고는 손수 양복 한 벌을 사위에게 안겼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코끝이 시큰거린다.

하지만 장인의 정성도 소용없었다. 더는 공부할 여력도, 가장으로서 면목도 없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다시 조선소 문을 두드렸다. 조선소에서 쫓겨난 지 1년 만에 현대중공업 하청업체에 들어갔다.

죽기 살기로 일했다. 일머리가 있었던지라 3개월 만에 현장 관리자가 됐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일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잘 챙기고 일은 확실히 마무리했다. 돈도 많이 모았다. 조선소는 열심히 하는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곳 같았다. 적어도 그때 하 지회장에게는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니 똑바로 일해라잉."

갓 스물을 넘긴 직원에게 이런 농담을 던지고 다른 작업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가 자리를 뜬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위에서 블록이 떨어졌다. 이 사고로 방금 전까지 그와 농담을 나누던 젊은 직원이 압사했다.
그렇게 황망할 데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회사는 일이 급하다며 시신을 수습한 뒤 다시 작업을 시작하려 했다.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밑에 있는 직원들에게 작업 중지를 지시했다. 그러고는 그들과 함께 고인이 된 직원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3일장을 치렀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는 그런 그를 마뜩잖게 생각했다.

이즈음 하 지회장은 노조 활동도 시작했다. 사람 목숨을 개미 목숨으로 생각하는 회사라고 생각했다. 작업 관리자다 보니 조합원을 조직하기도 수월했다. 욕심이 생겼다. 더 많은 노동자를 조직하고 싶었다. 일한 만큼 돈을 받아야 하는데 자기와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은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조합원을 조직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여기저기 업체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물량팀을 조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사실 관리자 신분으로 노동자에게 조합에 가입하라고 권유하는 것도 불편한 일이었다. “자기는 먹고살 만하니 노동조합 활동한다.” 이런 뒷말을 듣기도 거북했다. 그가 물량팀으로 적을 옮긴 이유다.

▲ ⓒ정기훈



블랙리스트의 '고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것이 화근이 될 줄은 뒤늦게 알았다. 업체에서는 그가 물량팀으로 넘어가자 기회를 잡은 듯했다. 어느 업체에서도 그에게 물량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소용없었다. 어느새 그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애초 일하던 업체로 돌아가려 했으나 거기서도 문전박대를 당했다.

결국, 자기 두 발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다시 공장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냐, 내가 이기나, 니들이 이기나 두고보자.'

그렇게 해서 지금껏 노조 일을 하고 있다. 하 지회장이 하청 노조 위원장을 맡은 지도 6년이나 됐다. 이렇다 할 수입도 없이 겨우 버틴 시간이었다.

그 사이 평수 넓은 아파트는 사라지고 임대아파트가 그의 보금자리가 됐다. 아들 둘은 공부를 어느 정도 해서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공부를 어느 정도 하는 것도 문제다. 등록금과 방세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얼마 전에는 막둥이도 태어났다.

이 지긋지긋한 블랙리스트의 '고박(固縛)'에서 그가 자유로울 수 있는 날은 올 수 있을까.


출처  뭉툭한 그의 손에서 죽음이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