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고난의 산증인, 오키나와-제주-타이완
[동아시아를 묻다·6] 지방(local)에서 지역(region)으로
기사입력 : 2011-10-27 오전 10:12:11
지방(local)에서 지역(region)으로
오키나와
동아시아를 실감하게 된 몇 차례의 일화 소개를 흥미롭게 접했습니다. 자이니치(在日) 문제가 일본과 한국의 곤경을 낳고, 중국의 혁명 경험을 공유하는 과제가 야기하는 곤혹스러움은 능히 이해할 만합니다. 균열과 적대로 얽혀 있는 이 냉엄한 현실로부터 동아시아를 사유하자는 발상에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오키나와 전투와 제주 4·3 사건 그리고 한국 전쟁을 논하면서 미국의 존재감이 뚜렷했고, 그 미국이라는 타자로 말미암아 한-일 연대의 여지가 넓어졌다는 지적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군요. 그 심포지엄이 1990년대도 아니고, 2000년 하고도 5년이 지나서 열린 행사였다는 점에서 한층 그러합니다.
친미든, 반미든 미국을 중심에 두는 냉전적 사유 방식으로부터의 탈각을 단련하는 방법이 바로 동아시아적 시각이었던 탓입니다. 기실 중국 혁명의 경험을 공유하는 문제도 북조선과 베트남, 미얀마(버마), 몽골 등 아시아 사회주의권의 연구자들이 참여했다면 그리 적막한 분위기가 연출되지는 않았을 법합니다. 한국-일본-미국의 3항이나, 자이니치-한국인-일본인의 3항도 냉전적 지리학에서 그리 자유로운 형편은 아닌 것이지요. 혹 냉전 연구조차도 냉전적 구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대목입니다.
특히 오키나와와 제주, 그리고 타이완의 2·28 사태를 아울러 보건데, 여기에는 미제국의 그늘로만은 해소되지 않는 동아시아 내부의 중층적 위계의 모순이 뚜렷합니다. 즉, 일본/오키나와, 한반도/제주도, 대륙/타이완 등 각 국가 내부의 중심-주변 관계가 일본-(동)아시아, 중국-(동)아시아라는 지역 단위의 중심-주변 관계와 착종되어 있는 것이지요.
한국 전쟁조차도 중국의 대규모 참전을 고려컨대 미국의 문제로만 갈음할 수 없는 복잡한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 미국과 중국이 다시금 베트남과 타이완 해협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던 사정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지요. 여기에 중소 분쟁을 내장하고 있던 내/외 몽골의 분할까지 염두에 둔다면, 동아시아 단위의 거대한 분단 체제를 사유의 지평으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북한, 남/북중국, 남/북베트남, 내/외몽골, 일본/오키나와 등 어느 하나도 '정상 국가'에 족하지 못한 구조적 불안정 상태가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동아시아 냉전/분단 체제를 구성하는 복수의 행위자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물론 미국이 가장 강력한 행위자였음은 분명하지만, 미 제국을 빌미 삼아 동아시아 내부의 균열과 적대를 봉합하고 마는 허구적인 연대 또한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성찰 없이 문제의 소재를 외부로 떠넘기는 것은 문제의 참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오키나와라는 장소의 고유함에 착목하게 됩니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제국들의 욕망이 어지러이 교차하는 병목 지점일 뿐만 아니라. 그 복수의 제국들과 다층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독특한 현장이기도 한 탓입니다. 또 대국들이 길항하는 동북아와 달리, 소국들의 연합이 지혜를 발휘하는 동남아로 이어지는 창구이기도 하지요.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를 상상할 때, 유력한 발상과 실천의 거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키나와 이전, 류큐 왕국의 교역망은 실로 다양했습니다. 북으로는 나하-푸저우-베이징으로 이어지는 조공 무역이, 동으로는 나하-쓰시마(대마도)-부산-사카이로 이어지는 민간 교역이, 서로는 안남(베트남), 루손(필리핀), 샴(타이)으로, 남으로는 말라카(말레이시아), 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 등지로 상선들이 정기적으로 파견되고 있었지요. 류큐는 과연 동북아와 동남아를 잇는 동아시아 중계 무역의 총아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류큐의 독립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것이 사쓰마 침공(1609년)입니다. 그 이면에는 임진왜란으로 악화된 중국과의 관계를 만회하려던 도쿠가와 막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관계 개선의 매개 역할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하자 군사적으로 보복한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중-일 관계의 재편 속에서 류큐의 운명이 좌우되었다는 점에서 사쓰마 침공은 조숙한 근대의 징후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사쓰마 번이 류큐의 특산물인 사탕수수와 흑설탕의 이권을 차지하면서 메이지 유신의 근거지로 부상했음이 의미심장합니다. 몰락하는 도쿠가와 막부와는 달리 사쓰마는 흑설탕 전매제 등으로 막대한 경제력을 비축할 수 있었던 것이죠. 따라서 메이지 유신은 이미 류큐를 발판으로 삼아 일어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페리 함대의 내항만을 근대의 기점으로 삼는 기존의 역사 이해 방식은 서구 편향의 '외눈박이' 사관인 것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이 담고 있던 사상의 '내적 긴장'이란 것도 절반의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죠. 그 메이지 일본이 류큐를 끝내 '처분'하고 '병합'시킨 것이 1879년입니다.
즉, 사쓰마 침공과 류큐 병합의 2단계 식민화를 통해서 오늘날의 오키나와가 탄생한 것이지요. 그리고 오키나와 인은 1903년 서구를 향해 일본의 흥기를 과시했던 오사카 박람회에서 식민지 원주민의 일원으로 전시되기에 이릅니다. 인도인, 중국인, 조선인, 타이완 고산족도 함께 전시되었다고 하니, 일본은 과연 인종적/민족적 폭력까지 두루 섭렵한 '근대의 우등생'이었습니다.
오키나와의 질곡은 식민화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알다시피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오키나와는 참혹한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자그만 치 주민들의 3분의 1이 희생되었고, 악명 높은 '집단 자결'의 강압도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후에도 30년 가까이 지속되는 미국의 점령 통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일본으로의 '복귀' 후에도, 오키나와는 본토의 '평화 헌법'을 지탱하는 군사 기지로 연명합니다. 따라서 오키나와 전투에는 미 제국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의 유산도 역력한 것입니다. 아니 미-일 제국의 합작 속에서 오키나와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전초 기지라는 '가해자'의 오명까지 떠안았습니다.
그래서 일부 오키나와의 군수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반전' 운동을 실천했던 사례는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억압 이양'의 형태로 연쇄를 이루는 중층적 식민주의의 균열이 작동하고 있기에, 미국이나 일본이라는 단수의 제국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그 지속되는 폭력의 구조를 제대로 감당하기가 벅찬 것입니다. 재차 동아시아라는 사유와 실천의 지평이 요청되는 까닭일 테고요.
제주도와 타이완
제주 4·3 사건도 한층 폭넓은 시야에서 재고해 봄직 합니다. 제주는 본디 탐라국이었지요. 백제와 신라는 물론이요, 중국과 일본과도 대외 관계를 맺었던 독자적 왕국이었습니다. 그 탐라국이 12세기 고려의 일개 군으로 편입되고, 15세기 조선의 세종 때는 토착적 지배 계급도 완전히 일소되기에 이릅니다.
한반도에서의 통일 왕조의 등장이 탐라국의 쇠락과 연동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4·3 사건 또한 조선 왕조 붕괴 이후 한반도에서의 새로운 근대 국가 건설 와중에 일어난 국가 폭력이었으니, 탐라국의 운명과도 겹쳐 보이는 지점이 있는 것이지요. 나아가 일본의 전국시대를 평정하며 등장한 도쿠가와 막부의 개막이 류큐 왕국의 쇠락을 야기했다는 점과도 미묘하게 포개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허나 그 역사적 유사성보다 한층 흥미로운 지점은 조선에 완전히 편입된 이후에도 제주도에는 그 나름의 고유함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대륙에서 발산되는 중화 질서의 자장 속에 있던 한반도가 북방 지향적인 성격이 농후했던 것과 달리, 제주는 해양 연결망을 통하여 남방으로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반도와는 상이한 독자적 정체성과 개방적인 민간 문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제주에 관한 다양한 표류민의 여행기가 존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표류' 자체가 당시에 작동하고 있던 해양 연결망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해와 동해 너머 인도양과 남태평양에서 어른거리고 있던 서구의 그림자를 일찍이 감지하기도 했습니다.
제주도의 이 뚜렷한 독자성은 근대 이후에도 쉽사리 상실되지 않았습니다. 만주와 대륙을 향해 전력으로 북진하던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인적 물적 흐름과는 달리, 제주는 오키나와, 오사카, 타이베이는 물론 동남아와 태평양으로 가닫는 교류망이 여전했던 것이지요. 물론 그 교류망이 제국 일본의 자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요.
따라서 4·3 사건은 제주가 맺고 있던 그 다양한 해양 네트워크를 단절하고 신생국 대한민국의 영토에 편입시켜 그 주권을 관철시키고자 한 정치적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해방 공간의 좌-우 이념 투쟁과 건국 노선을 둘러싼 치열한 경합이 국가 폭력의 비극을 야기했다는 기존의 접근법과 해석은 물론 타당한 것이지요.
허나 이러한 20세기적 이념의 갈등 구도와 일국사적 시야만으로는 당시 제주도의 실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결함 또한 분명합니다. 대규모 민중 학살에 직면한 제주도민들이 오사카나, 쓰시마 등지로 탈출할 수 있었던 민간의 '바닷길'이 면면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주목합시다. 오키나와를 일본 '본토'와의 관계에서만 사고할 수 없듯이, 제주도 또한 한반도 '육지'와의 관계만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는 없는 열린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타이완 또한 예외이지 않습니다. 대륙에서 전개되는 국공 내전의 맥락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국가 폭력이 2·28 사태였습니다. 반세기에 달한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국민당이라는 또 다른 외부 세력의 폭력과 억압으로 이전되었던 것이지요. 헌데 그 국가 폭력에 직면한 타이완 주민의 상당수가 이웃해 있던 오키나와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공산당과의 사활을 건 내전 속에서 국민당이 타이완의 경제력을 탈취해가자, 타이완 주민들은 오키나와와의 밀무역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고단한 살림살이를 꾸려가기도 했습니다. 즉, 오키나와-타이완 사이에는 패망한 제국 일본도 아니요, 도래하는 중화민국도 아닌, 제국/국가의 권력의 밖에서 작동하는 '생활권'의 교류가 여전했던 것입니다.
고기를 낚고 농산물을 교환하며 순환 노동을 하던 '자연 상태'의 생활권을 절합하여 '주권'이란 이름으로 영토화한 것이 근대적 국민국가와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라고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등 경합하는 분단국가의 대결이 제주도와 타이완에서 국지적 폭력을 야기했다면, 그 터전에서 살아가는 풀뿌리 민중들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생활권을 고안해가며 위태로운 일상을 영위해 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키나와 전투, 제주 4·3, 타이완의 2·28을 겹쳐 보노라면, 지방(local)과 지방을 잇는 지역(region) 네트워크의 생활권이 한층 도드라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일적 국가주의에 회수되지도 않으며, 지방적 토착주의에도 함몰되지 않는 이 견실한 지역적 개방성에 주목합시다.
제주-오키나와-타이완으로 이어지는 지역사의 비판적 복원은 한-중-일의 '삼국지'와는 결을 달리하는 새로운 동아시아사의 전망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그 지방적 자율성과 지역적 개방성의 공진화를 한껏 북돋는 집합적 과제 또한 동아시아로 가는 복수의 길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 예감합니다.
나아가 그 현장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새로운 지식 체계, 즉 '제주학'과 '오키나와학', '타이완학'이 조화롭게 어울려진다면, 21세기 東(아시아)學의 내실 또한 한결 탄탄해지리라 기대해 봅니다.
지방에서 지역으로
올해 초 자료 수집 차 홍콩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MTR을 기다리던 중, 벽면을 가득 채운 오키나와 광고가 두 눈을 찔러왔습니다. "Bridging Asia" 라는 표어로 인천, 상하이, 타이베이, 홍콩, 싱가포르, 방콕을 잇는 오키나와의 지도였습니다.
지난해 도쿄를 방문했을 때도, 아시아의 허브로 자리매김하는 오키나와의 행보를 다룬 특집 기사를 접한 바 있습니다. 유람선이 주변 국가의 도시 항구를 그물망처럼 엮어내는 여행 프로그램이 퍽이나 인상적이었지요. 일본에서 벗어나 아시아와 적극적으로 접속하는 모습이, 오키나와로부터 류큐를 회복해가는 흐름인 듯하여 범상치 않았던 것입니다.
미국의 군사 기지 됨을 거절하고, 일본에의 경제적 종속도 사절하면서, 때늦은 '류큐 공화국' 건설의 미망에도 빠지지 않는, 그리하여 오키나와의 새로운 활로를 (동)아시아와의 재회에서 찾고 있는 그들의 고투에 축하와 격려를 전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그 오키나와 발(發) 동아시아의 청사진이 국가 간 연합이 아니라 지방 간 네트워크에 기반 해 있음은 한층 더 뜻 깊고 각별합니다.
국가 이성으로 중무장하고 있는 서울과 평양, 도쿄와 베이징과는 사뭇 다른 밑그림을 그려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 지방간 교류망의 비판적 복원이 오키나와(공군 기지)와 제주(해군 기지)를 보루로 삼는 한-미-일 국가동맹을 해체하는 창조적 돌파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끝으로 타이완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소식도 보탭니다. 올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타이완 원주민들의 식민지 경험을 소재로 한 작품이 큰 화제를 모았다고 합니다. 원주민의 시선을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는 물론, 중국 내셔널리즘과 타이완 내셔널리즘도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지요.
성역화 된 2·28의 기억을 해체하고 타이완의 역사에 켜켜이 쌓여 있는 중층적 식민주의를 폭로한 것입니다. 외성인과 본성인 간의 정치화된 갈등 구도 너머 새로운 지평에서의 대화합을 모색하는 중대한 변화의 조짐으로 접수할 일입니다. 기실 통일이냐 독립이냐의 그간의 논쟁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타이완 공화국의 차이는 있으되, 국민 국가적 발상에 갇혀 있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리하여 머잖아 타이완 발(發) 동아시아론의 만개도 기대하게 됩니다. 지방에 뿌리를 둔 지역으로의 약진이야말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일구어가는 희망의 근거라 하겠습니다.
/이병한 UCLA 한국학 센터 연구원
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1027092448§ion=05
[동아시아를 묻다·6] 지방(local)에서 지역(region)으로
기사입력 : 2011-10-27 오전 10:12:11
지방(local)에서 지역(region)으로
오키나와
동아시아를 실감하게 된 몇 차례의 일화 소개를 흥미롭게 접했습니다. 자이니치(在日) 문제가 일본과 한국의 곤경을 낳고, 중국의 혁명 경험을 공유하는 과제가 야기하는 곤혹스러움은 능히 이해할 만합니다. 균열과 적대로 얽혀 있는 이 냉엄한 현실로부터 동아시아를 사유하자는 발상에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오키나와 전투와 제주 4·3 사건 그리고 한국 전쟁을 논하면서 미국의 존재감이 뚜렷했고, 그 미국이라는 타자로 말미암아 한-일 연대의 여지가 넓어졌다는 지적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군요. 그 심포지엄이 1990년대도 아니고, 2000년 하고도 5년이 지나서 열린 행사였다는 점에서 한층 그러합니다.
친미든, 반미든 미국을 중심에 두는 냉전적 사유 방식으로부터의 탈각을 단련하는 방법이 바로 동아시아적 시각이었던 탓입니다. 기실 중국 혁명의 경험을 공유하는 문제도 북조선과 베트남, 미얀마(버마), 몽골 등 아시아 사회주의권의 연구자들이 참여했다면 그리 적막한 분위기가 연출되지는 않았을 법합니다. 한국-일본-미국의 3항이나, 자이니치-한국인-일본인의 3항도 냉전적 지리학에서 그리 자유로운 형편은 아닌 것이지요. 혹 냉전 연구조차도 냉전적 구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대목입니다.
특히 오키나와와 제주, 그리고 타이완의 2·28 사태를 아울러 보건데, 여기에는 미제국의 그늘로만은 해소되지 않는 동아시아 내부의 중층적 위계의 모순이 뚜렷합니다. 즉, 일본/오키나와, 한반도/제주도, 대륙/타이완 등 각 국가 내부의 중심-주변 관계가 일본-(동)아시아, 중국-(동)아시아라는 지역 단위의 중심-주변 관계와 착종되어 있는 것이지요.
한국 전쟁조차도 중국의 대규모 참전을 고려컨대 미국의 문제로만 갈음할 수 없는 복잡한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 미국과 중국이 다시금 베트남과 타이완 해협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던 사정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지요. 여기에 중소 분쟁을 내장하고 있던 내/외 몽골의 분할까지 염두에 둔다면, 동아시아 단위의 거대한 분단 체제를 사유의 지평으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북한, 남/북중국, 남/북베트남, 내/외몽골, 일본/오키나와 등 어느 하나도 '정상 국가'에 족하지 못한 구조적 불안정 상태가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동아시아 냉전/분단 체제를 구성하는 복수의 행위자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물론 미국이 가장 강력한 행위자였음은 분명하지만, 미 제국을 빌미 삼아 동아시아 내부의 균열과 적대를 봉합하고 마는 허구적인 연대 또한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성찰 없이 문제의 소재를 외부로 떠넘기는 것은 문제의 참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더더욱 오키나와라는 장소의 고유함에 착목하게 됩니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제국들의 욕망이 어지러이 교차하는 병목 지점일 뿐만 아니라. 그 복수의 제국들과 다층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독특한 현장이기도 한 탓입니다. 또 대국들이 길항하는 동북아와 달리, 소국들의 연합이 지혜를 발휘하는 동남아로 이어지는 창구이기도 하지요.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를 상상할 때, 유력한 발상과 실천의 거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키나와 이전, 류큐 왕국의 교역망은 실로 다양했습니다. 북으로는 나하-푸저우-베이징으로 이어지는 조공 무역이, 동으로는 나하-쓰시마(대마도)-부산-사카이로 이어지는 민간 교역이, 서로는 안남(베트남), 루손(필리핀), 샴(타이)으로, 남으로는 말라카(말레이시아), 자바, 수마트라(인도네시아) 등지로 상선들이 정기적으로 파견되고 있었지요. 류큐는 과연 동북아와 동남아를 잇는 동아시아 중계 무역의 총아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류큐의 독립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것이 사쓰마 침공(1609년)입니다. 그 이면에는 임진왜란으로 악화된 중국과의 관계를 만회하려던 도쿠가와 막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관계 개선의 매개 역할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하자 군사적으로 보복한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중-일 관계의 재편 속에서 류큐의 운명이 좌우되었다는 점에서 사쓰마 침공은 조숙한 근대의 징후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사쓰마 번이 류큐의 특산물인 사탕수수와 흑설탕의 이권을 차지하면서 메이지 유신의 근거지로 부상했음이 의미심장합니다. 몰락하는 도쿠가와 막부와는 달리 사쓰마는 흑설탕 전매제 등으로 막대한 경제력을 비축할 수 있었던 것이죠. 따라서 메이지 유신은 이미 류큐를 발판으로 삼아 일어난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페리 함대의 내항만을 근대의 기점으로 삼는 기존의 역사 이해 방식은 서구 편향의 '외눈박이' 사관인 것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이 담고 있던 사상의 '내적 긴장'이란 것도 절반의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죠. 그 메이지 일본이 류큐를 끝내 '처분'하고 '병합'시킨 것이 1879년입니다.
즉, 사쓰마 침공과 류큐 병합의 2단계 식민화를 통해서 오늘날의 오키나와가 탄생한 것이지요. 그리고 오키나와 인은 1903년 서구를 향해 일본의 흥기를 과시했던 오사카 박람회에서 식민지 원주민의 일원으로 전시되기에 이릅니다. 인도인, 중국인, 조선인, 타이완 고산족도 함께 전시되었다고 하니, 일본은 과연 인종적/민족적 폭력까지 두루 섭렵한 '근대의 우등생'이었습니다.
오키나와의 질곡은 식민화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알다시피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오키나와는 참혹한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자그만 치 주민들의 3분의 1이 희생되었고, 악명 높은 '집단 자결'의 강압도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후에도 30년 가까이 지속되는 미국의 점령 통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일본으로의 '복귀' 후에도, 오키나와는 본토의 '평화 헌법'을 지탱하는 군사 기지로 연명합니다. 따라서 오키나와 전투에는 미 제국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의 유산도 역력한 것입니다. 아니 미-일 제국의 합작 속에서 오키나와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전초 기지라는 '가해자'의 오명까지 떠안았습니다.
그래서 일부 오키나와의 군수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반전' 운동을 실천했던 사례는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억압 이양'의 형태로 연쇄를 이루는 중층적 식민주의의 균열이 작동하고 있기에, 미국이나 일본이라는 단수의 제국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그 지속되는 폭력의 구조를 제대로 감당하기가 벅찬 것입니다. 재차 동아시아라는 사유와 실천의 지평이 요청되는 까닭일 테고요.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키나와의 일본 기지를 폭격하는 미국 전투기. ⓒwikipedia.org |
제주도와 타이완
제주 4·3 사건도 한층 폭넓은 시야에서 재고해 봄직 합니다. 제주는 본디 탐라국이었지요. 백제와 신라는 물론이요, 중국과 일본과도 대외 관계를 맺었던 독자적 왕국이었습니다. 그 탐라국이 12세기 고려의 일개 군으로 편입되고, 15세기 조선의 세종 때는 토착적 지배 계급도 완전히 일소되기에 이릅니다.
한반도에서의 통일 왕조의 등장이 탐라국의 쇠락과 연동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4·3 사건 또한 조선 왕조 붕괴 이후 한반도에서의 새로운 근대 국가 건설 와중에 일어난 국가 폭력이었으니, 탐라국의 운명과도 겹쳐 보이는 지점이 있는 것이지요. 나아가 일본의 전국시대를 평정하며 등장한 도쿠가와 막부의 개막이 류큐 왕국의 쇠락을 야기했다는 점과도 미묘하게 포개지는 구석이 있습니다.
허나 그 역사적 유사성보다 한층 흥미로운 지점은 조선에 완전히 편입된 이후에도 제주도에는 그 나름의 고유함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대륙에서 발산되는 중화 질서의 자장 속에 있던 한반도가 북방 지향적인 성격이 농후했던 것과 달리, 제주는 해양 연결망을 통하여 남방으로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반도와는 상이한 독자적 정체성과 개방적인 민간 문화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제주에 관한 다양한 표류민의 여행기가 존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표류' 자체가 당시에 작동하고 있던 해양 연결망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해와 동해 너머 인도양과 남태평양에서 어른거리고 있던 서구의 그림자를 일찍이 감지하기도 했습니다.
제주도의 이 뚜렷한 독자성은 근대 이후에도 쉽사리 상실되지 않았습니다. 만주와 대륙을 향해 전력으로 북진하던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인적 물적 흐름과는 달리, 제주는 오키나와, 오사카, 타이베이는 물론 동남아와 태평양으로 가닫는 교류망이 여전했던 것이지요. 물론 그 교류망이 제국 일본의 자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요.
따라서 4·3 사건은 제주가 맺고 있던 그 다양한 해양 네트워크를 단절하고 신생국 대한민국의 영토에 편입시켜 그 주권을 관철시키고자 한 정치적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해방 공간의 좌-우 이념 투쟁과 건국 노선을 둘러싼 치열한 경합이 국가 폭력의 비극을 야기했다는 기존의 접근법과 해석은 물론 타당한 것이지요.
허나 이러한 20세기적 이념의 갈등 구도와 일국사적 시야만으로는 당시 제주도의 실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결함 또한 분명합니다. 대규모 민중 학살에 직면한 제주도민들이 오사카나, 쓰시마 등지로 탈출할 수 있었던 민간의 '바닷길'이 면면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주목합시다. 오키나와를 일본 '본토'와의 관계에서만 사고할 수 없듯이, 제주도 또한 한반도 '육지'와의 관계만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는 없는 열린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타이완 또한 예외이지 않습니다. 대륙에서 전개되는 국공 내전의 맥락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국가 폭력이 2·28 사태였습니다. 반세기에 달한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국민당이라는 또 다른 외부 세력의 폭력과 억압으로 이전되었던 것이지요. 헌데 그 국가 폭력에 직면한 타이완 주민의 상당수가 이웃해 있던 오키나와로 피신하기도 했습니다.
공산당과의 사활을 건 내전 속에서 국민당이 타이완의 경제력을 탈취해가자, 타이완 주민들은 오키나와와의 밀무역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고단한 살림살이를 꾸려가기도 했습니다. 즉, 오키나와-타이완 사이에는 패망한 제국 일본도 아니요, 도래하는 중화민국도 아닌, 제국/국가의 권력의 밖에서 작동하는 '생활권'의 교류가 여전했던 것입니다.
고기를 낚고 농산물을 교환하며 순환 노동을 하던 '자연 상태'의 생활권을 절합하여 '주권'이란 이름으로 영토화한 것이 근대적 국민국가와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라고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등 경합하는 분단국가의 대결이 제주도와 타이완에서 국지적 폭력을 야기했다면, 그 터전에서 살아가는 풀뿌리 민중들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생활권을 고안해가며 위태로운 일상을 영위해 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키나와 전투, 제주 4·3, 타이완의 2·28을 겹쳐 보노라면, 지방(local)과 지방을 잇는 지역(region) 네트워크의 생활권이 한층 도드라짐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일적 국가주의에 회수되지도 않으며, 지방적 토착주의에도 함몰되지 않는 이 견실한 지역적 개방성에 주목합시다.
제주-오키나와-타이완으로 이어지는 지역사의 비판적 복원은 한-중-일의 '삼국지'와는 결을 달리하는 새로운 동아시아사의 전망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그 지방적 자율성과 지역적 개방성의 공진화를 한껏 북돋는 집합적 과제 또한 동아시아로 가는 복수의 길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 예감합니다.
나아가 그 현장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새로운 지식 체계, 즉 '제주학'과 '오키나와학', '타이완학'이 조화롭게 어울려진다면, 21세기 東(아시아)學의 내실 또한 한결 탄탄해지리라 기대해 봅니다.
지방에서 지역으로
올해 초 자료 수집 차 홍콩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MTR을 기다리던 중, 벽면을 가득 채운 오키나와 광고가 두 눈을 찔러왔습니다. "Bridging Asia" 라는 표어로 인천, 상하이, 타이베이, 홍콩, 싱가포르, 방콕을 잇는 오키나와의 지도였습니다.
지난해 도쿄를 방문했을 때도, 아시아의 허브로 자리매김하는 오키나와의 행보를 다룬 특집 기사를 접한 바 있습니다. 유람선이 주변 국가의 도시 항구를 그물망처럼 엮어내는 여행 프로그램이 퍽이나 인상적이었지요. 일본에서 벗어나 아시아와 적극적으로 접속하는 모습이, 오키나와로부터 류큐를 회복해가는 흐름인 듯하여 범상치 않았던 것입니다.
미국의 군사 기지 됨을 거절하고, 일본에의 경제적 종속도 사절하면서, 때늦은 '류큐 공화국' 건설의 미망에도 빠지지 않는, 그리하여 오키나와의 새로운 활로를 (동)아시아와의 재회에서 찾고 있는 그들의 고투에 축하와 격려를 전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그 오키나와 발(發) 동아시아의 청사진이 국가 간 연합이 아니라 지방 간 네트워크에 기반 해 있음은 한층 더 뜻 깊고 각별합니다.
국가 이성으로 중무장하고 있는 서울과 평양, 도쿄와 베이징과는 사뭇 다른 밑그림을 그려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 지방간 교류망의 비판적 복원이 오키나와(공군 기지)와 제주(해군 기지)를 보루로 삼는 한-미-일 국가동맹을 해체하는 창조적 돌파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끝으로 타이완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소식도 보탭니다. 올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타이완 원주민들의 식민지 경험을 소재로 한 작품이 큰 화제를 모았다고 합니다. 원주민의 시선을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는 물론, 중국 내셔널리즘과 타이완 내셔널리즘도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지요.
성역화 된 2·28의 기억을 해체하고 타이완의 역사에 켜켜이 쌓여 있는 중층적 식민주의를 폭로한 것입니다. 외성인과 본성인 간의 정치화된 갈등 구도 너머 새로운 지평에서의 대화합을 모색하는 중대한 변화의 조짐으로 접수할 일입니다. 기실 통일이냐 독립이냐의 그간의 논쟁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타이완 공화국의 차이는 있으되, 국민 국가적 발상에 갇혀 있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리하여 머잖아 타이완 발(發) 동아시아론의 만개도 기대하게 됩니다. 지방에 뿌리를 둔 지역으로의 약진이야말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일구어가는 희망의 근거라 하겠습니다.
/이병한 UCLA 한국학 센터 연구원
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1027092448§ion=05
'세상에 이럴수가 > 일본(X) 쪽바리(O)'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시민들도 `위안부 문제 해결하라` 시위 (0) | 2011.12.18 |
---|---|
美 언론 `일본이 과거 할머니들에게 한 짓은…` (0) | 2011.12.18 |
후쿠시마 원전의 `치명적 비밀`을 아시나요? (0) | 2011.03.22 |
한반도 지표 뒤죽박죽됐다 (0) | 2011.03.22 |
‘남태평양 일본군 식인사건’ 규명 (0) | 2011.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