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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쪽바리당과 일당들

요즘 왜 더욱 ‘배정자’가 생각날까

요즘 왜 더욱 ‘배정자’가 생각날까
[시사비평-지요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지요하 | 2011년 10월 03일 (월) 16:40:29


배정자(裵貞子)라는 여인이 무시로 떠오른다. 내 눈앞에서 오늘도 배정자가 무수히 출몰한다. 괴로운 현상이다.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된 이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어쩌면 내가 죽는 날까지 지속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괴롭다.


배정자의 춤판이 계속되는 시대

▲ 배정자는 1870년 김해에서 밀양부의 아전 노릇을 하던 배지홍(裵祉洪)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분남(粉男)이었다. 배정자라는 이름은 나중에 이토가 직접 지어준 일본 이름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에서 나온 것이었다.
배정자가 누구인가? 정신이 제대로 박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배정자를 익히 알 것이다. 친일 민족반역자.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 일본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귀국, 일제의 한국병탄 성취에 큰 역할을 한 여인. 국권피탈 뒤에도 일제의 앞잡이로 끊임없이 민족탄압을 도왔고,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군사 스파이로 암약하며 만주와 중국 본토 등에서 광복투사 체포에도 큰 공을 세운 여인.

나는 21세기, 새천년기의 기점으로 규정되어진 2000년부터 배정자의 출몰 현상을 겪기 시작했다. 2001년이었나, 소설가 이문열이 “나도 일제 때 태어났더라면 친일을 했을 것”이라는 매우 지성적인 망발로 친일파 세력을 엄호하고 나섰을 때는, 어쩌면 이문열이 그 화려 찬란한 문필 능력으로 미구에 배정자를 미화하는 소설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2002년이었나, 이미 친일파 세력의 ‘꽃’이 되어 버린 판사 나경원이 법복을 벗고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회창의 정책특보로 정계에 입문했을 때는 배정자의 출현을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솔직히 말해 나는 나경원의 미모에 깜짝 놀랐다. 대중매체에 노출된 나경원의 미모를 보는 순간 돌연 배정자의 미모를 떠올렸다. 그러나 나는 배정자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광복 후 민족특위에 체포된 노파 배정자의 얼굴만 흑백 사진으로 보았을 뿐이다. 그녀의 젊은 시절의 화려한 미모는 그저 수사(修辭)로만 내 뇌리에서 맴돌 따름이다.

그때부터 나는 공연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배정자도 나경원만큼 예뻤을까? 나경원도 배정자만큼 예쁜 걸까? 오래 전에 영화에서도 배정자를 보고, TV 드라마에서도 배정자를 본 적이 있건만, 배정자로 분한 그 여배우들의 얼굴은 내 기억 속에서 이미 온데간데없고, 그저 나경원의 얼굴만 배정자라는 이름 앞에서 맴도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나경원을 보면서 배정자의 미모를 상상하고, 배정자의 미모를 상상하면서 나경원의 미모를 떠올렸던(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내 솔직한 고백을 탓하지 마시라. 그 단초를 나경원이 제공했은즉, 그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친일 세력의 출세와 발호

▲ 나경원 의원. ⓒ민중의소리
나경원은 정계 입문 전 판사 시절에 이미 친일파 세력의 ‘’이 되어 버렸다. 매국노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제로부터 받은 땅을 훗날 국가가 몰수하여 국유지로 삼았는데, 그 땅을 돌려달라고 이완용의 후손이 소송을 했다. 그 소송을 맡은 판사 나경원은 보편적 법정의와 상식을 깨고 이완용 후손의 손을 번쩍 들어주었다.

이때부터 나경원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고, 특히 친일파 세력의 비상한 관심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공’으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회창의 정책 특보로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 뒤 대통령 선거에 또 낙선하여 마이너 신세가 되어 버린 이회창과 달리 나경원은 승승장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에 따라 대중매체에 무시로 출현하는 나경원의 미모를 보면서 나는 또 괜히 자꾸만 배정자의 미모를 궁금해 하는 이상한 수렁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2004년 6월 18일 서울 장충동에 있는 ‘신라호텔’에서 일본자위대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 행사에 나경원을 비롯하여 한나라당 국회의원인 김석준, 송영선, 안명옥과 민주당 국회의원 신중식이 참석했다고 한다. 그 사실이 오늘 크게 알려지면서 나경원은 ‘자위녀’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기모노 차림의 여성들은 마음대로 출입을 하고 한복을 입은 여성들은 출입이 차단된 사실 때문에 더욱 크게 알려진 그 사건을 보면서도 나는 또 배정자의 춤추는 형상을 보아야 했다. 그때의 그 일에 대해 나경원은 초선 의원 시절 무슨 행사인지 모르고 갔다는 맹한 소리를 했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는 한나라당 대변인 시절 대선 후보 이명박의 ‘BBK’ 문제에 대해 설파했던 포복절도의 ‘주어’ 발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명박은 동영상 안에서 “내가 BBK를 창립했다”고 분명히 ‘내가’라는 주어를 사용했는데, 그 주어를 주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슬쩍 빼돌린 것인지 나경원은 “주어가 빠졌으므로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기상천외의 발언을 했다.

그 발언을 잊지 않고 있던 나는 2년 전 <오마이뉴스> 지면에서 나경원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나경원의 친정아버지가 와서 “나, 아버지다” 하지 않고 그냥 “아버지다”라고 하면 주어가 빠졌으므로 아버지가 아니겠네? 라는 내용의 질의였다.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을 나경원에게서 어느 세월에 속 시원히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여간 일본자위대 창설 50주년 행사에 국회의원 신분으로 참석했으면서 무슨 행사인지 모르고 갔다는 나경원의 말과 이명박의 BBK 관련 발언에 주어가 빠졌으므로 이명박과 BBK 관련을 인정할 수 없다는 나경원의 말은 일맥상통의 기류가 너무도 분명하여 마치 이란성 쌍둥이 같다.


진정한 보수 세력의 태동을 갈망한다

▲ 소설가 은미희 씨가 지은 장편소설 <흑치마 사다코>(자음과모음 펴냄)는 친일파 배정자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최근 미국의 내부고발 사이트 ‘위키리크스’ 보도에 따르면, 2008년 5월 29일 이상득 당시 국회부의장이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미국 대사에게 자신의 친동생인 이명박에 대해 “뼛속까지 친미 친일 정신이 배어 있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친미는 그렇다 치고, 친일은 또 뭔가. 전후의 문맥으로 보아 이상득은 사대주의 근성을 깔고 자랑스럽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친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도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사실을 접하면서도 나는 또 배정자의 춤추는 형상을 보아야 했다. 배정자의 춤판이 저 일제 초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를 다 하도록 스스럼없이 전개되고 있는 현상에 조금은 오금이 저리는 기분이기도 했다.

우리는 오늘 친일파 세력이 발호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친일파 세력은 ‘뉴 라이트’라는 집단에 다수가 포진해 있다. 어쩌면 친일 세력이 뉴 라이트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친일은 그들의 핵심이고 정신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술책과 이설로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있다. 그것의 실례를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그중의 하나는 일제의 한국 강점을 미화하는 일이다. 친일파들의 친일부역과 민족반역을 정당화하는 주장들이 어느 정도 공공연해지자, 그들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역사의 필연으로 ‘승화’시키더니, 급기야는 일제의 강점 덕분에 대한민국의 근대화가 앞당겨졌다는 궤변까지 서슴없이 늘어놓는다.

그에 따라 나는 배정자가 화려한 미모를 뽐내며 내 눈앞에서 춤을 추는 형상을 다시 본다. 도도한 현상이다. 그 현상 속에서 이문열의 2001년 궤변도 다시금 듣는다.

뉴 라이트는 ‘보수’를 자처하지만 결코 진정한 보수는 아니다. 사이비 보수일 뿐이다. 보수의 핵심과 미덕은 자존심에 있다. 그들에게 자존심이 있는가. 친일 민족반역의 속성을 지닌 채 밤낮없이 일제 강점기를 미화하기 바쁜 그들에게는 자존심의 그림자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민족의 자존심을 찾아 나서야 한다. 사이비 보수를 분별하고, 자존심이 생명이며 본령인 진정한 보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보수 집단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라면 나는 보수다. 민족반역 친일세력이 핵심과 기본을 이루고 있는 뉴 라이트와 같은 사이비 보수 집단을 능히 대체할 수 있는 진정한 보수 세력의 태동 여부도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시발로 내년의 총선과 대선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오늘 깊이 깨닫고 명심하자.


지요하
막시모, 소설가, 대전교구 태안성당 신자.


출처  요즘 왜 더욱 ‘배정자’가 생각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