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3) 정책변화, 진화냐 말 바꾸기냐
성장에서 복지로 ‘좌클릭’ 급변… 어떻게 납득시킬지가 과제
[경향신문] 이지선·강병한 기자 | 입력 : 2012-09-02 22:03:57 | 수정 : 2012-09-02 22:03:57
“규제를 풀어 세계의 사람과 자본이 한국으로 몰려들도록 하면 주가 3000 시대도 가능하다.”(2007년 4월11일 증권업협회 증권사 지점장 간담회)
“그동안 양적 발전이나 성장을 중요시해왔지만 이제는 질적 발전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2011년 12월4일 경향신문 김호기·이상돈의 ‘대화’ 인터뷰)
2007년 대선과 2012년 대선 사이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의 정책은 급격한 변화의 궤적을 그린다. 5년 전 ‘성장 담론’은 분배 쪽에 초점을 둔 ‘복지와 경제민주화’ 담론으로 ‘좌클릭’했다. 작은 정부론을 앞세워 감세를 주장했던 박 후보는 조세부담과 복지 수준의 접점을 찾기 위한 국민 대타협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증세 논란에 불을 댕겼다는 평가, 자기 책임하에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국민에게 떠넘겼다는 비판이 양존한다.
그는 2007년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가 내세운 ‘한반도 대운하 정책’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 변형판이라고 할 4대강 정책에는 입을 닫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종합편성채널 승인 등을 골자로 한 미디어법안은 ‘언론의 다양성’을 들어 반대하다가, 일부 내용이 손질되자 “이 정도면 됐다”고 찬성했다. 이에 힘입은 여당은 미디어법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정치인의 철학은 ‘정책’과 그 정책을 담은 ‘법안’으로 표출된다.
정치인이 내세우는 정책을 살펴보면 세상을 보는 시각과 지향점을 알 수 있다. 박 후보의 정책과 그 행보를 짚어봐야 할 이유다.
▲ 5년 새 급격한 정책 변화… 경제민주화 등 진보 의제 앞세워
친박선 “박은 복지론자… DJ·노에 반발 2007년 성장 경쟁”
▲ 미디어법 원칙 없이 찬성, 사학법 땐 ‘색깔’ 덧씌우기도
당시 원희룡 “박의 리더십, 과거 회귀적… 민생 등 주장 다 패션”
■ ‘줄·푸·세’에서 경제민주화로
2007년 한나라당 경선은 성장 담론이 지배했다. 이명박 후보는 ‘7% 경제성장, 10년 내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강국 진입’을 골자로 한 ‘747 공약’을 내세웠다.
박근혜 후보는 이에 맞서 이른바 ‘5+2 경제성장론’을 주장했다. 5%는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고, 플러스 2%가 지도자 몫이라는 얘기다. 박 후보는 여기에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 공약을 내놓았다.
노무현 정부의 증세 주장을 ‘세금 폭탄’이라고 규정한 당시 한나라당은 규제를 최소화하는 작은 정부와 감세 주장을 펴왔다. 당 대표였던 박 후보는 2005년 참여정부를 비판하면서, “현 정부는 규제를 더 강화하고, 세금을 더 많이 거둬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서민만 더 큰 고통에 처했다”며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무시하고 시장의 생리와 사람들의 본능을 무시하는 아마추어식 발상이 국민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지적했다.
박 후보는 2004년 8월4일 MBN에 출연해 “대한민국이 투자 기피국이 되고 있고 한국 경제가 살아나지 못하는 이유는 좌파적인 정책과 사회주의로 가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2006년 1월2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저와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의 재정 확대 정책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 작은 정부와 큰 정부, 감세와 증세 어느 것이 선진 한국으로 가는 길인지 밝히고 국민 선택을 받아야 한다”고도 했다.
2012년 박 후보 입장은 크게 달라졌다. 진보 진영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복지’ 키워드를 자신의 것처럼 가져왔다. 생애주기별 복지정책 구상을 담은 사회보장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출마선언문에서 가장 눈에 띄게 내세운 것도 ‘경제민주화’ 구상이다.
박 후보의 변화는 2009년 스탠퍼드대학 연설에서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언급한 뒤부터 시작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성장의 온기가 골고루 퍼지지 못했고, 그 때문에 성장보다는 분배 쪽에 초점을 두도록 정책기조의 변화가 필요했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2011년 3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회의에서 박 후보는 “성장이 전체 국민의 후생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효과는 과거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며 “성장이 전체 후생에 골고루 도움이 되기보다는 일부에 편중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박 후보 변화의 시작은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고 말한 200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 때라는 분석도 있다. 한 친박 핵심 인사는 “돌이켜보면 박 후보는 ‘성장’보다는 ‘복지’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2007년 경선 때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에 대한 보수 진영의 반발이 컸기 때문에 성장 경쟁을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박 후보가 과거와는 생각 자체가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감세’를 고집해오던 입장은 ‘증세 논의를 열어두자’는 쪽으로 변했다. 박 후보는 지난달 22일 기자간담회에서 “복지비용의 60%는 세출을 절약하고, 40%는 세입을 늘려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복지에 대한) 기대 수준과 (비용의) 조달 수준의 접합점을 찾겠다”며 “국민 대표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공청회를 하고 국회에서 논의도 해서 우선 순위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 ‘정책의 진화’냐, ‘말 바꾸기’냐
박 후보는 정책 변화를 ‘변화’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는 7월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 ‘줄·푸·세’와 ‘경제민주화’가 배치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줄·푸·세에서 경제민주화로 바뀐 것은 경제상황이 바뀐 것이냐, 경제철학이 바뀐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박 후보의 대답은 이랬다.
“‘줄’은 저소득층, 중소기업 세율을 내리자는 것이고, ‘푸’는 규제의 불필요한 것을 풀어 국민들에게 도움을 주자는 것, ‘세’는 법치를 바로 세워 공정거래와 경제 남용을 바로잡자는 부분이다.”
하지만 2007년 ‘줄·푸·세’를 주장할 당시 ‘줄’은 주로 법인세 인하 등 대기업에 혜택이 가는 쪽에 초점이 맞춰졌다. ‘푸’는 “기업의 의욕을 북돋우고 기업의 자율을 최대한 확대하자”(서울 파이낸셜포럼 특강)는 규제 완화에 강조점이 찍혔다. 지난달 22일 기자간담회에서 “경제적 지배력 남용에 있어서는 규제가 필요하지만 쓸데없는 규제가 많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세’이다. 2007년 박 후보는 “법 위에 떼법이 존재해서 폭력을 쓰고 우기면 된다”며 파업 등 노조 활동을 겨냥한 바 있다.
박 후보의 ‘입장이 변화한 것이 없다’는 발언은 외부적으로 “일제강점과 8·15 독립이 같다는 말”(노회찬 의원)이라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캠프 내부에서도 “경제 상황이 2008년 이후 급속하게 바뀌었고 2009년부터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꾸준히 말해왔으니 변화를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캠프 핵심 관계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성장에서 복지로, 국가에서 국민으로 담론이 변화했다는 것이 박 후보 소신이라면, 이전에 했던 주장이 어떤 이유에서 어떻게 진화됐는지 설명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박 후보와 새누리당에 경제민주화 실천 의지가 있느냐는 의구심도 나온다. 4·11 총선에서는 당의 정강·정책에 담았던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인물을 공천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당 안팎에서 제기됐다. 현재도 박 후보 주변에서는 “경제민주화는 선거전략인 측면이 많다. 지금 언론에 경제민주화란 의제와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뜨니까 더 많이 부각됐는데 실제로 박 후보를 만나서 들어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강한 입장은 아닌 것 같다”(한 의원)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특히 박 후보보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경제민주화라는 의제에 동참해줄지도 의문이다. 원내외 40여명이 경제민주화 실천모임을 꾸려 관련 법안을 시리즈로 내고 있지만, 모임 내부에서는 “당내 설득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이 나온다.
■ 박 후보의 입장이 궁금한 정책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 후보가 주장하거나 반대한 정책들 중 여전히 입장이 모호한 것들도 있다. 박 후보는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정책을 두고 당시 정책 청문회에서 “아버지 시절에도 검토했다가 폐지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대에도 그랬다. 그래도 계속 추진할 것이냐”고 묻는 등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대운하 정책의 변형인 4대강 정책을 두고는 별다른 입장을 표하지 않았다. 그는 “제가 분명히 대운하는 반대라고 일관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4대강은 대운하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분명히 밝혔으니 믿어야 할 것”이라며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국민을 속이는 것인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만 말했다.
‘열차 페리’ 공약도 설명이 없다. 한·중 열차페리 정책은 복합화물운송 시스템으로 육상에서 화물을 실은 열차를 고스란히 페리에 실어 수송하는 방식을 말한다. 박 후보 쪽에서는 당시 중국 옌타이항~다롄항 구간 시험운행 등 증명된 사례가 있고 기존 중국 횡단철도와 연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정책’에 비해 현실성이 높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현재 공약에서 이 부분은 빠져 있다.
박 후보가 납득되는 설명 없이 입장을 바꾼 사례로는 2009년 미디어법도 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은 종편 승인 등을 골자로 미디어법 제정을 추진했다. 박 후보는 “제대로 된 미디어법이 되려면 미디어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고 독과점 문제도 해소돼야 한다”며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강행 처리 땐 반대표를 행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이런 입장을 밝힌 지 불과 일주일여쯤 지나 언론 관련 법안이 본회의에서 직권상정으로 처리될 당시 박 후보는 “이 정도면 국민도 공감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강행 처리된 법안은 구독률 20% 이상 신문사의 방송 진출을 불허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선·중앙·동아일보의 구독률은 그보다 낮았고, 결국 이들 신문사의 종편은 출범됐다.
박 후보 쪽에서는 “그나마 25%였던 기준을 박 후보가 버텨 20%로 낮췄다”는 설명뿐이었다. 당시 박 후보 측근 사이에서도 “박 후보의 트레이드마크인 원칙 정치에 타격을 입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앞서 대표 시절인 2004년 말부터 여야 대치의 주요 법안이었던 신문법 개정안에 반대한 박 후보는 “시장점유율 규제 조항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항”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 때는 ‘국제적 기준’과 ‘자유시장 경제’를 앞세웠던 것이다.
19대 국회에서 또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이는 사립학교법 개정에도 박 후보가 깊숙이 개입했다. 2005년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주도로 개방이사제 도입과 인사위원회 권한 강화, 부패사학에 임시이사 파견제 등을 내용으로 한 사학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박 후보는 이른바 ‘사학법 투쟁’을 하며 거리로 나갔다.
박 후보는 당시 사학법에 ‘색깔’을 입혔다. 그는 “그들(정부와 여당)의 목표는 비리척결이 아니라 전교조에 사학을 넘겨줘서 지배구조를 바꾸고 아이들에게 특정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것”이라고 했다. 2006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후보는 “이번에 날치기한 사학법은 전교조가 10년 전부터 주장한 법이다. 이 법의 독소조항인 개방형 이사제, 임시이사제, 교사의 노동운동 허용 같은 것은 모두 전교조 숙원 사업이다. 전교조가 사학의 경영에 간섭하고 갈등을 일으켜 이사회를 장악하고 학교를 접수하는 길을 터 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박 후보를 향해 원희룡 당시 최고위원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박 대표의 이념적 편견은 병”이라고 밝혔다. 2007년 개방형 이사제 추천 조항 등 일부 내용을 수정해 사학법이 재개정되긴 했지만 여야 모두 이 법안에 불만을 갖고 있다.
다시 원희룡 전 최고위원 말로 돌아가보자.
“박 대표가 사학에 개방이사를 넣는 것은 빨갱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김정일도 만나고 이념적 지평이 넓다고 말하는 것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와 같다. 자기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박 대표의 리더십 밑바닥은 과거회귀적·대결적·관념적 이념 틀이고, 민생 등 나머지 주장은 다 패션일 뿐이다.”
실제 보수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직접 면담한 이가 박 후보다. 박 후보는 자서전에서 2002년 5월13일 백화원 영빈관 회의실에서 이뤄진 김 위원장과의 독대에서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금강산댐 남북 공동조사단 구성 등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현재 박 후보는 대북·안보 정책에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로 설명되는 포용정책과 압박정책의 중간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6·15 공동선언, 10·4 선언도 존중한다는 입장이다.
출처 :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3) 정책변화, 진화냐 말 바꾸기냐
성장에서 복지로 ‘좌클릭’ 급변… 어떻게 납득시킬지가 과제
[경향신문] 이지선·강병한 기자 | 입력 : 2012-09-02 22:03:57 | 수정 : 2012-09-02 22:03:57
“규제를 풀어 세계의 사람과 자본이 한국으로 몰려들도록 하면 주가 3000 시대도 가능하다.”(2007년 4월11일 증권업협회 증권사 지점장 간담회)
“그동안 양적 발전이나 성장을 중요시해왔지만 이제는 질적 발전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2011년 12월4일 경향신문 김호기·이상돈의 ‘대화’ 인터뷰)
2007년 대선과 2012년 대선 사이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의 정책은 급격한 변화의 궤적을 그린다. 5년 전 ‘성장 담론’은 분배 쪽에 초점을 둔 ‘복지와 경제민주화’ 담론으로 ‘좌클릭’했다. 작은 정부론을 앞세워 감세를 주장했던 박 후보는 조세부담과 복지 수준의 접점을 찾기 위한 국민 대타협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증세 논란에 불을 댕겼다는 평가, 자기 책임하에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국민에게 떠넘겼다는 비판이 양존한다.
그는 2007년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가 내세운 ‘한반도 대운하 정책’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 변형판이라고 할 4대강 정책에는 입을 닫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종합편성채널 승인 등을 골자로 한 미디어법안은 ‘언론의 다양성’을 들어 반대하다가, 일부 내용이 손질되자 “이 정도면 됐다”고 찬성했다. 이에 힘입은 여당은 미디어법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정치인의 철학은 ‘정책’과 그 정책을 담은 ‘법안’으로 표출된다.
정치인이 내세우는 정책을 살펴보면 세상을 보는 시각과 지향점을 알 수 있다. 박 후보의 정책과 그 행보를 짚어봐야 할 이유다.
▲ 2007년 3월12일 한나라당 대선 주자였던 박근혜 전 대표가 서울 여의도 캠프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성장 담론 위주의 경제공약이 담긴 ‘근혜노믹스’를 발표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 5년 새 급격한 정책 변화… 경제민주화 등 진보 의제 앞세워
친박선 “박은 복지론자… DJ·노에 반발 2007년 성장 경쟁”
▲ 미디어법 원칙 없이 찬성, 사학법 땐 ‘색깔’ 덧씌우기도
당시 원희룡 “박의 리더십, 과거 회귀적… 민생 등 주장 다 패션”
■ ‘줄·푸·세’에서 경제민주화로
2007년 한나라당 경선은 성장 담론이 지배했다. 이명박 후보는 ‘7% 경제성장, 10년 내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강국 진입’을 골자로 한 ‘747 공약’을 내세웠다.
박근혜 후보는 이에 맞서 이른바 ‘5+2 경제성장론’을 주장했다. 5%는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고, 플러스 2%가 지도자 몫이라는 얘기다. 박 후보는 여기에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 공약을 내놓았다.
노무현 정부의 증세 주장을 ‘세금 폭탄’이라고 규정한 당시 한나라당은 규제를 최소화하는 작은 정부와 감세 주장을 펴왔다. 당 대표였던 박 후보는 2005년 참여정부를 비판하면서, “현 정부는 규제를 더 강화하고, 세금을 더 많이 거둬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서민만 더 큰 고통에 처했다”며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무시하고 시장의 생리와 사람들의 본능을 무시하는 아마추어식 발상이 국민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지적했다.
박 후보는 2004년 8월4일 MBN에 출연해 “대한민국이 투자 기피국이 되고 있고 한국 경제가 살아나지 못하는 이유는 좌파적인 정책과 사회주의로 가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2006년 1월2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저와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의 재정 확대 정책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 작은 정부와 큰 정부, 감세와 증세 어느 것이 선진 한국으로 가는 길인지 밝히고 국민 선택을 받아야 한다”고도 했다.
2012년 박 후보 입장은 크게 달라졌다. 진보 진영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복지’ 키워드를 자신의 것처럼 가져왔다. 생애주기별 복지정책 구상을 담은 사회보장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출마선언문에서 가장 눈에 띄게 내세운 것도 ‘경제민주화’ 구상이다.
박 후보의 변화는 2009년 스탠퍼드대학 연설에서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언급한 뒤부터 시작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성장의 온기가 골고루 퍼지지 못했고, 그 때문에 성장보다는 분배 쪽에 초점을 두도록 정책기조의 변화가 필요했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2011년 3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회의에서 박 후보는 “성장이 전체 국민의 후생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효과는 과거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며 “성장이 전체 후생에 골고루 도움이 되기보다는 일부에 편중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박 후보 변화의 시작은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었다”고 말한 200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 때라는 분석도 있다. 한 친박 핵심 인사는 “돌이켜보면 박 후보는 ‘성장’보다는 ‘복지’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2007년 경선 때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에 대한 보수 진영의 반발이 컸기 때문에 성장 경쟁을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박 후보가 과거와는 생각 자체가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감세’를 고집해오던 입장은 ‘증세 논의를 열어두자’는 쪽으로 변했다. 박 후보는 지난달 22일 기자간담회에서 “복지비용의 60%는 세출을 절약하고, 40%는 세입을 늘려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복지에 대한) 기대 수준과 (비용의) 조달 수준의 접합점을 찾겠다”며 “국민 대표와 전문가가 참여하는 공청회를 하고 국회에서 논의도 해서 우선 순위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 ‘정책의 진화’냐, ‘말 바꾸기’냐
박 후보는 정책 변화를 ‘변화’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는 7월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 ‘줄·푸·세’와 ‘경제민주화’가 배치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줄·푸·세에서 경제민주화로 바뀐 것은 경제상황이 바뀐 것이냐, 경제철학이 바뀐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박 후보의 대답은 이랬다.
“‘줄’은 저소득층, 중소기업 세율을 내리자는 것이고, ‘푸’는 규제의 불필요한 것을 풀어 국민들에게 도움을 주자는 것, ‘세’는 법치를 바로 세워 공정거래와 경제 남용을 바로잡자는 부분이다.”
하지만 2007년 ‘줄·푸·세’를 주장할 당시 ‘줄’은 주로 법인세 인하 등 대기업에 혜택이 가는 쪽에 초점이 맞춰졌다. ‘푸’는 “기업의 의욕을 북돋우고 기업의 자율을 최대한 확대하자”(서울 파이낸셜포럼 특강)는 규제 완화에 강조점이 찍혔다. 지난달 22일 기자간담회에서 “경제적 지배력 남용에 있어서는 규제가 필요하지만 쓸데없는 규제가 많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세’이다. 2007년 박 후보는 “법 위에 떼법이 존재해서 폭력을 쓰고 우기면 된다”며 파업 등 노조 활동을 겨냥한 바 있다.
박 후보의 ‘입장이 변화한 것이 없다’는 발언은 외부적으로 “일제강점과 8·15 독립이 같다는 말”(노회찬 의원)이라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캠프 내부에서도 “경제 상황이 2008년 이후 급속하게 바뀌었고 2009년부터 ‘원칙이 바로 선 자본주의’를 꾸준히 말해왔으니 변화를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캠프 핵심 관계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성장에서 복지로, 국가에서 국민으로 담론이 변화했다는 것이 박 후보 소신이라면, 이전에 했던 주장이 어떤 이유에서 어떻게 진화됐는지 설명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박 후보와 새누리당에 경제민주화 실천 의지가 있느냐는 의구심도 나온다. 4·11 총선에서는 당의 정강·정책에 담았던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인물을 공천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당 안팎에서 제기됐다. 현재도 박 후보 주변에서는 “경제민주화는 선거전략인 측면이 많다. 지금 언론에 경제민주화란 의제와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뜨니까 더 많이 부각됐는데 실제로 박 후보를 만나서 들어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강한 입장은 아닌 것 같다”(한 의원)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특히 박 후보보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경제민주화라는 의제에 동참해줄지도 의문이다. 원내외 40여명이 경제민주화 실천모임을 꾸려 관련 법안을 시리즈로 내고 있지만, 모임 내부에서는 “당내 설득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이 나온다.
■ 박 후보의 입장이 궁금한 정책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 후보가 주장하거나 반대한 정책들 중 여전히 입장이 모호한 것들도 있다. 박 후보는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정책을 두고 당시 정책 청문회에서 “아버지 시절에도 검토했다가 폐지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대에도 그랬다. 그래도 계속 추진할 것이냐”고 묻는 등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대운하 정책의 변형인 4대강 정책을 두고는 별다른 입장을 표하지 않았다. 그는 “제가 분명히 대운하는 반대라고 일관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정부에서 4대강은 대운하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분명히 밝혔으니 믿어야 할 것”이라며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국민을 속이는 것인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만 말했다.
‘열차 페리’ 공약도 설명이 없다. 한·중 열차페리 정책은 복합화물운송 시스템으로 육상에서 화물을 실은 열차를 고스란히 페리에 실어 수송하는 방식을 말한다. 박 후보 쪽에서는 당시 중국 옌타이항~다롄항 구간 시험운행 등 증명된 사례가 있고 기존 중국 횡단철도와 연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 정책’에 비해 현실성이 높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현재 공약에서 이 부분은 빠져 있다.
박 후보가 납득되는 설명 없이 입장을 바꾼 사례로는 2009년 미디어법도 있다. 당시 이명박 정권은 종편 승인 등을 골자로 미디어법 제정을 추진했다. 박 후보는 “제대로 된 미디어법이 되려면 미디어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고 독과점 문제도 해소돼야 한다”며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강행 처리 땐 반대표를 행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이런 입장을 밝힌 지 불과 일주일여쯤 지나 언론 관련 법안이 본회의에서 직권상정으로 처리될 당시 박 후보는 “이 정도면 국민도 공감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강행 처리된 법안은 구독률 20% 이상 신문사의 방송 진출을 불허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선·중앙·동아일보의 구독률은 그보다 낮았고, 결국 이들 신문사의 종편은 출범됐다.
박 후보 쪽에서는 “그나마 25%였던 기준을 박 후보가 버텨 20%로 낮췄다”는 설명뿐이었다. 당시 박 후보 측근 사이에서도 “박 후보의 트레이드마크인 원칙 정치에 타격을 입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앞서 대표 시절인 2004년 말부터 여야 대치의 주요 법안이었던 신문법 개정안에 반대한 박 후보는 “시장점유율 규제 조항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항”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 때는 ‘국제적 기준’과 ‘자유시장 경제’를 앞세웠던 것이다.
19대 국회에서 또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이는 사립학교법 개정에도 박 후보가 깊숙이 개입했다. 2005년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주도로 개방이사제 도입과 인사위원회 권한 강화, 부패사학에 임시이사 파견제 등을 내용으로 한 사학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박 후보는 이른바 ‘사학법 투쟁’을 하며 거리로 나갔다.
박 후보는 당시 사학법에 ‘색깔’을 입혔다. 그는 “그들(정부와 여당)의 목표는 비리척결이 아니라 전교조에 사학을 넘겨줘서 지배구조를 바꾸고 아이들에게 특정 이념을 주입시키려는 것”이라고 했다. 2006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후보는 “이번에 날치기한 사학법은 전교조가 10년 전부터 주장한 법이다. 이 법의 독소조항인 개방형 이사제, 임시이사제, 교사의 노동운동 허용 같은 것은 모두 전교조 숙원 사업이다. 전교조가 사학의 경영에 간섭하고 갈등을 일으켜 이사회를 장악하고 학교를 접수하는 길을 터 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박 후보를 향해 원희룡 당시 최고위원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박 대표의 이념적 편견은 병”이라고 밝혔다. 2007년 개방형 이사제 추천 조항 등 일부 내용을 수정해 사학법이 재개정되긴 했지만 여야 모두 이 법안에 불만을 갖고 있다.
다시 원희룡 전 최고위원 말로 돌아가보자.
“박 대표가 사학에 개방이사를 넣는 것은 빨갱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김정일도 만나고 이념적 지평이 넓다고 말하는 것은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이 아니다’라는 이야기와 같다. 자기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박 대표의 리더십 밑바닥은 과거회귀적·대결적·관념적 이념 틀이고, 민생 등 나머지 주장은 다 패션일 뿐이다.”
실제 보수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직접 면담한 이가 박 후보다. 박 후보는 자서전에서 2002년 5월13일 백화원 영빈관 회의실에서 이뤄진 김 위원장과의 독대에서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금강산댐 남북 공동조사단 구성 등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현재 박 후보는 대북·안보 정책에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로 설명되는 포용정책과 압박정책의 중간쯤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6·15 공동선언, 10·4 선언도 존중한다는 입장이다.
출처 :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3) 정책변화, 진화냐 말 바꾸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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