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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박정희·박근혜

유신헌법은 무엇이었나… 초헌법적 긴급조치, 삼권분립 부정, 세계사적 ‘헌정 파괴’

유신헌법은 무엇이었나…
초헌법적 긴급조치, 삼권분립 부정, 세계사적 ‘헌정 파괴’
[경향신문] 전병역 기자 | 입력 : 2012-08-31 21:45:12 | 수정 : 2012-08-31 22:45:02


‘10월 유신’은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위해 헌법 효력정지, 국회 해산 같은 초법적인 조치를 거쳐 마련한 ‘박정희의,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유신헌법에 기초하고 있다.

유신을 추진하는 과정과 형식, 내용 모두 위헌적 요소로 얼룩졌다. 비정상적인 유신체제를 끌고 가기 위해 긴급조치로 국민 기본권을 억압하는 ‘공포정치’는 필연적이었다. 전문가들은 “현대사의 오명인 유신체제를 지워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메이지 유신’에서 용어를 따온 10월 유신은 1971년 7대 대선에서 박정희가 야당 김대중 후보를 근소한 표차로 이겨 힘겹게 3선에 성공한 데 배경이 있다.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10·17 비상조치’로 유신체제 구축용 ‘친위 쿠데타’에 나섰다. 국회 해산과 정당활동 금지 등 정치활동을 못하게 한 뒤 비상국무회의에서 심의한 ‘유신헌법’을 11월 21일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 6년 임기에 연임을 포함해 12년을 추가 집권하는 게 가능하게 된 순간이다.

‘유신’ 국민투표 하는 박정희와 박근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운데)가 1972년 11월 21일 아버지 박정희(오른쪽), 어머니 육영수와 함께 유신헌법 국민투표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1971년 ‘김대중에 신승’ 3선 직후
주변정세 이유로 비상조치 선포
헌법 무력화해 장기집권 틀 마련

▲ 국민 기본권 제약한 ‘긴급조치’ 남발
10·26 총성 후 군부정권으로 이어져
“나치헌법처럼 무효화 조치 필요”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31일 “이런 유신체제는 법치를 부인하고, 입법부와 국민주권을 부정했으며, 권력자(박정희)를 법과 제도 아래 두는 공화국 원리를 부정한 세계사적으로도 극히 드문 헌정 파괴행위”라고 규정했다.

절차상 ‘국민투표’를 거쳤다고 유신을 옹호하는 세력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유신헌법이 위헌이라고 입을 모은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헌법학)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어용단체가 국민주권을 대신해 대통령을 뽑게 하고, 의회와 사법부를 무력화시킨 유신헌법은 원천 무효”라고 말했다.

제3공화국 헌법하에서도 개헌에 필요한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 의결 과정부터 외면했다. 당시 대통령에게는 국회해산권, 헌법 효력정지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효력을 정지한 것은 위헌이자 무효라는 것이다.

유신헌법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허가하거나 검열을 금지한 헌법 규정을 삭제하는 등 기본권도 제약했다.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를 하게 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유정회 의원)을 추천하고, 국회 동의 없는 긴급조치권을 가졌다. 대법원장과 모든 판사를 대통령이 임명·보직·파면할 수 있게 했다.

유신헌법에 의한 긴급조치(1~9호)로 체제 비판·풍기문란을 빌미로 금지곡을 선정하고,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단속했다.

‘막걸리 보안법’은 이때 나왔다. 오종상씨는 1974년 버스에서 여고생을 상대로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술을 마시다가 ‘박정희 왕국’을 비판한 한 광부도 19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살아야 했다.

민청학련 사건(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1975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1979년) 등 체제 유지용 공안 사건들이 만들어지거나 왜곡됐다.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가 1973년 10월 중앙정보부에서 고문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해 8월 재야 지도자로 긴급조치 1호의 첫 희생자인 장준하 선생도 의문사를 당했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는 “장기집권용 유신체제는 박 전 대통령이 심복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총탄에 쓰러지기 전에 스스로 출구를 찾기 어려운 체제였다”고 지적했다.

임지봉 교수는 “전후 독일이 나치 헌법을 무효화했듯, 우리 국회는 지금이라도 유신헌법 무효선언이 필요하다”며 “유신은 헌정사에서 제외해야 할 헌법의 진공상태였다”고 말했다.

유신 40년째인 올해까지 논란이 이어지는 것은 사법부가 유신헌법에 ‘사망선고’를 내리지 못한 탓도 있다. 대법원은 2010년 12월 오종상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긴급조치 1호는 위헌이라고 명시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유신헌법 자체의 위헌’ 여부를 놓고 제기된 소에 대해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고 있다.

5·16 쿠데타와 유신의 나쁜 선례는 결국 전두환·노태우 군부독재 정권으로 모방됐고 박정희의 유산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1980년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대통령 직선제는 1987년 6월항쟁에서 시민의 힘으로 쟁취해서야 비로소 되찾았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유신 옹호론이 나오는 것 또한 ‘유신 40년, 민주화 25년’을 맞은 한국 민주주의의 냉정한 현주소다. 박명림 교수는 “우리 헌법 질서는 여전히 박정희 체제 속에 있다”며 “민주주의와 경제민주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등에 관한 근본적인 토론이 필요한 때가 됐다”고 말했다.


출처 : 유신헌법은 무엇이었나… 초헌법적 긴급조치, 삼권분립 부정, 세계사적 ‘헌정 파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