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미국의 ‘워터게이트’가 2013년 ‘국정원게이트’에게
[토요판] 닉슨 하야 원인은 “나는 모른다”는 ‘은폐’
[한겨레] 최성진 기자 | 등록 : 2013.06.28 20:30 | 수정 : 2013.07.01 15:25
▶ 1973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두번째 임기 첫해를 맞았습니다.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맥거번 후보를 워낙 큰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기에 닉슨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진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닉슨 대통령은 1974년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는데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맞닥뜨린 박근혜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요.
‘물타기→꼬리자르기→수사방해’하다 대통령직 사임
1973년 미국에서는 재선에 성공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취임했고,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3년 한국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각각 국가 최고 정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정보원(국정원)의 대통령선거 개입 의혹이 불거져, 집권 첫해부터 큰 위기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곧 워터게이트 사건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따른 여론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이듬해인 1974년 결국 백악관에서 물러났다.
닉슨 대통령이 임기 중 사임이라는 막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에 있지 않았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따른 대통령의 책임을 단 한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워터게이트에 쏠린 미국 사회의 관심을 자신에게 유리한 ‘국가안보’ 이슈로 돌리려고 애썼다. 이마저도 뜻대로 이뤄지지 않자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도록 중앙정보국을 활용해 연방수사국(FBI) 등에 압력을 넣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를 주도한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닉슨을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은 바로 ‘은폐’였다”고 지적했다.
“3급 침입절도사건”이라며 논평 거부하다
닉슨 대통령과 그의 측근이 워터게이트 사건 은폐 과정에서 시도한 ‘물타기→꼬리 자르기→수사 방해 및 권력 남용’ 등 일련의 행태는 2013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관련해 한국에서 불거지고 있는 ‘정치공작’ ‘물타기’ 논란을 연상케 한다. 최초 발생 시점을 기준으로 40년도 넘게 지난 워터게이트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72년 미국 대선을 약 5개월 앞둔 6월 17일 토요일 새벽, 수도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호텔 빌딩 안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서 정장 차림에 외과 수술용 장갑을 낀 다섯 남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체포 당시 이들은 최신형 도청장치를 손에 쥐고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이들 가운데 한 명의 신분이 밝혀졌다. 제임스 매코드라는 인물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 기자는 그가 중앙정보국 출신으로 닉슨 대통령의 선거 캠프인 닉슨재선위원회에 몸담고 있었다고 6월 19일 보도했다. 다음날 워싱턴포스트는 매코드 등 범인 두 명의 수첩에서 역시 중앙정보국 출신이며 백악관의 법률고문인 찰스 콜슨의 측근인 하워드 헌트의 전화번호가 나왔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훗날 헌트는 워싱턴의 홍보대행업체 ‘로버트 멀린’사 소속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멀린사는 중앙정보국이 꾸려놓은 여러 위장 회사 가운데 한 곳이었다. 곧이어 범인들이 가지고 있던 현금의 출처가 닉슨재선위원회였다는 사실, 재선위원회 관계자와 범인들이 범행 직전 십수 차례에 걸쳐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대해 백악관은 ‘물타기’로 일관했다. 로널드 지글러 백악관 대변인은 사건 초기(6월 19일) 워터게이트 빌딩 도청사건에 대해 “3급 침입절도사건”에 불과하다며 아예 구체적 논평을 거부했다. 백악관이 이런 무성의한 논평을 내놓은 이유는 약 5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 때문이었다. 당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를 크게 앞서고 있던 닉슨 캠프로서는 논란 확산을 원치 않았다. 이에 따라 백악관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주장하며 대중의 관심에서 자연스레 멀어지기를 바랐다.
대선을 5개월 앞둔 1972년 6월. 미국 민주당 전국위 사무실에서 5명의 남자가 경찰에 잡혔다.
도청장치를 든 이들 중 한 명은 CIA 출신의 닉슨 캠프 사람. ‘절도 사건’이라는 백악관의 변명
2012년 12월 대선 8일 전. 야당 후보 비방 댓글 올린 혐의로 경찰은 국정원 직원 집을 덮쳤다.
박근혜 후보는 ‘인권 침해’라며 야당을 향해 맹공격을 펼쳤다
지난해 12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 처음 불거졌을 때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보인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 다만 박 후보는 이를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대선을 일주일여 앞둔 12월 11일 경찰 및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은 국정원 여직원 김아무개씨의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을 급습했다. 해당 여직원은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의 인터넷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 관계자가 대선 기간에 야당 후보를 겨냥한 인터넷 게시물을 올린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선거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를 만했다.
박근혜 후보는 이를 “국정원 여직원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하며 역공을 펼쳤다. 박 후보는 김씨에 대한 경찰의 소환조사를 하루 앞둔 12월 14일 새누리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안위를 챙기는 정보기관마저 자신들의 선거 승리를 위해 의도적으로 정쟁의 도구로 만들려고 했다면 이는 좌시할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고 주장했다.
12월 16일 밤 11시 경찰이 “국정원 여직원 대선 관련 댓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자, 문재인 후보를 향한 박 후보의 공세는 한층 거세졌다. 박 후보는 이튿날 “경찰이 (여직원의) 컴퓨터 노트북을 뒤져봐도 댓글 하나 단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2박3일 동안 감금당하고 고생한 젊은 여직원, 그 여직원만 불쌍하게 됐다. 민주당은 지금도 이렇게 하는데 정권을 잡으면 도대체 어떤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지 두려운 생각까지 든다”(경기도 수원 지동시장 유세)고 말하는 등 ‘국정원 여직원 인권’을 선거에 쏠쏠히 써먹었다.
닉슨과 박근혜 대통령은 각각 워터게이트와 국정원 대선개입이라는 대형 악재를 딛고 1972년, 2012년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선 직전 두 사람의 발목을 잡을 뻔했던 대형 사건에 대한 대중의 기억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취임 초까지 유일하게 보도한 워싱턴포스트
워터게이트에 대한 미국 사회의 분노를 일깨운 것은 다시 워싱턴포스트였다. 당시 미국 언론 가운데 1973년 닉슨 대통령 취임 초까지 워터게이트 사건을 거의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보도해온 곳은 워싱턴포스트였다. 워싱턴포스트는 10월 10일치 보도를 통해 닉슨 행정부가 도널드 세그레티라는 젊은 변호사를 활용해 야당인 민주당을 겨냥한 광범위한 스파이 활동을 벌이는 등 워터게이트가 하나의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 1972년 초까지 법무장관을 지낸 존 미첼 닉슨재선위원회 위원장이 민주당 관련 정보 수집의 총책임자라는 사실도 처음 알렸다.
닉슨 대통령의 취임 직후인 1973년 1월 30일에는 미국 사법부도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다. 사건 관련자에 대한 공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존 시리카 연방법원 판사는 검찰 수사 단계에서 피고인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닉슨 행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잇단 단독보도 행진에 이어 시리카 판사의 발언까지 나오자, <뉴욕 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 경쟁 매체도 비로소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에 관심을 쏟았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둘러싼 여론 지형의 변화에도 닉슨 대통령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식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3월20일 그는 “백악관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고, 4월 들어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존 미첼 위원장이 워터게이트 사건 모의 과정에 참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나는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사전에 아무것도 몰랐다”고 발뺌했다. 대신 닉슨 대통령은 4월 30일 워터게이트 사건 수습책의 하나로 밥 홀드먼 백악관 수석보좌관과 존 얼리크먼 국내담당보좌관을 해임했다. ‘꼬리 자르기’였다.
닉슨 대통령은 실제로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백악관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억울하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다. 그의 최측근이었던 찰스 콜슨 특별고문은 자신의 회고록 <백악관에서 감옥까지>에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미리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소개했다. 다만 닉슨 대통령 자신이 미리 알았든 몰랐든 선거전의 총책임자로서 끝까지 “나는 모른다”는 태도를 고집한 것은 그의 실책이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 재점화된 과정도 언론을 통해서였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대선을 3일 앞둔 지난해 12월 16일 밤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 여직원의 대선 관련 댓글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한 데 이어, 지난 1월 3일 “김씨가 올린 글은 정치적인 이슈와는 전혀 상관없고, 개인적이거나 국정원 업무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연이은 폭로에 닉슨 대통령 “몰랐다” 말하면서
보좌관 해임하며 꼬리 자르고 특검 해임하며 수사 방해
베트남전 내세워 안보 강조하다 모든 게 실패하자 사임했다
국정원 여직원 댓글 드러났어도 “의혹 밝히는 건 국회의 일”
박근혜 대통령 선 긋는 사이 국정원은 경찰 수사 방해하고
NLL 대화록을 공개하며 국가안보 논란을 부추긴다
1월 31일치 <한겨레> 보도는 달랐다. 한겨레는 ‘오늘의 유머’에서 활동한 국정원 여직원 김씨의 아이디 11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그가 지난해 8월 22일부터 12월 11일까지 모두 91건의 게시글을 작성했으며 해당 게시물은 정부 여당을 일방적으로 편들거나 야당 및 야당 대선후보를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고 보도했다.
국정원의 정치·대선 개입 혐의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속속 나왔다. 지난 3월18일 진선미 민주당 의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취임한 2009년 2월부터 2013년 1월까지 국정원 인트라넷에 게시된 ‘원장님 지시·강조말씀’ 내부문건을 공개했다. 진 의원은 “국정원 문건을 보면 원 전 원장이 여론 조작을 시도하고, 종북 좌파에 대한 대응과 공작, 이명박 정권의 전위부대로서 4대강 등 각종 국정 현안을 실질적으로 지시한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진 의원은 5월 15일에도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압해야 한다’는 취지의 국정원 작성 추정 문건을 추가로 공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이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국내 정치 및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박 대통령은 지난 24일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국정원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또한 그는 “국정원이 문제가 있었다면 여야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국민 앞에 의혹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절차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회가 논의해서 할 일”이라고 말했다. 곧바로 ‘꼬리 자르기’라는 비판이 불거졌다. 40여개 시민단체·정당 연대기구인 ‘세상을 바꾸는 민중의 힘’은 25일 기자회견을 열어 “권력의 가장 큰 수혜를 받고 당선된 대통령이 국정원 사건과 관련해 ‘나와 관계없는 일’로 치부하는 모습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워싱턴포스트 등 언론의 집요한 보도는 1973년 2월 미국 상원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의 설치와 5월 18일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 임명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워터게이트 사건은 기존의 연방수사국 수사와 의회 워터게이트 특위의 청문회, 특별검사의 수사 등 세 방향에서 닉슨 대통령을 압박해갔다.
특검 해임, 토요일 밤의 학살
닉슨 대통령은 여전히 “나는 모른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또한 워터게이트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미국 사회를 상대로 그는 두 가지 대응 방식을 선택했다. 우선 중앙정보국을 적극 활용해 연방수사국 및 워터게이트 특검의 수사활동을 교묘히 방해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과 전쟁을 치르던 당시 미국 사회의 애국심을 적극 활용했다. 닉슨 대통령은 5월 22일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는 미국의 국가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김정인 참여연대 부위원장(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은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이 말한 국가안보란 곧 ‘정권 안보’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닉슨과 그의 참모들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정권의 위기가 깊어지자 국가안보라는 입장에서 기자들과 칼럼니스트, 일부 정부 부처 관계자에 대한 도청을 시도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며 닉슨 정권이 말한 국가안보도 곧 ‘정권 안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닉슨 대통령은 1973년 10월 자신의 목에 더욱 깊숙이 칼을 들이미는 콕스 특검을 아예 해임하며 민심을 완전히 등졌다. 콕스 특검은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 집무실에서 오간 모든 대화를 기록한 음성테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닉슨 대통령에게 이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닉슨 대통령은 이를 거부하며 되레 콕스 특검을 10월 20일 해임했다. 그러자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은 콕스 특검 해임에 반대하며 사임하는 것으로 맞섰다. 법무차관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언론은 이를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고 불렀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직접 지시했거나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원 법사위원회는 1974년 7월 27일 닉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 권고안을 결의했다. 탄핵 사유는 사법방해죄와 권력남용죄였다. 그는 결국 1974년 8월 8일 탄핵에 앞서 먼저 사임을 발표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관련해 최근 여론이 크게 들끓은 지점은 지난 24일 남재준 국정원장이 ‘총대’를 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였다. 국정원은 지난해 대선 직전 경찰이 ‘국정원의 대선 개입은 없었다’는 내용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과정에도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지난 17일 “지난해 12월 16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과 박원동 당시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이 여러 차례 통화했다는 제보가 있다”고 주장했다. 남재준 원장의 대화록 공개 직후 새누리당과 <조선일보> 등 일부 매체는 기다렸다는 듯 이를 계기로 뜬금없는 ‘국가안보’ 논란을 부추겼다. 40년 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중앙정보국이 주도한 정치공작, 곧 찰스 콜슨 고문의 표현처럼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는 국가안보라는 주문의 보호막”을 만들어내 워터게이트 사건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출처 : 40년 전 미국의 ‘워터게이트’가 2013년 ‘국정원게이트’에게
[토요판] 닉슨 하야 원인은 “나는 모른다”는 ‘은폐’
[한겨레] 최성진 기자 | 등록 : 2013.06.28 20:30 | 수정 : 2013.07.01 15:25
▲ 워터게이트 사건일지 (※. 그림을 누르면 큰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
▶ 1973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두번째 임기 첫해를 맞았습니다.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맥거번 후보를 워낙 큰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기에 닉슨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진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닉슨 대통령은 1974년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나고 말았는데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맞닥뜨린 박근혜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요.
‘물타기→꼬리자르기→수사방해’하다 대통령직 사임
1973년 미국에서는 재선에 성공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취임했고,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13년 한국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각각 국가 최고 정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정보원(국정원)의 대통령선거 개입 의혹이 불거져, 집권 첫해부터 큰 위기를 맞았다는 사실이다. 곧 워터게이트 사건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따른 여론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이듬해인 1974년 결국 백악관에서 물러났다.
닉슨 대통령이 임기 중 사임이라는 막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워터게이트 사건 자체에 있지 않았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에 따른 대통령의 책임을 단 한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워터게이트에 쏠린 미국 사회의 관심을 자신에게 유리한 ‘국가안보’ 이슈로 돌리려고 애썼다. 이마저도 뜻대로 이뤄지지 않자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도록 중앙정보국을 활용해 연방수사국(FBI) 등에 압력을 넣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를 주도한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닉슨을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은 바로 ‘은폐’였다”고 지적했다.
“3급 침입절도사건”이라며 논평 거부하다
닉슨 대통령과 그의 측근이 워터게이트 사건 은폐 과정에서 시도한 ‘물타기→꼬리 자르기→수사 방해 및 권력 남용’ 등 일련의 행태는 2013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관련해 한국에서 불거지고 있는 ‘정치공작’ ‘물타기’ 논란을 연상케 한다. 최초 발생 시점을 기준으로 40년도 넘게 지난 워터게이트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72년 미국 대선을 약 5개월 앞둔 6월 17일 토요일 새벽, 수도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호텔 빌딩 안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서 정장 차림에 외과 수술용 장갑을 낀 다섯 남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체포 당시 이들은 최신형 도청장치를 손에 쥐고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이들 가운데 한 명의 신분이 밝혀졌다. 제임스 매코드라는 인물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 기자는 그가 중앙정보국 출신으로 닉슨 대통령의 선거 캠프인 닉슨재선위원회에 몸담고 있었다고 6월 19일 보도했다. 다음날 워싱턴포스트는 매코드 등 범인 두 명의 수첩에서 역시 중앙정보국 출신이며 백악관의 법률고문인 찰스 콜슨의 측근인 하워드 헌트의 전화번호가 나왔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훗날 헌트는 워싱턴의 홍보대행업체 ‘로버트 멀린’사 소속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멀린사는 중앙정보국이 꾸려놓은 여러 위장 회사 가운데 한 곳이었다. 곧이어 범인들이 가지고 있던 현금의 출처가 닉슨재선위원회였다는 사실, 재선위원회 관계자와 범인들이 범행 직전 십수 차례에 걸쳐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대해 백악관은 ‘물타기’로 일관했다. 로널드 지글러 백악관 대변인은 사건 초기(6월 19일) 워터게이트 빌딩 도청사건에 대해 “3급 침입절도사건”에 불과하다며 아예 구체적 논평을 거부했다. 백악관이 이런 무성의한 논평을 내놓은 이유는 약 5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 때문이었다. 당시 민주당 조지 맥거번 후보를 크게 앞서고 있던 닉슨 캠프로서는 논란 확산을 원치 않았다. 이에 따라 백악관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주장하며 대중의 관심에서 자연스레 멀어지기를 바랐다.
대선을 5개월 앞둔 1972년 6월. 미국 민주당 전국위 사무실에서 5명의 남자가 경찰에 잡혔다.
도청장치를 든 이들 중 한 명은 CIA 출신의 닉슨 캠프 사람. ‘절도 사건’이라는 백악관의 변명
2012년 12월 대선 8일 전. 야당 후보 비방 댓글 올린 혐의로 경찰은 국정원 직원 집을 덮쳤다.
박근혜 후보는 ‘인권 침해’라며 야당을 향해 맹공격을 펼쳤다
지난해 12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 처음 불거졌을 때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보인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 다만 박 후보는 이를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대선을 일주일여 앞둔 12월 11일 경찰 및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은 국정원 여직원 김아무개씨의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을 급습했다. 해당 여직원은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의 인터넷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 관계자가 대선 기간에 야당 후보를 겨냥한 인터넷 게시물을 올린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선거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를 만했다.
박근혜 후보는 이를 “국정원 여직원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하며 역공을 펼쳤다. 박 후보는 김씨에 대한 경찰의 소환조사를 하루 앞둔 12월 14일 새누리당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가안위를 챙기는 정보기관마저 자신들의 선거 승리를 위해 의도적으로 정쟁의 도구로 만들려고 했다면 이는 좌시할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고 주장했다.
12월 16일 밤 11시 경찰이 “국정원 여직원 대선 관련 댓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자, 문재인 후보를 향한 박 후보의 공세는 한층 거세졌다. 박 후보는 이튿날 “경찰이 (여직원의) 컴퓨터 노트북을 뒤져봐도 댓글 하나 단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2박3일 동안 감금당하고 고생한 젊은 여직원, 그 여직원만 불쌍하게 됐다. 민주당은 지금도 이렇게 하는데 정권을 잡으면 도대체 어떤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지 두려운 생각까지 든다”(경기도 수원 지동시장 유세)고 말하는 등 ‘국정원 여직원 인권’을 선거에 쏠쏠히 써먹었다.
닉슨과 박근혜 대통령은 각각 워터게이트와 국정원 대선개입이라는 대형 악재를 딛고 1972년, 2012년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선 직전 두 사람의 발목을 잡을 뻔했던 대형 사건에 대한 대중의 기억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취임 초까지 유일하게 보도한 워싱턴포스트
워터게이트에 대한 미국 사회의 분노를 일깨운 것은 다시 워싱턴포스트였다. 당시 미국 언론 가운데 1973년 닉슨 대통령 취임 초까지 워터게이트 사건을 거의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보도해온 곳은 워싱턴포스트였다. 워싱턴포스트는 10월 10일치 보도를 통해 닉슨 행정부가 도널드 세그레티라는 젊은 변호사를 활용해 야당인 민주당을 겨냥한 광범위한 스파이 활동을 벌이는 등 워터게이트가 하나의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 1972년 초까지 법무장관을 지낸 존 미첼 닉슨재선위원회 위원장이 민주당 관련 정보 수집의 총책임자라는 사실도 처음 알렸다.
닉슨 대통령의 취임 직후인 1973년 1월 30일에는 미국 사법부도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다. 사건 관련자에 대한 공판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존 시리카 연방법원 판사는 검찰 수사 단계에서 피고인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닉슨 행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잇단 단독보도 행진에 이어 시리카 판사의 발언까지 나오자, <뉴욕 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 경쟁 매체도 비로소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에 관심을 쏟았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둘러싼 여론 지형의 변화에도 닉슨 대통령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식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3월20일 그는 “백악관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고, 4월 들어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존 미첼 위원장이 워터게이트 사건 모의 과정에 참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나는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사전에 아무것도 몰랐다”고 발뺌했다. 대신 닉슨 대통령은 4월 30일 워터게이트 사건 수습책의 하나로 밥 홀드먼 백악관 수석보좌관과 존 얼리크먼 국내담당보좌관을 해임했다. ‘꼬리 자르기’였다.
닉슨 대통령은 실제로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백악관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억울하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혔다. 그의 최측근이었던 찰스 콜슨 특별고문은 자신의 회고록 <백악관에서 감옥까지>에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미리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소개했다. 다만 닉슨 대통령 자신이 미리 알았든 몰랐든 선거전의 총책임자로서 끝까지 “나는 모른다”는 태도를 고집한 것은 그의 실책이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 재점화된 과정도 언론을 통해서였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대선을 3일 앞둔 지난해 12월 16일 밤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원 여직원의 대선 관련 댓글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한 데 이어, 지난 1월 3일 “김씨가 올린 글은 정치적인 이슈와는 전혀 상관없고, 개인적이거나 국정원 업무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연이은 폭로에 닉슨 대통령 “몰랐다” 말하면서
보좌관 해임하며 꼬리 자르고 특검 해임하며 수사 방해
베트남전 내세워 안보 강조하다 모든 게 실패하자 사임했다
국정원 여직원 댓글 드러났어도 “의혹 밝히는 건 국회의 일”
박근혜 대통령 선 긋는 사이 국정원은 경찰 수사 방해하고
NLL 대화록을 공개하며 국가안보 논란을 부추긴다
1월 31일치 <한겨레> 보도는 달랐다. 한겨레는 ‘오늘의 유머’에서 활동한 국정원 여직원 김씨의 아이디 11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그가 지난해 8월 22일부터 12월 11일까지 모두 91건의 게시글을 작성했으며 해당 게시물은 정부 여당을 일방적으로 편들거나 야당 및 야당 대선후보를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고 보도했다.
국정원의 정치·대선 개입 혐의를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속속 나왔다. 지난 3월18일 진선미 민주당 의원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취임한 2009년 2월부터 2013년 1월까지 국정원 인트라넷에 게시된 ‘원장님 지시·강조말씀’ 내부문건을 공개했다. 진 의원은 “국정원 문건을 보면 원 전 원장이 여론 조작을 시도하고, 종북 좌파에 대한 대응과 공작, 이명박 정권의 전위부대로서 4대강 등 각종 국정 현안을 실질적으로 지시한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진 의원은 5월 15일에도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압해야 한다’는 취지의 국정원 작성 추정 문건을 추가로 공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이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국내 정치 및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에도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박 대통령은 지난 24일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국정원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또한 그는 “국정원이 문제가 있었다면 여야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국민 앞에 의혹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절차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회가 논의해서 할 일”이라고 말했다. 곧바로 ‘꼬리 자르기’라는 비판이 불거졌다. 40여개 시민단체·정당 연대기구인 ‘세상을 바꾸는 민중의 힘’은 25일 기자회견을 열어 “권력의 가장 큰 수혜를 받고 당선된 대통령이 국정원 사건과 관련해 ‘나와 관계없는 일’로 치부하는 모습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워싱턴포스트 등 언론의 집요한 보도는 1973년 2월 미국 상원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의 설치와 5월 18일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 임명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워터게이트 사건은 기존의 연방수사국 수사와 의회 워터게이트 특위의 청문회, 특별검사의 수사 등 세 방향에서 닉슨 대통령을 압박해갔다.
특검 해임, 토요일 밤의 학살
닉슨 대통령은 여전히 “나는 모른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또한 워터게이트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미국 사회를 상대로 그는 두 가지 대응 방식을 선택했다. 우선 중앙정보국을 적극 활용해 연방수사국 및 워터게이트 특검의 수사활동을 교묘히 방해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과 전쟁을 치르던 당시 미국 사회의 애국심을 적극 활용했다. 닉슨 대통령은 5월 22일 “워터게이트 사건 조사는 미국의 국가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김정인 참여연대 부위원장(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은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이 말한 국가안보란 곧 ‘정권 안보’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닉슨과 그의 참모들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정권의 위기가 깊어지자 국가안보라는 입장에서 기자들과 칼럼니스트, 일부 정부 부처 관계자에 대한 도청을 시도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며 닉슨 정권이 말한 국가안보도 곧 ‘정권 안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닉슨 대통령은 1973년 10월 자신의 목에 더욱 깊숙이 칼을 들이미는 콕스 특검을 아예 해임하며 민심을 완전히 등졌다. 콕스 특검은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 집무실에서 오간 모든 대화를 기록한 음성테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닉슨 대통령에게 이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닉슨 대통령은 이를 거부하며 되레 콕스 특검을 10월 20일 해임했다. 그러자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은 콕스 특검 해임에 반대하며 사임하는 것으로 맞섰다. 법무차관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언론은 이를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고 불렀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직접 지시했거나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원 법사위원회는 1974년 7월 27일 닉슨 대통령에 대한 탄핵 권고안을 결의했다. 탄핵 사유는 사법방해죄와 권력남용죄였다. 그는 결국 1974년 8월 8일 탄핵에 앞서 먼저 사임을 발표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관련해 최근 여론이 크게 들끓은 지점은 지난 24일 남재준 국정원장이 ‘총대’를 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였다. 국정원은 지난해 대선 직전 경찰이 ‘국정원의 대선 개입은 없었다’는 내용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과정에도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지난 17일 “지난해 12월 16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과 박원동 당시 국정원 국익정보국장이 여러 차례 통화했다는 제보가 있다”고 주장했다. 남재준 원장의 대화록 공개 직후 새누리당과 <조선일보> 등 일부 매체는 기다렸다는 듯 이를 계기로 뜬금없는 ‘국가안보’ 논란을 부추겼다. 40년 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중앙정보국이 주도한 정치공작, 곧 찰스 콜슨 고문의 표현처럼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는 국가안보라는 주문의 보호막”을 만들어내 워터게이트 사건을 극복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출처 : 40년 전 미국의 ‘워터게이트’가 2013년 ‘국정원게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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