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두 증인은 촛불 방화범임을 선서합니다”
[이슈추적] 국정원 국정조사 청문회장서 원세훈·김용판, 증인 선서 거부하고 “답변 않겠다”, “사실무근” 일관
새누리 노골적 감싸기 속 성과 없이 막 내려, 촛불집회에 물대포 진압 등장 상황에서 시위 격화 가능성
[한겨레21 제975호] 김외현 기자 | 2013.08.17
‘나는 결백하다. 검찰 수사 결과는 틀렸다. 공소 내용을 인정할 수 없다. 재판 중이므로 관련 답변은 법정에서 하겠다. 여기서 하게 되면 재판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8월16일 국회 청문회장에 나온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답변을 요약하면 이렇다. 원 전 원장의 답변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로 일관했고, 김 전 청장은 “사실무근이다”란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새로운 사실관계가 밝혀진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위증의 벌’에 동의하지 않아
두 사람은 증인선서를 거부했다. 오전에 출석한 김용판 전 청장은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국회증언법) 3조 1항 및 형사소송법 148조에 따라 선서를 거부하며, 원칙적으로 증언과 서류 제출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원세훈 전 원장도 오후에 출석해 마치 사전에 논의라도 한 듯이 같은 사유를 댔다. “국회증언법에 따라 증인선서를 거부하겠다. 신문 요지를 받아보니 대부분 내 형사재판과 직결돼 있는 내용이라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진실 그대로 증언하겠다. 다만 국정원법에 제한이 있거나 구금 중 자료를 얻지 못한 부분은 (답변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과거 국회에서 증인선서와 관련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9년 12월31일 ‘5공 비리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전두환 전 대통령은 증언대에 나가 손을 들지 않은 채 선서해, 선서 인정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나마 전 전 대통령은 질문도 받지 않은 채 준비한 답변서만 읽어내려가는 데 그쳐, 야당 의원들로부터 “질문도 없이 답변을 하느냐”는 질책을 들었다. 그러나 원세훈·김용판 증인처럼 아예 선서를 거부한 것은 국정조사 사상 처음이다. 국회증언법 8조는 증인이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진술이나 서면 답변에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서합니다”라는 내용이 기재된 선서를 하도록 규정한다. 김 전 청장과 원 전 원장은 ‘위증의 벌’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진술이 나중에 허위로 드러나는 경우에도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한 것이란 풀이도 가능하다.
두 사람은 “형사소송법 제148조 또는 제149조의 규정에 해당하는 경우에 선서·증언 또는 서류 제출을 거부할 수 있다”고 한 국회증언법 3조를 인용했다. 형사소송법 148조에는 본인이 공소 제기를 당했으면 증언을 거부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국회의 국정조사라 하더라도, 일종의 ‘무죄 추정의 원칙’을 보장한 셈이다.
청문회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국조특위) 여당 간사인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은 “민주당은 입만 열면 인권, 인권 하며 전가의 보도로 무죄 추정 원칙을 주장하더니 이번에는 유죄 추정 원칙을 들고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 민주당 소속인 신기남 위원장이 모두발언에서 검찰의 공소장을 근거로, “이번 사건은 대한민국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크게 뒤흔든 헌정질서 파괴 행위라는 것이 국민 대다수 여론이다. 검찰 수사 결과만 봐도 김용판 전 청장이 대선 당시 직권남용해 선거에 불법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며 김 전 청장의 혐의를 확정시한 것을 비꼰 것이다.
이전 증인 선서 거부자는 김기춘 비서실장
김용판·원세훈 두 증인의 증인선서 거부에 법리적 문제는 없다. 2004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대선자금 청문회에서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도 수사기관의 독립성 유지를 이유로 여야 동의 아래 선서를 하지 않은 채 수사 상황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김용판·원세훈 두 사람에 대해선, 성실한 진술을 회피하는 태도라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김용판 전 청장에게 “본인이 떳떳하면 왜 증인선서를 못하는가.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얼마나 거짓말을 하면 선서를 못하나”라고 했다. 김 전 청장은 “저는 경찰 생활을 통해서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했다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기소되는 과정을 통해서 내 스스로 떳떳하고 당당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헌법 기본권인 방어권 차원에서 선서를 거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다른 대목에선 “공소장을 보면서 실체적 진실과 다르게 사람이 해석되고 왜곡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세상 무섭다”고도 했다. 김 전 청장은 청문회 내내 이따금씩 뜻모를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보였다.
이날 야당이 이번 국정조사 두 핵심 증인의 증인선서 거부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기선제압’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전례에 비춰봐도 그렇다. 1989년 9월23일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장에 나온 김기춘 당시 검찰총장(현 청와대 비서실장)은 모두발언에서 “수감기관의 장으로서 증인선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야당 의원들이 즉각 국회 모독이라며 일제히 반발하면서 국정감사 자체가 중단되는 사태로 치달았다. 결국 김기춘 당시 총장은 나중에 선서를 해야 했다.
그러나 8월16일 청문회에서 김용판 전 청장의 증인선서 거부 선언에 대한 야당의 반응은 달랐다. 민주당 소속인 신기남 위원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증언은 하되, 선서를 거부하는 건가”를 물었고, 김 전 청장은 “원칙적으로는 거부하지만, 질의 성격에 따라 답변하겠다”고 답했다. 곧 ‘입맛에 맞는 질문에만 답변하겠다’는 선언이었음에도, 야당 의원들은 회의 진행에 토를 달지 않았다.
야당의 준비 부족에 대한 질책도 나온다. 김민기 민주당 의원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지난해 12월15일 김 전 청장과의 점심식사 배석자에 대한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으나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했다. 의도가 모호한 질문도 나왔다. 야당 간사인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김 전 청장에게 “지금 앉아 있는 심정이 어떤가”를 물었고, “특별한 감정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원세훈 전 원장에겐 “서울 구치소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나” “정권이 바뀌고 토사구팽당했다는 억울한 심정은 없나” “박근혜 정부에 대해 서운한 감정은 없나” 등을 연달아 물었지만 뾰족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
“우리 증인”? 김용판 국선변호인?
충분한 답변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상대방의 말을 끊고 윽박지르다 정작 필요한 진술을 놓친 것으로 보일 법한 상황도 있었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김용판 전 청장에게 박원동 국정원 전 국익정보국장과의 통화 내용에 대해 질문했으나, 정작 김 전 청장이 통화 내용을 설명하던 도중 말을 끊어버렸다. 전반적으로 야당 의원들은 검찰의 공소장 내용을 기반으로 공세를 펼치고자 했지만, 원세훈·김용판 두 증인이 검찰 공소 내용을 ‘전면 부인’하며 결백을 주장하는 바람에 다소 맥이 빠진 모습이었다.
반면 새누리당은 ‘매관매직’ ‘정치공작’ ‘여직원 감금’ 등 국정조사 이전부터 주력해온 열쇳말에 집중하면서 두 증인을 적극 옹호했다. 이장우 의원은 김용판 전 청장과 원세훈 전 원장에게 차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죠?” “요즘 잠이 옵니까?” “참말로 억울하죠?”라는 질문을 던진 뒤, “세상 살면서 가장 힘든 게, 억울한 일 당했을 때는 잠이 안 온다. 저 같아도 억울할 것 같아요”라며 증인들을 두둔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검찰 기소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질의하자, 원세훈 전 원장은 “선거에 개입하려고 했으면 댓글 몇 개 쓰라고 지시했겠느냐”고 맞장구를 쳤다. 김태흠 의원은 “재판 중인 사안에 대해 국정조사를 실시해 정쟁을 벌이는 게 부끄럽다”고 말했다.
경대수 의원은 증인선서 거부에 대해 “증언을 했는데 의원들과 다른 견해를 밝히면 사실과 다르다고 위증을 추궁할 것으로 예상했나? 그래서 선서를 거부한 건가?”라며 증인들의 입장을 대놓고 대리하고 나섰다. 여당 간사인 권성동 의원 등은 증인들을 부를 때 “우리 증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시사평론가 유창선씨는 트위터에서 “권성동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김용판 국선변호인인 듯”이라고 꼬집었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질문에 증인들이 비교적 고분고분하게 답변하면서 새로운 진술이 나오기도 했다. “왜 (대선 사흘 전인) 12월16일 밤 11시에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느냐”는 김도읍 새누리당 의원의 질문에, 김용판 전 청장은 “발표하지 않았다면, 몇몇 언론이 특종을 할 것이라는 정황이 포착됐다고 보고받았다”고 답했다. 결국 언론의 특종 보도를 막기 위해 경찰이 앞서 발표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경찰 수사가 축소·은폐된 것을 밝혀낸 검찰 수사에 대해선 “공소 내용 전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깎아내렸다.
증인들의 답변 거부와 새누리당의 노골적인 증인 감싸기 속에서 ‘국정원 선거 개입 국정조사’ 1차 청문회는 뚜렷한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오히려 피고인들이 공소장을 전면 부인하고 나서면서 체면을 구긴 검찰에게, 재판 과정에서 밝혀내야 할 숙제만 잔뜩 떠안긴 셈이 됐다. 국정조사 전체 일정은 8월23일 마무리된다.
검찰, 숙제만 잔뜩 안아
주목되는 것은 민심의 향배다. 원세훈·김용판 두 핵심 증인이 8월16일 청문회에서 증인선서를 하지 않는 등 ‘안하무인’성 태도를 보인 데 분노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촛불집회 규모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불어나는 촛불에 기름을 끼얹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청문회 하루 전인 8월15일,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으로 시위 진압에 물대포가 사용되는 등 경찰이 각종 시위에 대해 강경 대응으로 방향을 잡은 상황에서, 시위가 격화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조심스레 제기된다. 한 누리꾼(@slo****)은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원세훈·김용판 하는 짓 보니 이 정부가 국민을 아주 열받게 해서 화염병이나 죽창을 들게 하려는 모양이네. 그러고 나선 계엄령이라도 내려야 유신의 추억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가?”
출처 : [한겨레21] “두 증인은 촛불 방화범임을 선서합니다”
[이슈추적] 국정원 국정조사 청문회장서 원세훈·김용판, 증인 선서 거부하고 “답변 않겠다”, “사실무근” 일관
새누리 노골적 감싸기 속 성과 없이 막 내려, 촛불집회에 물대포 진압 등장 상황에서 시위 격화 가능성
[한겨레21 제975호] 김외현 기자 | 2013.08.17
‘나는 결백하다. 검찰 수사 결과는 틀렸다. 공소 내용을 인정할 수 없다. 재판 중이므로 관련 답변은 법정에서 하겠다. 여기서 하게 되면 재판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8월16일 국회 청문회장에 나온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답변을 요약하면 이렇다. 원 전 원장의 답변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로 일관했고, 김 전 청장은 “사실무근이다”란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새로운 사실관계가 밝혀진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왼쪽)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장에서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김경호 기자 |
‘위증의 벌’에 동의하지 않아
두 사람은 증인선서를 거부했다. 오전에 출석한 김용판 전 청장은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국회증언법) 3조 1항 및 형사소송법 148조에 따라 선서를 거부하며, 원칙적으로 증언과 서류 제출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원세훈 전 원장도 오후에 출석해 마치 사전에 논의라도 한 듯이 같은 사유를 댔다. “국회증언법에 따라 증인선서를 거부하겠다. 신문 요지를 받아보니 대부분 내 형사재판과 직결돼 있는 내용이라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진실 그대로 증언하겠다. 다만 국정원법에 제한이 있거나 구금 중 자료를 얻지 못한 부분은 (답변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과거 국회에서 증인선서와 관련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9년 12월31일 ‘5공 비리 청문회’ 증인으로 나온 전두환 전 대통령은 증언대에 나가 손을 들지 않은 채 선서해, 선서 인정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나마 전 전 대통령은 질문도 받지 않은 채 준비한 답변서만 읽어내려가는 데 그쳐, 야당 의원들로부터 “질문도 없이 답변을 하느냐”는 질책을 들었다. 그러나 원세훈·김용판 증인처럼 아예 선서를 거부한 것은 국정조사 사상 처음이다. 국회증언법 8조는 증인이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진술이나 서면 답변에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서합니다”라는 내용이 기재된 선서를 하도록 규정한다. 김 전 청장과 원 전 원장은 ‘위증의 벌’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진술이 나중에 허위로 드러나는 경우에도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한 것이란 풀이도 가능하다.
두 사람은 “형사소송법 제148조 또는 제149조의 규정에 해당하는 경우에 선서·증언 또는 서류 제출을 거부할 수 있다”고 한 국회증언법 3조를 인용했다. 형사소송법 148조에는 본인이 공소 제기를 당했으면 증언을 거부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국회의 국정조사라 하더라도, 일종의 ‘무죄 추정의 원칙’을 보장한 셈이다.
청문회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국조특위) 여당 간사인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은 “민주당은 입만 열면 인권, 인권 하며 전가의 보도로 무죄 추정 원칙을 주장하더니 이번에는 유죄 추정 원칙을 들고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 민주당 소속인 신기남 위원장이 모두발언에서 검찰의 공소장을 근거로, “이번 사건은 대한민국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크게 뒤흔든 헌정질서 파괴 행위라는 것이 국민 대다수 여론이다. 검찰 수사 결과만 봐도 김용판 전 청장이 대선 당시 직권남용해 선거에 불법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며 김 전 청장의 혐의를 확정시한 것을 비꼰 것이다.
이전 증인 선서 거부자는 김기춘 비서실장
김용판·원세훈 두 증인의 증인선서 거부에 법리적 문제는 없다. 2004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대선자금 청문회에서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도 수사기관의 독립성 유지를 이유로 여야 동의 아래 선서를 하지 않은 채 수사 상황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김용판·원세훈 두 사람에 대해선, 성실한 진술을 회피하는 태도라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김용판 전 청장에게 “본인이 떳떳하면 왜 증인선서를 못하는가.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얼마나 거짓말을 하면 선서를 못하나”라고 했다. 김 전 청장은 “저는 경찰 생활을 통해서 언제나 떳떳하고 당당했다고 자부해왔다. 하지만 기소되는 과정을 통해서 내 스스로 떳떳하고 당당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헌법 기본권인 방어권 차원에서 선서를 거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라고 답했다. 다른 대목에선 “공소장을 보면서 실체적 진실과 다르게 사람이 해석되고 왜곡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세상 무섭다”고도 했다. 김 전 청장은 청문회 내내 이따금씩 뜻모를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보였다.
▲ 15일 서울 종로 보신각 인근에서 한국 진보연대,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등 진보단체 회원들이 8.15 자주통일대회 정리 집회를 열며 도로를 점거하자 경찰이 물대포로 해산을 시도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
이날 야당이 이번 국정조사 두 핵심 증인의 증인선서 거부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기선제압’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전례에 비춰봐도 그렇다. 1989년 9월23일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장에 나온 김기춘 당시 검찰총장(현 청와대 비서실장)은 모두발언에서 “수감기관의 장으로서 증인선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야당 의원들이 즉각 국회 모독이라며 일제히 반발하면서 국정감사 자체가 중단되는 사태로 치달았다. 결국 김기춘 당시 총장은 나중에 선서를 해야 했다.
그러나 8월16일 청문회에서 김용판 전 청장의 증인선서 거부 선언에 대한 야당의 반응은 달랐다. 민주당 소속인 신기남 위원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증언은 하되, 선서를 거부하는 건가”를 물었고, 김 전 청장은 “원칙적으로는 거부하지만, 질의 성격에 따라 답변하겠다”고 답했다. 곧 ‘입맛에 맞는 질문에만 답변하겠다’는 선언이었음에도, 야당 의원들은 회의 진행에 토를 달지 않았다.
야당의 준비 부족에 대한 질책도 나온다. 김민기 민주당 의원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지난해 12월15일 김 전 청장과의 점심식사 배석자에 대한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으나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했다. 의도가 모호한 질문도 나왔다. 야당 간사인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김 전 청장에게 “지금 앉아 있는 심정이 어떤가”를 물었고, “특별한 감정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원세훈 전 원장에겐 “서울 구치소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나” “정권이 바뀌고 토사구팽당했다는 억울한 심정은 없나” “박근혜 정부에 대해 서운한 감정은 없나” 등을 연달아 물었지만 뾰족한 답변을 얻지 못했다.
“우리 증인”? 김용판 국선변호인?
충분한 답변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상대방의 말을 끊고 윽박지르다 정작 필요한 진술을 놓친 것으로 보일 법한 상황도 있었다. 박범계 민주당 의원은 김용판 전 청장에게 박원동 국정원 전 국익정보국장과의 통화 내용에 대해 질문했으나, 정작 김 전 청장이 통화 내용을 설명하던 도중 말을 끊어버렸다. 전반적으로 야당 의원들은 검찰의 공소장 내용을 기반으로 공세를 펼치고자 했지만, 원세훈·김용판 두 증인이 검찰 공소 내용을 ‘전면 부인’하며 결백을 주장하는 바람에 다소 맥이 빠진 모습이었다.
반면 새누리당은 ‘매관매직’ ‘정치공작’ ‘여직원 감금’ 등 국정조사 이전부터 주력해온 열쇳말에 집중하면서 두 증인을 적극 옹호했다. 이장우 의원은 김용판 전 청장과 원세훈 전 원장에게 차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죠?” “요즘 잠이 옵니까?” “참말로 억울하죠?”라는 질문을 던진 뒤, “세상 살면서 가장 힘든 게, 억울한 일 당했을 때는 잠이 안 온다. 저 같아도 억울할 것 같아요”라며 증인들을 두둔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검찰 기소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질의하자, 원세훈 전 원장은 “선거에 개입하려고 했으면 댓글 몇 개 쓰라고 지시했겠느냐”고 맞장구를 쳤다. 김태흠 의원은 “재판 중인 사안에 대해 국정조사를 실시해 정쟁을 벌이는 게 부끄럽다”고 말했다.
경대수 의원은 증인선서 거부에 대해 “증언을 했는데 의원들과 다른 견해를 밝히면 사실과 다르다고 위증을 추궁할 것으로 예상했나? 그래서 선서를 거부한 건가?”라며 증인들의 입장을 대놓고 대리하고 나섰다. 여당 간사인 권성동 의원 등은 증인들을 부를 때 “우리 증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시사평론가 유창선씨는 트위터에서 “권성동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김용판 국선변호인인 듯”이라고 꼬집었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질문에 증인들이 비교적 고분고분하게 답변하면서 새로운 진술이 나오기도 했다. “왜 (대선 사흘 전인) 12월16일 밤 11시에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느냐”는 김도읍 새누리당 의원의 질문에, 김용판 전 청장은 “발표하지 않았다면, 몇몇 언론이 특종을 할 것이라는 정황이 포착됐다고 보고받았다”고 답했다. 결국 언론의 특종 보도를 막기 위해 경찰이 앞서 발표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경찰 수사가 축소·은폐된 것을 밝혀낸 검찰 수사에 대해선 “공소 내용 전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깎아내렸다.
증인들의 답변 거부와 새누리당의 노골적인 증인 감싸기 속에서 ‘국정원 선거 개입 국정조사’ 1차 청문회는 뚜렷한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오히려 피고인들이 공소장을 전면 부인하고 나서면서 체면을 구긴 검찰에게, 재판 과정에서 밝혀내야 할 숙제만 잔뜩 떠안긴 셈이 됐다. 국정조사 전체 일정은 8월23일 마무리된다.
검찰, 숙제만 잔뜩 안아
주목되는 것은 민심의 향배다. 원세훈·김용판 두 핵심 증인이 8월16일 청문회에서 증인선서를 하지 않는 등 ‘안하무인’성 태도를 보인 데 분노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촛불집회 규모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불어나는 촛불에 기름을 끼얹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청문회 하루 전인 8월15일,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으로 시위 진압에 물대포가 사용되는 등 경찰이 각종 시위에 대해 강경 대응으로 방향을 잡은 상황에서, 시위가 격화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조심스레 제기된다. 한 누리꾼(@slo****)은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원세훈·김용판 하는 짓 보니 이 정부가 국민을 아주 열받게 해서 화염병이나 죽창을 들게 하려는 모양이네. 그러고 나선 계엄령이라도 내려야 유신의 추억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가?”
출처 : [한겨레21] “두 증인은 촛불 방화범임을 선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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