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박살 낼 진짜 '폭탄'은 ○○다!
[박권일의 '소셜 맥거핀'] 세상이 이 꼴인 게 누구 탓인가?
[프레시안] 박권일 <자음과모음 R> 편집위원·<88만 원 세대> 저자 | 기사입력 2012-03-05 오전 8:19:12
'정치는 갈등을 다루는 기예(art)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주장이다. 물론 정치에는 그런 측면이 있다. 우리는 정치를 거의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정치가들을 몇 알고 있다. 그것이 지나친 과장에 불과할지라도, 분명 첨예한 갈등을 효과적으로 봉합하고 통제하는데 재능을 발휘한 인물들은 역사적으로 적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훨씬 설득력이 있고 신뢰가 가는 사람이 있다. 막스 베버가 말한 '카리스마적 지도자'도 결국 이런 능력이 출중한 리더를 가리킨다. 그런데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이유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부재하기 때문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던 시기는 힘없는 민초들에게 재앙이었던 적이 더 많았다. '난세에 영웅 난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대표 격인 인물이지만 과연 그의 시대가 독일의, 나아가 유럽의 인민들에게 행복했던 시기였던가.
나는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게 썩은 정치인들이나 천인공노할 악의 세력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카리스마적 리더가 나타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세상이 이 꼴인 이유를 특정한 주체에게 돌리는 것은 언제나 난센스다. 순결한 민중, 무구한 대중이란 표상 역시 난센스인 건 마찬가지다.
특정한 인격에게 사회가 망가진 책임을 모조리 덮어씌우는 것은 우리가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무지하고 뻔뻔해서다. 실은 우리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인류가 다다른 생태 위기야말로 그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우리 모두가 개새끼"라는 식의 양비론적 결론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서론이다. 거기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이 연재 '소셜 맥거핀'은 일종의 '지도 그리기'다.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지형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 갈등은 여기서 '적대(hostility)'라 표현된다. 적대라는 말이 드러내는 것처럼 그 갈등은 때때로 사생결단의 싸움을 가리킨다. 그 물리적 극단은 아마도 전쟁일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가 발달시켜온 제도적 장치를 통해 그런 적대를 중화(neutralization)시키지만, 날것 그대로의 적대가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때도 있다. 아무튼 이 모든 '힘의 부딪힘'이 바로 적대이다. 우리가 처한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대가 어떻게 발생하고 어디서 첨예화되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인지적 자원을 끊임없이 소모해야 한다. 이런 '자기 계몽(Self-Enlightenment)'의 수고로움 없이 누군가에게 그 판단을 위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히틀러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지도자의 모습으로 다시 현현할 것이다. 편의상 적대를 네 가지 차원으로 구별할 것이다. 가짜 적대와 진짜 적대, 그리고 낡은 적대와 새로운 적대.
이런 구분이 즉각 인식론적 의문을 불러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대체 진짜 적대와 가짜 적대를 판단하는 초월적 존재는 누구란 말인가? 또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경계는 어디인가? 하지만 이 글은 철학적, 방법론적 정당성을 다투는 글이 아니다. 저 개념들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 벌어지는 사건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일 뿐, 저 개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사회라는 근거가 필요한 건 아니다.
물론 이에 대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논의의 효율을 위해 개념의 철학적 정합성 문제는 괄호 치기로 한다. 뒤에 기회가 된다면 보론의 형태로 인식론적 문제를 다룰 수도 있겠다.
가짜 적대의 '가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 '거짓' 등의 의미라기보다 '사이비(pseudo)'라는 의미이다. 즉, 가짜 적대는 사이비 적대이다. 진짜 같지만 진짜가 아닌 적대. 이에 대한 탁월한 영화적 비유가 있다. 바로 이 연재의 이름에 차용한 '맥거핀(Macguffin)'이 그것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맥거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스코틀랜드 행 열차를 타고 가다가 한 사람이 선반에서 짐을 발견한다. "저게 뭐요?" "아, 그거 맥거핀입니다." "맥거핀이 뭐죠?" "스코틀랜드 고지대에 사는 사자를 잡기 위한 도구죠." "스코틀랜드 고지대엔 사자가 없는데요?" "음, 그렇다면 맥거핀은 아무 것도 아니군요."
맥거핀은 영화의 줄거리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관객의 눈을 잡아끌며 긴장을 고조시킨다. 이를테면 관객들은 알고 있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까맣게 존재를 모르는 탁자 밑의 시한폭탄이 맥거핀이다. 이 폭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계속 카메라에 잡히고 째깍째깍 시계도 돌아간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폭발하지 않는다.
가짜 적대, 사이비 적대는 실제로 작동하지 않지만 마치 작동하는 것처럼 연출되는 적대라는 점에서,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정의하자면 소셜 맥거핀은 사회에 현존하는 적대들을 은폐, 왜곡하는 사이비 적대이다.
소셜 맥거핀은 크게 두 가지 패턴으로 발생한다. 먼저 지배 세력이 의도적으로 여론 조작이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획책하는 경우. 정당성 없는 권력이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한 고전적인 수법이다. 계획된 음모이기 때문에 증거나 증언만 확보하면 전말을 밝혀내기도 쉽다.
다른 하나의 패턴은 좀 까다로운 형태다. 특정 세력의 음모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사이비 적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적대는 과열된 형태로 폭발하지만 실제로 사회적 단층선이 자리한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왜곡된 형태로 분출된다. 소위 대중 지성의 시대라 불리는 오늘날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런 소셜 맥거핀은 '계몽된 대중'이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스스로 재구성하는 일종의 '과잉 현실(hyper reality)'이다.
첫 번째 형태의 소셜 맥거핀 사례로 '차지철 파병 반대 사건'이 있다.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파병이 본격화하던 무렵인 1965년, 국회의원이었던 차지철이 느닷없이 베트남 파병 반대에 나섰다. 당시 국회 상정된 증파 안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공화당 국회의원이 차지철이었다.
차지철이 어떤 인물인가. 박정희 측근 중의 측근이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했지만 실상은 허탈했다. 박정희가 측근인 차지철에게 파병 반대 '쇼'를 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파병 반대 여론이 비등하다는 핑계로 미국으로부터 좀 더 많은 걸 얻어내려는 '꼼수'였다. 이런 식으로 없는 내부 갈등을 있는 것처럼 연출하는 것은 박정희의 특기였는데, 1963년 3월의 소위 '군 일부 쿠데타 음모 사건'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박정희가 민간인 정치 해금을 추진하려하자 군 일부가 반발해 박정희를 죽이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것은 박정희가 이른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 위한 명분 쌓기 용도였다. 박정희가 실제로 살해될 뻔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노무현 정부 시기에도 소셜 맥거핀이 있었다. 역시 파병 건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유시민의 행보는 차지철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어떤 때는 대통령의 대미 협상 부담을 덜기 위해 국민들이 파병에 반대해줘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후에는 "네오콘의 보복" 운운하며 파병에 찬성한다.
유시민이 생산한 소셜 맥거핀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반대 여론의 국면에 따라 이라크 파병 반대와 찬성을 지속적으로 오락가락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인의 생명과 김선일 씨의 죽음을 놓고 반전 평화 세력이 그은 전선을 집요하게 교란시켰다.
다른 소셜 맥거핀 사례로는 황우석 사태 당시 <중앙일보> 의학 전문 기자 홍혜걸의 "국론통일" 주장이 있다.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홍 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난 해 기자는 영국 학술 잡지 <네이처>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황우석 교수의 업적보다 난자의 출처가 궁금했던 것이다. 겉으론 생명 윤리를 내세우지만 속으론 연구진에 대한 흠집 내기 의도가 역력해 보였다. (…) 우리가 뿌린 씨앗인데 남들에게 열매를 빼앗길 수 없다. 먼저 분열된 국론을 통일해야 한다."
이를테면 '선진국이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질투해서 황우석 흠집 내기에 나선다'는 식의 논리였다. 홍혜걸은 황우석을 둘러싼 한국과 선진국 사이의 가짜 적대를 설정해 사람들의 민족주의와 경쟁심을 자극했고 실제로 이 칼럼은 큰 반향을 불러왔다. 홍혜걸이 특별히 독특한 생각을 가져서가 아니었다. 대중들 역시 그런 적대를 이미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 대한민국 박살 낼 진짜 '폭탄'은 ○○다!
[박권일의 '소셜 맥거핀'] 세상이 이 꼴인 게 누구 탓인가?
[프레시안] 박권일 <자음과모음 R> 편집위원·<88만 원 세대> 저자 | 기사입력 2012-03-05 오전 8:19:12
'정치는 갈등을 다루는 기예(art)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주장이다. 물론 정치에는 그런 측면이 있다. 우리는 정치를 거의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정치가들을 몇 알고 있다. 그것이 지나친 과장에 불과할지라도, 분명 첨예한 갈등을 효과적으로 봉합하고 통제하는데 재능을 발휘한 인물들은 역사적으로 적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훨씬 설득력이 있고 신뢰가 가는 사람이 있다. 막스 베버가 말한 '카리스마적 지도자'도 결국 이런 능력이 출중한 리더를 가리킨다. 그런데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이유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부재하기 때문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던 시기는 힘없는 민초들에게 재앙이었던 적이 더 많았다. '난세에 영웅 난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대표 격인 인물이지만 과연 그의 시대가 독일의, 나아가 유럽의 인민들에게 행복했던 시기였던가.
나는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게 썩은 정치인들이나 천인공노할 악의 세력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카리스마적 리더가 나타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세상이 이 꼴인 이유를 특정한 주체에게 돌리는 것은 언제나 난센스다. 순결한 민중, 무구한 대중이란 표상 역시 난센스인 건 마찬가지다.
▲ "특정한 인격에게 사회가 망가진 책임을 모조리 덮어씌우는 것은 우리가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무지하고 뻔뻔해서다." ⓒ프레시안(손문상) |
이 연재 '소셜 맥거핀'은 일종의 '지도 그리기'다.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지형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 갈등은 여기서 '적대(hostility)'라 표현된다. 적대라는 말이 드러내는 것처럼 그 갈등은 때때로 사생결단의 싸움을 가리킨다. 그 물리적 극단은 아마도 전쟁일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 우리는 현대 민주주의가 발달시켜온 제도적 장치를 통해 그런 적대를 중화(neutralization)시키지만, 날것 그대로의 적대가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때도 있다. 아무튼 이 모든 '힘의 부딪힘'이 바로 적대이다. 우리가 처한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대가 어떻게 발생하고 어디서 첨예화되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인지적 자원을 끊임없이 소모해야 한다. 이런 '자기 계몽(Self-Enlightenment)'의 수고로움 없이 누군가에게 그 판단을 위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히틀러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지도자의 모습으로 다시 현현할 것이다. 편의상 적대를 네 가지 차원으로 구별할 것이다. 가짜 적대와 진짜 적대, 그리고 낡은 적대와 새로운 적대.
이런 구분이 즉각 인식론적 의문을 불러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대체 진짜 적대와 가짜 적대를 판단하는 초월적 존재는 누구란 말인가? 또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경계는 어디인가? 하지만 이 글은 철학적, 방법론적 정당성을 다투는 글이 아니다. 저 개념들은 한국 사회에서 지금 벌어지는 사건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일 뿐, 저 개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사회라는 근거가 필요한 건 아니다.
물론 이에 대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고,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논의의 효율을 위해 개념의 철학적 정합성 문제는 괄호 치기로 한다. 뒤에 기회가 된다면 보론의 형태로 인식론적 문제를 다룰 수도 있겠다.
가짜 적대의 '가짜'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 '거짓' 등의 의미라기보다 '사이비(pseudo)'라는 의미이다. 즉, 가짜 적대는 사이비 적대이다. 진짜 같지만 진짜가 아닌 적대. 이에 대한 탁월한 영화적 비유가 있다. 바로 이 연재의 이름에 차용한 '맥거핀(Macguffin)'이 그것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맥거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스코틀랜드 행 열차를 타고 가다가 한 사람이 선반에서 짐을 발견한다. "저게 뭐요?" "아, 그거 맥거핀입니다." "맥거핀이 뭐죠?" "스코틀랜드 고지대에 사는 사자를 잡기 위한 도구죠." "스코틀랜드 고지대엔 사자가 없는데요?" "음, 그렇다면 맥거핀은 아무 것도 아니군요."
맥거핀은 영화의 줄거리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관객의 눈을 잡아끌며 긴장을 고조시킨다. 이를테면 관객들은 알고 있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까맣게 존재를 모르는 탁자 밑의 시한폭탄이 맥거핀이다. 이 폭탄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계속 카메라에 잡히고 째깍째깍 시계도 돌아간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폭발하지 않는다.
가짜 적대, 사이비 적대는 실제로 작동하지 않지만 마치 작동하는 것처럼 연출되는 적대라는 점에서, '소셜 맥거핀(social macguffin)'이라 이름 붙일 수 있다. 정의하자면 소셜 맥거핀은 사회에 현존하는 적대들을 은폐, 왜곡하는 사이비 적대이다.
소셜 맥거핀은 크게 두 가지 패턴으로 발생한다. 먼저 지배 세력이 의도적으로 여론 조작이나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획책하는 경우. 정당성 없는 권력이 피지배 계급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한 고전적인 수법이다. 계획된 음모이기 때문에 증거나 증언만 확보하면 전말을 밝혀내기도 쉽다.
다른 하나의 패턴은 좀 까다로운 형태다. 특정 세력의 음모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사이비 적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적대는 과열된 형태로 폭발하지만 실제로 사회적 단층선이 자리한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왜곡된 형태로 분출된다. 소위 대중 지성의 시대라 불리는 오늘날 더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런 소셜 맥거핀은 '계몽된 대중'이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스스로 재구성하는 일종의 '과잉 현실(hyper reality)'이다.
첫 번째 형태의 소셜 맥거핀 사례로 '차지철 파병 반대 사건'이 있다.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파병이 본격화하던 무렵인 1965년, 국회의원이었던 차지철이 느닷없이 베트남 파병 반대에 나섰다. 당시 국회 상정된 증파 안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공화당 국회의원이 차지철이었다.
차지철이 어떤 인물인가. 박정희 측근 중의 측근이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했지만 실상은 허탈했다. 박정희가 측근인 차지철에게 파병 반대 '쇼'를 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파병 반대 여론이 비등하다는 핑계로 미국으로부터 좀 더 많은 걸 얻어내려는 '꼼수'였다. 이런 식으로 없는 내부 갈등을 있는 것처럼 연출하는 것은 박정희의 특기였는데, 1963년 3월의 소위 '군 일부 쿠데타 음모 사건'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박정희가 민간인 정치 해금을 추진하려하자 군 일부가 반발해 박정희를 죽이려 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것은 박정희가 이른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 위한 명분 쌓기 용도였다. 박정희가 실제로 살해될 뻔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노무현 정부 시기에도 소셜 맥거핀이 있었다. 역시 파병 건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유시민의 행보는 차지철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어떤 때는 대통령의 대미 협상 부담을 덜기 위해 국민들이 파병에 반대해줘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 후에는 "네오콘의 보복" 운운하며 파병에 찬성한다.
유시민이 생산한 소셜 맥거핀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반대 여론의 국면에 따라 이라크 파병 반대와 찬성을 지속적으로 오락가락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인의 생명과 김선일 씨의 죽음을 놓고 반전 평화 세력이 그은 전선을 집요하게 교란시켰다.
다른 소셜 맥거핀 사례로는 황우석 사태 당시 <중앙일보> 의학 전문 기자 홍혜걸의 "국론통일" 주장이 있다.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홍 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난 해 기자는 영국 학술 잡지 <네이처>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황우석 교수의 업적보다 난자의 출처가 궁금했던 것이다. 겉으론 생명 윤리를 내세우지만 속으론 연구진에 대한 흠집 내기 의도가 역력해 보였다. (…) 우리가 뿌린 씨앗인데 남들에게 열매를 빼앗길 수 없다. 먼저 분열된 국론을 통일해야 한다."
이를테면 '선진국이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질투해서 황우석 흠집 내기에 나선다'는 식의 논리였다. 홍혜걸은 황우석을 둘러싼 한국과 선진국 사이의 가짜 적대를 설정해 사람들의 민족주의와 경쟁심을 자극했고 실제로 이 칼럼은 큰 반향을 불러왔다. 홍혜걸이 특별히 독특한 생각을 가져서가 아니었다. 대중들 역시 그런 적대를 이미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 대한민국 박살 낼 진짜 '폭탄'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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