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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한국, ‘종북’ 깜빡이 켜고 거대한 ‘우회전’

한국, ‘종북’ 깜빡이 켜고 거대한 ‘우회전’
[시사IN 314호] 천관율 기자 | 승인 2013.09.30 08:19:29


9월4일.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반대 14표, 기권 11표, 무효 6표였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반대는 대놓고 종북, 기권도 사실상 종북, 무효는 은근슬쩍 종북. 대한민국 국회에 종북 의원이 최소 31명”이라고 트위터에 썼다.

9월4일. 고려대학교는 이과대·정경대 학생회와 참여연대가 공동 주최하는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강연회에 대한 대관 허가를 돌연 취소했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강연은 허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표 전 교수는 고려대 야외광장에서 강연했다.

9월6일. 경희대에서 마르크스 이론을 강의하는 임승수씨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반미사상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국가정보원에 신고를 당했다. 신고자는 이 학교 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신고 사실을 학교 측에도 알렸다.


9월7일. 극장 체인 메가박스는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의혹을 다룬 다큐멘터리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을 중단한다고 배급사에 일방 통보했다. 개봉 이틀 만이었다. 메가박스는 보수 단체 등의 항의시위 압력을 이유로 들었지만, 해당 단체가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9월9일. 민주당 조경태 최고위원은 체포동의안 반대·기권표를 문제 삼고 나섰다. “이석기 체포동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의원이 있다면 무기명 비밀투표 뒤에 숨지 말고 당당하게 나서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빨리 커밍아웃해야 한다.” 민주당은 벌집을 쑤신 꼴이 되었다. 초선 의원들은 최고위원직 사퇴를 요구했다. 새누리당에서는 김진태 의원이 이 발언을 치켜세웠다.


숨 가쁘게 분출하는 우경화 징후들

9월11일. 식민통치 미화, 우편향 사관, 기본적인 사실관계 오류로 논란이 된 교학사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 그 집필자 가운데 한 명인 이명희 공주대 교수가 새누리당 의원들의 초청을 받은 자리에서 작심한 발언을 쏟아냈다. “좌파가 교육계·언론계의 70%, 예술계의 80%, 출판계의 90%, 학계의 60%, 연예계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했다.” “한국의 주류 세력이란 여기 있는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새누리당 의원들의 열띤 호응이 이어졌다.

거대한 우회전이 시작됐다. 사회 곳곳에서 우경화의 징후들이 숨 가쁘게 분출한다. 야당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대학과 기업도 속절없이 쓸려간다. 자생적인 ‘백색테러’는 현실적인 위협이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 강의실에서 이뤄지는 학문적 논의조차 국가보안법을 걸고 보는 분위기가 되었다.

대선 개입, 남북 정상회의록 무단 공개, 이석기 녹취록 카드 등을 연달아 내놓으며 돌연 정치의 중심으로 뛰어든 국정원은, 2013년의 우회전을 만들어낸 일등 공신이다. 의미심장한 장면 하나. 9월6일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의혹 보도가 터지자마자 정치권의 관찰자들은 조건반사로 국정원을 주목했다. 이제는 다들 당연한 듯이 국정원을 국내 정치의 ‘플레이어’로 간주한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 단계는 지났다고 믿었던 이들에게는 당혹스러운 반전이다.

‘한국 사회, 신뢰를 묻다-<시사IN> 신뢰도 조사’는 이런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시사IN>은 창간 당시부터 신뢰가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고 신뢰 수준이 낮은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대통령·국가기관·언론 매체의 신뢰도를 묻는 조사를 진행해왔다. 5회째를 맞이하는 이번 조사 결과에는 한국 사회의 거대한 우회전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대통령·여당·보수 언론의 신뢰도가 상승했고, 전직 대통령 신뢰도 순위도 보수 우위로 뒤바뀌었다.

먼저, 박근혜 대통령과 주요 정당에 대해 얼마나 신뢰하는지, 0점에서 10점까지 점수를 매겨달라고 했다(<표 1>). 박근혜 대통령 신뢰도는 6.59점. 조사가 시작된 이후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과거 조사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5점을 넘긴 적이 없다. 이 전 대통령은 2009년 4.31점, 2010년 4.97점, 2012년 3.95점이었다. 박 대통령 신뢰도는 새누리당 지지층에서 8.18점으로 매우 높았고,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4.88점으로 안정적인 수준을 보였다.


정당 신뢰도에서도 새누리당이 약진했다. 5.20점을 기록해, 지난해 4.18점보다 1.02점이 올랐다. 반면 민주당은 3.94점으로 지난해(4.08점)보다 미세하게 떨어졌다. 이석기 사건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통합진보당은 1.44점.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나왔다. 비례대표 경선 부정 의혹과 당 대회 폭력사태로 얼룩진 지난해의 2.14점보다도 더 떨어진 결과다. 또 하나의 진보 정당인 정의당도 유탄을 맞았다. 1.86점.


박 대통령 신뢰도, 집권 후 크게 상승

대선 승리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정쟁에서 한 발 떨어진 국가 지도자의 모습을 즐겨 연출했다. 유권자의 신뢰도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표 2>). 대통령이 된 이후 신뢰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물었더니, ‘변화 없다’가 48.7%로 가장 많은 가운데, ‘대통령이 된 후에 더 신뢰가 높아졌다’가 36.7%였다. ‘대통령이 되기 전이 더 신뢰가 높았다’라는 응답은 14.2%.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응답이 부정적으로 변했다는 응답보다 2.5배가량 많다.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긍정 변화(31.2%)가 부정 변화(17.9%)보다 높게 나왔다.

<표 3>은 각종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도를 10점 만점으로 물은 결과다. 박근혜 대통령 신뢰도와 연계되어, 청와대가 1위를 차지했다(5.72점). 역시 조사 이후 최초다.

대통령 신뢰도 상승은 국가기관 전반의 신뢰도를 동반해 끌어올렸다. 조사 대상 모든 국가기관의 신뢰도가 상승했다. 대법원(5.27점)과 경찰(5.17점)에 대한 신뢰도도 비교적 높았다. 감사원(4.95점)과 국세청(4.94점)과 검찰(4.85점) 등 사정·감찰 기관들은 보통 정도의 신뢰도를 기록했다. 대체로 새누리당 지지층은 5점대, 민주당 지지층은 4점대 신뢰도를 매겼다.

올해 내내 논란의 중심에 있는 국정원은 4.36점을 기록했다. 지난해보다 0.08점 올랐다. 다른 국가기관들에 견줘 상승폭이 가장 낮다. 국정원은 여야 지지자들 사이에 신뢰 여부가 가장 극명하게 나뉜 기관이기도 하다. 민주당 지지층은 2.90점으로 모든 기관 중 최하점을 주었다. 새누리당 지지층은 5.77점으로 신뢰를 보냈다. 검찰·감사원·국세청·국회보다 높다. 국정원이 정치의 중심에 섰다는 방증이다. 이런 종류의 조사에서 단골로 최하위를 기록하는 국회는, 지난해에 비해 0.81점이 올랐지만 여전히 꼴찌다.

전반적 우경화 경향이 반영된 듯, 전직 대통령 신뢰도 순위도 지난해와 뒤바뀌었다(<표 4>). 가장 신뢰하는 전직 대통령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37.3%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았다. 지난해 대비 4.4%포인트 늘었다.

지난해 선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28%. 지난해보다 5.7%포인트가 빠진 2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뒤를 이었다. 14.9%. 2012년에는 진보·개혁 성향의 두 대통령을 첫손에 꼽은 응답자가 절반을 넘겼다(노무현 33.7%, 김대중 18.1%, 합계 51.8%). 올해는 이 합계가 42.9%로 주저앉았다.

언론 신뢰도 질문에도 보수화·우경화 경향이 드러났다. KBS와 MBC가 뚜렷한 신뢰도 상승을 보여주었다. 반면 <한겨레>는 신뢰도 하락이 두드러졌다(30~31쪽 기사 참조).


“공동체 쇠퇴하면 우경화 나타나”


어느 지표를 보아도 우경화 흐름은 뚜렷하다. 원인이 뭘까. 정치학 박사인 박상훈 대표(후마니타스 출판사)는 “우경화라기보다는, 집권 1년차 현상으로 보는 게 맞다. 아직까지는 이걸 과장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다. 집권 1년차에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많은 정권과 보수 블록이 활기를 띠는 바람에 ‘오른쪽’이 두드러져 보일 뿐, 사회 전체가 우경화한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공동체’의 갑갑한 사정이 우경화를 이끌고 있다는 진단도 있다. 서울대 최갑수 교수(서양사)는 “원래 진보라는 건 미래에 대한 비전이다. 공동체가 쇠퇴한다는 느낌을 사람들이 공유하게 되면 극우화·우경화가 나타나기 쉽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조사 결과도 있다. 9월5일 한국소비자원은 ‘2013년 한국 소비생활지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는 응답은 62.5%였는데, 이는 1994년 이 조사를 시작한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중산층 체감률’은 외환위기 때인 1997년 조사에서도 71.1%였고, 그동안 한 번도 60%대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자신이 하류층이라고 생각하는 비율도 34.8%. 역시 조사 시작 이후 처음으로 30%를 돌파했다. 중산층 체감률이 떨어지고 하류층 체감률이 오른다는 것은 ‘가라앉는 공동체’의 일반적인 징후다. 우경화를 불러오기 좋은 토양인 셈이다.

이번 <시사IN> 신뢰도 조사 결과에 나타난 우경화 경향을 좀 더 정밀하게 살펴보기 위해, 서울대 장덕진 교수(사회학과)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조남운 박사에게 상세 분석을 의뢰했다.

조남운 박사는 이번 신뢰도 조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결과인 언론 매체 신뢰도를 분석한 결과(특히 KBS 신뢰도의 약진을 분석한 결과), 박근혜 대통령 신뢰도 증가만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박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 증가 그룹(<표 2> 참조)이 KBS의 신뢰도를 직접 끌어올리는 효과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 KBS의 신뢰도를 끌어올렸을까. 조 박사는 ‘이석기 내란음모’ ‘국정원 선거 개입’ ‘정상회의록 NLL 포기 여부’에 대한 질문에 주목했다(해당 질문에 대한 결과 분석은 28~29쪽 관련 기사). 즉, 이 세 질문에서 국정원을 신뢰하는 그룹과 불신하는 그룹을 추출해 분석해 보니, 국정원 신뢰 그룹이 KBS의 신뢰도를 결정적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장덕진 교수는 이 결과를 이렇게 해석했다. “내란음모 사건, NLL 논란 등 일련의 북한 관련 이슈가 여론을 뒤덮는 데 성공했다. 북한을 선명한 적으로 세워두고 박근혜 대통령은 거기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사람으로, 박근혜를 비판하는 사람은 나라를 지킬 의지가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프레임이 먹히고 있다. 이 프레임에서는 북한·종북 관련 보도를 보수적으로 할수록 신뢰도가 상승할 것이다.”


북한의 귀환과 ‘네오 레드 콤플렉스’

공론장 한가운데 돌연 ‘북한’이 부활한 것이다. ‘공공의 적’인 북한을 얼마나 강하게, 열렬히 때리는가가 신뢰의 척도가 되었다.

익숙한 얘기 같지만, 두 가지가 새롭다. 첫째, 한동안 북한 관련 공세는 정치의 전면에서 퇴장하는 추세였다. 강경 보수층은 결집시킬 수 있어도, 선거 결과를 좌우하는 중간층은 오히려 진저리를 내는 이슈가 색깔론이었다. 2002년 대선의 실패를 마지막으로, 새누리당은 북한 이슈를 선거 쟁점으로 들고 나서는 데 소극적이었다. 박근혜 후보 역시 지난해 대선을 경제민주화 등 ‘좌클릭 의제’로 치렀다. 그렇게 서서히 찬밥 취급을 받던 북한 이슈가 올해 들어 일련의 국정원 개입과 더불어 극적으로 부활한 것이다.

둘째, 20세기에 기승을 부렸던 레드 콤플렉스가 주적 북한에 대한 공포였다면, 2013년에 찾아온 ‘네오 레드 콤플렉스’는 공포보다는 한심함과 냉소의 뉘앙스가 더 강하다. 호칭의 변화는 의미심장하다. 보수가 친북이라는 낙인을 찍는 방법은 ‘빨갱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에서 ‘종북’이라는 경멸적 호칭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분출하는 우경화 흐름이 단순한 집권 1년차 현상으로 그칠지, 저성장·저출산·고령화와 맞물리며 장기 추세로 고착될지, 지금 예측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이번 조사에서 징후가 발견된 ‘네오 레드 콤플렉스’가 어느 정도 생명력을 가질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우파가 활보할 공간이 꽤 넓을 것이라는 점은 이번 조사 결과가 선명하게 보여준다.


출처 : 한국, ‘종북’ 깜빡이 켜고 거대한 ‘우회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