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만철 가족 귀순'의 진실, 모두 부인하는 국정원의 궤변
[取중眞담] 설명·사과·변명하지 않는 '정보기관 3불(不) 원칙' 유감
[오마이뉴스] 김도균 | 14.02.27 11:03 | 최종 업데이트 14.02.27 11:03
"관련 내용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국가정보원(아래 국정원) 관계자의 답변은 미리 예상을 하던 터였지만, 허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25일 <오마이뉴스>는 지난 1994년 4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만철씨 일가족 망명사건(관련기사 : 20년만에 밝혀진 '여만철 가족 귀순사건' 진실)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보도했습니다.
저는 기사에서 식량난으로 북한을 탈출한 여씨 일가족이 국내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아래 안기부)가 개입하여, 이들을 다시 국외로 내보냈다가 재입국시키면서 정보조작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20년 만에 당사자의 입을 통해 처음 드러난 이야기였고,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탈북자의 관련 증언도 확보해 기사를 썼습니다.
지난 주말 취재를 마치고 24일 오전 국정원에 사실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만 하루가 지나도록 국정원의 답변은 오지 않았고, 25일 오후 기사는 배치됐습니다. 그리고 기사가 배치되고도 반나절이 훌쩍 지난 26일 오전 국정원 관계자는 기사 내용을 모두 부인하는 취지의 답변을 해왔습니다.
'3불 원칙'에 충실한 정보기관의 답변
기자 생활을 하다 보면 가장 막막할 때 중의 하나가 바로 정보기관을 상대할 때입니다.
나름대로 충실히 취재하고 거의 사실임이 확실해 보여도 정보기관 관계자들의 답변은 십중팔구 "확인해 줄 수 없다"거나 "사실이 아니다"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설명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는다'는 정보기관의 이른바 3불(不)원칙에 충실한 답변이지요.
사실 전 세계 220여 개 국가 중 비밀 정보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국제사회의 무한경쟁 속에서 국가이익을 수호하는 최첨병의 역할을 해야 하기에, 합법과 탈법의 경계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정보기관의 속성은 본질적으로 폐쇄적일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본연의 사명으로 삼는 언론은 정보기관과 서로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제 기사에는 정보기관이 하는 일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이 결국은 국익을 헤치는 행위가 아니냐는 항의성 글을 단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국익이란 과연 무엇이고 국익에 부합하는가 아닌가 하는 판단은 누가 하는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정보기관은 정권 유지를 위해 봉사하면서 이를 국익과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왔던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예를 하나만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1987년 1월 홍콩에서 한국인 여성 김옥분(35)씨가 살해된 채 발견됐습니다. 유력한 살해용의자였던 남편은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여간첩과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됐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안기부는 이 사건이 남편에 의한 살인사건임을 알았으면서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불붙기 시작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희석시키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살인범인 남편은 반공투사로 둔갑했고, 억울하게 숨진 여성은 간첩의 오명을 써야 했습니다. 이른바 '수지김' 사건이었습니다. 숨진 김씨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오빠, 언니가 이 사건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는 등 집안 전체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 후 13년이나 흐른 뒤의 일이었습니다. 뒤늦게 살인범이었던 남편은 구속돼 법의 단죄를 받았고, 법원은 국가가 유족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이것으로 김씨 가족이 겪었을 그 모진 세월들을 다 보상할 수 있었을까요.
대한민국 국민이었던 김옥분씨 가족에게 국익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안기부가 조작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국익은 누구를 위한 국익이었으며, 국가안보는 누구로부터 누구를 지키겠다는 것이었나요. 지금의 국정원은 억울한 희생자를 간첩으로 만들었던 1987년의 안기부와 달라졌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의혹과 논란 중심에 서 있음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국정원
지난 대선에서 불법 정치 댓글을 통한 선거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은 이른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증거위조 의혹으로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연일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데도 국정원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고 이를 비호하는 여권 인사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예의 국익론을 내세워 어떠한 합리적 의심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간첩단 사건 문제는 국가 이익과 직결 돼 있는 문제로 이럴 때 국론이 분열되면 안 되는 것"이라는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과 "정치인들의 무모한 선정주의 때문에 대한민국 국익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는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의 인식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익은 국민의 삶과 동떨어져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익이라는 추상적 가치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개인과 개인들의 권리 위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겁니다. 저는 앞으로도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견의 역할에 충실하겠습니다. 진정한 국익에 대한 판단은 바로 국민과 독자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출처 : '여만철 가족 귀순'의 진실, 모두 부인하는 국정원의 궤변
[取중眞담] 설명·사과·변명하지 않는 '정보기관 3불(不) 원칙' 유감
[오마이뉴스] 김도균 | 14.02.27 11:03 | 최종 업데이트 14.02.27 11:03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여만철씨 가족이 1994년 4월 김포공항으로 입국하는 모습. ⓒ 연합뉴스 |
"관련 내용 모두 사실이 아닙니다."
국가정보원(아래 국정원) 관계자의 답변은 미리 예상을 하던 터였지만, 허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25일 <오마이뉴스>는 지난 1994년 4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만철씨 일가족 망명사건(관련기사 : 20년만에 밝혀진 '여만철 가족 귀순사건' 진실)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보도했습니다.
저는 기사에서 식량난으로 북한을 탈출한 여씨 일가족이 국내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아래 안기부)가 개입하여, 이들을 다시 국외로 내보냈다가 재입국시키면서 정보조작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20년 만에 당사자의 입을 통해 처음 드러난 이야기였고,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탈북자의 관련 증언도 확보해 기사를 썼습니다.
지난 주말 취재를 마치고 24일 오전 국정원에 사실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만 하루가 지나도록 국정원의 답변은 오지 않았고, 25일 오후 기사는 배치됐습니다. 그리고 기사가 배치되고도 반나절이 훌쩍 지난 26일 오전 국정원 관계자는 기사 내용을 모두 부인하는 취지의 답변을 해왔습니다.
'3불 원칙'에 충실한 정보기관의 답변
▲ 1994년 아버지 여만철씨와 함께 귀순한 여금룡씨가 지난 21일 오전 서울 노원구 한 카페에서 당시 안기부의 귀순공작 의혹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 이희훈 |
기자 생활을 하다 보면 가장 막막할 때 중의 하나가 바로 정보기관을 상대할 때입니다.
나름대로 충실히 취재하고 거의 사실임이 확실해 보여도 정보기관 관계자들의 답변은 십중팔구 "확인해 줄 수 없다"거나 "사실이 아니다"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설명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는다'는 정보기관의 이른바 3불(不)원칙에 충실한 답변이지요.
사실 전 세계 220여 개 국가 중 비밀 정보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국제사회의 무한경쟁 속에서 국가이익을 수호하는 최첨병의 역할을 해야 하기에, 합법과 탈법의 경계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정보기관의 속성은 본질적으로 폐쇄적일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본연의 사명으로 삼는 언론은 정보기관과 서로 대척점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제 기사에는 정보기관이 하는 일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이 결국은 국익을 헤치는 행위가 아니냐는 항의성 글을 단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국익이란 과연 무엇이고 국익에 부합하는가 아닌가 하는 판단은 누가 하는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정보기관은 정권 유지를 위해 봉사하면서 이를 국익과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왔던 부끄러운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예를 하나만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1987년 1월 홍콩에서 한국인 여성 김옥분(35)씨가 살해된 채 발견됐습니다. 유력한 살해용의자였던 남편은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여간첩과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됐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안기부는 이 사건이 남편에 의한 살인사건임을 알았으면서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불붙기 시작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희석시키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습니다. 살인범인 남편은 반공투사로 둔갑했고, 억울하게 숨진 여성은 간첩의 오명을 써야 했습니다. 이른바 '수지김' 사건이었습니다. 숨진 김씨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오빠, 언니가 이 사건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는 등 집안 전체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 후 13년이나 흐른 뒤의 일이었습니다. 뒤늦게 살인범이었던 남편은 구속돼 법의 단죄를 받았고, 법원은 국가가 유족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이것으로 김씨 가족이 겪었을 그 모진 세월들을 다 보상할 수 있었을까요.
대한민국 국민이었던 김옥분씨 가족에게 국익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안기부가 조작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국익은 누구를 위한 국익이었으며, 국가안보는 누구로부터 누구를 지키겠다는 것이었나요. 지금의 국정원은 억울한 희생자를 간첩으로 만들었던 1987년의 안기부와 달라졌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의혹과 논란 중심에 서 있음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국정원
▲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원 국정감사가 열린 지난해 11월 4일 오전 국정원 현관에서 한기범 제1차장(오른쪽)과 서천호 제2차장(왼쪽)이 국회의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
지난 대선에서 불법 정치 댓글을 통한 선거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은 이른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증거위조 의혹으로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연일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는데도 국정원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고 이를 비호하는 여권 인사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예의 국익론을 내세워 어떠한 합리적 의심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간첩단 사건 문제는 국가 이익과 직결 돼 있는 문제로 이럴 때 국론이 분열되면 안 되는 것"이라는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과 "정치인들의 무모한 선정주의 때문에 대한민국 국익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는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의 인식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익은 국민의 삶과 동떨어져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익이라는 추상적 가치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개인과 개인들의 권리 위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겁니다. 저는 앞으로도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견의 역할에 충실하겠습니다. 진정한 국익에 대한 판단은 바로 국민과 독자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출처 : '여만철 가족 귀순'의 진실, 모두 부인하는 국정원의 궤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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