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번방의 악몽’, 배상금 26억원이 ‘0원’ 되다니…
36년간 성폭행·살인 누명…‘7번방의 선물’ 실존 인물 정원섭 목사
“배상금은 우리 가족의 핏값…나를 또 죽이겠다는 것” 울분 토해
[한겨레] 김민경 기자 | 등록 : 2014.03.28 20:26 | 수정 : 2014.03.29 11:07
지난해 1,281만 명의 눈물을 훔친 영화 <7번방의 선물> 주인공은 사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피고인 이용구에게 무죄를 선고한다’는 영화 속 판결도 모의재판에 그쳤다. 그러나 <7번방의 선물>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 정원섭(80) 목사는 아직 살아 있다. 당시 만홧가게를 운영하던 정 목사는 1972년 강원도 춘천시 역전파출소장의 열살 딸을 성폭행한 뒤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5년 만인 1987년 출소했다. 검찰 수사 때부터 무죄라고 주장해온 정 목사의 누명은 30년이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법원 재심 무죄 판결로 벗겨졌다. 경찰이 고문하고, 검찰은 조작된 사실을 바탕으로 기소하고, 법원마저 무기징역을 선고한 이 사건은 국가가 한 사람과 그 가족의 삶을 망쳐놓은 부끄러운 과거사였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려던 사건은 하루아침에 악몽이 됐다. 지난 1월 23일 서울고법 민사8부(재판장 배기열)가 소멸시효 기간이 열흘 지났다며, 정원섭 목사와 그 가족에게 손해배상금 26억 원을 지급하라는 1심 판결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판결이 내려진 이유는 지난해 대법원 판결에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12일 재심 무죄 선고를 받은 과거사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이전까지 민법에 따라 3년으로 통용되던 소멸시효 기간을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로 못박았다. 이 판결로 1심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소멸시효가 2심 때 적용돼 26억 원의 손해배상금은 하루아침에 0원이 됐다. 정 목사는 시작에 불과하다. 법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독재·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폭력, 조작 간첩, 의문사 사건 등 반민주·반인권적인 ‘과거사’ 피해자들은 여전히 많다. 이 판례에 따라 손해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또다른 ‘정 목사들’이 줄줄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과거사 피해자와 단체들은 대법원의 소멸시효 삭감을 과거사 청산의 후퇴로 평가한다. 과거사 위원회들의 활동 종료 뒤 피해자들은 법원 재심과 손해배상을 통해 명예회복과 보상을 받아왔다. 이들은 재심 무죄와 손해배상을 국가의 사과이자 화해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난 시절 조작된 혐의에 대해 확정 판결을 내렸던 법원이 이제 와 피해자들이 ‘권리 위에 잠자고 있었다’며 소멸시효를 내세워 손해배상금을 깎고 있다. 국가로부터 2차 가해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과거사 피해자 정원섭 목사를 20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법무법인 덕수 사무실에서 만났다.
▶ 정원섭 목사의 사연과 영화 <7번방의 선물>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경찰 간부의 어린 딸 성폭행 살인 사건이 벌어졌고, 경찰은 폭력과 협박을 동원해 무고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지요. 다른 점도 있습니다. 실제 죽은 건 파출소장 딸이었고, 정 목사는 비장애인이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5년 뒤 가석방됐습니다. 진실규명을 위한 평생의 노력은 재심 무죄와 26억여 원의 손해배상금 판결로 빛을 발하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서울고법은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배상금은 우리 가족 핏값…다시 무기징역 받은 기분”
“손해배상금은 나와 우리 가족의 피나 다름없는데, 그걸 주지 않겠다는 건 나를 또 죽이겠다는 거예요.” 42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싸움에 정원섭 목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 재심 무죄 확정판결 뒤 국가를 상대로 민사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소멸시효 탓에 1심과 2심 판결이 엇갈렸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돈을 안 주기 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잘못한 걸 인정하기 싫다는 거죠. 오히려 따뜻하게 보듬고 위로해줘야 하는데 이게 무슨 짓이에요. 형사보상금 확정일로부터 6개월 10일이 지났다는 건데, 형사보상금은 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나면 검찰에서 10일 내에 주기로 돼 있어요. 근데 5개월 동안 4번씩 나눠서 줬어요. 형사보상금액을 손해배상 고소장에 써야 하니까, 돈을 받아야 소송을 할 수 있어요. 그거 다 받고 하니까 10일이 지난 거예요. 검찰이 늑장 부린 것도 법을 어긴 건데, 국가가 잘못한 것을 아무 책임 없는 저에게 덮어씌운 거 아닙니까.”
1972년 춘천의 논두렁서 발견된
10살 여자아이 살해범으로 몰려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무기징역
15년 뒤 출소해 진실규명 노력
36년만의 무죄판결, 그리고 0원
소멸시효 기간 10일 지났다며
26억 손해배상금을 없던 일로
손배소 비용은 형사보상금인데
법원은 그 돈이 5개월이나 늦게
지급된 것은 문제삼지 않았다
“진실화해위 결정문 받았을 때 가장 기뻤지만…”
형사보상금은 재심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피해 보상금이다. 손해배상금이 국가가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라면, 형사보상금은 구금기간에 대해 주는 보상이다. 검찰 내부지침으로 형사보상 지급청구 결정일로부터 10일 안에 보상금을 지급해야 하지만, 정 목사처럼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정 목사는 2012년 5월 18일 형사보상금 9억6000만 원 지급 결정을 받았지만, 실제 돈은 6월 8일~10월 19일 사이 네 차례로 나눠 입금됐다. 형사보상금 지급이 늦어지면 그만큼 손해배상소송도 지연된다.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은 장기간의 옥살이와 사회적 낙인 탓에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 대부분 보상금을 인지대로 쓰고 있다. 정 목사 사건을 담당하는 김형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가 “설령 6개월로 소멸시효가 줄어든 걸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형사보상금 지급일이 들쑥날쑥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돈을 받은 10월 19일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형사보상금 지급의 고질적인 문제 탓에 국민권익위원회도 지난해 8월 법무부 장관에게 관련 제도 정비를 권고했다.
- 손해배상금은 목사님께 어떤 의미입니까?
“내 피, 우리 가족 전부의 피죠. 우리 삶이 피 흘린 삶이에요. 이건 나를 몇 번 죽이는 거예요. 예전에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을 때와 똑같은 거죠. 그때는 몽둥이를 들어 직접 나를 때렸다면, 이번에는 경제력을 죽이는 거죠. 그 돈을 다 준다고 해도 그동안 잃어버린 세월이 어딥니까. 그 세월 회복 못 합니다. 국가가 사과도 안 하지 않습니까. 배상금 말고는 없는데 그것도 안 한다니. 미국에서는 성폭행 살인 누명을 쓰고 11년을 감옥에서 산 데이비드 에이어스에게 지난해 114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어요. 저는 그보다 긴 15년을 감옥에서 살았는데…. 돈이 많다고요? 저 같은 대우 받고 살면 다들 몇 달 못 살고 죽었을 겁니다.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에 그 고통을 견뎌내고 나온 거지 하나님마저 원망했으면 감옥에서 벌써 죽었을 거예요. 감옥에서 일부러 더 착하고 모범적으로 살려고 했어요. 그것이 바로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복수니까요. 역설적이지만 나를 너희가 이렇게 망가뜨려도 난 그렇게 망가지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그렇게 살아왔는데 소멸시효라는 말로 국가의 잘못을 나한테 뒤집어씌웁니까.”
- 처음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한 게 1999년 11월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재심 청구를 생각했던 건가요?
“제가 자신이 있으니까 진실 규명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경찰이나 검찰은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건을 조작했는데 저를 믿어 주겠어요? 그래서 교도소에서 징역 살면서 책을 찢어 꿀떡꿀떡 삼키면서 형사소송법 공부를 했어요. 진실 규명하려면 법을 알아야 하니까요.”
- 하지만 진실 규명은 쉽지 않았습니다. 첫 재심 신청은 2001년 10월에 기각됐고, 진실화해위가 2007년 진실을 규명한 뒤에 다시 제기한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졌죠. 무죄 확정판결도 2011년 10월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심정은 어땠습니까?
“그걸 어떻게 한마디로 다 말하겠어요…. 돌이켜보면 진실화해위 결정문을 받았을 때가 제일 기뻤습니다. 몇십년 동안의 싸움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됐으니까요. 그 전까지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사회적 낙인이 찍혀 있으니까요.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면 다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하겠죠. 누명을 벗기 전에는 누가 나를 똑바른 시선으로 보겠어요. 어딜 가도 쫄아서 고개 숙이고 다녔어요. 춘천지법에서 처음 무죄 판결을 받고 좋아했는데, 검찰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항소·상고하는 바람에 고법, 대법원까지 갔어요. 증거가 다 허위라는 게 밝혀졌는데 계속 유죄를 주장하는 걸 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죠.”
- 30년 넘는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은 날 아신다는 거였습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죽으려고 했을 때나 통곡할 때나 언제나 제 옆에는 그분이 계셨어요. 나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믿어주셨죠. 저의 가장 위대한 변호사는 주님이었습니다. 둘째는 진실은 죽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아무리 짓밟고 뭉개버려도 진실은 죽지 않는 생명력이 있다고 믿었죠.”
1973년 법원은 1심에서 대법원 판결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정 목사가 성폭행 살인범이 맞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정 목사의 재심 신청을 받아들인 법원은 2008~2011년 동안엔 다시 세 차례에 걸쳐 정 목사의 무죄를 인정했다. 세 번의 무죄 판결에서 법원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것은 1심 법원인 춘천지법 형사2부(재판장 정성태)뿐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와 적법절차를 보장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었던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대었던 법원마저 적법절차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하였고 그 결과 피고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할 수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하겠다.’ 2013년 7월 서울중앙지법 민사33부(재판장 박평균)는 정 목사가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손해배상금 26억원과 이자 지급을 결정했다. 하지만 불과 반년 뒤에 법원은 말을 바꿨다.
시한부 검거령에 다급해진 경찰의 고문
사건은 1972년 9월 28일 오전 9시 40분께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의 한 논둑길에서 10살 난 여자 어린이 주검이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어린이 성폭행 살인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뜨거웠다. 당시 김현옥 내무부 장관은 1972년 10월 10일까지 범인을 검거하지 않으면 관계자들을 문책하겠다고 밝혔다. 시한부 검거령이었다. 경찰은 시한부 검거령에 딱 맞춘 것처럼 10월 10일 왕국만화가게 주인이었던 정원섭 목사가 범인이라고 밝혔다. 검거도 상도 빨랐다. 범인을 잡고 3일 후 담당 경찰관들은 특진하고 표창을 받았다.
- 원래 한국신학대학원(현 한신대)을 졸업하고 목사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춘천에 만홧가게를 열었습니까?
“목사가 된 건 어머니 때문입니다. 원래 1953년 경희대의 전신인 신흥대학교에 원서를 넣었는데 어머니가 단식을 하셨어요. ‘하나님께 우리 집안에서 목사 하나 나올 수 있게 기도해서 네가 태어났는데 어떻게 그런 곳에 가냐’면서요. 그래서 전도사 양성 목적으로 만든 고등성경학교에 갔다가, 1954년에 서울 한국신학대학원으로 옮겼죠. 열아홉 살 때부터 교회를 개척했어요. 어머니가 제가 전도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좋아하셨거든요. 그러다 대학 졸업하면서 사진관을 열었어요. 교인들이 낸 헌금이 아니라 목사가 자기 생활 기반을 갖고 교회를 운영하는 ‘자비량 목회’의 꿈이 있었거든요. 교회는 내 것을 주는 곳이지 교인들에게 돈 많이 내라고 설교하는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돈이 모이니까 1964년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교회 전도사로 갔어요. 그러다 어느 해 여름 ‘모여라 동무야 여름성경학교로’라는 펼침막을 교회 앞에 걸었는데 ‘동무’라는 말을 썼다고 경찰에 끌려가 온종일 맞았죠. 그때부터 경찰들이 내 설교까지 감시하니까 설교를 더 못하겠는 거예요. 농촌 교회로 피난을 갔다가 경상북도 청송의 한 학교 교사로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덟 살이었던 큰아들 제헌이가 뇌척수막염에 걸렸어요. 안동으로 나가고, 대구로도 가고, 서울까지 걔 낫게 하려고 다 다녔는데 그만 죽고 말았죠. 자식도 잃고 돈도 잃고 거지가 돼서 먹고살려고 어머니와 형님이 있는 춘천으로 들어갔죠. 그 상황에서 교회로 가면 교인들이 날 먹여 살려야 하니까 교회로 갈 수는 없었어요. 내가 농사일을 배웠나요, 노동을 제대로 합니까. 그래서 만화방을 열었습니다.”
강원도 춘천시에 정 목사가 연 ‘왕국만화가게’는 장사가 잘됐다. 정 목사는 수완이 좋았다. 신간은 10원에 4권, 구간은 10원에 6권을 빌릴 수 있었는데 20원 이상씩 책을 빌리면 당시 귀했던 텔레비전을 만화방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쿠폰인 시청표를 줬다. 아이들이 많이 찾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 아이들 중에 숨진 열 살 소녀가 있었던 걸까.
- 죽은 아이와는 알던 사이였나요?
“가게 처음 열었을 때 한두 번 왔고, 왔다 간 지가 아주 오래됐습니다. 그날도 우리 집에 오지 않았어요. 그 아이가 집에서 학교 가는 길에는 우리 가게가 아니라 ‘주택만화가게’라는 다른 만화방이 있었어요. 우리 집에 오려면 빙 돌아 일부러 찾아와야 했어요. 죽은 아이 몸에서 텔레비전 시청표가 나왔는데 그것도 우리 게 아니라 주택만화가게 것이었어요. 시청표를 그냥 줬겠어요? 거기서 책을 빌렸으니까 줬겠죠.”
- 처음 경찰서로 연행된 건 1972년 9월 29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용의자로 지목됐습니까?
“그 사건이 터지자 웬만한 동네 사람들은 다 경찰서에서 잡아다가 두들겨 팼습니다. 일단 가둬두고 조사를 한 거예요. 저도 10월 4일에야 석방이 됐는데, 경찰서 유치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어요. 동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잡혀와 가지고. 나갈 때는 난 아니라면서 석방을 해줬지. 그래 놓고 10월 7일에 다시 또 잡아간 거예요.”
-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날 아이를 본 적 없다고 진술했는데, 어떻게 3일 만에 범인이 된 겁니까?
“폭행이란 폭행은 다 받았어요. 경찰이 우선 나를 조져놓고 봤지요. 그걸 어떻게 잊어버립니까. 처음에 저는 웃었어요. 웃기는 얘기니까요. 그런데 사람이 힘들면 고통이 극심하면 안 한 것도 했다고 그래요. 니 맘대로 다 쓰라고 하게 돼 있어요. 그게 고문의 효과잖아요. 고문의 공포가 컸습니다. 고문에 견디는 사람은 없어요. 못 견디기 때문에 허위자백을 하면 죽는 걸 알면서도, 인정하면 사형받을 수 있는 걸 알면서도 합니다. 죽음보다 더한 것, 그게 고문이에요.”
연필과 빗, 피 묻은 팬티라는 증거
정 목사는 고문의 기억을 말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 기억은 진실화해위 보고서에 나와 있다. ‘10월 7일 11시에 파출소 갔다가 숙직실에 갇혀 9월 27일부터 9월 28일까지 행적에 대한 진술서를 작성했다. 저녁 11시께 춘천경찰서로 옮겨져 기합과 구타를 받으며 신문을 당했다. 팬티 외에 옷을 다 벗기고 손에 수건을 댄 뒤 소총 멜빵 같은 것으로 양손을 약간 떨어뜨려 묶고, 양팔 사이로 양 무릎을 넣어 무릎 아래로 봉을 통과시키고, 이 봉을 양 책상 사이에 걸쳐 매달리게 한 뒤 얼굴에 수건을 덮고 찬물을 부었고 고문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7일 연행 후 자백할 때까지 잠을 재우지 않았고 식사도 제공하지 않았다.’ 고문은 3일 만에 범인을 만들어냈다. 경찰이 만든 건 자백만이 아니었다. 머리빗, 연필, 피 묻은 팬티 같은 증거도 만들어냈다.
- 당시 목사님이 범인이라는 증거로는 빗, 연필, 피 묻은 팬티가 제기됐습니다.
“사건 현장에서 긴 하늘색 연필이 나왔고, 우리 아들이 자기 연필이라고 했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짧은 노란색 연필을 봤다고 했죠. 처음에는 아들을 현장에 데려가서 연필을 보여줬다고 하는데, 알고 보니 나를 고문해 자백을 받은 다음에 우리 애를 파출소에 데려간 다음 필통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그 필통에서 하늘색 연필을 꺼내서, 네 거냐고 물으니까 당연히 자기 거라고 한 거죠. 현장에서 발견된 빗도 내 것이라고 종업원이 진술했다는데, 그것도 여관에 갇혀 폭행당해 말한 거고요. 제 팬티에 피가 묻어 있었다는 증언도 말이 안 됩니다. 증언한 사람이 우리 집 옷 빨래하다가 봤다고 하는데 만약 진짜 피가 묻어 있으면 깨끗이 빨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빨래 널 때 보니까 피 같은 게 묻어 있다고 하니….”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정 목사의 연필과 빗, 그리고 빨래하면서 봤다는 그의 피 묻은 팬티는 정 목사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했다. 그러나 2011년 10월 27일 재심 대법원 판결은 세 증거를 모두 부정했다.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하늘색 연필은 증거물로 조작된 것으로 보이고, 빗이 정 목사의 것이라는 진술도 여관에 갇혀 경찰관들에게 폭행당하던 만홧가게 종업원의 허위진술로 판단했다. 피 묻은 팬티를 봤다는 증인 역시 “피 같은 건 본 적은 없지만 경찰 조사 시 무서운 분위기에서 사실과 다르게 진술했고, 수사기관에서 진술을 번복하면 처벌받는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나 거짓증언을 했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시한부 검거령을 내린 상태에서 경찰관들은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 거짓을 말하는 증인들이 원망스럽지 않았습니까?
“말도 못 하죠. 우리 아들한테는 물증을 바꿔서 자기 연필이라고 말하도록 유도했는데. 증거 조작만 하면 누구나 다 쉽게 성폭행 살인범이 되는구나, 그 말을 듣고 내가 죽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시려는구나 했어요. 전 증거도 증인도 조작인 걸 알았으니까 속으로는 웃었죠. 양심이라는 것은 조작자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초월해서 내려다보고 심판하는 거예요. 그때 거짓말하고 조작한 사람들 때문에 진짜 범인을 놓친 겁니다.”
- 검찰과 법원에서는 혐의를 부인하고 고문 사실도 말했는데 그냥 넘어간 건가요?
“사실상 검찰이 고문을 허락하지 않으면 경찰 마음대로 조작을 못 합니다. 경찰은 검찰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요. 판사도 검사가 요구하는 무기징역을 선고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유신정권에서 삼권을 전부 틀어쥐기 위해 판사 임명권을 박정희 대통령이 가져갔잖아요. 정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죠.”
정 목사는 검찰과 법원에서 고문과 허위자백 사실을 말했다. 1972년 11월 6일 검사 피의자 신문조서 3회에서 “(경찰에게 자백한 것에 대해) 경찰의 고문 때문이었다”, “(검사에게 자백한 것에 대해) 경찰관들이 그렇게 하라고 종용했고, 번복해도 검사님이 받아주질 않을 것 같았다. 경찰에게 보복을 받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제가 억울하게 징역을 살 수가 없어 번복한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1심 1, 2차 공판에서도 고문 사실을 말했다. 그러나 당시 검찰과 법원은 정 목사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35년 뒤에야 재심 재판부는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등의 방법으로 진행돼 증거능력이 없다’며 정씨의 말을 믿어줬다.
- 하지도 않은 일로 파렴치범으로 몰리고 무기징역까지 선고된 뒤 심정은 어땠습니까?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죠. 감옥 갔더니 사람들이 놀리더군요. 세 번씩이나 거기서 자살하려고 했어요. 너무 억울하고 분한 것도 있고, 내 명예가 이렇게 됐는데 어떻게 나가서 목사가 될 수 있을지 도덕적 절망감이 컸어요. 그때 대학 시절 은사님들이 면회를 왔죠. ‘죽지 마라’, ‘정군이 죽으면 경찰이 좋아할 거 아니냐. 고문하고 조작한 사람들 말이 진리가 되는 거다’라며 나를 믿어줬어요. 그 말 듣고 정신을 차렸어요.”
“무기징역 선고받을 때와 똑같죠
그땐 몽둥이로 날 직접 때렸다면
이번엔 경제력을 죽이는 거죠
돈 다 줘도 세월 회복 못합니다
사과 안 하면서 배상금도 없다니”
정 목사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번 판결은 과거사 피해자인
여든 고령 그에게 마지막 기회다
또다시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교통사고 당한 아내, 노동판에 뛰어든 아들
- 감옥에 들어갈 당시 부인과 아이까지 다섯 식구가 남아 있었죠.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이 사라진 뒤 가족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죽지 못해 살았죠. 춘천에서는 그날로 바로 쫓겨났어요. 큰애가 아홉 살이고 막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여자가 혼자 애 넷 키우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 했겠어요. 형님 집에 가 숨어 있는데 거기까지 찾아와서 사람들이 행패 부렸어요. 형 확정 뒤 광주 교도소로 갔는데 가족은 서울에 있어서 자주 못 봤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걷지 못하게 됐어요. 엄마 그렇게 다치고 나서 큰아들이 중학교 마치고 노동판에 뛰어들었어요. 그 아들이 제일 불쌍하죠. 남들은 다 하는 공부 중학교밖에 못했으니. 내가 교도소에서 1987년에 나오고 나니 막내가 고등학교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완전히 우리 가정은… 나만 죽인 게 아니라 우리 가족 다 죽인 거예요.”
- 1987년 12월 24일 모범수로 가석방 출소했습니다. 그 뒤로 어떻게 지내셨나요?
“사람 마음이 곧지만은 않지요. 가족이 저를 믿을 때도 있고 믿지 않을 때도 있고. 기계적으로 사람을 딱 믿고, 안 믿고 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가족이 저를 기다려줬죠. 하지만 사회적 낙인 때문에 누가 나 볼까 봐 전라북도 장수군 대성리 산골마을에 숨어 살았습니다. 누나가 전도사로 있는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바위에 ‘통곡’을 한자로 적어놓고 거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곤 했죠.”
절망 속에서도 정 목사는 자비량 목회의 꿈을 놓지 않았다. 1991년 누나가 세상을 떠난 뒤 1992년 전라북도 남원시에 충절교회를 세웠다. 그 후 지금까지 충절교회에서 사슴 등을 키우며 지내고 있다.
- 국가가 뒤흔든 42년의 삶이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진실을 규명할 수 있었던 건 저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이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당당해졌어요. 비록 지금 형식은 대한민국과 법원에서 싸우고 있지만 미워도 내 부모, 내 자식인 것처럼 내 국가 아니겠어요? 잘못한 사람들이 나쁜 거지 국가를 미워하진 않습니다. 남은 바람이 있다면 배상금이라도 많이 받아서 좋은 일 하고 싶어요. 형사보상금도 받은 뒤 모교에 장학금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배상금은 통일을 위해 쓰고 싶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통일 아닙니까.”
정 목사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번 판결은 여든 고령의 과거사 피해자에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또다시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출처 : ‘7번방의 악몽’, 배상금 26억원이 ‘0원’ 되다니…
36년간 성폭행·살인 누명…‘7번방의 선물’ 실존 인물 정원섭 목사
“배상금은 우리 가족의 핏값…나를 또 죽이겠다는 것” 울분 토해
[한겨레] 김민경 기자 | 등록 : 2014.03.28 20:26 | 수정 : 2014.03.29 11:07
▲ 정원섭 목사는 1972년 강원도 춘천에서 일어난 여자 어린이 성폭행 살인범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정 목사의 억울한 사연은 영화 <7번방의 선물>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재심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정 목사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은 26억여원을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지난 1월 서울고법은 소송 제기 소멸시효 기간 6개월에서 열흘이 늦었다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열흘은 정 목사가 진실규명을 위해 외롭게 싸워온 36년에 비하면 너무 짧은 시간이다. 지난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에서 정 목사를 만나 42년째 끝나지 않는 ‘과거사’에 대해 들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
지난해 1,281만 명의 눈물을 훔친 영화 <7번방의 선물> 주인공은 사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피고인 이용구에게 무죄를 선고한다’는 영화 속 판결도 모의재판에 그쳤다. 그러나 <7번방의 선물>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 정원섭(80) 목사는 아직 살아 있다. 당시 만홧가게를 운영하던 정 목사는 1972년 강원도 춘천시 역전파출소장의 열살 딸을 성폭행한 뒤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15년 만인 1987년 출소했다. 검찰 수사 때부터 무죄라고 주장해온 정 목사의 누명은 30년이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법원 재심 무죄 판결로 벗겨졌다. 경찰이 고문하고, 검찰은 조작된 사실을 바탕으로 기소하고, 법원마저 무기징역을 선고한 이 사건은 국가가 한 사람과 그 가족의 삶을 망쳐놓은 부끄러운 과거사였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려던 사건은 하루아침에 악몽이 됐다. 지난 1월 23일 서울고법 민사8부(재판장 배기열)가 소멸시효 기간이 열흘 지났다며, 정원섭 목사와 그 가족에게 손해배상금 26억 원을 지급하라는 1심 판결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판결이 내려진 이유는 지난해 대법원 판결에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12일 재심 무죄 선고를 받은 과거사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이전까지 민법에 따라 3년으로 통용되던 소멸시효 기간을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로 못박았다. 이 판결로 1심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소멸시효가 2심 때 적용돼 26억 원의 손해배상금은 하루아침에 0원이 됐다. 정 목사는 시작에 불과하다. 법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독재·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폭력, 조작 간첩, 의문사 사건 등 반민주·반인권적인 ‘과거사’ 피해자들은 여전히 많다. 이 판례에 따라 손해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또다른 ‘정 목사들’이 줄줄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과거사 피해자와 단체들은 대법원의 소멸시효 삭감을 과거사 청산의 후퇴로 평가한다. 과거사 위원회들의 활동 종료 뒤 피해자들은 법원 재심과 손해배상을 통해 명예회복과 보상을 받아왔다. 이들은 재심 무죄와 손해배상을 국가의 사과이자 화해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난 시절 조작된 혐의에 대해 확정 판결을 내렸던 법원이 이제 와 피해자들이 ‘권리 위에 잠자고 있었다’며 소멸시효를 내세워 손해배상금을 깎고 있다. 국가로부터 2차 가해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과거사 피해자 정원섭 목사를 20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법무법인 덕수 사무실에서 만났다.
▲ 2008년 11월 28일 춘천지법에서 형사 재심 첫 무죄 판결을 받은 정원섭 목사(가운데)가 기뻐하고 있다. 재심 무죄 확정판결과 손해배상 소송 1심 선고는 평생의 한을 위로한 선물이었다. 연합뉴스 |
▶ 정원섭 목사의 사연과 영화 <7번방의 선물>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경찰 간부의 어린 딸 성폭행 살인 사건이 벌어졌고, 경찰은 폭력과 협박을 동원해 무고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지요. 다른 점도 있습니다. 실제 죽은 건 파출소장 딸이었고, 정 목사는 비장애인이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5년 뒤 가석방됐습니다. 진실규명을 위한 평생의 노력은 재심 무죄와 26억여 원의 손해배상금 판결로 빛을 발하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서울고법은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배상금은 우리 가족 핏값…다시 무기징역 받은 기분”
“손해배상금은 나와 우리 가족의 피나 다름없는데, 그걸 주지 않겠다는 건 나를 또 죽이겠다는 거예요.” 42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싸움에 정원섭 목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 재심 무죄 확정판결 뒤 국가를 상대로 민사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소멸시효 탓에 1심과 2심 판결이 엇갈렸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돈을 안 주기 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잘못한 걸 인정하기 싫다는 거죠. 오히려 따뜻하게 보듬고 위로해줘야 하는데 이게 무슨 짓이에요. 형사보상금 확정일로부터 6개월 10일이 지났다는 건데, 형사보상금은 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나면 검찰에서 10일 내에 주기로 돼 있어요. 근데 5개월 동안 4번씩 나눠서 줬어요. 형사보상금액을 손해배상 고소장에 써야 하니까, 돈을 받아야 소송을 할 수 있어요. 그거 다 받고 하니까 10일이 지난 거예요. 검찰이 늑장 부린 것도 법을 어긴 건데, 국가가 잘못한 것을 아무 책임 없는 저에게 덮어씌운 거 아닙니까.”
1972년 춘천의 논두렁서 발견된
10살 여자아이 살해범으로 몰려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무기징역
15년 뒤 출소해 진실규명 노력
36년만의 무죄판결, 그리고 0원
소멸시효 기간 10일 지났다며
26억 손해배상금을 없던 일로
손배소 비용은 형사보상금인데
법원은 그 돈이 5개월이나 늦게
지급된 것은 문제삼지 않았다
“진실화해위 결정문 받았을 때 가장 기뻤지만…”
형사보상금은 재심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피해 보상금이다. 손해배상금이 국가가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라면, 형사보상금은 구금기간에 대해 주는 보상이다. 검찰 내부지침으로 형사보상 지급청구 결정일로부터 10일 안에 보상금을 지급해야 하지만, 정 목사처럼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정 목사는 2012년 5월 18일 형사보상금 9억6000만 원 지급 결정을 받았지만, 실제 돈은 6월 8일~10월 19일 사이 네 차례로 나눠 입금됐다. 형사보상금 지급이 늦어지면 그만큼 손해배상소송도 지연된다.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은 장기간의 옥살이와 사회적 낙인 탓에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아 대부분 보상금을 인지대로 쓰고 있다. 정 목사 사건을 담당하는 김형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가 “설령 6개월로 소멸시효가 줄어든 걸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형사보상금 지급일이 들쑥날쑥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돈을 받은 10월 19일을 기준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형사보상금 지급의 고질적인 문제 탓에 국민권익위원회도 지난해 8월 법무부 장관에게 관련 제도 정비를 권고했다.
- 손해배상금은 목사님께 어떤 의미입니까?
“내 피, 우리 가족 전부의 피죠. 우리 삶이 피 흘린 삶이에요. 이건 나를 몇 번 죽이는 거예요. 예전에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을 때와 똑같은 거죠. 그때는 몽둥이를 들어 직접 나를 때렸다면, 이번에는 경제력을 죽이는 거죠. 그 돈을 다 준다고 해도 그동안 잃어버린 세월이 어딥니까. 그 세월 회복 못 합니다. 국가가 사과도 안 하지 않습니까. 배상금 말고는 없는데 그것도 안 한다니. 미국에서는 성폭행 살인 누명을 쓰고 11년을 감옥에서 산 데이비드 에이어스에게 지난해 114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어요. 저는 그보다 긴 15년을 감옥에서 살았는데…. 돈이 많다고요? 저 같은 대우 받고 살면 다들 몇 달 못 살고 죽었을 겁니다.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에 그 고통을 견뎌내고 나온 거지 하나님마저 원망했으면 감옥에서 벌써 죽었을 거예요. 감옥에서 일부러 더 착하고 모범적으로 살려고 했어요. 그것이 바로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복수니까요. 역설적이지만 나를 너희가 이렇게 망가뜨려도 난 그렇게 망가지지 않겠다는 거였어요. 그렇게 살아왔는데 소멸시효라는 말로 국가의 잘못을 나한테 뒤집어씌웁니까.”
- 처음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한 게 1999년 11월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재심 청구를 생각했던 건가요?
“제가 자신이 있으니까 진실 규명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경찰이나 검찰은 제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사건을 조작했는데 저를 믿어 주겠어요? 그래서 교도소에서 징역 살면서 책을 찢어 꿀떡꿀떡 삼키면서 형사소송법 공부를 했어요. 진실 규명하려면 법을 알아야 하니까요.”
- 하지만 진실 규명은 쉽지 않았습니다. 첫 재심 신청은 2001년 10월에 기각됐고, 진실화해위가 2007년 진실을 규명한 뒤에 다시 제기한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졌죠. 무죄 확정판결도 2011년 10월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심정은 어땠습니까?
“그걸 어떻게 한마디로 다 말하겠어요…. 돌이켜보면 진실화해위 결정문을 받았을 때가 제일 기뻤습니다. 몇십년 동안의 싸움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됐으니까요. 그 전까지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사회적 낙인이 찍혀 있으니까요.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면 다 나보고 미친놈이라고 하겠죠. 누명을 벗기 전에는 누가 나를 똑바른 시선으로 보겠어요. 어딜 가도 쫄아서 고개 숙이고 다녔어요. 춘천지법에서 처음 무죄 판결을 받고 좋아했는데, 검찰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항소·상고하는 바람에 고법, 대법원까지 갔어요. 증거가 다 허위라는 게 밝혀졌는데 계속 유죄를 주장하는 걸 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죠.”
- 30년 넘는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은 날 아신다는 거였습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죽으려고 했을 때나 통곡할 때나 언제나 제 옆에는 그분이 계셨어요. 나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믿어주셨죠. 저의 가장 위대한 변호사는 주님이었습니다. 둘째는 진실은 죽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아무리 짓밟고 뭉개버려도 진실은 죽지 않는 생명력이 있다고 믿었죠.”
1973년 법원은 1심에서 대법원 판결까지 세 차례에 걸쳐 정 목사가 성폭행 살인범이 맞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정 목사의 재심 신청을 받아들인 법원은 2008~2011년 동안엔 다시 세 차례에 걸쳐 정 목사의 무죄를 인정했다. 세 번의 무죄 판결에서 법원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것은 1심 법원인 춘천지법 형사2부(재판장 정성태)뿐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와 적법절차를 보장받지 못한 채 고통을 겪었던 피고인이 마지막 희망으로 기대었던 법원마저 적법절차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부족하였고 그 결과 피고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할 수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하겠다.’ 2013년 7월 서울중앙지법 민사33부(재판장 박평균)는 정 목사가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손해배상금 26억원과 이자 지급을 결정했다. 하지만 불과 반년 뒤에 법원은 말을 바꿨다.
▲ 1972년 ‘춘천 어린이 성폭행 살인범’ 누명을 쓴 정원섭 목사가 경찰의 현장검증을 받고 있다. 동아일보 제공 |
시한부 검거령에 다급해진 경찰의 고문
사건은 1972년 9월 28일 오전 9시 40분께 강원도 춘천시 우두동의 한 논둑길에서 10살 난 여자 어린이 주검이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어린이 성폭행 살인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뜨거웠다. 당시 김현옥 내무부 장관은 1972년 10월 10일까지 범인을 검거하지 않으면 관계자들을 문책하겠다고 밝혔다. 시한부 검거령이었다. 경찰은 시한부 검거령에 딱 맞춘 것처럼 10월 10일 왕국만화가게 주인이었던 정원섭 목사가 범인이라고 밝혔다. 검거도 상도 빨랐다. 범인을 잡고 3일 후 담당 경찰관들은 특진하고 표창을 받았다.
- 원래 한국신학대학원(현 한신대)을 졸업하고 목사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춘천에 만홧가게를 열었습니까?
“목사가 된 건 어머니 때문입니다. 원래 1953년 경희대의 전신인 신흥대학교에 원서를 넣었는데 어머니가 단식을 하셨어요. ‘하나님께 우리 집안에서 목사 하나 나올 수 있게 기도해서 네가 태어났는데 어떻게 그런 곳에 가냐’면서요. 그래서 전도사 양성 목적으로 만든 고등성경학교에 갔다가, 1954년에 서울 한국신학대학원으로 옮겼죠. 열아홉 살 때부터 교회를 개척했어요. 어머니가 제가 전도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좋아하셨거든요. 그러다 대학 졸업하면서 사진관을 열었어요. 교인들이 낸 헌금이 아니라 목사가 자기 생활 기반을 갖고 교회를 운영하는 ‘자비량 목회’의 꿈이 있었거든요. 교회는 내 것을 주는 곳이지 교인들에게 돈 많이 내라고 설교하는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돈이 모이니까 1964년 서울 송파구에 있는 한 교회 전도사로 갔어요. 그러다 어느 해 여름 ‘모여라 동무야 여름성경학교로’라는 펼침막을 교회 앞에 걸었는데 ‘동무’라는 말을 썼다고 경찰에 끌려가 온종일 맞았죠. 그때부터 경찰들이 내 설교까지 감시하니까 설교를 더 못하겠는 거예요. 농촌 교회로 피난을 갔다가 경상북도 청송의 한 학교 교사로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덟 살이었던 큰아들 제헌이가 뇌척수막염에 걸렸어요. 안동으로 나가고, 대구로도 가고, 서울까지 걔 낫게 하려고 다 다녔는데 그만 죽고 말았죠. 자식도 잃고 돈도 잃고 거지가 돼서 먹고살려고 어머니와 형님이 있는 춘천으로 들어갔죠. 그 상황에서 교회로 가면 교인들이 날 먹여 살려야 하니까 교회로 갈 수는 없었어요. 내가 농사일을 배웠나요, 노동을 제대로 합니까. 그래서 만화방을 열었습니다.”
강원도 춘천시에 정 목사가 연 ‘왕국만화가게’는 장사가 잘됐다. 정 목사는 수완이 좋았다. 신간은 10원에 4권, 구간은 10원에 6권을 빌릴 수 있었는데 20원 이상씩 책을 빌리면 당시 귀했던 텔레비전을 만화방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쿠폰인 시청표를 줬다. 아이들이 많이 찾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 아이들 중에 숨진 열 살 소녀가 있었던 걸까.
- 죽은 아이와는 알던 사이였나요?
“가게 처음 열었을 때 한두 번 왔고, 왔다 간 지가 아주 오래됐습니다. 그날도 우리 집에 오지 않았어요. 그 아이가 집에서 학교 가는 길에는 우리 가게가 아니라 ‘주택만화가게’라는 다른 만화방이 있었어요. 우리 집에 오려면 빙 돌아 일부러 찾아와야 했어요. 죽은 아이 몸에서 텔레비전 시청표가 나왔는데 그것도 우리 게 아니라 주택만화가게 것이었어요. 시청표를 그냥 줬겠어요? 거기서 책을 빌렸으니까 줬겠죠.”
- 처음 경찰서로 연행된 건 1972년 9월 29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용의자로 지목됐습니까?
“그 사건이 터지자 웬만한 동네 사람들은 다 경찰서에서 잡아다가 두들겨 팼습니다. 일단 가둬두고 조사를 한 거예요. 저도 10월 4일에야 석방이 됐는데, 경찰서 유치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어요. 동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잡혀와 가지고. 나갈 때는 난 아니라면서 석방을 해줬지. 그래 놓고 10월 7일에 다시 또 잡아간 거예요.”
-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날 아이를 본 적 없다고 진술했는데, 어떻게 3일 만에 범인이 된 겁니까?
“폭행이란 폭행은 다 받았어요. 경찰이 우선 나를 조져놓고 봤지요. 그걸 어떻게 잊어버립니까. 처음에 저는 웃었어요. 웃기는 얘기니까요. 그런데 사람이 힘들면 고통이 극심하면 안 한 것도 했다고 그래요. 니 맘대로 다 쓰라고 하게 돼 있어요. 그게 고문의 효과잖아요. 고문의 공포가 컸습니다. 고문에 견디는 사람은 없어요. 못 견디기 때문에 허위자백을 하면 죽는 걸 알면서도, 인정하면 사형받을 수 있는 걸 알면서도 합니다. 죽음보다 더한 것, 그게 고문이에요.”
연필과 빗, 피 묻은 팬티라는 증거
정 목사는 고문의 기억을 말하고 싶지 않아 했다. 그 기억은 진실화해위 보고서에 나와 있다. ‘10월 7일 11시에 파출소 갔다가 숙직실에 갇혀 9월 27일부터 9월 28일까지 행적에 대한 진술서를 작성했다. 저녁 11시께 춘천경찰서로 옮겨져 기합과 구타를 받으며 신문을 당했다. 팬티 외에 옷을 다 벗기고 손에 수건을 댄 뒤 소총 멜빵 같은 것으로 양손을 약간 떨어뜨려 묶고, 양팔 사이로 양 무릎을 넣어 무릎 아래로 봉을 통과시키고, 이 봉을 양 책상 사이에 걸쳐 매달리게 한 뒤 얼굴에 수건을 덮고 찬물을 부었고 고문을 가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7일 연행 후 자백할 때까지 잠을 재우지 않았고 식사도 제공하지 않았다.’ 고문은 3일 만에 범인을 만들어냈다. 경찰이 만든 건 자백만이 아니었다. 머리빗, 연필, 피 묻은 팬티 같은 증거도 만들어냈다.
“사건 현장에서 긴 하늘색 연필이 나왔고, 우리 아들이 자기 연필이라고 했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짧은 노란색 연필을 봤다고 했죠. 처음에는 아들을 현장에 데려가서 연필을 보여줬다고 하는데, 알고 보니 나를 고문해 자백을 받은 다음에 우리 애를 파출소에 데려간 다음 필통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그 필통에서 하늘색 연필을 꺼내서, 네 거냐고 물으니까 당연히 자기 거라고 한 거죠. 현장에서 발견된 빗도 내 것이라고 종업원이 진술했다는데, 그것도 여관에 갇혀 폭행당해 말한 거고요. 제 팬티에 피가 묻어 있었다는 증언도 말이 안 됩니다. 증언한 사람이 우리 집 옷 빨래하다가 봤다고 하는데 만약 진짜 피가 묻어 있으면 깨끗이 빨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빨래 널 때 보니까 피 같은 게 묻어 있다고 하니….”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정 목사의 연필과 빗, 그리고 빨래하면서 봤다는 그의 피 묻은 팬티는 정 목사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했다. 그러나 2011년 10월 27일 재심 대법원 판결은 세 증거를 모두 부정했다.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하늘색 연필은 증거물로 조작된 것으로 보이고, 빗이 정 목사의 것이라는 진술도 여관에 갇혀 경찰관들에게 폭행당하던 만홧가게 종업원의 허위진술로 판단했다. 피 묻은 팬티를 봤다는 증인 역시 “피 같은 건 본 적은 없지만 경찰 조사 시 무서운 분위기에서 사실과 다르게 진술했고, 수사기관에서 진술을 번복하면 처벌받는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나 거짓증언을 했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시한부 검거령을 내린 상태에서 경찰관들은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 거짓을 말하는 증인들이 원망스럽지 않았습니까?
“말도 못 하죠. 우리 아들한테는 물증을 바꿔서 자기 연필이라고 말하도록 유도했는데. 증거 조작만 하면 누구나 다 쉽게 성폭행 살인범이 되는구나, 그 말을 듣고 내가 죽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시려는구나 했어요. 전 증거도 증인도 조작인 걸 알았으니까 속으로는 웃었죠. 양심이라는 것은 조작자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초월해서 내려다보고 심판하는 거예요. 그때 거짓말하고 조작한 사람들 때문에 진짜 범인을 놓친 겁니다.”
- 검찰과 법원에서는 혐의를 부인하고 고문 사실도 말했는데 그냥 넘어간 건가요?
“사실상 검찰이 고문을 허락하지 않으면 경찰 마음대로 조작을 못 합니다. 경찰은 검찰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요. 판사도 검사가 요구하는 무기징역을 선고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유신정권에서 삼권을 전부 틀어쥐기 위해 판사 임명권을 박정희 대통령이 가져갔잖아요. 정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죠.”
정 목사는 검찰과 법원에서 고문과 허위자백 사실을 말했다. 1972년 11월 6일 검사 피의자 신문조서 3회에서 “(경찰에게 자백한 것에 대해) 경찰의 고문 때문이었다”, “(검사에게 자백한 것에 대해) 경찰관들이 그렇게 하라고 종용했고, 번복해도 검사님이 받아주질 않을 것 같았다. 경찰에게 보복을 받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제가 억울하게 징역을 살 수가 없어 번복한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1심 1, 2차 공판에서도 고문 사실을 말했다. 그러나 당시 검찰과 법원은 정 목사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35년 뒤에야 재심 재판부는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등의 방법으로 진행돼 증거능력이 없다’며 정씨의 말을 믿어줬다.
- 하지도 않은 일로 파렴치범으로 몰리고 무기징역까지 선고된 뒤 심정은 어땠습니까?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죠. 감옥 갔더니 사람들이 놀리더군요. 세 번씩이나 거기서 자살하려고 했어요. 너무 억울하고 분한 것도 있고, 내 명예가 이렇게 됐는데 어떻게 나가서 목사가 될 수 있을지 도덕적 절망감이 컸어요. 그때 대학 시절 은사님들이 면회를 왔죠. ‘죽지 마라’, ‘정군이 죽으면 경찰이 좋아할 거 아니냐. 고문하고 조작한 사람들 말이 진리가 되는 거다’라며 나를 믿어줬어요. 그 말 듣고 정신을 차렸어요.”
“무기징역 선고받을 때와 똑같죠
그땐 몽둥이로 날 직접 때렸다면
이번엔 경제력을 죽이는 거죠
돈 다 줘도 세월 회복 못합니다
사과 안 하면서 배상금도 없다니”
정 목사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번 판결은 과거사 피해자인
여든 고령 그에게 마지막 기회다
또다시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교통사고 당한 아내, 노동판에 뛰어든 아들
- 감옥에 들어갈 당시 부인과 아이까지 다섯 식구가 남아 있었죠.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이 사라진 뒤 가족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죽지 못해 살았죠. 춘천에서는 그날로 바로 쫓겨났어요. 큰애가 아홉 살이고 막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여자가 혼자 애 넷 키우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 했겠어요. 형님 집에 가 숨어 있는데 거기까지 찾아와서 사람들이 행패 부렸어요. 형 확정 뒤 광주 교도소로 갔는데 가족은 서울에 있어서 자주 못 봤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걷지 못하게 됐어요. 엄마 그렇게 다치고 나서 큰아들이 중학교 마치고 노동판에 뛰어들었어요. 그 아들이 제일 불쌍하죠. 남들은 다 하는 공부 중학교밖에 못했으니. 내가 교도소에서 1987년에 나오고 나니 막내가 고등학교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완전히 우리 가정은… 나만 죽인 게 아니라 우리 가족 다 죽인 거예요.”
- 1987년 12월 24일 모범수로 가석방 출소했습니다. 그 뒤로 어떻게 지내셨나요?
“사람 마음이 곧지만은 않지요. 가족이 저를 믿을 때도 있고 믿지 않을 때도 있고. 기계적으로 사람을 딱 믿고, 안 믿고 할 수는 없어요. 그래도 가족이 저를 기다려줬죠. 하지만 사회적 낙인 때문에 누가 나 볼까 봐 전라북도 장수군 대성리 산골마을에 숨어 살았습니다. 누나가 전도사로 있는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바위에 ‘통곡’을 한자로 적어놓고 거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곤 했죠.”
절망 속에서도 정 목사는 자비량 목회의 꿈을 놓지 않았다. 1991년 누나가 세상을 떠난 뒤 1992년 전라북도 남원시에 충절교회를 세웠다. 그 후 지금까지 충절교회에서 사슴 등을 키우며 지내고 있다.
- 국가가 뒤흔든 42년의 삶이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진실을 규명할 수 있었던 건 저의 승리가 아니라 주님의 승리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이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당당해졌어요. 비록 지금 형식은 대한민국과 법원에서 싸우고 있지만 미워도 내 부모, 내 자식인 것처럼 내 국가 아니겠어요? 잘못한 사람들이 나쁜 거지 국가를 미워하진 않습니다. 남은 바람이 있다면 배상금이라도 많이 받아서 좋은 일 하고 싶어요. 형사보상금도 받은 뒤 모교에 장학금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배상금은 통일을 위해 쓰고 싶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통일 아닙니까.”
정 목사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번 판결은 여든 고령의 과거사 피해자에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또다시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출처 : ‘7번방의 악몽’, 배상금 26억원이 ‘0원’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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