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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정치적 사형선고’ 받았던 독일 여성 국회의원의 고백

‘정치적 사형선고’ 받았던 독일 여성 국회의원의 고백
[인터뷰] 잉에 회거(Inge Höger) 독일 연방의회 좌파당 의원
[민중의소리] 강경훈 기자 | 최종업데이트 2015-05-05 18:24:33


지난 2011년 줄리아노 메르 카미스(Juliano Mer-Khamis)와 비토리오 아리고니(Vittorio Arrigoni)라는 두 이탈리아인 친팔레스타인 활동가가 팔레스타인 내부 분파에 의해 납치·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독일의 한 국회의원은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두 활동가가 이스라엘에 의해 살해됐다’라고 주장했다는 음모에 휩싸였다.

이 국회의원은 단지 해당 사건과 관련해 “누가 이 끔찍한 범죄에서 이익을 볼 것인지를 제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스라엘에 가장 위험한 두 활동가가 제거됐다는 사실”이라며 결과적으로 해당 사건이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취지로 특정 현상을 언급했을 뿐이었다. 결국 이 국회의원은 독일 내에서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졸지에 ‘반유대주의자’로 전락해버렸던 독일 연방의회 3선 잉에 회거(Inge Höger) 좌파당 의원의 이야기다. 그는 최근 <민중의소리>와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살해됐다’는 말은 와전된 것이었다. 난 그런 말을 절대 한 적이 없다”며 당시 사건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몹시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 독일 연방의회 3선의 잉에 회거(Inge Höger) 좌파당 의원이 세계노동절이 1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의철 기자

“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불문하고 세계 각국에서 인권 문제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런 활동을 어떤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이 저 같은 사람을 상대로 펴는 논리가 ‘반유대주의자’라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반유대주의자’라는 딱지는 정치적으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에요.”

회생이 쉽지 않은 정치적 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복지나 반전 문제에 대한 일관성 있는 활동으로 위기를 극복해나갔다.

“그런 근거 없는 비난에 얽매이기보단 그동안 제가 해왔던 방식대로 원내외 활동을 했어요. 사회복지 정책의 확대와 반전평화 확대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면서 신뢰를 쌓았지요.”

‘홀로코스트’(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를 겪은 유럽, 그 중에서도 특히 독일에서 ‘반유대주의’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공교롭게도 유대인들은 대학살이라는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자신들의 오랜 염원이던 독립국가 건립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의 저항이 유대인들의 시온주의 운동과 부딪혔고, 유럽에서 피해자였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는 가해자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팔레스타인의 이슬람계 원주민과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유럽 극우세력은 모두 ‘유대인’이라는 공통의 적을 두게 됐다.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는 활동이 자칫 극우로 오인받을 미묘한 상황이 조성된 셈이다.

그는 오랜 기간 독일 내에서 알아주는 반전평화 운동을 해왔었고, 연방의회에서는 외무위원회 소속 ‘군축, 군비통제 및 비확산 분과위원회’ 위원, ‘건강위원회’ 및 ‘국방위원회’ 부위원, 유럽안보협력기구(ESCE) 의원총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반유대주의자’라는 딱지는 이 같은 일련의 활동들과 시기를 잘못 탄 반이스라엘 발언이 맞물려 그를 수렁에 빠뜨린 얄궂은 누명이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단순하다. 전쟁을 유발하거나 학살하는 쪽이 나쁘다는 것이다. 이 명분을 위해 그는 목숨도 바쳤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 앞바다를 점령하고 있을 무렵인 지난 2010년 5월 말 국제 구호 조직을 대동해 가자 지구 앞바다를 통해 팔레스타인에 구호 물품을 전달하려다 이스라엘군에 나포됐던 것.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던 당시 상황을 그는 담담하게 서술했다.

“항상 팔레스타인 구호품을 지원해줬어요. 가자 지구 앞바다에서 경로가 막히면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어요. 이스라엘군은 ‘전쟁중이라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며 우리 배를 공격해 아홉명을 죽였어요. 배는 납치됐고요. 이스라엘은 ‘너희가 불법적으로 입국했다’고 주장하더군요. 미국, 스웨덴, 네덜란드 등 다양한 국가 활동가들이 타고 있었는데, 대부분 이스라엘 감옥에 수용됐고, 저를 비롯한 독일인들만 풀려났어요. 아마 저를 포함한 두 명의 현직 국회의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갈등을 우려한 조치였던 것 같아요.”


순탄치 않은 정치인의 삶

이렇듯 ‘정치인’으로서 그의 삶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그는 왜 순탄치 않은 정치인의 길을 택했던 것일까.

1967년 브레멘 대학을 졸업한 그는 여러 회사를 전전하다가 1994년 ‘아오카(AOK)’라는 의료보험 회사에 근무하면서 노동조합을 처음 접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여성운동을 배웠어요. 여성이 직장 생활이나 사생활에 있어서 남성과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됐고, 자연스럽게 기업 평의회 활동도 하게 됐지요.”

이후 회거 의원은 독일노총(DGB) 여성위원회 위원장, 공공의료보험 연방주 전문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맡으며 노동운동과 여성운동, 반전운동을 병행했다.

▲ 독일 연방의회 3선의 잉에 회거(Inge Höger) 좌파당 의원이 세계노동절이 1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의철 기자
“독일의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활동도 하지만 정치적 토론도 많이 해요. 그래서 사회복지정책이 후퇴되는 데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하기도 하고, 평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지요. 핵무기 반대 운동에도 적극 개입했어요. 노조 활동을 하면서 사회.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어요.”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기로 마음먹은 건 1998년이었다. 1982년부터 자유민주당과의 연정을 시작으로 16년 동안 최장기 집권했던 우파인 기민당(기독교민주당)은 1998년 중도좌파인 사민당(사회민주당)과 좌파인 녹색당 연합에 패했다. 오랜 기간 우파가 집권하다가 사민-녹색 연정이 되면서 복지정책에 국민들의 기대감이 높아졌다. 하지만 새롭게 권력을 잡은 좌파 정권은 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새 정부에서 사회복지 정책이 후퇴하고,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대로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좌파 정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정치적 상황을 틈 타 새로운 좌파 정당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운 좋게 국회의원에 출마할 수 있었어요.”

그는 2005년 선거대안연합(WASG)의 일원으로 하원 의원에 당선됐고, 2007년 WASG와 구동독 공산당(SED)의 후신인 민주사회당(PDS))이 통합해 현재의 좌파당(Die Linke)이 창당됐다.

‘좌파당’ 창당 과정에서는 정파 갈등도 있었다. 하지만 뚜렷한 대의를 중심으로 단합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좌파당을 건설할 때 내부에 여러 정파들이 존재했었어요. 동독 출신의 ‘PDS’라는 정파가 있었고, 서독 노동조합 출신들이 모인 정파, 서독 녹색당 출신 정파 등 많은 세력이 섞여 있었지요. 강령을 어떻게 정할지부터 시작해 수많은 토론이 있었지만, 사민-녹색 연정이 내세운 ‘아젠다 2010’에 반대한다는 큰 명분을 바탕으로 하나로 뭉칠 수 있었어요.”

녹색-사민 연정이 2003년부터 추진한 ‘아젠다 2010’은 노동시장과 사회보장제도, 세재 개혁으로 대표되는 경제활성화 정책이다. 도입 당시부터 이 정책은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만 양산하는 반노동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좌파당은 현재 630개 독일 하원 의석의 약 10%에 불과한 64개 의석을 보유한 소수 정당이다. 때문에 의정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대안을 제시해나가면서 독일 정치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회거 의원은 강조했다.

“두 거대 정당인 사민당과 기민당 양당 체제에서 좌파당이 의회 권력으로만 무언가를 도모하기엔 불가능해요. 그럼에도 우리 당의 임무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입법 활동을 하고, 각종 의회 내 ‘질의’를 통해 여론화를 시키는 거죠. 최저임금제 같은 경우 처음 좌파당이 먼저 내세운 정책이었어요. 하지만 10년 후에 집권당이 비슷하게 내놓고 통과를 시켰더군요. 결국 변화는 야당으로부터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독일 하원은 지난해 7월 정부가 입안한 최저임금제 도입에 관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독일의 최저임금은 시간당 8.5유로, 우리나라 돈으로 1만2천원 수준이다. 그동안 독일에서는 노사 간 단체협상에서 합의된 임금이 최저임금의 역할을 해왔었다. 하지만 ‘아젠다 2010’으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단협 임금이 최저임금이라는 그간의 공식이 무의미해졌고, 최저임금제 도입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이 제기됐다.

▲ 독일 연방의회 3선의 잉에 회거(Inge Höger) 좌파당 의원이 세계노동절이 1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의철 기자

한편, 회거 의원은 지난해 옛 통합진보당 이석기 전 의원 구명 활동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첫 해외 국회의원이었다.

본지와 짧은 인터뷰를 마친 회거 의원은 수원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이석기 전 의원 면회를 가야 할 시간이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법원에서 내란선동죄로 최종 유죄 판결을 받은 이 전 의원에 대해 물으니 그는 매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석기 전 의원에 대한 재판 과정은 정치 재판이지, 법을 지키는 올바른 재판은 아니었다고 봐요. 국가보안법이라고 하는 건 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고, 특히 평화협정이나 통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행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합진보당 해산 절차도 마찬가지에요. 한 정당이 금지 조치를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정당 금지는 모든 민주적 정부들이 해선 안 되는 겁니다.”


출처  ‘정치적 사형선고’ 받았던 독일 여성 국회의원의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