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 박정희 대선 때 청와대에 600만달러 건네”
[토요판] 커버스토리 / ‘한일경협 핫라인’ 박제욱 옹의 비사
‘1960년대 한일경협 핫라인’ 박제욱 옹이
전하는 당시 비화와 권력실세들의 투쟁
[한겨레] 글 곽정수 선임기자,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 등록 : 2015-08-14 21:24 | 수정 : 2015-08-15 13:52
박정희 대통령의 1960~70년대 정부 주도 경제발전을 둘러싼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박 대통령이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기 위해 한일수교를 강행한 것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도 엇갈린다. 올바른 역사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게 순서다. 박제욱(89) 전 영진흥산 사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미쓰비시상사 후지노 주지로 사장 간의 막후 핫라인 구실을 했다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구순을 앞둔 노구의 그가 <한겨레>와 만나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는 “일본 미쓰비시가 한-일 경제협력 초기 포항제철소 건설 등 대일청구권 자금을 이용한 핵심사업을 독점하다시피 한 이면에는 박 대통령과 후지노 미쓰비시상사 사장 간에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중공업 입국을 이루자’는 밀약이 있었다”고 밝혔다. “한-일 경협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악용하려 한 한·일 정경유착 세력을 막기 위해 미쓰비시를 직접 물색해 대통령에게 소개하고, 이후 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는 말도 했다. 그는 증거로 1967년 7월 27일 미쓰비시 은행 다지쓰 와타루 행장에게 받아 48년째 간직해온 ‘각서’를 소개했다. 사진은 지난 10일 박제욱 전 사장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신의 자택에서 각서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 각서에서 미쓰비시는 “한-일 경제협력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지원을 앙망합니다”라고 썼다. 그가 전하는 한-일 경협의 숨겨진 이야기는 빈칸으로 남아 있던 1960~70년대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채워준다.
▶ 3·4공화국에 대한 공식 역사는 물론 한-일 경협 비사에서 박제욱 전 영진흥산 사장의 이름을 찾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는 1960년대 한-일경협 초기 10여 년간 미쓰비시상사가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한 한국의 경제발전 사업을 사실상 독점할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후지노 주지로 미쓰비시상사 사장 간의 핫라인을 잇는 숨은 고리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박정희 대통령의 ‘위기 해결사’였다”고 표현했다. 50여 년간 침묵을 지켜온 그가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한-일 경협 초기의 비사와 권력 실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한겨레>에 털어놨다.
1974년 6월 초 서울 무교동 영진흥산의 박제욱 사장 사무실. 이병철 삼성 회장이 박 사장 앞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좀 전에 김종필 총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반도호텔 매각입찰에 참여하지 말라고 합디다.” 서울 중구 소공동 반도호텔은 서울 도심의 알짜 부동산으로 이 회장이 수년 전부터 눈독을 들여왔다. 하지만 권력 실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호텔 매각은 경쟁입찰이었지만 삼성이 빠진 채 사실상 단독입찰로 치러져 롯데에 넘어갔다. 롯데는 이곳에 지금의 롯데호텔을 지었다.
박제욱(89) 전 사장은 지난 10일 <한겨레>와 만나 “신격호가 당시 김종필에게 대가로 3천만 달러를 줬다고 이병철이 말했다”고 회상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가 반도호텔 매각과 관련해 롯데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금품수수 증언은 처음이다. (“당시 롯데의 전체 호텔 투자규모가 4,800만 달러였다”는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의 저자 손정목의 기록으로 볼 때, 3천만 달러라는 금액 규모는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후 김종필은 신격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김 전 총리의 대변인 구실을 하는 유운영 전 자민련 대변인은 11일 신격호와의 유착설에 대해 “(김 전 총리가) 언론과의 직접 인터뷰는 어렵다”며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외자 유치를 하면서 롯데가 진출했고, 김 전 총리는 이 과정에서 일부 관여한 정도이며 이후에는 신격호 회장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고 의혹을 부인했다.
박 전 사장과 이병철의 인연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5·16 세력들은 부정·비리 인사들을 대거 구속시켰다. 기업인으로는 삼성의 이병철, 대한양회 이정림 등 12명에 대해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 중 다수는 부정축재 관련 조사를 받았고, 개별적으로 환수재산액을 통보받았다. 이병철 회장은 5·16 세력과 잘 아는 박 전 사장을 찾아와 “이북 출신 기업인은 봐주고, 경상도 출신은 죽이려 한다”고 호소했다. 박 전 사장은 김재춘 합동수사본부장에게 “경제를 살려 가난을 구제하겠다면서 기업을 결딴내면 안 된다. 기업인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곧 재조사가 이뤄졌다. 환수 대상 부정축재액은 대폭 줄고, 이마저도 국책사업에 투자하도록 선처가 이뤄졌다. 박 전 사장은 “이를 계기로 이병철 회장이 자주 찾았다. 내가 이 회장에게 기업 대표자 모임을 구성해 혁명정부를 도와주라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기업인들은 그해 8월 한국경제인협의회(전경련의 전신)를 발족시키고 회장에 이병철 회장을 추대했다.
박 전 사장은 5·16 당시 언론인이었다. 대한통신, 합동통신, 연합신문, 한국일보, 서울경제신문 등에서 일했다. 기자인 그가 5·16 주도세력과 가깝게 된 데는 연유가 있었다. 그는 교토 동사(東寺)전문학교를 다니다가 해방이 되면서 중도에 귀국했다. 부산 영도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6·25 전쟁이 터지자 종군기자를 자원했다. “5·16 쿠데타 직후 종군기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김재춘 대령(1963년 중앙정보부장 역임)이 도움을 요청했다. 박정희의 국가개발 전략이 옳다고 보고 돕기로 했다. 김재춘 합동수사본장이 나의 정세 판단과 조언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받아줬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충실히 전달하고 실행했다.” 5·16 세력과의 인연은 이후 그의 운명 전체를 바꿨다.
박 전 사장은 5·16 직후 박정희와의 일화부터 소개했다. 5·16 직후 박정희의 입지는 매우 취약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내지 못하는 게 큰 문제였다. 박정희는 여러 외교 경로를 통해 미국을 설득하고 케네디와의 회동을 타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박 전 사장이 그때 아이디어를 냈다. “일반 우편제도를 이용해 백악관에 회담 요청 전보를 띄우자고 했다. 박 의장의 전보가 일반 우편물로 전달되리라고는 미 국무부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미국의 의심을 벗기 위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구절을 전보에 넣었다.” 전보를 친 뒤 열흘이 안 돼 백악관에서 답이 왔다. 그해 11월 중순 박 의장과 케네디 간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현재 ‘징용 보상 회피’ 미쓰비시
당시엔 정경유착 금기 전통 주목
박정희와 경협 파트너로 연결시켜
이후 당인리발전소·포철 건설 등
한일경협 사업은 미쓰비시가 독점
1963년 대선 정치자금 해결사 역할
미쓰비시에 개인적으로 100만달러
빌린 뒤 당인리발전소 결제 때 갚아
1967년 대선 때도 500만달러 조달
김형욱이 돈 들여오며 환전이익 챙겨
삼성 빠진 채 단독입찰로 치러진
반도호텔은 롯데에 넘어갔는데
사무실 온 이병철이 분통 터뜨리며
“신격호가 김종필에게 3천만달러 줬다”
김종필 전 총리 쪽에선 의혹 부인
역사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해 1962년 11월 김종필 특사와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의 비밀회담에서 합의된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근거로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재산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 정식 조인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박 전 사장은 1965년 국교정상화 수년 전부터 사전준비가 있었다고 말한다. “박 대통령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경제발전에 활용할 복안을 갖고 답보상태에 있던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서둘렀는데, 일본의 정치인과 경제인 등 정상배들은 개인 이익에만 집착해 한국 내 실세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박 전 사장은 박 정권의 부패를 막으려면 정경유착이 안 된 일본 기업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일회담의 대표에 배의환 전 한은 총재를 대통령에게 추천했다. 배 대표는 나와 뜻을 같이하고, 일본 기업들에 나를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여러 일본 기업이 박 전 사장을 칙사 대접했지만, 정작 그는 미쓰비시에 주목했다. “미쓰비시상사는 정경유착을 금기시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일본 극우파하고도 거리를 뒀다.” (이는 미쓰비시가 일본강점기 강제노역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회피하며 비난받고 있는 현실과 대비된다) 박 전 사장은 미쓰비시상사를 노크했다. “미쓰비시가 한국의 특정 정치인, 관료와 관계를 맺지 않고 나를 통해 박정희 의장에 협력하면 한국 시장 진출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박 전 사장은 드디어 1963년 늦은 봄 미쓰비시상사의 쇼 기요히코 사장과 후지노 주지로 전무(훗날 사장)를 만났다. 미쓰비시 사장은 “당신이 무조건 도와달라고 하는데 나중에 리스크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느냐”고 물었다. 박 전 사장은 “나는 아직 30대로 살아야 할 날이 더 많다. 만약에 미쓰비시의 협력에 (5·16) 군인들이 신의를 저버리면 내 목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이 한창 마무리 단계였던 1965년 2월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미쓰비시상사 차기 사장으로 내정된 후지노 부사장과 독대했다. 박정희는 “전쟁 이후 미국 잉여농산물로 연명하고 있는데 정치인은 싸움만 하고 북한의 위협이 상존한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후지노는 “과거 일제시대에 대해 사죄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중공업 입국에 기여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대통령을 직접 대화 상대로 하겠다고 다짐했다. 박 전 사장은 “후지노의 약속은 일본 정치인과 기업에 끈을 대기 위해 혈안이 돼 있던 한국 권력 실세들의 이권개입과 부정거래에 연루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는 1974년 사장을 그만둘 때까지 이 약속을 지켰다”고 말했다.
후지노는 1966년 5월 사장에 취임한 뒤 박정희와의 돈독한 관계를 발판 삼아 미쓰비시 계열사들을 동원해 한국과의 경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박 전 사장은 “후지노 사장이 재임 중 매년 서울을 방문해 박 대통령을 만났다. 1965년 6월 한일협정 체결 이후 한국 사업은 미쓰비시가 독점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대한조선공사 확장공사, 당인리 발전소 건설, 동양 최대 규모인 쌍용시멘트 공장 건설, 경인선 전철화 사업, 포항제철소 건설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한-일 국교 수립 이후 대일청구권 자금(8억 달러)이 국가 경제발전에 쓰였다. 박 전 사장은 “한·일 정경유착 세력이 대일청구권 자금 집행 과정에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정권을 대일청구권자금을 이용해 부패시켜 일본의 경제적 지배 아래 놓이게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한국에 대해서도 획책했다. 정권이 썩지 않아야 근대화 작업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일 유착세력과 관련해 한국 쪽에서는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김동조 주일대사, 이동원 외무장관을, 일본 쪽에서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아베 신조 현 총리의 외조부), 다나카 통산상, 아쿠자인 고다마 요시오, 세지마 류조 이토추 회장(당시는 임원)을 대표적으로 꼽았다.
박 전 사장은 한·일 유착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정부 직제에 없는 대일청구권 사절단이라는 독립기구를 대통령 특명으로 발족시킬 것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대통령은 대일청구권 사절단 운영지침으로 한·일 특정 정치인, 관료, 이들과 유착된 기업은 배제할 것을 지시했다. 대통령의 결단으로 한국을 제2의 인도네시아로 만들려는 음모는 무산됐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내내 권력 실세들의 부패 스캔들은 끊이지 않았다. 경제개발을 위해 도입하는 외자의 혜택을 보려는 기업들이 정권 실세들 앞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외자 도입과 사용은 부총리가 위원장인 외자도입심의위를 거쳤다. 1964년 5월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이 부총리에 임명됐다. 그는 조선은행 부총재 출신의 경제통이었다. 장기영은 취임 1년여 뒤인 1965년 특혜 의혹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의 내사를 받았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비리 증거를 잡기 위해 부총리 집무실의 캐비닛을 뒤져 수표와 돈을 발견했다.” 김형욱은 대통령에 낱낱이 보고했다. “기자 시절부터 알았던 장기영이 도움을 요청해 와 만났는데, ‘한 나라의 재상을 이러면 안 된다’며 불만만 늘어놓고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 실망해서 그냥 나오려는데 장기영이 사직서를 내밀며 ‘나 이렇게 잘리면 매장된다.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박 전 사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대통령이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한일회담이오. 각하한테 가서 ‘제2의 이완용 역할을 내가 하겠다. 앞으로는 부패하지 않겠다. 한일회담 끝날 때까지 봐달라’고 하시오.” 장기영은 바로 청와대로 올라갔다. 그날 오후 장기영은 휘파람을 불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일본의 미쓰비시상사가 건설한 당인리 발전소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후지노 사장이 대통령과 처음 만났을 때 미쓰비시가 가장 먼저 참여하겠다고 말한 사업이었고 대통령도 내락했다. 그러나 1966년 말 한전은 도시바와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기로 임시계약을 맺었다. 도시바의 뒤에는 재일동포 기업인이 있었고, 그 뒤에는 장기영 부총리와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있었다. 이후락 실장이 한전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쓰비시와 하는 것으로 이미 결정돼 있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장기영은 한전 사장에게 “미쓰비시가 하려면 일본 차관이 아닌 제3국 차관으로 하겠다는 보증을 24시간 내 받아오라”고 어깃장을 놨다. 박 전 사장은 미쓰비시에 “내가 책임질 테니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장기영은 박 전 사장을 사무실로 불렀다. “부총리실에는 재일동포 기업인도 와 있었다. 그는 30만 달러를 내놓으며 눈감아달라고 사정했지만 거절했다.”
당인리 발전소 건설에는 정치자금 관련 일화가 얽혀 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돈이 없었다. 박 전 사장이 해결사로 나섰다. “미쓰비시에 개인적으로 100만 달러(당시 환율과 물가 수준을 고려해 현재 가치로는 1천억 원 정도 추정)를 빌려와 청와대에 전달했다. 빌린 돈은 당인리 발전소 건설 대금 결제 때 포함해 갚았다.” 박 전 사장은 1967년 6대 대선 때도 박정희를 위해 500만 달러(현재 가치로는 3,500억 원 추정)를 조달했다. 이 돈 역시 미쓰비시에서 빌려왔다. “홍콩 상하이은행에서 인출한 돈을 김형욱 부장이 책임지고 국내로 들여왔다. 대신 김 부장은 공식환율과 암시장 시세 간의 차액(10%)을 챙겼다.”
사방에서 박 전 사장을 제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965년 가을 정보부에 의해 서울 시내 모 호텔로 끌려갔다. 정보부는 ‘신문기자 출신인데 어디서 돈을 벌었느냐’고 추궁했다. 하지만 내가 사장으로 있던 영진흥산은 사실상 간판뿐인 회사였다.” 박 전 사장이 직접 기업을 운영하지 않은 것은 나름의 원칙 때문이었다. “직접 기업을 운영하면 주변의 질시와 견제로 국가 근대화를 위해 맺은 미쓰비시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 박 전 사장은 김형욱 부장에게 “부장 저기 (창문 밖의) 구름이 보입니까? 지나가는 구름 붙잡고 무엇을 할 겁니까? 앞으로 내가 도울 테니 기다려요”라고 말했다. 그는 곧바로 풀려났다.
박 전 사장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이후락 실장은 노심초사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실장에게 충고했다. “선거(1963년 5대 대선과 6대 총선) 때 수고했으니 앞으로 권한을 좀 내놓으시오. 이 실장이 당 자금 수금과 배분에 이어 외화 배분까지 다 하니 욕을 먹지 않습니까.” 박 전 사장은 권력 실세들 간 충돌을 피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후락, 김형욱, 김성곤, 장기영 네 사람을 조직해야겠습니다. 네 사람이 각자 임무를 분할하되 총괄은 이 실장이 하십시오.” 김성곤 재정위원장은 당 운영과 자금지출에 전념하고, 장기영 부총리는 외자 도입 계획만 하고, 김형욱 부장은 수금을 책임지고, 이후락 실장은 전체를 총괄하는 안이었다. 이후락이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왔다. 이렇게 해서 이후락-김형욱-김성곤-장기영의 4자 회담이 만들어졌다. “4자 회담은 대통령의 측근 실세들의 떡고물을 둘러싼 이전투구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리고 반목하는 실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자처해 나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 차관이 물밀듯이 들어오자 일본 은행의 한국 진출은 당연한 일로 간주했다. 일본 은행 간 경쟁이 치열했다. 1967년 2월 말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가 후지은행의 서울지점 설치를 인가해달라고 청와대에 요청했다. 하지만 박 전 사장은 한-일 경협이 본격화될 무렵 이후락을 통해 박 대통령과 일본 은행 지점 인가 원칙을 이미 정해두었다. “첫째, 은행은 일반 공장 건설 프로젝트와 다르기 때문에 커미션 수수를 불허함. 둘째, 은행 진출에 있어 특정 정치인, 관료, 재벌을 배제할 것. 셋째, 한국의 국시인 수출입국, 중공업 입국에 협력할 수 있는 은행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김형욱 부장에게 조사를 지시했다. “일주일 뒤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인가 원칙에 맞는 곳은 미쓰비시뿐이었다.” 재무부는 미쓰비시 은행에만 내인가 서류를 발급했다. 그러자 방해공작이 시작됐다. “미쓰비시 은행이 3월 9일 인가서를 일본 대장성에 접수하려 하자 담당관리가 거부했다. 장기영 부총리가 일본에 연락해 ‘부총리가 모르는 내인가서는 가짜다. 접수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일본에 있던 박 전 사장은 서울의 이후락 실장에게 전화했다. “대통령이 두 사람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나 바로 귀국하렵니다.” 귀국은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뜻이었다. “이후락이 자신에게 맡기라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파리로 출장 간 장기영에게 달려갔다.” 귀국길에 도쿄에 들른 장기영은 후지노 사장에게 “미쓰비시 은행 서울지점을 인가하기로 했다”고 꼬리를 내렸다. 장기영 부총리는 6개월 뒤인 1967년 10월 3일 경질됐다.
1967년 6월 8일 7대 총선이 끝난 뒤 나흘째 되던 날 청와대에 특별한 손님 4명이 찾아왔다. 미쓰비시상사의 후지노 사장을 비롯해 미쓰비시 중공업과 전기 사장, 미쓰비시 은행장이 박정희를 예방한 것이다. 미쓰비시는 은행 서울지점 내인가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대통령이 이들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을 줬다. 정부가 추진하게 된 영동전철(중앙·태백·영동선 전철화 사업)과 영동고속도로 건설을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이날 한남동 우리 집에서는 미쓰비시 4개사 사장과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이 참석한 가운데 파티가 열렸다.”
미쓰비시 4개사 사장은 돌아가기 전에 박 전 사장을 잡아끌었다. “은행 인가와 관련해 보답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은행 내인가 직후에도 다지쓰 와타루 은행장이 그런 말을 해서 한 번 거절한 적이 있었다. 나는 한 달 뒤에 답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 달 뒤 일본 도쿄의 미쓰비시 은행을 찾았다. “다지쓰 은행장이 통장을 내밀었다. 통장에는 100만 달러가 입금돼 있었다.” 박 전 사장은 통장을 밀어놓고 말했다. “한국은 중공업 입국, 수출입국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협력하시겠습니까?” 은행장은 협력하겠다고 답했다. “이런 방침을 다음 은행장, 또 그다음 은행장에게도 인계하시겠습니까?” 은행장은 그러겠다고 답했다. “저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 한 약속을 글로 써주십시오.” 은행장은 크게 웃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박 전 사장은 “얼마 뒤 다지쓰 은행장이 직접 붓으로 쓴 1967년 7월 27일 자 염서(각서)를 받았다”고 말했다.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지은 포철
본래 구미 차관으로 하려 했는데
실패 대비해 미쓰비시와도 진행
미쓰비시가 일본 내 반대 무마작업
결국 구미쪽의 차관 무산 위기 돌파
초등학교 교사 하다가 종군기자
알고 지내던 김재춘이 도움 요청
박정희에 정세판단과 조언 역할
박태준과 갈등 겪으며 신변 위협
1971년 미쓰비시와는 공식 결별
박 대통령의 약속에 따라 철도청과 미쓰비시가 영동전철 기초조사를 마무리한 것은 1967년 말이었다. 그런데 도쿄에서 활동하던 국제적인 유대인 중개상 아이젠버그가 끼어들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1968년 1월 8일 이후락이 박 전 사장에게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인 서정귀씨를 만날 것을 요청했다. 서씨는 “이후락 실장, 김성곤 위원장이 결정한 사안이다. 영동전철 건을 아이젠버그가 주도하는 구주연합회사에 넘겨라. 아이젠버그가 대가로 800만 달러를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 전 사장은 다음 날 오후 5시 반도호텔 1029호실의 아이젠버그 사무실을 찾았다. “아이젠버그에게 800만 달러를 대기 중이던 나카가와 미쓰비시 은행 서울지점장에게 주라고 했다. 아이젠버그는 말도 않고 그냥 나가버렸다.” 다음날 이후락이 최후통첩했다. 그는 맞섰다. “대통령이 미쓰비시에 약속한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다. 나는 정의와 신의를 빼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미쓰비시에 목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락은 아무 말도 안 했다. 결국, 2억 달러 규모의 영동전철 프로젝트는 아이젠버그에게 넘어갔다.
포항제철소는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지어졌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은 자신의 회고록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에서 1969년 2월 당시 자신의 ‘하와이 구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썼다. 미국에서의 차관 도입 협상이 막혀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귀국길에 잠시 하와이에 들렀다가 일본 자금으로 제철소를 짓자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 전 사장이 전하는 실상은 큰 차이가 있다. “(영동전철 건으로 인한) 박정희와 후지노 간의 관계 단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바로 포철 사업의 대일 전환이었다.”
포철 건설은 일찍이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기간산업육성 계획에 따라 추진이 결정됐다. 일본의 철강업계는 1964년 기술조사를 했고, 자체 비용으로 100만 톤 규모의 제철사업계획서까지 만들어 한국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경제기획원은 1966년 미국 중심의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을 구성한다고 발표했다. KISA의 배후에는 아이젠버그가 있었다. 배신을 당한 셈인 일본은 차관단에 불참하기로 했다. 정부는 1967년 10월 서방 중심 국제차관단과 6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 건설 기본계약을 맺고, 부지로 선정된 포항에서 기공식까지 거행했다. 하지만 세계은행과 미국 수출입은행 등이 차관 공여에 난색을 보이며 낙관에 봉착했다.
박 전 사장은 (하와이 구상 1년 전인) 1968년 2월 초 대통령에게 “포철은 어떻게 진행되느냐”고 물었다. 이후락이 옆에서 “그건 다 끝났다”고 가로챘다. 박 전 사장이 대통령을 설득했다. “제철소 굴뚝에 연기가 나야 다 된 것 아닙니까. 이 실장 말대로 99%가 다 됐더라도 1%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99%가 0%가 안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는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차관단을 통한 사업 추진을 계속하되, 만약 실패할 경우 저와 미쓰비시에 사업권을 넘겨주십시오.” 대통령은 수락했다. 박 전 사장은 직접 일본으로 넘어가 용건은 숨긴 채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한다고 설득해서 후지노 사장을 서울로 데려왔다.
박 대통령은 2월 6일 금요일 오전 9시 30분 후지노 사장을 만나 “그동안 포철은 일본에서 조사도 하고 수고했는데 아무 양해 없이 미국 주도 차관단을 통해 추진되고 있다고 보고받았다”며 사과했다. 이어 “나는 포철 사업을 일본과 하기를 바란다. 후지노 사장이 일본을 설득해 달라”고 간청했다. 포철 프로젝트는 이미 국제간에 진행 중이어서 일본과의 사업 추진은 극비였다. 후지노는 일본으로 돌아가 미쓰비시 내부 반대파를 설득하고, 일본 철강업계에도 고개를 숙이며 협조를 구했다. 또 일본 정관계 요로를 통해 차관 공여를 위한 사전작업을 했다. 후지노는 두 달 뒤인 68년 4월 “큰 고비는 넘겼다”며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1년 뒤인 1969년 4월과 5월 세계은행과 미국 수출입은행이 차관 공여를 공식 거부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포철 사업을 은밀하게 착착 진행했다. 드디어 1969년 8월 한국 요청으로 한-일 각료회담에서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포철 사업을 추진하기로 의결됐다. 박 전 사장은 “포철 사업을 일본으로 전환한 것은 박 대통령의 결단이 주효했다. 그러나 후지노가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감동이나 한국의 경제발전을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대안을 생각해내고, 후지노 사장을 설득한 박제욱이 없었다면 포철 사업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실세들의 부패를 막기 위해 조직한 4자 회담도 한계에 봉착했다. 박 전 사장은 “부패 감시자로서 역할을 자임한 나는 칼날 위를 걷는 입장이었다”고 회상했다. 1968년 3월 이후락 실장이 부하를 시켜 미쓰비시에 “앞으로는 박제욱 대신 서정귀와 거래하라”고 통보했다. 박 전 사장이 미쓰비시 은행 서울지점 허가와 관련해 500만 달러를 착복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것은 나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만약 내가 대가를 받기 시작했다면 권력 주변에서 그렇게 오래 생존할 수 없었다. 나는 미쓰비시 은행으로부터 돈 대신 각서를 받았다.” 박 전 사장은 각서를 김형욱 부장에게 전달했다. 김형욱은 즉각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그러면 그렇지. 김 부장 어전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후락, 김형욱, 김성곤, 서정귀, 박종규, 박제욱, 나카가와 미쓰비시 은행 서울지점장 등 7명이 청와대에 모였다. “각서를 본 이후락은 부르르 떨었다. 이후락은 대통령을 만난 뒤 ‘없던 일로 하자’고 말했다.”
1969년 여름 도쿄에서 열린 한-일 각료회담을 계기로 포철 건설이 본격화되자 박태준 포철 사장이 스타로 부상했다. 당시 포철의 조강 규모는 100만 톤이고, 신일본제철은 1,000만 톤이었다. 100만 톤 규모 제철소의 원료 구매가격이 1,000만 톤 제철소보다 비싼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박 전 사장은 신일철에 특별대우를 요청했다. “우리가 1,00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지을 때까지 원료 구매가격을 1,000만 톤 가격에 해달라고 요청해 양해를 구했다. 대신 미쓰비시는 나의 공로를 인정해 원료값의 1%를 커미션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를 박태준이 알고 뒤를 캐기 시작했다.” 박 전 사장은 미쓰비시에 “박태준 몫으로 100만 달러를 주라”고 말했다. 일종의 입막음용이었다. “박태준은 이 돈으로 부하를 시켜 호주에 별도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이 회사를 철광석 거래 창구로 활용했다.”
1969년 후반기 박태준은 미쓰비시와 각종 계약을 체결하면서 내부 인사들과 가까워졌다. “미쓰비시 내부 반대파가 박태준에게 1967년 대선 때 나에게 500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알려줬다. 박태준은 이를 김성곤에게 알렸고, 김시진 청와대 정보비서관을 통해 보안사에 ‘박제욱이 500만 달러를 받아 이후락, 김형욱과 착복했다’고 제보했다. 김시진은 육사 5기로 박태준과 동기였다.” 박 전 사장은 1969년 8월 토요일 새벽 보안사로 끌려갔다. 그는 “나는 자유당 때부터 신문기자를 한 사람이다. 신문기자는 남에게 발목 잡히는 일을 안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박 대통령이 이후락, 김형욱과 함께 보안사령관을 불렀다. “대통령이 ‘임자 뭐 하고 있어. 박제욱은 왜 데려갔어’라며 호통쳤다. 나는 바로 풀려났다.”
박태준은 박제욱 제거 계획이 실패하자 일본의 세지마 류조 이토추 회장과 손을 잡았다. 세지마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참여한 극우파로,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대인 만주군 당시 박정희의 직속상관이었다는 인연으로 한-일 외교사의 중요 고비 때마다 막후에서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박태준은 세지마에게 나를 제거해주면 한국 사업을 당신과 하겠다고 제의했다. 세지마는 미쓰비시 내 반대파를 움직여 정치깡패 고다마에게 나를 살인 청부했다.” 당시 고다마 수하에는 악명 높은 야쿠자들이 있었다. “대통령도 나를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살기 위해 미쓰비시와의 결별을 준비했다. 세지마는 훗날 박태준의 일본 내 비자금을 관리해주었다.”
1971년 1월 박 전 사장은 미쓰비시와의 결별선언서를 작성해 후지노 사장에게 보냈다. “대통령은 이후락에게 나의 생각을 바꾸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내 결심은 단호했다.” 공식결별은 1971년 2월 이뤄졌다. 미쓰비시가 청산서류를 갖고 서울을 방문했다. “미쓰비시가 20만 달러를 내놓았다. 내가 운영하던 영진흥산과 영진전기의 영업권과 미쓰비시의 한국 내 대리권을 포기하는 대가로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하지만 이익을 챙기기 위해 일을 한 게 아니므로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박 전 사장은 이후 영진해운이라는 개인회사를 운영하면서, 박 대통령의 밀명을 수행했다. 1973년 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술탄 이븐 압둘아지즈 국방장관과 만났다. 한국이 사우디의 안보를 지원하는 대신 원유 광구를 확보하게 해달라는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했다. 1974년 8월 19일 주프랑스 사우디 대사의 방한 일정이 잡혔다. 하지만 문세광의 8·15 피격 사건이 발발해 방문이 무산되면서 한-사우디 간 안보경협은 좌초됐다. 박 전 사장은 1979년 3월 박 대통령의 밀명으로 중국 실권자 덩샤오핑과의 회담을 극비리에 추진했다. 그해 10월 초 박정희-덩샤오핑 간 핫라인이 성사 일보 직전까지 진전됐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며칠 뒤인 10월 26일 유명을 달리하면서 계획은 무산됐다. 한국이 중국과 수교한 것은 13년 뒤인 1992년 8월이었다.
박 전 사장은 박정희라는 보호막이 사라지고, 1980년 신군부가 쿠데타로 들어서며 신변 위협이 커지자 1983년 미국행을 택했다. 기업은 물론 한남동 집까지 빼앗겼다. 미국에서는 뉴욕 맨해튼의 1평 반짜리 가게에서 신문 및 과자류 등을 팔아 가족과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1996년 13년 만에 귀국했다.
출처 박정희와 미쓰비시와 나
[토요판] 커버스토리 / ‘한일경협 핫라인’ 박제욱 옹의 비사
‘1960년대 한일경협 핫라인’ 박제욱 옹이
전하는 당시 비화와 권력실세들의 투쟁
[한겨레] 글 곽정수 선임기자,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 등록 : 2015-08-14 21:24 | 수정 : 2015-08-15 13:52
지난 10일 박제욱 전 사장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신의 자택에서 각서를 보여주는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박정희 대통령의 1960~70년대 정부 주도 경제발전을 둘러싼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박 대통령이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기 위해 한일수교를 강행한 것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도 엇갈린다. 올바른 역사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실상을 제대로 아는 게 순서다. 박제욱(89) 전 영진흥산 사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미쓰비시상사 후지노 주지로 사장 간의 막후 핫라인 구실을 했다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구순을 앞둔 노구의 그가 <한겨레>와 만나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는 “일본 미쓰비시가 한-일 경제협력 초기 포항제철소 건설 등 대일청구권 자금을 이용한 핵심사업을 독점하다시피 한 이면에는 박 대통령과 후지노 미쓰비시상사 사장 간에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중공업 입국을 이루자’는 밀약이 있었다”고 밝혔다. “한-일 경협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악용하려 한 한·일 정경유착 세력을 막기 위해 미쓰비시를 직접 물색해 대통령에게 소개하고, 이후 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는 말도 했다. 그는 증거로 1967년 7월 27일 미쓰비시 은행 다지쓰 와타루 행장에게 받아 48년째 간직해온 ‘각서’를 소개했다. 사진은 지난 10일 박제욱 전 사장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신의 자택에서 각서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 각서에서 미쓰비시는 “한-일 경제협력에 전력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앞으로도 변함없는 지원을 앙망합니다”라고 썼다. 그가 전하는 한-일 경협의 숨겨진 이야기는 빈칸으로 남아 있던 1960~70년대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채워준다.
“사업 독점 미쓰비시, 두 번 대선 때 청와대에 600만달러 건네”
▶ 3·4공화국에 대한 공식 역사는 물론 한-일 경협 비사에서 박제욱 전 영진흥산 사장의 이름을 찾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는 1960년대 한-일경협 초기 10여 년간 미쓰비시상사가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한 한국의 경제발전 사업을 사실상 독점할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후지노 주지로 미쓰비시상사 사장 간의 핫라인을 잇는 숨은 고리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박정희 대통령의 ‘위기 해결사’였다”고 표현했다. 50여 년간 침묵을 지켜온 그가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한-일 경협 초기의 비사와 권력 실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한겨레>에 털어놨다.
1974년 6월 초 서울 무교동 영진흥산의 박제욱 사장 사무실. 이병철 삼성 회장이 박 사장 앞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좀 전에 김종필 총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반도호텔 매각입찰에 참여하지 말라고 합디다.” 서울 중구 소공동 반도호텔은 서울 도심의 알짜 부동산으로 이 회장이 수년 전부터 눈독을 들여왔다. 하지만 권력 실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호텔 매각은 경쟁입찰이었지만 삼성이 빠진 채 사실상 단독입찰로 치러져 롯데에 넘어갔다. 롯데는 이곳에 지금의 롯데호텔을 지었다.
박제욱(89) 전 사장은 지난 10일 <한겨레>와 만나 “신격호가 당시 김종필에게 대가로 3천만 달러를 줬다고 이병철이 말했다”고 회상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가 반도호텔 매각과 관련해 롯데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금품수수 증언은 처음이다. (“당시 롯데의 전체 호텔 투자규모가 4,800만 달러였다”는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의 저자 손정목의 기록으로 볼 때, 3천만 달러라는 금액 규모는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후 김종필은 신격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김 전 총리의 대변인 구실을 하는 유운영 전 자민련 대변인은 11일 신격호와의 유착설에 대해 “(김 전 총리가) 언론과의 직접 인터뷰는 어렵다”며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외자 유치를 하면서 롯데가 진출했고, 김 전 총리는 이 과정에서 일부 관여한 정도이며 이후에는 신격호 회장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고 의혹을 부인했다.
박제욱 전 영진흥산 사장이 지난 10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신의 자택에서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 겪었던 비화를 털어놓고 있다. 구순을 앞둔 그가 국내 매체와 인터뷰하기는 처음이다. 그는 올해 3월 중병을 앓은 이후 가슴속에 간직하던 이야기를 남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5·16 주도세력과 가까워지다
박 전 사장과 이병철의 인연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5·16 세력들은 부정·비리 인사들을 대거 구속시켰다. 기업인으로는 삼성의 이병철, 대한양회 이정림 등 12명에 대해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 중 다수는 부정축재 관련 조사를 받았고, 개별적으로 환수재산액을 통보받았다. 이병철 회장은 5·16 세력과 잘 아는 박 전 사장을 찾아와 “이북 출신 기업인은 봐주고, 경상도 출신은 죽이려 한다”고 호소했다. 박 전 사장은 김재춘 합동수사본부장에게 “경제를 살려 가난을 구제하겠다면서 기업을 결딴내면 안 된다. 기업인을 잘 활용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곧 재조사가 이뤄졌다. 환수 대상 부정축재액은 대폭 줄고, 이마저도 국책사업에 투자하도록 선처가 이뤄졌다. 박 전 사장은 “이를 계기로 이병철 회장이 자주 찾았다. 내가 이 회장에게 기업 대표자 모임을 구성해 혁명정부를 도와주라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기업인들은 그해 8월 한국경제인협의회(전경련의 전신)를 발족시키고 회장에 이병철 회장을 추대했다.
박 전 사장은 5·16 당시 언론인이었다. 대한통신, 합동통신, 연합신문, 한국일보, 서울경제신문 등에서 일했다. 기자인 그가 5·16 주도세력과 가깝게 된 데는 연유가 있었다. 그는 교토 동사(東寺)전문학교를 다니다가 해방이 되면서 중도에 귀국했다. 부산 영도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6·25 전쟁이 터지자 종군기자를 자원했다. “5·16 쿠데타 직후 종군기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김재춘 대령(1963년 중앙정보부장 역임)이 도움을 요청했다. 박정희의 국가개발 전략이 옳다고 보고 돕기로 했다. 김재춘 합동수사본장이 나의 정세 판단과 조언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받아줬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충실히 전달하고 실행했다.” 5·16 세력과의 인연은 이후 그의 운명 전체를 바꿨다.
박제욱 전 사장이 1998년 일본에서 발간한 책 <박 정권의 근대화와 후지노 주지로, 박제욱의 한일경협>의 표지.
박 전 사장은 1926년생으로 올해 89살이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하에서 겪은 일에 대해 지난 50년간 침묵을 지켜왔다. 1990년대 중반 한 월간지에 일부 일화가 소개됐으나, 직접 인터뷰는 <한겨레>가 처음이다. 그는 올해 3월 암 발병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이후 <한겨레>에 당시 비사를 직접 털어놓기로 했다. “많은 사람이 내가 한 일과 내가 추구하려던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는 나를 친일파요 심지어 일본과 붙어먹은 매국노라고 깎아내렸다.” 박 전 사장은 고령인 데다 암 치료로 지쳐 있었지만, 과거 행적을 꼼꼼히 정리해 놓은 자료들을 토대로 40~50년 전의 사람 이름과 시점 등을 정확히 기억했다. 그는 1998년 자신의 경험을 담은 <박 정권의 근대화와 후지노 주지로, 박제욱의 한일경협>이라는 책을 일본에서 일본어로 펴냈으나, 한국에는 소개되지 않았다.박 전 사장은 5·16 직후 박정희와의 일화부터 소개했다. 5·16 직후 박정희의 입지는 매우 취약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내지 못하는 게 큰 문제였다. 박정희는 여러 외교 경로를 통해 미국을 설득하고 케네디와의 회동을 타진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박 전 사장이 그때 아이디어를 냈다. “일반 우편제도를 이용해 백악관에 회담 요청 전보를 띄우자고 했다. 박 의장의 전보가 일반 우편물로 전달되리라고는 미 국무부로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미국의 의심을 벗기 위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구절을 전보에 넣었다.” 전보를 친 뒤 열흘이 안 돼 백악관에서 답이 왔다. 그해 11월 중순 박 의장과 케네디 간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현재 ‘징용 보상 회피’ 미쓰비시
당시엔 정경유착 금기 전통 주목
박정희와 경협 파트너로 연결시켜
이후 당인리발전소·포철 건설 등
한일경협 사업은 미쓰비시가 독점
1963년 대선 정치자금 해결사 역할
미쓰비시에 개인적으로 100만달러
빌린 뒤 당인리발전소 결제 때 갚아
1967년 대선 때도 500만달러 조달
김형욱이 돈 들여오며 환전이익 챙겨
삼성 빠진 채 단독입찰로 치러진
반도호텔은 롯데에 넘어갔는데
사무실 온 이병철이 분통 터뜨리며
“신격호가 김종필에게 3천만달러 줬다”
김종필 전 총리 쪽에선 의혹 부인
“나는 한·일 정경유착 세력을 막으려 했다”
역사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대해 1962년 11월 김종필 특사와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의 비밀회담에서 합의된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근거로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재산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 정식 조인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박 전 사장은 1965년 국교정상화 수년 전부터 사전준비가 있었다고 말한다. “박 대통령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경제발전에 활용할 복안을 갖고 답보상태에 있던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서둘렀는데, 일본의 정치인과 경제인 등 정상배들은 개인 이익에만 집착해 한국 내 실세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박 전 사장은 박 정권의 부패를 막으려면 정경유착이 안 된 일본 기업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일회담의 대표에 배의환 전 한은 총재를 대통령에게 추천했다. 배 대표는 나와 뜻을 같이하고, 일본 기업들에 나를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여러 일본 기업이 박 전 사장을 칙사 대접했지만, 정작 그는 미쓰비시에 주목했다. “미쓰비시상사는 정경유착을 금기시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일본 극우파하고도 거리를 뒀다.” (이는 미쓰비시가 일본강점기 강제노역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회피하며 비난받고 있는 현실과 대비된다) 박 전 사장은 미쓰비시상사를 노크했다. “미쓰비시가 한국의 특정 정치인, 관료와 관계를 맺지 않고 나를 통해 박정희 의장에 협력하면 한국 시장 진출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박 전 사장은 드디어 1963년 늦은 봄 미쓰비시상사의 쇼 기요히코 사장과 후지노 주지로 전무(훗날 사장)를 만났다. 미쓰비시 사장은 “당신이 무조건 도와달라고 하는데 나중에 리스크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느냐”고 물었다. 박 전 사장은 “나는 아직 30대로 살아야 할 날이 더 많다. 만약에 미쓰비시의 협력에 (5·16) 군인들이 신의를 저버리면 내 목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이 한창 마무리 단계였던 1965년 2월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미쓰비시상사 차기 사장으로 내정된 후지노 부사장과 독대했다. 박정희는 “전쟁 이후 미국 잉여농산물로 연명하고 있는데 정치인은 싸움만 하고 북한의 위협이 상존한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후지노는 “과거 일제시대에 대해 사죄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중공업 입국에 기여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대통령을 직접 대화 상대로 하겠다고 다짐했다. 박 전 사장은 “후지노의 약속은 일본 정치인과 기업에 끈을 대기 위해 혈안이 돼 있던 한국 권력 실세들의 이권개입과 부정거래에 연루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는 1974년 사장을 그만둘 때까지 이 약속을 지켰다”고 말했다.
제6대 총선이 끝나고 나흘 뒤인 1967년 6월 12일 박제욱 영진흥산 사장(가운데)이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미쓰비시 상사의 후지노 사장(박 사장 오른쪽 첫째)을 비롯해 중공업의 고노 사장(맨 왼쪽), 은행의 다지쓰 행장(왼쪽서 둘째) 등 4명과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맨 오른쪽 얼굴 보이는 이)을 초청해 파티를 열고 있는 모습. 이날 후지노 사장 등은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해 미쓰비시 은행 서울지점 내인가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박제욱 제공
후지노는 1966년 5월 사장에 취임한 뒤 박정희와의 돈독한 관계를 발판 삼아 미쓰비시 계열사들을 동원해 한국과의 경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박 전 사장은 “후지노 사장이 재임 중 매년 서울을 방문해 박 대통령을 만났다. 1965년 6월 한일협정 체결 이후 한국 사업은 미쓰비시가 독점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대한조선공사 확장공사, 당인리 발전소 건설, 동양 최대 규모인 쌍용시멘트 공장 건설, 경인선 전철화 사업, 포항제철소 건설사업 등이 대표적이다.
한-일 국교 수립 이후 대일청구권 자금(8억 달러)이 국가 경제발전에 쓰였다. 박 전 사장은 “한·일 정경유착 세력이 대일청구권 자금 집행 과정에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정권을 대일청구권자금을 이용해 부패시켜 일본의 경제적 지배 아래 놓이게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한국에 대해서도 획책했다. 정권이 썩지 않아야 근대화 작업도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일 유착세력과 관련해 한국 쪽에서는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김동조 주일대사, 이동원 외무장관을, 일본 쪽에서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아베 신조 현 총리의 외조부), 다나카 통산상, 아쿠자인 고다마 요시오, 세지마 류조 이토추 회장(당시는 임원)을 대표적으로 꼽았다.
박 전 사장은 한·일 유착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정부 직제에 없는 대일청구권 사절단이라는 독립기구를 대통령 특명으로 발족시킬 것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대통령은 대일청구권 사절단 운영지침으로 한·일 특정 정치인, 관료, 이들과 유착된 기업은 배제할 것을 지시했다. 대통령의 결단으로 한국을 제2의 인도네시아로 만들려는 음모는 무산됐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내내 권력 실세들의 부패 스캔들은 끊이지 않았다. 경제개발을 위해 도입하는 외자의 혜택을 보려는 기업들이 정권 실세들 앞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외자 도입과 사용은 부총리가 위원장인 외자도입심의위를 거쳤다. 1964년 5월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이 부총리에 임명됐다. 그는 조선은행 부총재 출신의 경제통이었다. 장기영은 취임 1년여 뒤인 1965년 특혜 의혹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의 내사를 받았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비리 증거를 잡기 위해 부총리 집무실의 캐비닛을 뒤져 수표와 돈을 발견했다.” 김형욱은 대통령에 낱낱이 보고했다. “기자 시절부터 알았던 장기영이 도움을 요청해 와 만났는데, ‘한 나라의 재상을 이러면 안 된다’며 불만만 늘어놓고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 실망해서 그냥 나오려는데 장기영이 사직서를 내밀며 ‘나 이렇게 잘리면 매장된다.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박 전 사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대통령이 지금 꼭 해야 할 일이 한일회담이오. 각하한테 가서 ‘제2의 이완용 역할을 내가 하겠다. 앞으로는 부패하지 않겠다. 한일회담 끝날 때까지 봐달라’고 하시오.” 장기영은 바로 청와대로 올라갔다. 그날 오후 장기영은 휘파람을 불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후락-김형욱-김성곤-장기영의 4자회담
일본의 미쓰비시상사가 건설한 당인리 발전소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후지노 사장이 대통령과 처음 만났을 때 미쓰비시가 가장 먼저 참여하겠다고 말한 사업이었고 대통령도 내락했다. 그러나 1966년 말 한전은 도시바와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기로 임시계약을 맺었다. 도시바의 뒤에는 재일동포 기업인이 있었고, 그 뒤에는 장기영 부총리와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있었다. 이후락 실장이 한전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쓰비시와 하는 것으로 이미 결정돼 있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장기영은 한전 사장에게 “미쓰비시가 하려면 일본 차관이 아닌 제3국 차관으로 하겠다는 보증을 24시간 내 받아오라”고 어깃장을 놨다. 박 전 사장은 미쓰비시에 “내가 책임질 테니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장기영은 박 전 사장을 사무실로 불렀다. “부총리실에는 재일동포 기업인도 와 있었다. 그는 30만 달러를 내놓으며 눈감아달라고 사정했지만 거절했다.”
당인리 발전소 건설에는 정치자금 관련 일화가 얽혀 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돈이 없었다. 박 전 사장이 해결사로 나섰다. “미쓰비시에 개인적으로 100만 달러(당시 환율과 물가 수준을 고려해 현재 가치로는 1천억 원 정도 추정)를 빌려와 청와대에 전달했다. 빌린 돈은 당인리 발전소 건설 대금 결제 때 포함해 갚았다.” 박 전 사장은 1967년 6대 대선 때도 박정희를 위해 500만 달러(현재 가치로는 3,500억 원 추정)를 조달했다. 이 돈 역시 미쓰비시에서 빌려왔다. “홍콩 상하이은행에서 인출한 돈을 김형욱 부장이 책임지고 국내로 들여왔다. 대신 김 부장은 공식환율과 암시장 시세 간의 차액(10%)을 챙겼다.”
사방에서 박 전 사장을 제거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965년 가을 정보부에 의해 서울 시내 모 호텔로 끌려갔다. 정보부는 ‘신문기자 출신인데 어디서 돈을 벌었느냐’고 추궁했다. 하지만 내가 사장으로 있던 영진흥산은 사실상 간판뿐인 회사였다.” 박 전 사장이 직접 기업을 운영하지 않은 것은 나름의 원칙 때문이었다. “직접 기업을 운영하면 주변의 질시와 견제로 국가 근대화를 위해 맺은 미쓰비시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 박 전 사장은 김형욱 부장에게 “부장 저기 (창문 밖의) 구름이 보입니까? 지나가는 구름 붙잡고 무엇을 할 겁니까? 앞으로 내가 도울 테니 기다려요”라고 말했다. 그는 곧바로 풀려났다.
박 전 사장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이후락 실장은 노심초사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실장에게 충고했다. “선거(1963년 5대 대선과 6대 총선) 때 수고했으니 앞으로 권한을 좀 내놓으시오. 이 실장이 당 자금 수금과 배분에 이어 외화 배분까지 다 하니 욕을 먹지 않습니까.” 박 전 사장은 권력 실세들 간 충돌을 피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후락, 김형욱, 김성곤, 장기영 네 사람을 조직해야겠습니다. 네 사람이 각자 임무를 분할하되 총괄은 이 실장이 하십시오.” 김성곤 재정위원장은 당 운영과 자금지출에 전념하고, 장기영 부총리는 외자 도입 계획만 하고, 김형욱 부장은 수금을 책임지고, 이후락 실장은 전체를 총괄하는 안이었다. 이후락이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왔다. 이렇게 해서 이후락-김형욱-김성곤-장기영의 4자 회담이 만들어졌다. “4자 회담은 대통령의 측근 실세들의 떡고물을 둘러싼 이전투구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리고 반목하는 실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자처해 나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 차관이 물밀듯이 들어오자 일본 은행의 한국 진출은 당연한 일로 간주했다. 일본 은행 간 경쟁이 치열했다. 1967년 2월 말 일본 총리 사토 에이사쿠가 후지은행의 서울지점 설치를 인가해달라고 청와대에 요청했다. 하지만 박 전 사장은 한-일 경협이 본격화될 무렵 이후락을 통해 박 대통령과 일본 은행 지점 인가 원칙을 이미 정해두었다. “첫째, 은행은 일반 공장 건설 프로젝트와 다르기 때문에 커미션 수수를 불허함. 둘째, 은행 진출에 있어 특정 정치인, 관료, 재벌을 배제할 것. 셋째, 한국의 국시인 수출입국, 중공업 입국에 협력할 수 있는 은행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김형욱 부장에게 조사를 지시했다. “일주일 뒤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인가 원칙에 맞는 곳은 미쓰비시뿐이었다.” 재무부는 미쓰비시 은행에만 내인가 서류를 발급했다. 그러자 방해공작이 시작됐다. “미쓰비시 은행이 3월 9일 인가서를 일본 대장성에 접수하려 하자 담당관리가 거부했다. 장기영 부총리가 일본에 연락해 ‘부총리가 모르는 내인가서는 가짜다. 접수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일본에 있던 박 전 사장은 서울의 이후락 실장에게 전화했다. “대통령이 두 사람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나 바로 귀국하렵니다.” 귀국은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뜻이었다. “이후락이 자신에게 맡기라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파리로 출장 간 장기영에게 달려갔다.” 귀국길에 도쿄에 들른 장기영은 후지노 사장에게 “미쓰비시 은행 서울지점을 인가하기로 했다”고 꼬리를 내렸다. 장기영 부총리는 6개월 뒤인 1967년 10월 3일 경질됐다.
1967년 6월 8일 7대 총선이 끝난 뒤 나흘째 되던 날 청와대에 특별한 손님 4명이 찾아왔다. 미쓰비시상사의 후지노 사장을 비롯해 미쓰비시 중공업과 전기 사장, 미쓰비시 은행장이 박정희를 예방한 것이다. 미쓰비시는 은행 서울지점 내인가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대통령이 이들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을 줬다. 정부가 추진하게 된 영동전철(중앙·태백·영동선 전철화 사업)과 영동고속도로 건설을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이날 한남동 우리 집에서는 미쓰비시 4개사 사장과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이 참석한 가운데 파티가 열렸다.”
미쓰비시 4개사 사장은 돌아가기 전에 박 전 사장을 잡아끌었다. “은행 인가와 관련해 보답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은행 내인가 직후에도 다지쓰 와타루 은행장이 그런 말을 해서 한 번 거절한 적이 있었다. 나는 한 달 뒤에 답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 달 뒤 일본 도쿄의 미쓰비시 은행을 찾았다. “다지쓰 은행장이 통장을 내밀었다. 통장에는 100만 달러가 입금돼 있었다.” 박 전 사장은 통장을 밀어놓고 말했다. “한국은 중공업 입국, 수출입국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협력하시겠습니까?” 은행장은 협력하겠다고 답했다. “이런 방침을 다음 은행장, 또 그다음 은행장에게도 인계하시겠습니까?” 은행장은 그러겠다고 답했다. “저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 한 약속을 글로 써주십시오.” 은행장은 크게 웃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박 전 사장은 “얼마 뒤 다지쓰 은행장이 직접 붓으로 쓴 1967년 7월 27일 자 염서(각서)를 받았다”고 말했다.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지은 포철
본래 구미 차관으로 하려 했는데
실패 대비해 미쓰비시와도 진행
미쓰비시가 일본 내 반대 무마작업
결국 구미쪽의 차관 무산 위기 돌파
초등학교 교사 하다가 종군기자
알고 지내던 김재춘이 도움 요청
박정희에 정세판단과 조언 역할
박태준과 갈등 겪으며 신변 위협
1971년 미쓰비시와는 공식 결별
영동전철과 포항제철
박 대통령의 약속에 따라 철도청과 미쓰비시가 영동전철 기초조사를 마무리한 것은 1967년 말이었다. 그런데 도쿄에서 활동하던 국제적인 유대인 중개상 아이젠버그가 끼어들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1968년 1월 8일 이후락이 박 전 사장에게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인 서정귀씨를 만날 것을 요청했다. 서씨는 “이후락 실장, 김성곤 위원장이 결정한 사안이다. 영동전철 건을 아이젠버그가 주도하는 구주연합회사에 넘겨라. 아이젠버그가 대가로 800만 달러를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박 전 사장은 다음 날 오후 5시 반도호텔 1029호실의 아이젠버그 사무실을 찾았다. “아이젠버그에게 800만 달러를 대기 중이던 나카가와 미쓰비시 은행 서울지점장에게 주라고 했다. 아이젠버그는 말도 않고 그냥 나가버렸다.” 다음날 이후락이 최후통첩했다. 그는 맞섰다. “대통령이 미쓰비시에 약속한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다. 나는 정의와 신의를 빼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미쓰비시에 목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락은 아무 말도 안 했다. 결국, 2억 달러 규모의 영동전철 프로젝트는 아이젠버그에게 넘어갔다.
포항제철소는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지어졌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은 자신의 회고록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에서 1969년 2월 당시 자신의 ‘하와이 구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썼다. 미국에서의 차관 도입 협상이 막혀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귀국길에 잠시 하와이에 들렀다가 일본 자금으로 제철소를 짓자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 전 사장이 전하는 실상은 큰 차이가 있다. “(영동전철 건으로 인한) 박정희와 후지노 간의 관계 단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바로 포철 사업의 대일 전환이었다.”
포철 건설은 일찍이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기간산업육성 계획에 따라 추진이 결정됐다. 일본의 철강업계는 1964년 기술조사를 했고, 자체 비용으로 100만 톤 규모의 제철사업계획서까지 만들어 한국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경제기획원은 1966년 미국 중심의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을 구성한다고 발표했다. KISA의 배후에는 아이젠버그가 있었다. 배신을 당한 셈인 일본은 차관단에 불참하기로 했다. 정부는 1967년 10월 서방 중심 국제차관단과 6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 건설 기본계약을 맺고, 부지로 선정된 포항에서 기공식까지 거행했다. 하지만 세계은행과 미국 수출입은행 등이 차관 공여에 난색을 보이며 낙관에 봉착했다.
박 전 사장은 (하와이 구상 1년 전인) 1968년 2월 초 대통령에게 “포철은 어떻게 진행되느냐”고 물었다. 이후락이 옆에서 “그건 다 끝났다”고 가로챘다. 박 전 사장이 대통령을 설득했다. “제철소 굴뚝에 연기가 나야 다 된 것 아닙니까. 이 실장 말대로 99%가 다 됐더라도 1%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99%가 0%가 안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는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차관단을 통한 사업 추진을 계속하되, 만약 실패할 경우 저와 미쓰비시에 사업권을 넘겨주십시오.” 대통령은 수락했다. 박 전 사장은 직접 일본으로 넘어가 용건은 숨긴 채 대통령이 만나고 싶어한다고 설득해서 후지노 사장을 서울로 데려왔다.
박 대통령은 2월 6일 금요일 오전 9시 30분 후지노 사장을 만나 “그동안 포철은 일본에서 조사도 하고 수고했는데 아무 양해 없이 미국 주도 차관단을 통해 추진되고 있다고 보고받았다”며 사과했다. 이어 “나는 포철 사업을 일본과 하기를 바란다. 후지노 사장이 일본을 설득해 달라”고 간청했다. 포철 프로젝트는 이미 국제간에 진행 중이어서 일본과의 사업 추진은 극비였다. 후지노는 일본으로 돌아가 미쓰비시 내부 반대파를 설득하고, 일본 철강업계에도 고개를 숙이며 협조를 구했다. 또 일본 정관계 요로를 통해 차관 공여를 위한 사전작업을 했다. 후지노는 두 달 뒤인 68년 4월 “큰 고비는 넘겼다”며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박태준과 세지마 이토추
1년 뒤인 1969년 4월과 5월 세계은행과 미국 수출입은행이 차관 공여를 공식 거부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포철 사업을 은밀하게 착착 진행했다. 드디어 1969년 8월 한국 요청으로 한-일 각료회담에서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포철 사업을 추진하기로 의결됐다. 박 전 사장은 “포철 사업을 일본으로 전환한 것은 박 대통령의 결단이 주효했다. 그러나 후지노가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감동이나 한국의 경제발전을 진정으로 바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대안을 생각해내고, 후지노 사장을 설득한 박제욱이 없었다면 포철 사업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실세들의 부패를 막기 위해 조직한 4자 회담도 한계에 봉착했다. 박 전 사장은 “부패 감시자로서 역할을 자임한 나는 칼날 위를 걷는 입장이었다”고 회상했다. 1968년 3월 이후락 실장이 부하를 시켜 미쓰비시에 “앞으로는 박제욱 대신 서정귀와 거래하라”고 통보했다. 박 전 사장이 미쓰비시 은행 서울지점 허가와 관련해 500만 달러를 착복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것은 나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만약 내가 대가를 받기 시작했다면 권력 주변에서 그렇게 오래 생존할 수 없었다. 나는 미쓰비시 은행으로부터 돈 대신 각서를 받았다.” 박 전 사장은 각서를 김형욱 부장에게 전달했다. 김형욱은 즉각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그러면 그렇지. 김 부장 어전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후락, 김형욱, 김성곤, 서정귀, 박종규, 박제욱, 나카가와 미쓰비시 은행 서울지점장 등 7명이 청와대에 모였다. “각서를 본 이후락은 부르르 떨었다. 이후락은 대통령을 만난 뒤 ‘없던 일로 하자’고 말했다.”
1969년 여름 도쿄에서 열린 한-일 각료회담을 계기로 포철 건설이 본격화되자 박태준 포철 사장이 스타로 부상했다. 당시 포철의 조강 규모는 100만 톤이고, 신일본제철은 1,000만 톤이었다. 100만 톤 규모 제철소의 원료 구매가격이 1,000만 톤 제철소보다 비싼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박 전 사장은 신일철에 특별대우를 요청했다. “우리가 1,00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지을 때까지 원료 구매가격을 1,000만 톤 가격에 해달라고 요청해 양해를 구했다. 대신 미쓰비시는 나의 공로를 인정해 원료값의 1%를 커미션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를 박태준이 알고 뒤를 캐기 시작했다.” 박 전 사장은 미쓰비시에 “박태준 몫으로 100만 달러를 주라”고 말했다. 일종의 입막음용이었다. “박태준은 이 돈으로 부하를 시켜 호주에 별도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이 회사를 철광석 거래 창구로 활용했다.”
1969년 후반기 박태준은 미쓰비시와 각종 계약을 체결하면서 내부 인사들과 가까워졌다. “미쓰비시 내부 반대파가 박태준에게 1967년 대선 때 나에게 500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알려줬다. 박태준은 이를 김성곤에게 알렸고, 김시진 청와대 정보비서관을 통해 보안사에 ‘박제욱이 500만 달러를 받아 이후락, 김형욱과 착복했다’고 제보했다. 김시진은 육사 5기로 박태준과 동기였다.” 박 전 사장은 1969년 8월 토요일 새벽 보안사로 끌려갔다. 그는 “나는 자유당 때부터 신문기자를 한 사람이다. 신문기자는 남에게 발목 잡히는 일을 안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 박 대통령이 이후락, 김형욱과 함께 보안사령관을 불렀다. “대통령이 ‘임자 뭐 하고 있어. 박제욱은 왜 데려갔어’라며 호통쳤다. 나는 바로 풀려났다.”
박태준은 박제욱 제거 계획이 실패하자 일본의 세지마 류조 이토추 회장과 손을 잡았다. 세지마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참여한 극우파로,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대인 만주군 당시 박정희의 직속상관이었다는 인연으로 한-일 외교사의 중요 고비 때마다 막후에서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박태준은 세지마에게 나를 제거해주면 한국 사업을 당신과 하겠다고 제의했다. 세지마는 미쓰비시 내 반대파를 움직여 정치깡패 고다마에게 나를 살인 청부했다.” 당시 고다마 수하에는 악명 높은 야쿠자들이 있었다. “대통령도 나를 보호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살기 위해 미쓰비시와의 결별을 준비했다. 세지마는 훗날 박태준의 일본 내 비자금을 관리해주었다.”
신군부 들어선 뒤 미국으로 건너가
1971년 1월 박 전 사장은 미쓰비시와의 결별선언서를 작성해 후지노 사장에게 보냈다. “대통령은 이후락에게 나의 생각을 바꾸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내 결심은 단호했다.” 공식결별은 1971년 2월 이뤄졌다. 미쓰비시가 청산서류를 갖고 서울을 방문했다. “미쓰비시가 20만 달러를 내놓았다. 내가 운영하던 영진흥산과 영진전기의 영업권과 미쓰비시의 한국 내 대리권을 포기하는 대가로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하지만 이익을 챙기기 위해 일을 한 게 아니므로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박제욱 전 사장은 1973년 2월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의 국방장관실에서 술탄 이븐 압둘아지즈 국방장관과 만나 한국이 사우디의 안보를 지원하는 대신 원유 광구를 확보하게 해달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 메시지를 전달한 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술탄 장관은 사진에다 친필 사인을 했다. 박제욱 제공
박 전 사장은 이후 영진해운이라는 개인회사를 운영하면서, 박 대통령의 밀명을 수행했다. 1973년 2월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술탄 이븐 압둘아지즈 국방장관과 만났다. 한국이 사우디의 안보를 지원하는 대신 원유 광구를 확보하게 해달라는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했다. 1974년 8월 19일 주프랑스 사우디 대사의 방한 일정이 잡혔다. 하지만 문세광의 8·15 피격 사건이 발발해 방문이 무산되면서 한-사우디 간 안보경협은 좌초됐다. 박 전 사장은 1979년 3월 박 대통령의 밀명으로 중국 실권자 덩샤오핑과의 회담을 극비리에 추진했다. 그해 10월 초 박정희-덩샤오핑 간 핫라인이 성사 일보 직전까지 진전됐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며칠 뒤인 10월 26일 유명을 달리하면서 계획은 무산됐다. 한국이 중국과 수교한 것은 13년 뒤인 1992년 8월이었다.
박 전 사장은 박정희라는 보호막이 사라지고, 1980년 신군부가 쿠데타로 들어서며 신변 위협이 커지자 1983년 미국행을 택했다. 기업은 물론 한남동 집까지 빼앗겼다. 미국에서는 뉴욕 맨해튼의 1평 반짜리 가게에서 신문 및 과자류 등을 팔아 가족과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1996년 13년 만에 귀국했다.
출처 박정희와 미쓰비시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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