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작위 받은 ‘반역자’ 이완용 등 총 150여명
1910년 이완용 등 76명 첫 작위… 세습포함 총 150여명
[문화일보] 최현미 기자 | 게재 일자 : 2015년 08월 19일(水)
유길준·한규설 등은 거부… 민영린은 아편 흡입죄로 박탈
한일병합조약 제5조 따라 신설… 후·백·자·남작 등 華族制 준용
강제병합 공로자·왕족 등 포함… 식민통치 선전하는 전위대 역할
홍영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최근 자신의 조부가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작위를 받았다고 사죄를 하면서 ‘일제의 작위’, 이른바 ‘조선 귀족’이 또다시 대중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조선 귀족은 일본이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중국 고대 하왕조와 주왕조의 선례를 참고해 만든 공·후·백·자·남작 다섯 등급의 화족(華族) 제도를 준용해 만든 특수 계급이다. 조선 귀족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 강제 체결 직후 작위를 받은 수작자 76명을 포함해 선대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은 습작자까지 포함해 140∼150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작위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고 독립 운동으로 작위가 강제 박탈된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나락으로 추락하던 그때, 일본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해방 후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처벌 대상이 된 조선 귀족,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해 친일 반민족행위로 규정된 수작·습작을 한 조선 귀족은 누구이고, 또 그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리했다.
조선 귀족은 1910년 8월 29일 공표된 한일병합조약 제5조와 일본 황실령 ‘조선 귀족령’에 따라 신설됐다가 1947년 5월 2일 일본 황실령 제12호 ‘황실령과 부속법령 폐지의 건’으로 폐지됐다. 그 당시에도 선정 이유나 경력이 비밀에 부쳐졌기에 각각의 선정 기준이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전모도 완벽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일제가 조선 귀족을 선정할 때 가장 염두에 둔 조건은 강제병합 과정에서의 공로였고, 여기에 대한제국 황실을 배려해 이왕의 혈족과 준왕족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제가 조선 귀족령을 제정하고 귀족 집단을 만든 것은 개항 이래 한국 침략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식민 통치를 앞장서 선전하고 정당화할 전위대로서 피지배민의 최상층인 조선 귀족을 만들어 적극 이용했다”고 풀이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1910년 9월 초 자격이 될 만한 이들에 대한 심의에 착수했다. 통감부가 대상자를 1차로 검토해 일본 정부에 보냈고, 각의 논의와 궁내성 최종 심의를 거쳐 일왕이 재가하는 절차가 이뤄졌다.
결국 그해 9월 30일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등 76명 명단이 확정됐다. 원래 공작 작위도 수여할 계획이었으나 가능한 주요 대상인 대한제국 황족의 방계가 별도로 ‘공족’으로 칭해지면서 수여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작 작위는 왕족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고종의 인척 이해승, 순종의 장인 윤택영, 개화파 박영효가 받았다.
을사오적 이완용, 순종의 첫 부인 순명효황후와 남매 관계인 민영린, 내부대신이었던 왕족 이지용은 백작, 창씨개명 1호 송병준, 정미칠적 조중응은 자작 작위를 받았다.
나중에 이완용은 백작에서 후작으로, 송병준과 고희경은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작했다. 그 후 추가로 작위를 받은 경우는 1924년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가 남작 작위를 받은 것이 유일하다.
여기에 작위를 계승한 습작자를 포함해 조선귀족은 140∼150여 명에 이른다.
규모와 관련해 민족문제연구소는 140여 명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는 150여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1910년 습작자 76명 중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한 사람은 8명이다.
강제병합이 이뤄지자 음독 자결한 관리 김석진, 역시 자결을 시도해 작위를 반납한 조정구 그리고 작위를 거절한 유길준, 민영달, 윤용구, 조경호, 한규설, 홍순형이다.
유길준은 그해 10월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글을 보내 남작 작위를 반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제는 유길준에게 남작 중 최고 액수의 은사 공채를 수여하며 회유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이와 함께 자작 김윤식·이용직, 남작 김가진·김사준은 ‘독립운동’과 관련해 ‘실작’했다.
이용창 연구원은 “일제의 일방적 강요 때문에 작위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작위 거절, 거부 및 반납은 본인이 얼마든지 능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정치적 이유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작위가 박탈·반납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백작 민영린은 아편 흡입죄로 작위를 잃었고, 남작 조희연은 빚에 쪼들리다가 품위 손상으로 작위를 반납했다.
이들은 ‘조선 귀족령’에 근거해 일본 화족과 같은 예우를 향유할 권리, 작위 세습의 권리 등을 보장받았다.
이들 자제는 무시험으로 경성유치원과 가쿠슈인(學習院)에 입학할 수 있고, 결원이 발생할 경우 무시험으로 도쿄(東京)제국대, 교토(京都)제국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은사공채 증권도 교부받았고, 조선귀족회 차원에서 조합을 설립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 및 삼림 매각 과정에서 무상 대부 및 증여도 받았다.
그 대신 조선귀족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쓸모 있는 최상위 협력층으로 각종 통치기구나 사회단체, 수탈기구에 참여해 활동했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문화 통치로 전환한 식민정책과 더불어 다양한 계층의 지식인 집단이 성장하면서 이들의 역할도 정체됐다.
출처 일제에 작위 받은 ‘조선 친일 귀족’ 이완용 등 총 150여명
1910년 이완용 등 76명 첫 작위… 세습포함 총 150여명
[문화일보] 최현미 기자 | 게재 일자 : 2015년 08월 19일(水)
유길준·한규설 등은 거부… 민영린은 아편 흡입죄로 박탈
한일병합조약 제5조 따라 신설… 후·백·자·남작 등 華族制 준용
강제병합 공로자·왕족 등 포함… 식민통치 선전하는 전위대 역할
홍영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최근 자신의 조부가 일제강점기에 중추원 참의를 지내고 작위를 받았다고 사죄를 하면서 ‘일제의 작위’, 이른바 ‘조선 귀족’이 또다시 대중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조선 귀족은 일본이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중국 고대 하왕조와 주왕조의 선례를 참고해 만든 공·후·백·자·남작 다섯 등급의 화족(華族) 제도를 준용해 만든 특수 계급이다. 조선 귀족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 강제 체결 직후 작위를 받은 수작자 76명을 포함해 선대로부터 작위를 물려받은 습작자까지 포함해 140∼150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작위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고 독립 운동으로 작위가 강제 박탈된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나락으로 추락하던 그때, 일본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해방 후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처벌 대상이 된 조선 귀족,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거해 친일 반민족행위로 규정된 수작·습작을 한 조선 귀족은 누구이고, 또 그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정리했다.
조선귀족은 누구
조선 귀족은 1910년 8월 29일 공표된 한일병합조약 제5조와 일본 황실령 ‘조선 귀족령’에 따라 신설됐다가 1947년 5월 2일 일본 황실령 제12호 ‘황실령과 부속법령 폐지의 건’으로 폐지됐다. 그 당시에도 선정 이유나 경력이 비밀에 부쳐졌기에 각각의 선정 기준이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전모도 완벽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일제가 조선 귀족을 선정할 때 가장 염두에 둔 조건은 강제병합 과정에서의 공로였고, 여기에 대한제국 황실을 배려해 이왕의 혈족과 준왕족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제가 조선 귀족령을 제정하고 귀족 집단을 만든 것은 개항 이래 한국 침략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식민 통치를 앞장서 선전하고 정당화할 전위대로서 피지배민의 최상층인 조선 귀족을 만들어 적극 이용했다”고 풀이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1910년 9월 초 자격이 될 만한 이들에 대한 심의에 착수했다. 통감부가 대상자를 1차로 검토해 일본 정부에 보냈고, 각의 논의와 궁내성 최종 심의를 거쳐 일왕이 재가하는 절차가 이뤄졌다.
결국 그해 9월 30일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등 76명 명단이 확정됐다. 원래 공작 작위도 수여할 계획이었으나 가능한 주요 대상인 대한제국 황족의 방계가 별도로 ‘공족’으로 칭해지면서 수여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작 작위는 왕족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고종의 인척 이해승, 순종의 장인 윤택영, 개화파 박영효가 받았다.
을사오적 이완용, 순종의 첫 부인 순명효황후와 남매 관계인 민영린, 내부대신이었던 왕족 이지용은 백작, 창씨개명 1호 송병준, 정미칠적 조중응은 자작 작위를 받았다.
나중에 이완용은 백작에서 후작으로, 송병준과 고희경은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작했다. 그 후 추가로 작위를 받은 경우는 1924년 이완용의 차남 이항구가 남작 작위를 받은 것이 유일하다.
여기에 작위를 계승한 습작자를 포함해 조선귀족은 140∼150여 명에 이른다.
규모와 관련해 민족문제연구소는 140여 명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는 150여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작위를 거부한 사람들
1910년 습작자 76명 중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한 사람은 8명이다.
강제병합이 이뤄지자 음독 자결한 관리 김석진, 역시 자결을 시도해 작위를 반납한 조정구 그리고 작위를 거절한 유길준, 민영달, 윤용구, 조경호, 한규설, 홍순형이다.
유길준은 그해 10월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글을 보내 남작 작위를 반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제는 유길준에게 남작 중 최고 액수의 은사 공채를 수여하며 회유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이와 함께 자작 김윤식·이용직, 남작 김가진·김사준은 ‘독립운동’과 관련해 ‘실작’했다.
이용창 연구원은 “일제의 일방적 강요 때문에 작위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작위 거절, 거부 및 반납은 본인이 얼마든지 능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정치적 이유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작위가 박탈·반납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백작 민영린은 아편 흡입죄로 작위를 잃었고, 남작 조희연은 빚에 쪼들리다가 품위 손상으로 작위를 반납했다.
권리와 행태들
이들은 ‘조선 귀족령’에 근거해 일본 화족과 같은 예우를 향유할 권리, 작위 세습의 권리 등을 보장받았다.
이들 자제는 무시험으로 경성유치원과 가쿠슈인(學習院)에 입학할 수 있고, 결원이 발생할 경우 무시험으로 도쿄(東京)제국대, 교토(京都)제국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경제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은사공채 증권도 교부받았고, 조선귀족회 차원에서 조합을 설립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임야 및 삼림 매각 과정에서 무상 대부 및 증여도 받았다.
그 대신 조선귀족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에 쓸모 있는 최상위 협력층으로 각종 통치기구나 사회단체, 수탈기구에 참여해 활동했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문화 통치로 전환한 식민정책과 더불어 다양한 계층의 지식인 집단이 성장하면서 이들의 역할도 정체됐다.
출처 일제에 작위 받은 ‘조선 친일 귀족’ 이완용 등 총 150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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