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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우리가 소주 한 병을 5,000원에 사먹어야 하는 이유

우리가 소주 한 병을 5,000원에 사먹어야 하는 이유
담합의 경제학, 피해는 소비자의 몫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최종업데이트 2015-12-06 15:08:06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네, 소주 뭐로 드릴까요?”

이 간단해 보이는 대화에는 사실 한국 소주 업계의 수많은 역사적 부침이 담겨 있다. 과거 어느 시절만 해도 “소주 한 병 주세요!”라는 손님의 주문에 “뭐로 드릴까요?”라고 되묻는 ‘이모’는 없었다. 소주 한 병을 주문하면 그냥 소주 한 병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소비자들에게는 ‘어떤 소주’를 마시느냐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

소주는 서민의 술이다. 한국 민중들은 수 십 년 동안 고난에 지친 삶을 쓰디 쓴 소주 한 잔으로 풀었다. 소주는 서민만 위로하는 게 아니라 정부도 위로한다. 국세청 통계연보에 따르면 2014년 소주에서 걷힌 주세는 1조 522억 원, 맥주에서 걷힌 주세는 1조 4,543억 원이다.

맥주에서 걷힌 세금이 총액 기준으로는 조금 더 많다. 두 술의 주세율이 72%로 같으니 세금 걷힌 기준으로만 보면 팔린 병 숫자도 비슷하다고 봐야 한다. 맥주 가격이 소주보다 조금 비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주는 독해야 7도인 반면 소주는 약해도 16도다. 한국 국민들은 소주를 통해 적게는 두 배, 많게는 세 배까지 더 많은 알코올을 섭취했다. 누가 뭐래도 아직 한국을 대표하는 서민의 술은 ‘싼 값에 빨리 취할 수 있는’ 소주다.

그런데 2012년 소주 회사들의 담합 인상으로 식당 소줏값이 4,000원으로 오르더니 2015년에는 그 앞자리가 5로 바뀔 태세다. 소주 업계의 지존으로 불리는 하이트진로의 ‘참이슬’이 3년 만에 출고 가격을 5.62% 올렸기 때문이다. 참이슬 출고 가격은 961.7원에서 54원 올라 1,015.7원이 됐다. 지존이 길을 터주니 롯데주류 등 후발업체들의 입장도 편해졌다. 3년 전에도 하이트진로가 먼저 가격을 올리자 후발업체들이 줄줄이 출고 가격을 올렸다.

문제는 “소줏값 고작 54원 오른 게 뭐 대수냐”고 말할 수 없는 현실에 있다. 출고 가격이 54원 오르면 도매가격은 100~200원 오른다. 그리고 이 정도 도매가격이면 식당에서는 500~1,000원 단위로 술값이 뛴다.

수도권 식당의 소주 가격은 싼 곳은 3,000원, 비싼 곳은 4,000원이다. 3,500원이라는 애매한 가격이 남아있는 지방과 달리 서울 대부분 음식점들은 술값의 끝자리를 1,000원 단위로 맞춘다. 기존에 4,000원에 소주를 팔던 업체들이 가격을 5,000원으로 올릴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가 이것이다. 서민의 술 소주의 가격이 ‘부러진 1만 원’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 대형 마트의 소주 진열대. 하이트진로의 소주 가격 인상에 따라 소주 가격은 줄줄이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뉴시스


소주 가격은 경쟁과 담합의 역사

선발업체인 하이트진로가 가격을 54원 올렸을 뿐인데 서민들이 받을 가격 충격은 ‘소주 5,000원 시대’로 현실화된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왜 이런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주 가격이 업체의 담합 여부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한국의 소주 업체들은 독점과 담합, 그리고 경쟁을 반복했다. 업체들이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경쟁을 할 때 민중들은 비교적 싼 가격에 품질 좋은 소주를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업체들이 담합 모드로 들어가면 ‘비싼 소주’의 폐해는 고스란히 서민들의 몫이 됐다.

한국에서 소주가 대중화된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1976년 매우 독특한 제도를 실행함으로써 몇몇 소주 업체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보장해줬다. 그것이 바로 ‘자도주 의무 구매’ 규정이었다. 일부 업체의 시장 독점을 방지하고, 지방 소주 업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정부가 시도별로 단 한 개의 소주 업체에게만 생산 권한을 준 뒤 소주를 각 시도에서 최소한 50% 이상 소비하도록 한 것이다.

이 규정 덕에 1970년 254개나 됐던 군소 소주 업체들이 줄줄이 퇴출됐다. 대신 수도권의 진로, 부산의 대선, 경남의 무학, 전남의 보해, 경북의 금복주, 강원의 경월 등 각 시도를 대표하는 업체들이 압도적 지역 시장점유율로 성장을 거듭했다. “이모, 소주 한 병 주세요!”라는 손님의 주문에 이모가 “소주 뭐로 드릴까요?”라고 되물을 필요가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시기 소주 업체들은 누워서 떡 먹기 장사를 했다. 특히 수도권을 장악한 진로의 위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진로는 소주 판 돈으로 운송, 신용금고, 건설, 유통 등에 문어발식으로 진출해 1996년 재계 서열 24위까지 올랐다. 다행히 이 시기 정부가 소주 가격을 강력히 통제해서 소주 가격이 폭등하지는 않았지만, 품질은 형편이 없었다. 특히 강원 지역 경월소주의 악명은 대단했는데, 1980년대 “대학생들이 강원도에 MT를 갈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경월소주”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자도주 의무 구매 규정은 1992년 폐지됐다가 1995년 부활했고, 1996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이후에야 완전히 사라졌다. 규정이 사라지자 소주 업체들의 본격적 경쟁이 시작됐다. 이 시기가 바로 서민들이 품질 좋은 소주를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었던 ‘소주의 전성기’였다. 시장의 경쟁이 소비자들에게 혜택으로 돌아온 것이다.

1993년 악명 높았던 강원의 경월소주를 인수한 두산은 1994년 초록색 병의 ‘그린’을 앞세워 시장에 일대 돌풍을 일으켰다. ‘대관령 청정수를 사용한 부드러운 술’을 앞세운 그린은 출시 7개월 만에 1억 병을 팔아치우며 시장점유율을 30%대로 끌어올렸다. 1996년 대선도 ‘시원’을 내놓았고, 무학도 ‘NEW화이트’, 금복주도 ‘보배 20도’를 출시하며 다양한 맛의 소주가 등장했다. 진로도 21도 소주 ‘나이스’로 방어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맛 경쟁과 함께 가격 경쟁도 치열해졌다. 이 시기 식당 소주 가격은 오랫동안 2,000원 벽을 넘지 않았다. 여기에 4,000원이라는 가격 부담은 있었지만 맛과 풍미를 다양화한 김삿갓, 청산리벽계수, 청색시대, 참나무통맑은소주 등 프리미엄 소주도 잇달아 출시되며 애주가들의 취향을 저격했다.

소주 업체들의 경쟁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멈춰 섰다. 경기가 위축되자 소주 업체들은 다시 담합의 유혹에 넘어갔다. 1998년 진로의 참이슬이 시장을 석권하자 신제품 출시도 중단됐고, 대부분 업체들은 경쟁을 포기한 채 지역 마케팅에 치중하며 살아남기 전략을 구사했다.

2006년 두산이 ‘처음처럼’을 출시하면서 평화가 깨졌다. 처음처럼은 소주의 알코올 도수를 20도 아래로 떨어뜨린 혁신적 제품이었다. 특히 두산은 종전 21도짜리 소주 때 출고 가격이었던 800원을 730원까지 떨어뜨리는 공격적 가격 정책도 병행했다. 경쟁을 통해 소주의 가격이 떨어진 최초의 사례가 나타난 것이다. 처음처럼은 5%대였던 시장점유율을 2006년 말 13%대로 바짝 끌어올렸다. “이모, 소주 한 병 주세요”라는 손님의 주문에 “소주 뭐로 드릴까요?”라는 반문이 처음 나온 때가 바로 이 시절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고 경기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소주 업체들은 다시 담합의 길로 빠져들었다. 시장점유율이 고착화되자 업체들은 가격 경쟁을 포기했다. 2012년 하이트진로가 가격을 올리자 후발업체들이 줄줄이 가격 인상에 동참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적어도 가격에 대해서만큼은 장기 담합의 카르텔이 암묵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정부의 묵인 속에 점프한 소줏값, 수혜자와 피해자는 누구?

업체들이 형성한 침묵의 가격 카르텔에는 뜻밖의 동참자가 있다. 바로 소주를 파는 식당과 주점들이다. 업주들에 따르면 실제 요식업체들이 돈을 남기는 가장 큰 품목은 안주가 아니라 술이다. 안주는 재료값도 들고, 요리를 만드는 데 인건비도 든다. 설거지 등 뒤처리 비용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소주는 도매업체에서 병 당 1,000원대 초반에 들여오면 아무 가공 없이 4,000원에 팔 수 있다.

참이슬 가격이 54원 오르면 식당 소줏값이 1,000원씩 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업주들이 소주 출고 가격 인상을 계기로 그 동안 올랐던 인건비나 식재료 값 등 다양한 부담을 술값 인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장사가 안 돼 고생하는 중소상인들을 향해 “소주로 폭리를 취한다”고 비난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출고가격 54원 인상이 소비자가격 1,000원 인상으로 나타나는 기괴한 현상에서 식당 주인들의 암묵적 참여가 있었음을 부인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 비교적 간단해 졌다. 하이트진로의 소주 가격 인상으로 손해를 보는 쪽은 서민들이다. 반면 혜택을 보는 쪽은 소주 제조업체와 식당, 그리고 정부다. 정부가 수혜자의 반열에 오르는 이유는 세금 때문이다.

소주 출고 가격에는 주세와 교육세, 그리고 부가가치세가 붙는다. 소주의 주세율은 맥주나 양주와 마찬가지인 72%다. 여기에 21.6%의 교육세가 추가로 붙는다. 그리고 소주가 소비자들한테 팔릴 때 10%의 부가세도 더해진다.

그래서 이번에 업체들이 소주 가격을 올리면 정부는 막대한 세수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 하이트진로가 소주 가격을 54원 올리면 병 당 주세도 38원이 늘어난다. 전체 주세 규모에 단순히 대입하면(소주 판매가 줄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1년에 526억 원의 주세가 추가로 걷힌다. 여기에 교육세와 부가가치세까지 늘어나니 정부는 손 안대고 코를 풀 수 있다.

물론 이번 가격 인상은 정부의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소주는 물가관리 품목이다. 가격을 올리기 전 업체들은 정부(국세청)에 인상 요인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다. 정부가 이번 하이트진로의 소주 가격 인상을 독려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방조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업체들이 얻을 이익도 막대하다. 지난달 30일 신한금융투자는 “하이트진로의 소주 가격 인상으로 연간 400억 원 이상 매출이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래에셋증권도 “설혹 가격 인상으로 판매량이 2~3% 준다 해도 영업이익은 되레 8~9% 늘어날 것”이라며 긍정적 분석을 내놓았다.


담합의 경제학, 피해는 소비자의 몫

▲ 여름철 피서지에서 판매촉진 캠페인을 벌이는 하이트진로. 수입맥주의 공세를 받고 있는 맥주 시장에서는 일방적 가격 인상이 쉽지 않다. ⓒ뉴시스
사실 한국 시장에서 소수의 업체들이 가격을 담합한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몇몇 시장에서 업체들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칼날을 피해 교묘히 담합의 카르텔을 유지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SK가스와 LG가스 등 두 LPG가스 업체는 가스 가격은 물론, 심지어 매년 주주들에게 주는 배당금마저 똑같이 맞췄다. 여러 업체들이 경쟁을 펼치는 라면 시장에서도 주도 제품인 신라면의 가격이 오르면 나머지 제품들의 가격이 줄줄이 따라 오르는 현상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라면과 소주는 다르다. 라면은 대체제가 있는 상품이다. 반면 소주는 대체제가 없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을지 모르겠지만(사실 그녀가 이 말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서민들은 “소주가 비싸면 맥주 마시면 되지”라고 말할 수 없다. 그 가격에 그 정도 알코올을 섭취할 수 있는 상품은 소주가 유일(비록 5,000원이어도)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과점 시장을 거쳤던 맥주 시장은 해외 맥주 브랜드의 자유로운 수입으로 시장의 주도권이 소비자에게 넘어갔다. 한국 맥주 업체들은 더 이상 담합을 통해 멋대로 가격을 올릴 수 없다. 한국 맥주와는 또 다른 맛을 자랑하는 수준 높은 세계 맥주 브랜드를 소비자들이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덕분이다.

서민의 술 소주, 대체가 불가능한 이 술 가격은 하이트진로의 기습적 가격 인상으로 5,000원 시대를 맞을 판이다. 서민들은 한 동안 불만을 터뜨리겠지만, 어쩔 수 없이 또 그 가격에 적응해 시린 가슴을 한 잔 술에 담아 날릴 것이다.

공급 업체들의 담합은 이래서 무섭다. 굳이 “시장경제의 최대의 적은 독점”이라는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의 고언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정부와 업체, 그리고 주점으로 엮인 이 카르텔 안에서 최대 피해자가 서민들임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여전히 한국의 민중들에게는 싼 가격에 시름을 녹일 수 있는 한 잔의 소주가 절실한데도 말이다.



출처  담합의 경제, 우리가 소주 한 병을 5,000원에 사먹어야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