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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어머니들 “5.18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오월 어머니들 “5.18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혈육 잃은 어머니·사형수 부인 등, 5·18 36주년 전야제서 눈물로 ‘증언’
[민중의소리] 김주형 기자 | 최종업데이트 2016-05-18 03:01:04


▲ 전야제에 참석한 5월 열사 유족 어머니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비롯한 5월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다. ⓒ김주형 기자

“계엄군 삽시간에 금남로를 공포로 물들였다. 우리 학생들이 골목마다 쓰러져갔다.” 최근까지 5·18 당시 첫 희생자(5월 19일)로 알려졌던 김경철 열사의 어머니 임종금 씨가 당시 금남로에서 일어난 계엄군의 폭력 만행에 대해 증언했다. 그 밖에도 몇몇 오월 어머니들이 5·18 전야제에서 다양한 증언을 하는 등 36주년 5·18 전야제는 예전과는 차별화됐다.

36주년 5·18 전야제는 17일 오후 7시 20분 광주 동구 금남로에서 열렸다. 이날 전야제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5·18민중항쟁에서 자식, 동생 등을 잃은 오월 어머니, 오월 여성들이 자신이 겪었던 전두환 신군부의 학살 만행을 특설무대에서 직접 증언했다.

▲ 김경철 열사 어머니 임종금씨가 5·18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김주형 기자

특히 임종금 씨는 이날 무대에서 아이들과 함께한 오월의 소나무 합창단으로 무대에 올라서 ‘솔아 푸르른 솔아’ ‘임을 위한 행진곡’ 등 2곡을 부른 뒤 마이크를 들었다.

임 씨는 “5월 19일 우리 아들은 곤봉에 맞아서 피를 흘리며 이 세상을 하직했다”면서 “그 한을 어디에다 말할 수 없고 제대로 울음도 울지 못했다. 그때부터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경찰서로, 산골짝으로 쫓아다니면서 버려지면 혼자 땅을 치며 울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래도 광주시민들이 우리 힘이 돼주고,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를 지켰고, 도왔다”면서 “우리는 그 힘으로 지금까지 싸워오다가 오늘날 말 한마디 할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우리 유족들이 한데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광주시민들을 향해 고마움을 전했다.

발언하는 내내 임 씨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려 무대 영상에 크게 비쳤고, 발언을 마치자 전야제에 참석한 1만여 명 시민들이 뜨거운 박수로 격려했다.

▲ 5·18 당시 최후 항쟁지 옛 전남도청에서 아들 문재학 열사를 잃었던 김길자 여사가 증언하고 있다. ⓒ김주형 기자

5·18 당시 최후격전지 옛 전남도청에서 희생된 문재학 열사 어머니 김길자 씨는 “(옛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정부는 폭도로 몰았다”면서 “그때부터 내 아들 폭도 누명을 벗기려면 집에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89년부터 오늘까지 투쟁하러 (거리로) 나왔다”고 말했다.

이어 “최초로 전두환 잡으러 청와대로 가려고 서울로 갔다. 종로경찰서 있는 데로 가서 현수막을 들고 8차선 도로로 뛰어들었다. 5분도 못 돼 경찰서에 잡혀갔다”고 진상규명 투쟁에 나선 당시를 증언하면서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발포 명령한 사람 데려다가 처벌도 하고 진상규명도 해야 끝난다”고 강조했다.

동생을 잃고 나서 투사가 된 노영숙 오월어머니집 관장은 “1980년 이후 36년 세월이 흘렀지만, 이 금남로 거리에 서면 아직도 그 당시 계엄군의 만행에 짓밟혀 쓰러지고 넘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우리 젊은이들이 선연하게 떠올라 지금도 숨이 콱 막힌다”면서 “80년 이 금남로 거리는 어쩌면 절망의 거리였다”며 김준태 시인의 시를 읊으며 전야제 참석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남편 정동년 전 광주 남구청장이 내란수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5·18과 인연을 맺은 이명자 전 광주광역시의원은 “5·18은 이 땅에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95년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전두환·노태우 주범들이 구속됐을 때 전국은 물론 광주시민과 전 세계 양심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면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 민주화를 열망한 온 국민의 힘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하자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꽃이 피었구나 굳게 믿었다. 그때 금남로의 열기를 광주시민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 것”이라고 회고했다.


마지막 방송 주인공 “도청에서 너무 무서웠다”

▲ 5·18 당시 최후 항쟁의 밤 도청 상황실에서 27일 새벽까지 마지막 방송을 했던 박영순씨가 그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김주형 기자

또다른 의미를 가진 오월 여성도 당시를 증언했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청으로 나오셔서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살려주십시오. 우리는 끝까지 도청을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 잊지 말아 주십시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이요원 씨가 항쟁 최후의 날 새벽 지프를 타고 광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방송했던 애절한 내용이다. 하지만 당시 가두방송은 없었다. 그 당시 마지막 방송은 도청 상황실에서 이뤄졌다.

마지막 방송의 주인공인 박영순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 정도 해 질 무렵에 도청에 들어갔다. 온종일 방송을 하다 보니까 피곤해서 방송실 앞에 있는 탁자에 앉게 됐다”면서 “그 당시 몇몇 남학생들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래서 도청을 살펴보니까 학생들과 시민들이 굉장히 불안하고 두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이나 새벽에 계엄군이 들어올지 모른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옆에 있던 여중생도 너무 무서웠다”고 전했다.

이어 “여중생이 ‘언니 지금 집으로 가면 안 될까’ 하더라. 옆에 있던 남학생은 ‘지금 밖으로 나가면 바로 계엄군 총에 맞아 죽을 테니까 내일 새벽에 나가자’고 하더라”면서 “방송실에는 가두방송할 저와 남학생, 여중생 셋이서 너무 무서워 ‘도청을 끝까지 사수하자’고 결의하고 굳은 마음으로 밤을 새우기로 했다. 그런데 그 시간 도청 안에 있는 너무 많은 사람이 떨고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때 다급히 방송실로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이 뛰어들어와 A4 용지 조각을 꺼내주면서 방송을 해달라고 했다. 계엄군이 도청을 에워싸니까 시민들이 도청으로 나와달라고 방송 좀 빨리해달라고 했다”고 마지막 날 새벽까지 방송하게 된 상황을 증언했다. 그렇게 한 방송은 시내 전역으로 퍼져나가 마치 방송차로 돌아다니며 한 것인 양 시민들에게 생생하게 들렸던 것처럼 와전됐다.

이날 오월어머니들을 비롯한 여성들의 증언은 5·18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고, 광주를 상징하는 금남로에 모이게 된 데 대해 상기시켰다. 그렇게 5·18 36주년 전야제는 역사 속에 또 다른 의미로 기록됐다.

▲ 36주년 5·18민중항쟁 기념행사위원회는 17일 오후 광주 금남로에서 5·18 전야제를 열었다. 이날 전야제에 참여한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다. ⓒ김주형 기자

▲ 노영숙 오월어머니집 관장이 5·18 당시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김주형 기자

▲ 이명자 전 광주광역시의원이 5·18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김주형 기자


출처  오월 어머니들 “5.18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