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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종교와 개독교

한국 장로교의 부끄러운 ‘데자뷰’

한국 장로교의 부끄러운 ‘데자뷰’
1938년 ‘신사참배’와 2018년 ‘세습 면죄부’
[민중의소리] 권종술 기자 | 발행 : 2018-08-11 00:00:11 | 수정 : 2018-08-11 09:12:16


▲ 명성교회 ⓒ온라인 커뮤니티

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재판국이 명성교회의 목회자 세습을 묵인하는 판결을 내렸다. 예장 통합총회 재판국은 8대7로 ‘서울동남노회 결의 무효 확인소송’을 기각했다. 목회세습을 방지하기 위한 금지조항이 교단 헌법에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성교회의 부자 세습은 교단헌법 위반이 아니라며 면죄부 판결을 내린 것이다.

2018년은 한국 개신교의 대표교단인 장로교가 일제에 무릎을 꿇고 신사참배를 결정한 지 80년이 되는 해이다. 때문에 개신교계 내부에서 신사참배 결정 80년을 맞아 과거의 죄를 사죄하자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또 다시 대형교회의 부자세습에 면죄부를 주며 “신사참배보다 더 큰 죄를 저질렀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한국 장로교가 80년만에 부끄러운 데자뷰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세습금지법은
‘은퇴하는 담임목사'의 세습을 금지하기 때문에
김삼환 목사는 이미 ‘은퇴한 목사’여서
세습금지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한 교회와 교단

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재판국은 어떻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린 것일까? 그 배경을 짚어보려면 2013년 9월 열린 예장통합 제98회 총회에서 통과된 ‘교회세습방지법’을 살펴봐야 한다. 당시 대형 개신교회들을 중심으로 부자 세습이 문제가 되면서 사회적 논란이 일었고,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이 앞 다퉈 ‘세습방지법’을 만들었다. 예장 통합도 당시 “해당 교회에서 사임 또는 은퇴하는 담임목사(장로)의 배우자 또는 직계비속과 그 배우자는 담임목사(장로)로 청빙할 수 없다”고 못 박은 ‘교회세습방지법’을 ‘870 대 81’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다. 더구나 ‘교회세습방지법’을 통과시킨 당시 총회가 열린 곳은 명성교회였다.

▲ 박근혜가 2014년 3월 6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46회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해 황우여 당시 새누리당 대표, 김삼환 명성교회 목사와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뉴시스

하지만 세습방지 규정이 통과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변칙 세습 논란이 일었다. 김삼환 목사의 ‘명성교회’와 김삼환 목사의 아들인 김하나 목사의 ‘새노래명성교회’를 합병해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 김하나 목사를 새로운 담임목사로 세우려 한 것이다. 합병으로 새로 생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세습방지법’의 규정을 피해갈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여러 반발에 부딪히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합병을 통한 세습이라는 꼼수가 무산된 뒤 이번엔 세습방지법의 문구의 모호성을 파고들어 세습을 시도했다. 지난해 3월 명성교회는 김하나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의했다. 명성교회는 김삼환 목사가 은퇴한 이후에도 2년여 동안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하지 않아왔다. 이들은 ‘교회세습방지법’엔 ‘은퇴하는 담임목사’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미 ‘은퇴한’ 김삼환 목사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펼치며 세습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부자 세습 합리화 위해
“하나님도 예수님께 세습” 설교

심지어 자신들의 세습을 합리화하기 위해 명성교회의 부자세습을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 비교하며 합리화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지난 7월 29일 고세진 목사는 명성교회 예배에서 에서 “이 지구상 어디를 다녀봐도 명성교회 이상 좋은 교회는 없다”며 “내가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승계했더라고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하는 일을 예수님이 받아서 하시고 예수님이 과업을 다 이뤄서 둘이 동역하고 있어 만약 하나님하고 예수님과 관계가 끊어지면 어떻게 해요. 기독교가 꽝이 되는 거야”라고 주장했다. 신의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구원의 사역은 자신들의 재산인 교회를 물려주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향한 오만이 눈에 보이고, ‘교회세습방지법’의 본래 취지를 무시하는 세습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명성교회가 소속된 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동남노회에선 김하나 목사가 명성교회 담임으로 청빙된 것이 세습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에 반발한 노회 소속 목회자들이 비대위를 꾸리고 ‘서울동남노회 결의 무효 확인소송’을 제기했지만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던 예장 통합총회 재판국은 8대7로 명성교회의 세습은 세습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 1943년 일본 나라(奈良)신궁 참배 후 한국 개신교 목회자들이 신궁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CBS-TV


1938년 9월 장로교총회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

80년 전 신사참배를 결의할 당시 장로교의 모습도 지금과 비슷했다. 당시 개신교는 전통적인 예법인 제사조차도 ‘우상숭배’라며 거부하는 등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일제의 강요로 결정하게 되면서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교리적 원칙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며 신앙적 양심과 민족적 양심 모두를 저버리는 결정을 했다. 이런 결정을 할 수 없다고 버틴 주기철 목사와 같은 이들은 총회에 앞서 일본 경찰에 의해 구금되는 등 철저히 봉쇄됐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예배당에선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열렸다. 당시는 장로회가 예장 합동과 통합, 기독교장로회 등으로 분열되기 전이었다. 신학자인 김양선 목사는 ‘신사참배의 강요와 박해’라는 글에서 신사참배를 결정하던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10시 50분 이미 조작된 각본대로 평양·평서·안주 3노회 연합대표 평양노회장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의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긴급제안이 있었고 박임현 목사와 길인섭 목사의 동의와 재청이 있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전신을 떨면서 ‘이 안건이 가하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물었다. 이때에 제안자와 동의·재청자의 10명 미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했고 그들 외의 전원은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표시하는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으므로 수백 경관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일대 위협을 표시했다. 당황한 총회장은 ‘부’를 묻지 않고 그냥 만장일치의 가결을 선언하였다. 이때에 이런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한 선교회는 약속해 두었던대로 방위량 선교사를 선두로 2,3명의 선교사들이 회장의 불법선포에 항의하는 한편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주장하려고 했으나 경찰관의 강력한 제지로 발언이 막히자 선교사 30명 전원은 차례로 기립하여 ‘불법이오’ ‘항의합니다’라고 외쳤다. 봉천노회 소속 헌트 교사는 무술경관의 제지를 뿌리치고 불법에 대한 항의를 외치다가 그들에게 붙들려 옥외로 축출당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란 속에 총회 서기는 성명서를 낭독하였고 평양 기독교 친목회 회원 심익현 목사는 총회원 신사참배 즉시 실행을 특청하였다. 동일 12시에 부회장 김길창 목사의 안내로 전국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함으로써 장로교회마저 그들의 불법 강요에 굴하고 말았다.”

이들은 당시 성명을 통해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려행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를 기함”이라고 밝혔다. 우상숭배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논리로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한 것이다. 이런 불합리한 결정을 되돌리기 위해 신사참배에 반대한 이들이 남은 총회 기간 동안 신사참배 가결 무효를 주장하는 안을 제출하려고 했지만 총회는 이를 무시했다.


1941년 장로회 총회에선
일제를 위해 비행기 헌납을 결의하고
1942년 헌금을 모아 ‘조선장로호’라는
비행기를 일제에 바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제에 대한 장로교의 협력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총회 한 달 뒤인 그해 10월 서울에선 ‘시국대응기독교장로회 신도대회’가 열렸고 소속 신도들과 학생 등 3,000여 명이 모여 총독부 광장에서 미나미 총독의 격려사를 듣고, 행렬을 지어 조선신궁을 참배했다. 다음해부터 장로회총회는 총회 시작 전에 일본 천황이 있는 궁성을 향해 궁성요배를 했다.

1941년엔 일제의 전쟁을 돕기위해 장로회총회에서 ‘전시체제 실천성명서’를 결의·발표했고, 이에 대한 실천사항에는 ‘시국봉사의 실천’으로 ‘애국기(愛國機) 헌납’, ‘금속품 공출’, ‘폐품 회수’를 넣기까지 했다. 이 가운데 ‘애국기 헌납’을 실행하기 위해서 ‘조선장로교도애국기헌납기성회’를 조직하여, 그 해 말까지 최단 기간에 완수하기로 결의하고, 전국 장로교회에서 헌금 모금 사업을 펼쳤다. 헌금을 모금한 장로교회는 이듬해인 1942년 2월 10일에 비행기 1대와 기관총 7정에 해당하는 15만 317원 50전을 헌납했다. 그렇게 헌납한 헌금으로 만들어진 비행기에는 ‘조선장로호’라는 치욕적인 이름이 붙었다. 심지어 금속품 공출을 위해 교회의 종을 띄어서 바쳤다는 기록까지 등장할 정도로 장로교의 친일행위는 극에 달했다.

이러한 신사참배를 비롯한 일제를 향한 협력은 장로교뿐 아니라 성결교회, 감리교회 등 다른 개신교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일제와 손잡기 시작한 개신교는 해방 이후에도 독재정권에 부역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키워갔다.


“80년 전 신사참배 결의보다
더 큰 죄를 범했습니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며 일제에 협력한 장로교의 만행은 ‘은퇴한’ 목사이기에 세습방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식의 억지 해석을 한 2018년 예장 통합총회 재판국의 판결과 이어진다. 80년이 지났지만 반성은커녕 더 큰 죄를 저지른 것이다.

한국교회사 학자인 옥성득 교수(UCLA)는 재판 결과가 전해지자 자신의 SNS에 통합 목사직을 사직하면서 “세습 인정 판결로 장로교회는 80년 전 신사참배 결의보다 더 큰 죄를 범했습니다. 당시는 일제의 강제로 결의했으나, 오늘 통합측 재판국은 자의로 결정했기에, 통합 교단 최대 수치의 날이자 가장 큰 불의를 범했습니다”라고 꼬집기도 했다.

김운용 장로회신학대 교수도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그 부끄러운 이름을 기억하듯 역사는 당신들의 이름을 기억하리라. 교회의 주인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욕되게 한 당신들의 행위를 심판하시리라. 지금껏 그리 부끄럽진 않았던, 예장 통합 교단이 오늘은 정말 부끄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80년 만에 되풀이된 치욕적인 결정을 되돌리는 방법은 없을까? 무효소송을 제기했던 동남노회비대위는 예장통합 총회에 재심을 청구한다는 계획이다. 예장 통합 총회는 오는 9월 열릴 예정이고, 재심 여부는 총회에서 총대 3분의 2의 동의를 얻어 결정한다. 재심이 받아들여지면 다음 회기 새로 선출된 재판국원들이 재심을 하게 된다. 재판에 참여해 반대표를 던진 재판국원 7명 가운데 6명이 사임서를 제출했고, ‘명성교회 세습철회를 위한 예장목회자대회’ 등 반발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로선 결정이 뒤집힐 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사회적 파장이 큰 만큼 전향적 결정이 나올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출처  한국 장로교의 부끄러운 ‘데자뷰’… 1938년 ‘신사참배’와 2018년 ‘세습 면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