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검사들은 왜 ‘공익’을 싫어하나
다시 도마 오른 검찰 공안부
[한겨레] 김양진 기자 | 등록 : 2018-09-29 15:44 | 수정 : 2018-09-30 10:50
“서울 시내에만 고정간첩이 수십만 명입니다. 국가안보가 정말 중요합니다.” ㄱ 부장검사는 몇 년 전 후배 검사가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고정간첩 수십만 명이라니. 얘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그 후배 검사는 소위 ‘정통 공안’으로 분류되는 검사였다. ㄱ 검사는 “평소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알던 그 아무개가 맞는지 다시 봤다”며 “너무 진지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다 보니 자기 생각이 망상에 가깝다는 것을 깨우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같은 검사들 사이에서도 ‘적응이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공안검사들의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검찰 공안부 개편 논의에 다시 물꼬가 터졌다. 공안부는 검찰 안에서 대공, 선거, 집회·시위, 노동 관련 사건을 다루는 부서다. 대검 공안부를 비롯해 일선 검찰청 12개 공안부(서울중앙지검 3개부, 서울 남부·수원·인천·부산·대구·창원·울산·광주·대전지검 각각 1개부) 등에 100명이 훨씬 넘는 검사들이 포진해 있다. 서울지검에 1963년, 대검에 1973년에 처음 설치돼 특별수사부(특수부)와 함께 검찰 내 ‘양대 산맥’, 에이스 집단으로 불려 왔다. 법무부와 대검은 최근 검찰 공안부를 ‘공익부’로 바꾸고 노동 사건을 공안부에서 형사부로 이관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일선 공안검사들의 반발로 현실화할지는 불투명하다. 진보성향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개혁대상’에 올랐지만, 그때마다 ‘불사조’처럼 살아남았던 공안부가 이번에는 정말 개혁될 수 있을까.
1993년 김영삼 정부는 출범 직후 당시 성역에 가까웠던 검찰 조직에 칼을 대 대검 공안부장 출신 이건개(77) 대전고검장 등 현직 고검장 3명의 옷을 벗겼다. 하지만 2년 뒤 신군부의 12·12사태와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건 처리를 맡기며 되레 공안검사들을 중용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도 인권을 중시하는 새로운 공안정책, 즉 ‘신공안’이라는 개념을 앞세워 공안검사 물갈이를 시도하고 조직도 축소했다. 하지만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을 구속했던 ‘성골 공안’ 김원치(2008년 사망)를 검사장으로 승진(1998년)시켰고, 박근혜 정부 시절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해 논란을 일으킨 ‘마지막 구공안’ 고영주(2015~2017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69)를 대검 감찰부장으로 중용(2004년)했다.
정권의 ‘탄압’에 맞서 공안검사들은 오히려 더 크게 목소리를 냈다. 1993년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 적용 범위 축소 등이 추진되자, 당시 서울지검 공안1부 부장 등 공안부 소속 검사 5명이 기자실로 우르르 내려와 “간첩 수사의 난관을 초래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2003년 송두율 교수에 대한 법무부 장관의 불구속 수사 지휘에 대해서도 송광수(68) 당시 검찰총장부터 정점식(53) 공안부 평검사까지 사표를 내겠다고 버텨 결국 구속수사를 관철했다.
현재 법무부와 대검이 추진하는 공안부 개편 방안은 크게 두 가지다. 대검은 지난 7월 전국 공안검사들에 공문을 보내 “선거, 노동 사건을 공안적 시각에서 편향되게 처리한다는 오해와 비판을 불식하겠다”며 ‘공안부’라는 이름을 ‘공익부’로 바꾸는 방안을 공식화했다. “검찰이 파업 등에 업무방해죄를 과도하게 적용하고, (기업의) 부당노동행위에는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등 노동 사건을 공안의 시각으로 처리했다”는 지난 6월 법무검찰개혁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노동 사건을 공안부 담당에서 형사부로 이관시키는 방안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공안부를 개편해야 한다는 총론에는 공안검사들도 대부분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 간첩조작 사건’이나 국정원·기무사의 불법적 정치개입 행위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 용산 참사·쌍용자동차 파업 진압 같은 공권력 남용 사건에 대한 편향적인 처리 등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간 검찰 공안부가 보여준 행태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터져 나온다. 공안검사 출신 한 검찰 간부는 “과거 정부에서 공안부가 잘못한 일들을 철저히 분석해서 공안검사들을 재교육하고 다시는 그런 과오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개편 방안의 각론에는 반대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특히 노동 사건을 형사부로 이관하는 방안과 관련해 “노동 사건을 떼어내면 공안부가 검찰 내 하나의 독자적인 ‘부’로 존립하기 힘든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이 엿보인다.
역대 공안부는 대공·선거·집회시위 사건보다 노동 사건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다른 사건들은 급감하는데 비해 노동 사건은 계속 증가해 그 비중이 커졌다. 지난해 기준 공안부 처리 사건의 89.2%를 차지할 정도다. 최근 들어선 공안부로 매일 꾸준히 사건이 송치되는 유일한 ‘일감’이기도 하다.
특히, 공안부 사건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대공 사건이 많이 감소하고 있다. 과거 공안검사에게 간첩 사건 수사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특수부 검사에게 재벌총수나 유력 정치인·관료를 대상으로 하는 수사와도 같았다. 하지만 남북관계 개선 등 정치 사회적 환경이 바뀌면서 대공 사건은 가물에 콩 나듯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1997년 한 해 보안법으로 기소된 사람은 897명에 달했지만, 2017년엔 14명까지 줄었다. 1970∼80년대 맹위를 떨쳤던 공안검사의 ‘무기’ 국가보안법은 사문화돼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올해 들어 지난 7월까지 검찰이 재판에 넘긴 대공 사범은 2명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2013년)의 70명이나 지난해 14명과 비교해서도 많이 감소했다.
집회·시위 관련 사건 역시 문재인 정부 들어 집회·시위의 권리가 기본권으로 존중되고 있는 추세여서 많이 줄고 있다. 만약 노동 사건을 떼어낸다면 공안부가 껍데기만 남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유다. 대검 공안부 관계자는 “과거 공안부의 노동 사건 처리가 잘못됐다면 그걸 바로잡으면 될 일이지, 전문성이 없는 형사부에 노동 사건을 넘기게 되면 누구에게도 득이 될 게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궁지에 몰린 듯한 모습이지만, 공안부는 1963년 서울지검에 설치된 이래 검찰 내 최고 ‘노른자위’였다. 특히 군사독재 정권 시절엔 법의 이름으로 독재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전위대 노릇을 하며 승승장구했다.
작곡가 윤이상(1995년 작고) 등을 간첩으로 몰았던 동백림사건(1967년)을 비롯해 이후 과거사 조사 및 재심 결과 ‘조작사건’으로 드러난 사건들이 모두 공안검사들의 손끝에서 처리됐다.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를 시작으로 법무부 검찰3과장(현 공안기획과장), 대검 공안과장, 서울지검 공안부장 등을 거치면 검사장 이상 검찰 고위직으로의 승진은 물론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까지 넘볼 수 있는 ‘출세 코스’로 인식됐다. 공안검사들이 특수부 검사들과 달리 정권 교체에 따른 부침이 큰 이유도 출세 지향적 사건 처리에 따른 자승자박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당시 이런 공안검사의 전형이 바로 김기춘(79)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대학 3학년 때인 1960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소년 등과’한 김 전 실장은 유신헌법을 제정(1972년)하는 데 기여해, 이듬해 부장검사급인 법무부 인권옹호과장으로, 1975년엔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에 올랐다. 당시 그는 36살이었다. 1976년 ‘민주구국선언’ 발표로 구속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변호했던 김광일(2010년 작고) 변호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김 전 실장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 김대중 앞잡이 노릇 집어치워라”라고 김 변호사를 협박했다고 한다. 김기춘은 5공 때 서울지검 공안부장, 법무부 검찰국장을 거쳐 6공 때인 1988년 40대 검찰총장이 됐고 곧바로 법무부 장관(1991년)에 올랐다. 당시 기사를 보면 김기춘은 총장 시절 대검·서울지검 공안 관계자 전원을 총장실로 불러 “좌경세력은 무좀과 같아서 약을 바르면 일시적으로 치유된 듯하다가도 다시 나타나곤 한다. 체제 수호에 검찰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라”고 역설했다고 한다.
특수부와 함께 검찰 내 양대산맥
간첩·선거·집회시위 사건 등 다뤄
독재정권 시절 체제유지 전위대
검사장 등으로 올라가는 승진코스
김기춘, 이건개, 고영주 등 ‘배출’
김대중·노무현 정부선 개혁 제자리
문재인 정부, ‘공익부’로 이름 바꾸고
노동 사건 형사부로 분리 방안 추진
“전문성 없어 누구도 득 안돼” 반발
일각선 “아예 없애야 한다” 주장도
이건개 전 의원 역시 대표적인 공안검사다. 서른 살 때인 1971년 서울시경 국장(현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발탁됐고, 5공·6공 때 서울지검 공안부장과 대검 공안부장을 맡았다. 1989년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으로 몰아친 공안정국 땐 공안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을 맡아 77일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85명을 구속하는 ‘신기’를 보여줬다. 이 사건과 관련해 당시 제1야당인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에게 불고지죄를 적용해 재판에 넘긴 주역들로, 김기춘·이건개·당시 안강민(77) 서울지검 공안1부장·이상형(69) 공안1부 검사를 묶어 ‘공안 4인방’이라고 부른다.
출세욕에 눈먼 일부 공안검사들은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는 사소한 문제로 치부했다. 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갖은 고문을 당한 김근태(2011년 작고) 전 의원은 이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을 조사한 김원치 검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두려움에 얼어버린 채 남영동에서 검찰로 왔을 때, 교양 있는 검사를 끊임없이 짝사랑하게 된다. 그래도 끔찍한 고문을 안 해서 고맙고 감사하고 때로는 슬쩍 가족 얼굴을 보게 해주고 우리의 검사님은 너그러움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올가미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이다.” 당시 김원치 검사는 김 전 의원이 경찰에게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스스로 ‘거악’으로 규정한 반체제사범을 향해 돌진했던 ‘돈키호테 검사’의 후예들은 지금도 검찰 조직 곳곳에 포진해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무죄가 확정됐음에도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의 유우성 씨를 여전히 간첩이라고 믿는 부류가 ‘정통 공안’들이다. 한 고위 검사는 사석에서 기자들을 만나 “유우성 사건이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무죄가 선고됐지, 유우성은 100% 간첩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또 과거사 사건 재심 청구로 무죄가 선고돼 수십 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은 이들을 향해서도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었을 뿐 간첩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치 검사’는 일부일 뿐 대다수의 공안부 검사들은 예나 지금이나 사건처리에 파묻혀 살고 있다는 항변도 나온다. 1980년대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근무했던 한 원로 법조인은 “당시 공안검사를 너무 화려하게 포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대다수는 매일 같이 야근을 하고, 후배들 밥 사주고 술 사 주느라 월급봉투 한번 제대로 집에 가져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한 간부급 검사는 “변호사로 돈을 벌고 싶으면 공안검사보다는 금융·조세·특수 쪽으로 가는 게 맞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공안을 한다고 검사장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공안검사를 하려는 검사들은 정말 공안 관련 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꼭 해보고 싶어서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공안부 개편도 일선 공안검사들의 반발로 지지부진한 양상을 보인다. 공익부로 개명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안녕하세요, 대검 공익부장입니다’라고 소개하면 ‘소집해제는 언제 되나요’라고 할지 모른다”는 비아냥이 돌아다닌다. 공익부를 ‘공익요원’에 빗댄 것이다. 공익부라는 명칭이 수사기관의 정체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며 이름에 ‘수사’를 넣자는 의견이 많아, 대검에서는 ‘공익수사부’ 등 수정안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 사건 분리에 대한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악의 경우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 흐지부지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법조계 안팎에선 개편 방안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유우성 씨 등 대공 사건 피의자 변호를 전문적으로 맡아온 장경욱 변호사는 “공안부 특유의 극우 보수적인 ‘공안적 시각’을 갈아엎지 않는 이상, 공안부 개편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 원로 변호사는 지난해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가진 공안검사들 대상 강연 자리에서 “공안부는 아예 없애는 게 답”이라고 말했다. 도도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공안부가 찾아야 하는 자리는 어디일까.
출처 공안검사들은 왜 ‘공익’을 싫어하나
다시 도마 오른 검찰 공안부
[한겨레] 김양진 기자 | 등록 : 2018-09-29 15:44 | 수정 : 2018-09-30 10:50
▲ ‘서울시 간첩 조작사건’과 관련해 간첩 혐의를 받은 유우성씨가 2014년 4월 14일 기자회견에서 검찰의 간첩증거조작 수사결과가 부실하다고 주장하고있다. 김성광 기자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검찰 공안부가 다시 개혁 대상에 올랐다. ‘공익부’로 이름을 바꾸고 노동 사건을 분리하겠다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공안부 개편 방안이다. 한때 독재정권의 전위대 노릇을 하며 승승장구했던 공안부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점차 존재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다. 공안부의 55년 ‘흑역사’와 향후 개편 전망을 짚어봤다.
“서울 시내에만 고정간첩이 수십만 명입니다. 국가안보가 정말 중요합니다.” ㄱ 부장검사는 몇 년 전 후배 검사가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고정간첩 수십만 명이라니. 얘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그 후배 검사는 소위 ‘정통 공안’으로 분류되는 검사였다. ㄱ 검사는 “평소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알던 그 아무개가 맞는지 다시 봤다”며 “너무 진지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다 보니 자기 생각이 망상에 가깝다는 것을 깨우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같은 검사들 사이에서도 ‘적응이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공안검사들의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검찰 공안부 개편 논의에 다시 물꼬가 터졌다. 공안부는 검찰 안에서 대공, 선거, 집회·시위, 노동 관련 사건을 다루는 부서다. 대검 공안부를 비롯해 일선 검찰청 12개 공안부(서울중앙지검 3개부, 서울 남부·수원·인천·부산·대구·창원·울산·광주·대전지검 각각 1개부) 등에 100명이 훨씬 넘는 검사들이 포진해 있다. 서울지검에 1963년, 대검에 1973년에 처음 설치돼 특별수사부(특수부)와 함께 검찰 내 ‘양대 산맥’, 에이스 집단으로 불려 왔다. 법무부와 대검은 최근 검찰 공안부를 ‘공익부’로 바꾸고 노동 사건을 공안부에서 형사부로 이관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일선 공안검사들의 반발로 현실화할지는 불투명하다. 진보성향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개혁대상’에 올랐지만, 그때마다 ‘불사조’처럼 살아남았던 공안부가 이번에는 정말 개혁될 수 있을까.
대검의 공안부 개편 추진
1993년 김영삼 정부는 출범 직후 당시 성역에 가까웠던 검찰 조직에 칼을 대 대검 공안부장 출신 이건개(77) 대전고검장 등 현직 고검장 3명의 옷을 벗겼다. 하지만 2년 뒤 신군부의 12·12사태와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사건 처리를 맡기며 되레 공안검사들을 중용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도 인권을 중시하는 새로운 공안정책, 즉 ‘신공안’이라는 개념을 앞세워 공안검사 물갈이를 시도하고 조직도 축소했다. 하지만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을 구속했던 ‘성골 공안’ 김원치(2008년 사망)를 검사장으로 승진(1998년)시켰고, 박근혜 정부 시절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해 논란을 일으킨 ‘마지막 구공안’ 고영주(2015~2017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69)를 대검 감찰부장으로 중용(2004년)했다.
▲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한겨레> 자료사진
정권의 ‘탄압’에 맞서 공안검사들은 오히려 더 크게 목소리를 냈다. 1993년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 적용 범위 축소 등이 추진되자, 당시 서울지검 공안1부 부장 등 공안부 소속 검사 5명이 기자실로 우르르 내려와 “간첩 수사의 난관을 초래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2003년 송두율 교수에 대한 법무부 장관의 불구속 수사 지휘에 대해서도 송광수(68) 당시 검찰총장부터 정점식(53) 공안부 평검사까지 사표를 내겠다고 버텨 결국 구속수사를 관철했다.
현재 법무부와 대검이 추진하는 공안부 개편 방안은 크게 두 가지다. 대검은 지난 7월 전국 공안검사들에 공문을 보내 “선거, 노동 사건을 공안적 시각에서 편향되게 처리한다는 오해와 비판을 불식하겠다”며 ‘공안부’라는 이름을 ‘공익부’로 바꾸는 방안을 공식화했다. “검찰이 파업 등에 업무방해죄를 과도하게 적용하고, (기업의) 부당노동행위에는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등 노동 사건을 공안의 시각으로 처리했다”는 지난 6월 법무검찰개혁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노동 사건을 공안부 담당에서 형사부로 이관시키는 방안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공안부를 개편해야 한다는 총론에는 공안검사들도 대부분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 간첩조작 사건’이나 국정원·기무사의 불법적 정치개입 행위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 용산 참사·쌍용자동차 파업 진압 같은 공권력 남용 사건에 대한 편향적인 처리 등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간 검찰 공안부가 보여준 행태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터져 나온다. 공안검사 출신 한 검찰 간부는 “과거 정부에서 공안부가 잘못한 일들을 철저히 분석해서 공안검사들을 재교육하고 다시는 그런 과오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라지는 존재감
하지만 개편 방안의 각론에는 반대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특히 노동 사건을 형사부로 이관하는 방안과 관련해 “노동 사건을 떼어내면 공안부가 검찰 내 하나의 독자적인 ‘부’로 존립하기 힘든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이 엿보인다.
역대 공안부는 대공·선거·집회시위 사건보다 노동 사건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다른 사건들은 급감하는데 비해 노동 사건은 계속 증가해 그 비중이 커졌다. 지난해 기준 공안부 처리 사건의 89.2%를 차지할 정도다. 최근 들어선 공안부로 매일 꾸준히 사건이 송치되는 유일한 ‘일감’이기도 하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한겨레> 자료사진
특히, 공안부 사건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대공 사건이 많이 감소하고 있다. 과거 공안검사에게 간첩 사건 수사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특수부 검사에게 재벌총수나 유력 정치인·관료를 대상으로 하는 수사와도 같았다. 하지만 남북관계 개선 등 정치 사회적 환경이 바뀌면서 대공 사건은 가물에 콩 나듯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1997년 한 해 보안법으로 기소된 사람은 897명에 달했지만, 2017년엔 14명까지 줄었다. 1970∼80년대 맹위를 떨쳤던 공안검사의 ‘무기’ 국가보안법은 사문화돼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올해 들어 지난 7월까지 검찰이 재판에 넘긴 대공 사범은 2명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2013년)의 70명이나 지난해 14명과 비교해서도 많이 감소했다.
집회·시위 관련 사건 역시 문재인 정부 들어 집회·시위의 권리가 기본권으로 존중되고 있는 추세여서 많이 줄고 있다. 만약 노동 사건을 떼어낸다면 공안부가 껍데기만 남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유다. 대검 공안부 관계자는 “과거 공안부의 노동 사건 처리가 잘못됐다면 그걸 바로잡으면 될 일이지, 전문성이 없는 형사부에 노동 사건을 넘기게 되면 누구에게도 득이 될 게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재정권 ‘보위’하며 승승장구
지금은 궁지에 몰린 듯한 모습이지만, 공안부는 1963년 서울지검에 설치된 이래 검찰 내 최고 ‘노른자위’였다. 특히 군사독재 정권 시절엔 법의 이름으로 독재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전위대 노릇을 하며 승승장구했다.
작곡가 윤이상(1995년 작고) 등을 간첩으로 몰았던 동백림사건(1967년)을 비롯해 이후 과거사 조사 및 재심 결과 ‘조작사건’으로 드러난 사건들이 모두 공안검사들의 손끝에서 처리됐다.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를 시작으로 법무부 검찰3과장(현 공안기획과장), 대검 공안과장, 서울지검 공안부장 등을 거치면 검사장 이상 검찰 고위직으로의 승진은 물론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까지 넘볼 수 있는 ‘출세 코스’로 인식됐다. 공안검사들이 특수부 검사들과 달리 정권 교체에 따른 부침이 큰 이유도 출세 지향적 사건 처리에 따른 자승자박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당시 이런 공안검사의 전형이 바로 김기춘(79)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대학 3학년 때인 1960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소년 등과’한 김 전 실장은 유신헌법을 제정(1972년)하는 데 기여해, 이듬해 부장검사급인 법무부 인권옹호과장으로, 1975년엔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에 올랐다. 당시 그는 36살이었다. 1976년 ‘민주구국선언’ 발표로 구속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변호했던 김광일(2010년 작고) 변호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김 전 실장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 김대중 앞잡이 노릇 집어치워라”라고 김 변호사를 협박했다고 한다. 김기춘은 5공 때 서울지검 공안부장, 법무부 검찰국장을 거쳐 6공 때인 1988년 40대 검찰총장이 됐고 곧바로 법무부 장관(1991년)에 올랐다. 당시 기사를 보면 김기춘은 총장 시절 대검·서울지검 공안 관계자 전원을 총장실로 불러 “좌경세력은 무좀과 같아서 약을 바르면 일시적으로 치유된 듯하다가도 다시 나타나곤 한다. 체제 수호에 검찰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라”고 역설했다고 한다.
특수부와 함께 검찰 내 양대산맥
간첩·선거·집회시위 사건 등 다뤄
독재정권 시절 체제유지 전위대
검사장 등으로 올라가는 승진코스
김기춘, 이건개, 고영주 등 ‘배출’
김대중·노무현 정부선 개혁 제자리
문재인 정부, ‘공익부’로 이름 바꾸고
노동 사건 형사부로 분리 방안 추진
“전문성 없어 누구도 득 안돼” 반발
일각선 “아예 없애야 한다” 주장도
▲ 이건개 전 국회의원. <한겨레> 자료 사진.
이건개 전 의원 역시 대표적인 공안검사다. 서른 살 때인 1971년 서울시경 국장(현 서울지방경찰청장)으로 발탁됐고, 5공·6공 때 서울지검 공안부장과 대검 공안부장을 맡았다. 1989년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으로 몰아친 공안정국 땐 공안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을 맡아 77일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85명을 구속하는 ‘신기’를 보여줬다. 이 사건과 관련해 당시 제1야당인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에게 불고지죄를 적용해 재판에 넘긴 주역들로, 김기춘·이건개·당시 안강민(77) 서울지검 공안1부장·이상형(69) 공안1부 검사를 묶어 ‘공안 4인방’이라고 부른다.
출세욕에 눈먼 일부 공안검사들은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는 사소한 문제로 치부했다. 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갖은 고문을 당한 김근태(2011년 작고) 전 의원은 이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을 조사한 김원치 검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두려움에 얼어버린 채 남영동에서 검찰로 왔을 때, 교양 있는 검사를 끊임없이 짝사랑하게 된다. 그래도 끔찍한 고문을 안 해서 고맙고 감사하고 때로는 슬쩍 가족 얼굴을 보게 해주고 우리의 검사님은 너그러움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올가미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이다.” 당시 김원치 검사는 김 전 의원이 경찰에게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데 온 힘을 쏟았다.
▲ 김원치 전 검사장. <한겨레> 자료 사진
스스로 ‘거악’으로 규정한 반체제사범을 향해 돌진했던 ‘돈키호테 검사’의 후예들은 지금도 검찰 조직 곳곳에 포진해 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무죄가 확정됐음에도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의 유우성 씨를 여전히 간첩이라고 믿는 부류가 ‘정통 공안’들이다. 한 고위 검사는 사석에서 기자들을 만나 “유우성 사건이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무죄가 선고됐지, 유우성은 100% 간첩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또 과거사 사건 재심 청구로 무죄가 선고돼 수십 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은 이들을 향해서도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었을 뿐 간첩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치 검사’는 일부일 뿐 대다수의 공안부 검사들은 예나 지금이나 사건처리에 파묻혀 살고 있다는 항변도 나온다. 1980년대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근무했던 한 원로 법조인은 “당시 공안검사를 너무 화려하게 포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대다수는 매일 같이 야근을 하고, 후배들 밥 사주고 술 사 주느라 월급봉투 한번 제대로 집에 가져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한 간부급 검사는 “변호사로 돈을 벌고 싶으면 공안검사보다는 금융·조세·특수 쪽으로 가는 게 맞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공안을 한다고 검사장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공안검사를 하려는 검사들은 정말 공안 관련 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꼭 해보고 싶어서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시각 안 바뀌면 개편 무의미”
문재인 정부의 공안부 개편도 일선 공안검사들의 반발로 지지부진한 양상을 보인다. 공익부로 개명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안녕하세요, 대검 공익부장입니다’라고 소개하면 ‘소집해제는 언제 되나요’라고 할지 모른다”는 비아냥이 돌아다닌다. 공익부를 ‘공익요원’에 빗댄 것이다. 공익부라는 명칭이 수사기관의 정체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며 이름에 ‘수사’를 넣자는 의견이 많아, 대검에서는 ‘공익수사부’ 등 수정안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 사건 분리에 대한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악의 경우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 흐지부지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법조계 안팎에선 개편 방안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유우성 씨 등 대공 사건 피의자 변호를 전문적으로 맡아온 장경욱 변호사는 “공안부 특유의 극우 보수적인 ‘공안적 시각’을 갈아엎지 않는 이상, 공안부 개편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 원로 변호사는 지난해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가진 공안검사들 대상 강연 자리에서 “공안부는 아예 없애는 게 답”이라고 말했다. 도도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공안부가 찾아야 하는 자리는 어디일까.
출처 공안검사들은 왜 ‘공익’을 싫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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