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검찰조사 받아보니···“이런 식일 줄은”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으로 새 경험
“검찰이 이런 식으로 조사할 줄 몰랐다”
[경향신문] 류인하 기자 | 입력 : 2019.02.17 09:01:00 | 수정 : 2019.02.17 13:40:33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 과정을 법원 밖에서 바라본 변호사들은 “이제 판사들도 우리 마음을 알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피고인이 검찰 조사과정에서 주변 지인에 대한 은근한 압박 등 강압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해도 대부분 재판장은 “지금 시대가 어떤 때인데 그런 말이 나오냐”는 식의 반응을 보여 왔지만 이제 그들도 당해봤으니 알 거라는 얘기다.
변호사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을 거치면서 100명 이상의 전·현직 판사들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검찰이 판사에게까지 이런 식으로 조사할 줄은 몰랐다”였다.
검찰 조사를 받고 온 한 부장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검찰이 질문할 내용을 예상하고, 기억을 떠올려 갔다. 그런데 애초 예상했던 질문은 15~20분 정도로 끝나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과거의 일을 물었다.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 것들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검찰이 ‘이러이러한 의도로 했던 거 아니냐’고 했다. 분명한 건 당시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나는 그럴 위치에서 상의할 자격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고 답하니 그때부터 언제든 나를 참고인 신분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바꿀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아, 이게 검사들의 수사방식이구나’라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다. 말 그대로 참고인이었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압박감을 느꼈다.”
또 다른 법원행정처 출신 부장판사는 “검찰이 e메일 명세를 임의제출해달라는 요구를 ‘생각해보겠다’는 말도 못 하고 그대로 동의해 제출했다”고 말했다.
검찰이 작성한 조서가 묘하게 검찰에 유리한 식으로 질문과 답변이 바뀌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질문 내용과 답변이 조서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 판사는 “'아' 다르고 '어' 다른 문장에서 마치 내 답변이 검찰의 질문에 ‘예스’라고 답한 것처럼 적혀 있었다. 나는 조사에서 단 한 번도 ‘그렇습니다’라고 한 적이 없는데 검찰이 유도하듯 했던 질문에는 전부 답이 ‘그렇습니다’로 돼 있었다. 문제를 제기하고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조사받는 과정에서 너무 지쳐 조서를 제대로 수정하지 못하고 나왔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조서를 집어 던져라’고 했던 말이 내 일이 되고 보니 그대로 와닿았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아까 질문하셨던 내용이 조서에 없습니다’라고 하니 검사가 ‘그건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거라 따로 조서에 적지 않았다’고 답했다”고 했다.
말 그대로 역지사지(易地思之)다. 판사들은 참고인 또는 피의자 신분이 되고 보니 그동안 법정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들이 주장했던 검찰의 강압수사와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 여부를 다투는 이유를 알았다고 고백한다. ‘겪어보니 알겠더라’는 얘기다.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를 거친 많은 판사의 경험이 더욱더 인권 친화적인 사법부를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절반은 진심이고, 절반은 짓궂은 농담이다.
일부 판사들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남겨준 유산’이라고 뼈 있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검찰에 수사 의뢰를 하고, 검찰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로 배당한 시점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및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을 기소하기까지 239일간 진행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가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판사가 검찰 조사를 받는 경험을 할 수 있었겠냐는 말이다.
그 중 대표적인 문제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 판사가 겪었던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될 수 있음을 은근히 내비치며 조사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ㄱ 부장판사는 “모든 사람은 무결할 수 없다. 나는 떳떳하다는 생각으로 검찰청사를 들어가도 조사실에 앉아 있는 순간부터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그 심리를 검사가 파고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 내부에서 제기되는 포토라인에 대한 인권침해 주장 역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와 무관하지 않다.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공개 소환조사 다음 날 자신의 블로그에 ‘이제 포토라인 악습도 걷어내자’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해 포토라인 관행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강 부장판사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적어도 유죄의 1심 판결이라도 나기 전에 그 의사에 반해 카메라 세례를 받게 하는 포토라인은 중세 마녀재판과 행태가 다르다고 누가 이론적으로 주장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포토라인에 서고 안 서고를 검찰이 자의적으로 선별하여 결정한다. 누가, 어떤 법령이 검찰에 그 권한을 부여했나. 검찰이 알 권리를 구실로 현대판 멍석말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포토라인이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 앞에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시한 폭력에 해당한다는 지적은 인권단체를 중심으로만 제기돼 왔다. 법정에서 처음으로 피고인을 만나는 판사들에게 ‘포토라인 문제’는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문제였다. 이 역시 판사들이 겪어보니 문제라는 것을 인식한 사례 중 하나다. 대한변호사협회와 법조언론인클럽은 지난 1월 15일 ‘포토라인,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공동토론회를 열어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도 했다.
재판부의 집중심리 문제 역시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변호인단은 첫 공판을 앞둔 1월 29일 재판부에 전원 사임서를 제출했다. 일종의 항의성 조치다. 재판부가 심리에 속도를 내기 위해 집중심리로 재판을 하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피고인의 방어권과 변호인의 변론권 보장이 어렵다며 전원 사임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구속기한 만료일이나 사안의 방대성 등을 고려해 임의로 집중심리를 할 수 있다.
임 전 차장의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 부장판사)는 주 4회 기일을 열어 재판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집중심리는 그러나 신속한 재판은 가능하지만,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 어렵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무기대등의 원칙(법정에 선 양 당사자는 대등한 지위에서 법적 다툼을 해야 한다는 원칙)에도 어긋난다.
검찰은 공소 유지를 위한 모든 증거자료를 갖춘 상태에서 법정에 들어서지만, 변호인단은 검찰이 열람·복사를 허용할 때까지 빈손으로 재판에 임해야 한다. “아직 열람·복사가 끝나지 않아 한 차례 더 기일을 열어주시면…”이라며 재판장에게 부탁하는 변호사의 모습은 법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법원 내부에서 이 문제가 지금처럼 논쟁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 이 역시 판사가 겪어보니 집중심리가 얼마나 피고인 방어권 보장에 미흡한 제도인지 알게 된 사례로 볼 수 있다.
혹자는 왜 이제서야 그런 지적을 하느냐며 문제 제기 시점을 탓하고, 제 식구 감싸기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중견 변호사는 “몸소 겪어봤으니 이제는 법정 안 풍경도 조금씩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역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가 남긴 성과일지도 모른다.
출처 판사가 검찰조사 받아보니···“이런 식일 줄은”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으로 새 경험
“검찰이 이런 식으로 조사할 줄 몰랐다”
[경향신문] 류인하 기자 | 입력 : 2019.02.17 09:01:00 | 수정 : 2019.02.17 13:40:33
▲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받기 위해 1월 23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들어서는 모습을 카메라기자들이 촬영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 과정을 법원 밖에서 바라본 변호사들은 “이제 판사들도 우리 마음을 알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피고인이 검찰 조사과정에서 주변 지인에 대한 은근한 압박 등 강압 조사를 받았다고 주장해도 대부분 재판장은 “지금 시대가 어떤 때인데 그런 말이 나오냐”는 식의 반응을 보여 왔지만 이제 그들도 당해봤으니 알 거라는 얘기다.
변호사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을 거치면서 100명 이상의 전·현직 판사들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검찰이 판사에게까지 이런 식으로 조사할 줄은 몰랐다”였다.
검찰 조사를 받고 온 한 부장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검찰이 질문할 내용을 예상하고, 기억을 떠올려 갔다. 그런데 애초 예상했던 질문은 15~20분 정도로 끝나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과거의 일을 물었다.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 것들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검찰이 ‘이러이러한 의도로 했던 거 아니냐’고 했다. 분명한 건 당시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나는 그럴 위치에서 상의할 자격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고 답하니 그때부터 언제든 나를 참고인 신분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바꿀 수 있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아, 이게 검사들의 수사방식이구나’라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다. 말 그대로 참고인이었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압박감을 느꼈다.”
또 다른 법원행정처 출신 부장판사는 “검찰이 e메일 명세를 임의제출해달라는 요구를 ‘생각해보겠다’는 말도 못 하고 그대로 동의해 제출했다”고 말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남긴 유산?
검찰이 작성한 조서가 묘하게 검찰에 유리한 식으로 질문과 답변이 바뀌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질문 내용과 답변이 조서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 판사는 “'아' 다르고 '어' 다른 문장에서 마치 내 답변이 검찰의 질문에 ‘예스’라고 답한 것처럼 적혀 있었다. 나는 조사에서 단 한 번도 ‘그렇습니다’라고 한 적이 없는데 검찰이 유도하듯 했던 질문에는 전부 답이 ‘그렇습니다’로 돼 있었다. 문제를 제기하고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조사받는 과정에서 너무 지쳐 조서를 제대로 수정하지 못하고 나왔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조서를 집어 던져라’고 했던 말이 내 일이 되고 보니 그대로 와닿았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아까 질문하셨던 내용이 조서에 없습니다’라고 하니 검사가 ‘그건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거라 따로 조서에 적지 않았다’고 답했다”고 했다.
말 그대로 역지사지(易地思之)다. 판사들은 참고인 또는 피의자 신분이 되고 보니 그동안 법정에서 피고인 측 변호인들이 주장했던 검찰의 강압수사와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 여부를 다투는 이유를 알았다고 고백한다. ‘겪어보니 알겠더라’는 얘기다.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를 거친 많은 판사의 경험이 더욱더 인권 친화적인 사법부를 만들 것이라고 말한다. 절반은 진심이고, 절반은 짓궂은 농담이다.
일부 판사들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남겨준 유산’이라고 뼈 있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검찰에 수사 의뢰를 하고, 검찰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로 배당한 시점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및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을 기소하기까지 239일간 진행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가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판사가 검찰 조사를 받는 경험을 할 수 있었겠냐는 말이다.
그 중 대표적인 문제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 판사가 겪었던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될 수 있음을 은근히 내비치며 조사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ㄱ 부장판사는 “모든 사람은 무결할 수 없다. 나는 떳떳하다는 생각으로 검찰청사를 들어가도 조사실에 앉아 있는 순간부터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그 심리를 검사가 파고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포토라인 관행의 문제점 도마에
법원 내부에서 제기되는 포토라인에 대한 인권침해 주장 역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와 무관하지 않다.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공개 소환조사 다음 날 자신의 블로그에 ‘이제 포토라인 악습도 걷어내자’라는 제목의 글을 작성해 포토라인 관행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강 부장판사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적어도 유죄의 1심 판결이라도 나기 전에 그 의사에 반해 카메라 세례를 받게 하는 포토라인은 중세 마녀재판과 행태가 다르다고 누가 이론적으로 주장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 포토라인에 서고 안 서고를 검찰이 자의적으로 선별하여 결정한다. 누가, 어떤 법령이 검찰에 그 권한을 부여했나. 검찰이 알 권리를 구실로 현대판 멍석말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포토라인이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 앞에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시한 폭력에 해당한다는 지적은 인권단체를 중심으로만 제기돼 왔다. 법정에서 처음으로 피고인을 만나는 판사들에게 ‘포토라인 문제’는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문제였다. 이 역시 판사들이 겪어보니 문제라는 것을 인식한 사례 중 하나다. 대한변호사협회와 법조언론인클럽은 지난 1월 15일 ‘포토라인,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공동토론회를 열어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도 했다.
재판부의 집중심리 문제 역시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변호인단은 첫 공판을 앞둔 1월 29일 재판부에 전원 사임서를 제출했다. 일종의 항의성 조치다. 재판부가 심리에 속도를 내기 위해 집중심리로 재판을 하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피고인의 방어권과 변호인의 변론권 보장이 어렵다며 전원 사임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구속기한 만료일이나 사안의 방대성 등을 고려해 임의로 집중심리를 할 수 있다.
임 전 차장의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재판장 윤종섭 부장판사)는 주 4회 기일을 열어 재판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집중심리는 그러나 신속한 재판은 가능하지만,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 어렵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무기대등의 원칙(법정에 선 양 당사자는 대등한 지위에서 법적 다툼을 해야 한다는 원칙)에도 어긋난다.
검찰은 공소 유지를 위한 모든 증거자료를 갖춘 상태에서 법정에 들어서지만, 변호인단은 검찰이 열람·복사를 허용할 때까지 빈손으로 재판에 임해야 한다. “아직 열람·복사가 끝나지 않아 한 차례 더 기일을 열어주시면…”이라며 재판장에게 부탁하는 변호사의 모습은 법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법원 내부에서 이 문제가 지금처럼 논쟁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 이 역시 판사가 겪어보니 집중심리가 얼마나 피고인 방어권 보장에 미흡한 제도인지 알게 된 사례로 볼 수 있다.
혹자는 왜 이제서야 그런 지적을 하느냐며 문제 제기 시점을 탓하고, 제 식구 감싸기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 중견 변호사는 “몸소 겪어봤으니 이제는 법정 안 풍경도 조금씩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역시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가 남긴 성과일지도 모른다.
출처 판사가 검찰조사 받아보니···“이런 식일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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