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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m 밖 체액 묻은 손수건 한 장으로… ‘만들어진 범인들’

30m 밖 체액 묻은 손수건 한 장으로… ‘만들어진 범인들’
1990년 ‘낙동강변 살인사건’
‘만들어진 범인들’은 20년 옥살이

[경향신문] 서중석 에스제이에스법의학연구소장 및 성균관대 교수 | 입력 : 2019.05.06 06:00 | 수정 : 2019.05.06 09:36


▲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의 정한중 위원장 대행과 위원들이 지난 3월 경기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정례회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17일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는 광범위한 조사 끝에 이른바 ‘낙동강변 살인사건’에 대한 심의 결과를 발표했다. 발표내용에 따르면, 과거 수사 당시 고문이 이뤄졌고 사건 전반에 걸쳐 왜곡된 부분들이 있다고 한다. 또 수사기관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감정 내용을 잘못 해석했다고 결론 내렸다. 필자는 몇 달 전, 이 건에 대한 재감정을 실시했다. 감정을 수행하면서 의뢰된 사건이 1990년 부산 사상구 엄궁동 낙동강변 살인사건으로 잘 알려진 것임을 알게 됐다. 혹시 재감정을 의뢰한 목적이 이미 완료된 형사사건에 대한 합리성을 훼손하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면서 감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료를 검토하자마자 수사 내용의 진위를 떠나 과학수사 감정에 대한 해석이 변질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나는 감정을 하는 내내 씁쓸했다.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법 과학적 판단을 잘못 적용하거나 해석하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1990년 1월 4일 오전 1시, 한겨울에 달도 없는 캄캄한 밤중이었다. 낙동강변에서 남녀가 승용차를 이용해 데이트하고 있었다. 여성 피해자가 물을 가지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두 명의 용의자(이하 제1 용의자, 제2 용의자)가 자동차에 접근해 혼자 있던 남성 피해자를 가스권총으로 위협하고 무자비하게 폭행하며 금품을 갈취했다. 이때 여성 피해자가 자동차로 되돌아왔다. 용의자들은 여성도 위협해 남성 피해자와 함께 납치했다. 용의자들은 10분가량 해당 차량을 운전해 더 외진 최종적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도착할 때까지 남성 피해자에 대한 폭행은 지속했고, 급기야 오전 3시쯤엔 제1 용의자가 여성 피해자를 강간했다. 여성 피해자가 도망가려고 하자 제2 용의자는 주먹만 한 돌멩이로 여성의 머리를 때려 숨지게 했다. 이때 남성 피해자는 사건 현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했고, 용의자들은 여성 시신을 강변에 유기한 채 도주했다. 남성 피해자는 탈출한 지 1시간 만에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여성 피해자의 시신을 발견했다.

피해자 시신은 부산 지역에서 공의로 활동 중인 부검의의 집도로 긴급부검이 시행됐다. 사건 당시에는 국과수가 서울에만 있었다. 사인은 고도의 머리 손상이며, 강간의 증거는 없다고 판단했다. 남성 피해자는 경찰에서 범인은 두 명인데 제1 용의자는 키가 크고, 제2 용의자는 키가 작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신속하게 수사본부를 설치, 범인 검거에 나섰다. 하지만 추가 증거 확보 등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해 미해결 사건으로 남게 됐다. 사건 발생 1년 10개월이 지난 후 제1 용의자가 경찰서에 연행돼 조사를 받게 됐다. 을숙도 공터에서 운전교습을 하는 사람들에게 경찰을 사칭해 돈을 빼앗은 혐의다. 그 용의자는 경찰의 추가 수사를 통해 다른 범죄에도 연루됐음이 밝혀졌다. 나아가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도 지목됐고,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그는 또 다른 공범인 제2 용의자도 지목했다.

그러나 두 용의자는 이후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고문 때문에 허위로 자백했다고 계속 주장했다. 그들은 대법원까지 수차례의 재판이 진행되는 내내 자신들의 결백을 강조했다. 하지만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여년을 복역한 뒤 몇 년 전 모범수로 석방됐다. 그들은 석방 후에도 재심 신청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무죄를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관련된 서류와 판결문 등을 근거로 필자에게 재감정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오래된 사건은 수사 내용을 포함한 관련 기록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다행히도 이 사건의 경우 용의자 가족들이 그들의 억울함을 주장하면서 사건 기록의 상당 부분을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그 결과 나는 부검감정서, 현장 사진, 현장검증 사진, 수사기록 및 판결문들을 검토해볼 수 있었다.

제시된 자료에 의하면 남녀 피해자는 혈액형이 모두 A형, 제1 용의자는 AB형, 제2 용의자는 O형이었다. 당시 차량 내외부에서 발견된 머리카락, 피 묻은 증거물, 변사자의 손톱 혈흔, 변사자 의복 혈흔 등은 모두 A형으로 감정됐다. 다만 차량 내부의 머리카락 3점은 B형이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30여m 떨어진 곳에서 수거된 정체불명의 손수건 검사 결과 혈흔은 A형이고, 정액 반응은 양성이었으며, 정액 혈액형은 AB형으로 반응한다고 했다. 이를 근거로 수사기관은 범인을 AB형으로 추정했고, AB형인 제1 용의자를 범인으로 확정했다. 또 용의자들의 무죄 주장과는 달리 수사 자료들은 이미 두 사람이 진범임을 단정하고 있었다.


피해자 진술 의존해 증거물 꿰맞춰
법과학적 잘못 판단한 단적인 사례

여기서 이 사건의 감정 결과가 잘못 해석됐거나 비과학적으로 이용된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감정 결과를 잘못 해석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진실을 감추고, 절대 있어선 안 될 피해자를 만들기 때문이다. 우선 범행이 진행되던 동안 이용된 차량과 그 주변에서 수거된 혈흔, 모발, 음모 등의 모든 증거물에서 용의자들의 혈액형인 AB형 및 O형의 증거물은 하나도 없다.

둘째, 30여m 떨어진 곳에서 우연히 발견된 손수건에서 정액 반응이 양성이고, AB형으로 반응했다는 사실만으로 제1 용의자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A형과 B형, A형과 AB형, B형과 AB형이 혼합된 경우도 AB형으로 반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본상식조차도 고려하지 않고 범인을 AB형이라고 단정한 것은 명백한 오류다. 국과수 감정서에도 질액과 정액을 분리하지 않은 채 판단된 혈액형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기재했지만, AB형인 제1 용의자를 범인으로 단정했다는 데 그저 놀랄 뿐이다. 특히 부검 시 채취된 질내 분비물에서 정액 반응이 양성이었지만 혈액형 결과도 없었다. 유부녀 또는 성관계가 자주 있는 여성의 경우 SM(정액반응) 시험 법상 성행위와 상관없이 상당 기간이 지나도 양성으로 나온다. 따라서 부검 결과에 상관없이 이 결과만으로 여성 피해자가 강간당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더욱 곤란하다.

셋째, 사건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손수건이 사건 관련 증거물인지에 대한 판단은 매우 중요하다. 통상 변사자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시계, 지갑 등은 해당 변사자의 소유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주변에 있는 수첩, 서류, 외투 등은 변사자의 소유물일 가능성은 있지만, 확인이 필요하다. 하물며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오염되고 낡은 손수건을 관련 증거물로 단정해 법적 판단에 사용한 것은 과학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넷째, 더 수용하기 어려운 것은 지문 감식 결과다. 어두운 차량 내에서 수 시간 납치, 운전, 폭행 및 강간이 이뤄졌다는데 두 용의자의 지문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확인된 지문은 피해자 두 사람의 것뿐이다. 용의자들의 지문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범행 후 자신들의 지문만을 선택적으로 지웠다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혈흔 분석 등 기본 상식 외면에도
당시 증거물 상당수 재판에서 인정

따라서 법 과학적 측면에서 살펴볼 때, 두 용의자를 범인으로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다른 확실한 증거로 그들이 범인이고, 이러한 감정 결과는 단지 참고자료로만 사용했다면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법 과학적 오판만을 설명하는 것이며, 용의자들이 진범인지 아닌지는 법원에서 재심해 따져봐야 할 또 다른 진실이다. 다만 법 과학적 판단이 잘못 이용됐다는 점만은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두 용의자 “허위 자백·결백” 주장
진범 여부 재심 통해 ‘진위’ 가려야

▲ 2017년 부산지법에 제출된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심청구서와 관련 자료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나는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두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첫째, 신체 감정이나 과학적 판단은 그 자체가 전문적이기 때문에 수사기관-감정인-법원 상호 간 긴밀한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이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용의자들이 한결같이 무죄를 주장했고, 대법원 판단이 이뤄질 때까지 형량을 낮춰달라고 간청하기보다 끊임없이 무죄를 주장할 때에는 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봐야 했다. 그리고 법정에서 유죄의 근거로 채택된 법 과학적 판단근거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재검토를 했어야 한다.

그러나 사법적 판단이 이뤄지는 동안 법 과학자의 역할은 눈에 띄지 않았다. 특히 제1 용의자는 고문에 의한 치아 손상이 발생했고, 키가 작았던 제2 용의자는 밤에 사물을 거의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의 시신경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수사기관은 이와 관련해 의사·치과의사 등을 포함한 일부 전문가들에게 자문했다. 그러나 그들은 범인들이 이미 자백했다는 사실 때문에 의학적 판단에 신중을 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법원이나 수사기관은 제도적으로 그들의 판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 있고 검증된 자문단을 구성하기를 제안한다. 더 나아가 난립하고 있는 사설감정소 또한 점검해보길 충심으로 권한다.

둘째, 미해결 사건들에 대한 증거물 보관에 관한 시스템 구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에 각종 미제사건에 대해서는 해당 증거물을 반영구적으로 보관하는 시스템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향후 더 발전된 감정기법이 개발되면 이를 통해 더욱 정확한 증거를 확보, 범인을 체포하거나 억울한 자들의 누명을 벗겨내는 국가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공약한 것이다. 외국에서는 수십 년 전 살인사건의 증거물들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그 결과 현재의 유전자 감정기법을 통해 다시 진범을 찾아내거나 억울하게 옥살이한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그야말로 책임을 다하는 수사기관의 노력이 종종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 재심을 원하는 사건들의 경우 증거물은 물론 관련 수사기록조차 없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이 사건은 당시 유전자 감정이 수사에 도입되기 시작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사당국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보관된 증거물로 추가 감정을 해야 했다. 불행히도 당시 자료에는 이러한 시도가 없다. 지금은 수사기관과 국과수가 대체로 협업이 잘 이뤄지고 있고 미해결 사건인 경우 두 기관이 나름 증거물들을 보관하고는 있다.


법원·수사기관에 ‘자문단’ 만들고
미제사건 증거물 반영구 보존 필요

그런데도 나는 우리나라도 미제사건 혹은 중요 사건들과 관련된 증거물을 반영구적으로 보관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믿는다. 현장 증거물의 경우 부패 혹은 변형의 위험이 있고, 인위적으로 변질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중립기관인 국과수에 시설을 갖추고 이에 걸맞은 관리체계를 구축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과거 어두웠던 수사 관행으로 억울한 법적 판단을 받은 국민이 있는지 더 세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다고 이 ‘낙동강변 살인사건’을 현재의 수사능력과 과학수사 감정 수준에서 판단하고 그 결과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과학수사라는 개념이 정립돼 있지도 않았던 오래전의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수사관들이 과학수사의 도움 없이 수사기법에만 의존해 고군분투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다만 이제라도 잘못됐을 개연성이 있는 사건들은 반드시 제도적으로 재검토, 정의를 다시 세우면 된다. 마지막으로 ‘낙동강변 살인사건’에 대해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철저한 재조사와 솔직한 발표 내용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출처  [서중석의 법의학 이야기-침묵 속의 진실을 찾아서⑨]30m 밖 체액 묻은 손수건 한 장으로…‘만들어진 범인들’ 20년 옥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