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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서 흐르던 피보고 쓰러져”…광주 고교생들이 겪은 5·18

“옆구리서 흐르던 피보고 쓰러져”…광주 고교생들이 겪은 5·18
서석고 5회 ‘5·18, 우리들의 이야기’ 출간
서석고 3학년 61명이 겪었던 경험담 모아
5·18기념재단 공모사업 2년 연속 선정 출판
계엄군 ‘편의대’ 증언·고교생 시민군 등 다양

[한겨레] 정대하 기자 | 등록 : 2019-05-03 10:32 | 수정 : 2019-05-03 10:37


▲ 총상을 입은 당시 광주서석고 3학년 전형문이 병원 시트에 누운 채 이동 중이고, 왼쪽 손목에 수건을 묶은 친구 김동률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5·18, 우리들의 이야기> 본문 268쪽)

“또 다시 총소리가 들렸다. 시민들은 다시 총을 피해 쏜살같이 뛰기 시작했다.”

1980년 5·18 당시 광주 서석고 3학년생이었던 전형문(57)씨는 옛 전남도청 앞 계엄군의 집단발포 현장에 있었던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시민들은 다시 총을 피해 쏜살같이 뛰기 시작했다. 그도 “총을 피하기 위해 막 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왼쪽 옆구리 아래 배꼽 밑 부분이 이상했다. 처음에는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가 잠시 후 통증이 밀려왔다. 쳐다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전 씨는 “곧바로 쓰러져버렸다”고 회고했다.

전 씨가 총상을 입고 시트에 누운 채 이동 중인 모습은 5·18 기록사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사진에선 전 씨의 옆에서 서석고 친구 김동률 씨(왼쪽 손목에 수건을 묶은 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전 씨는 지금도 몸에 계엄군의 총탄이 박혀 있어 고통을 겪고 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 서석고 3학년생들이 겪었던 역사의 단편들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5·18기념재단은 광주 서석고 3학년 학생들의 경험을 기록한 <5·18, 우리들의 이야기>(심미안)가 출간됐다고 3일 밝혔다. 이 책은 1980년 5·18 당시 서석고 3학년이었던 61명이 직접 겪었던 생생한 체험담을 456쪽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서석고 5회 동창회가 5·18기념재단 공모사업에 2년 연속 선정돼 진행한 성과물이다.

서석고 고교 3학년생들의 경험담은 구체적인 내용이 많아 주목된다. 이 책엔 전투교육사령부의 ‘광주소요사태 분석’이나 보안사령부가 낸 ‘제5공화국전사’에 나오는 계엄군의 ‘편의대’ 활동 사례도 등장한다. 편의대란 5·18 당시 시위대 대원으로 위장한 뒤 사찰 활동을 벌였던 계엄군 비밀공작팀 소속 군인들을 지칭한다. 당시 서석고 3학년생 오일교씨는 편의대원에게 붙잡혀 20일 동안 구금됐다.

“어제부터 함께 다녔던 스포츠형 머리의 30대 청년이 같이 가자면서 따라왔다. 그 청년과 대화를 나누면서 걸으니 심심하지 않았다. 상무대를 지나 서창다리에 이르렀다. 다리 앞에 검문소가 있었다. 근무 중이던 4명의 군인이 우리에게 왔다. 그때였다. 함께 갔던 30대 청년이 권총을 꺼내 내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깜짝 놀라 쳐다봤다.”(오일교, ‘상무대 영창에 갇혀’ 중) 오 씨는 “그 청년이 검문 중인 군인들에게 신분증을 보이더니 나를 인계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뚜렷하게 기억했다. 그 청년은 “군인의 신분을 속이고 시위대의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시위대에 합류한 계엄군”이었던 것이다.

▲ 5·18기념재단은 광주 서석고 3학년 학생들의 경험을 기록한 <5·18, 우리들의 이야기>(심미안 냄)가 출간됐다고 3일 밝혔다.

계엄군 편의대 소속 요원들의 정확한 숫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편의대는 정보사령부, 전교사, 505보안부대, 20사단, 31사단, 3·8·11공수여단, 경찰 정보팀 등으로 광범위하게 꾸려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특히 첩보·정보 수집, 주동자 색출·체포, 시위대 위치·무장상황 파악 보고, 시위대의 모략·교란, 선무공작, 지역감정 조장, 무장 필요성 조장, 시민과 시위대의 분리 공작 등의 특수임무를 맡았다.

“갑자기 우리 초소에도 총알이 날아왔다.…나는 얼마나 놀랐던지 수류탄이 터진 줄 알았다. 반사적으로 우리들은 초소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제 죽었구나, 집에 있을 걸 괜히 나와서 죽게 되었구나…”

5월 18일부터 시작된 10일간의 항쟁, 마지막 날 시민군의 거점인 옛 전남도청을 빠져나온 서석고 3학년생 임영상(57·서석고 5회 동창회장) 씨의 기록도 눈길을 끈다. 총을 들고 싸우던 그는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으로 진입하자 도주했던 기억을 약도와 함께 생생하게 기록했다. 임 씨는 “총성이 울려 퍼지고 도청 본관 뒤쪽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 비명, 시민군을 제압하려는 계엄군의 악에 받친 고함이 뒤섞여 들렸다.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온갖 소리는 나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이 밖에도 전남대와 광주교도소에서 46일간 붙잡혀 있다가 석방된 사례, 가두방송으로 유명한 전옥주 씨의 가족이 자취방 옆집에 살았던 탓에 친누나가 간첩 혐의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던 경험, 고문을 당하면서도 함께 시위에 참여한 자신에 대해 끝내 말하지 않은 친구의 안타까운 죽음 등이 실려 있다.

임영상 서석고 5회 동창회장은 “5·18은 몇몇 사람이나 특정한 세력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의 항쟁이었으며, 시민들이 바로 5·18의 주인공이자 피해자라는 사실을 기록하고 싶었다”며 “더욱이 일부에서 ‘북한군 개입설’ 등으로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것을 더 두고 볼 수 없어서 5·18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자 이 책을 펴내게 됐다”고 말했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 저자 이재의 씨는 “5·18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목격담과 고백이 역사의 재료가 된다. 5·18의 역사는 순전히 그렇게 복원된 것들이다. 당시 고등학생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새로운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출처  “옆구리서 흐르던 피보고 쓰러져”…광주 고교생들이 겪은 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