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80·90년대 북에서 겪은 ‘팀스피릿’
한미 연합군사훈련에 ‘전시’ 초비상
농번기 맞물리면 한해 농사 악영향
집집마다 미군 공습 대비 ‘야간소등’
나사 위성촬영 사진 ‘남북 대비’ 선전
“북 전력난 극심-남 경제발전” 왜곡
“미군이 돌연 선제공격하면 어쩌나”
학자·고위급 정치지도자들 ‘공포감’
‘완전·검증 가능·불가역적 비핵화’
북-미 서로 불신하는한 실현 불가능
[한겨레] 박한식 조지아대 석좌교수, 구술정리 박연진 | 등록 : 2019-05-05 21:01 | 수정 : 2019-05-05 21:09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북핵위기'는 그로부터 무려 26년이 지난 2019년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미국, 중국, 북한, 한국 등이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예컨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가 체결되었고, 2005년에는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성과는 이내 와해되고 말았다. 또한 그런 협상이 반복될수록 북핵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북핵위기는 오히려 악화되는 패턴을 보였다. 북한은 현재 실질적인 핵 보유국가가 되지 않았는가? 도대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기이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런 시각으로 북한을 재단하는 행위를 ‘인식론적 제국주의’(epistemic imperialism)란 용어로 개념화했다. 아울러 인식론적 제국주의에 입각해서 입안된 모든 북핵위기 해법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난 26년 동안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궁극적 까닭 역시 인식론적 제국주의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본다.
나는 2002년 <통념을 넘어서 본 북한정치>(North Korea: The Politics of Unconventional Wisdom·린 리너 출판)를 출간했다. 북한의 정치문화를 직접 관찰하고, 또 북한 내부 학자들과 진지한 토론을 거듭하면서 터득한 주체사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2년 나는 또 한 권의 북한 연구서를 동료 학자들과 함께 펴냈는데, <탈신비화시킨 북한>(North Korea Demystified·케임브리지 프레스)이 그것이다. 우리의 통념으로 각색된 북한의 모습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2018년에는 우리말로 된 북한 연구서 <선을 넘어 생각한다>(부키)를 펴냈다.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통념의 한계를 넘어서서 북한을 이해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약 10년을 주기로 출간된 나의 책 제목들이 어떤 공통의 명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넘어서서 북한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담고고 있었다. 그런 나의 연구 태도를 ‘엠퍼시’(empathy)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는데, 우리말로 의역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은 현재 이른바 CVID,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북한에 요구하고 있다.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뜻하는 PVID, ‘최종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를 뜻하는 FFVD 등의 용어도 사용하고 있지만, CVID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CVID가 미국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전형적으로 반영한 개념이라고 판단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북한의 핵 개발 동기를 전적으로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조건 핵을 없애라고 강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실현 불가능한 비현실적 개념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만 한다.
CVID에서 ‘시’(C), 즉 ‘완전한’(Complete)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은 크게 일반사찰과 특별사찰로 나뉜다. 보통은 일반사찰로 한다.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무기 소재지와 핵무기 수량 등을 신고하면 원자력기구 에서 현지를 방문해서 검증한다. 북한이 신고한 곳의 일부를 샘플로 선별해서 검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사찰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려면 반드시 북한에 대한 ‘신뢰'를 전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 원자력기구나 미국은 북한을 극단적으로 불신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아무리 정직하게 신고한다손 치더라도 믿지를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사찰은 더더욱 어렵다. 원자력기구에서 북한이 신고한 곳뿐만 아니라, 자체 분석에 따라 핵무기 소재지로 의심되는 곳까지 검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사실상 북한의 모든 곳을 뒤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그런데도 원자력기구와 미국이 특별사찰을 강행한다면 북한은 자국의 주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총격전을 의미할 수도 있다.
CVID에서 ‘브이’(V), 즉 ‘검증 가능한’(Verifiable) 비핵화는 더욱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핵무기 전문가가 북한이 신고한 지역을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원자력기구와 미국은 근본적으로 북한을 믿지 않으니 신고 지역만 보고 검증할 생각이 없다.
CVID에서 ‘아이’(I), 즉 ‘불가역적’(Irreversible) 비핵화 역시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고, 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전문가, 핵무기를 만든 경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원료 등도 보유했다. 따라서 북한이 현재 보유한 핵무기를 모두 폐기한다손 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불가역적' 비핵화가 가능하겠는가?
이런 분석을 종합해보면 CVID는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핵위기의 해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CVID는 이제 그만 얘기해야만 한다.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북한의 처지에서 핵을 보유한 까닭을 정확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앞에서 얘기한 엠퍼시(역지사지)를 통해서 그런 진단을 해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나는 이른바 남쪽의 ‘팀스피릿훈련'(1976~93) 기간 중에 북한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본 적이 여러번 있었다. 팀스피릿훈련은 북한 공격을 목적으로 시행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이었다. 해마다 두 달 남짓 동안 냉전시대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으로서 참가병력이 20만~30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남쪽에서 팀스피릿훈련이 시작되면 북한은 곧바로 전쟁상태에 돌입한다. 미국은 훈련이라지만, 언제든지 총부리를 북한으로 돌릴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쟁 상태에서 일상생활은 전면적으로 마비된다. 팀스피릿훈련이 주로 농번기여서 북한은 농사 준비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악순환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면서 북한은 필사적으로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내 찾아낸 해법이 바로 ‘핵무기'였다. 더욱이 북한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핵무기를 포기하면서 이내 죽음을 당하고, 또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미국에 의해 쉽게 살해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핵무기가 정답이라는 판단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팀스피릿훈련 시기에 북한의 교수나 일반 주민의 집을 방문해서 그들의 대처방식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들은 밤이 되면 일제히 소등을 하고 창문에 커튼을 친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틀어막는 것이다. 혹시라고 불빛이 새어 나가면 정부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는다. 그러면 북한 전역이 곧바로 칠흑 같은 어두움에 휩싸인다.
그런데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에서 위성으로 촬영한 한반도의 야경 사진을 종종 잡지나 언론을 통해 널리 유포되고 있다. 온통 깜깜한 북한의 모습과 대낮같이 밝은 남한의 모습을 선명하게 대비되는 사진이다. 팀스피릿훈련 같은 때 북한에 머문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실소를 하거나 때로는 화가 날 정도로 북한의 현실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얼마나 전기가 없으면 북한 전역이 저렇게 깜깜할 수 있단 말인가? 전기가 풍족한 남한은 저렇게 대낮처럼 밝은데 말이다. 참으로 지옥과 같은 북한과 비교하니 남한과 같은 천국이 따로 없지 않은가?!' 내가 직접 목격한 북한의 밤이 평상시에는 그 정도로 깜깜한 적은 없었다.
팀스피릿훈련이 진행되는 와중에 북한의 학자나 고위급 정치지도자과 대화를 해본 적도 여러차례인데, 그럴 때면 내겐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특히 북한의 고위급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막강한 무력을 준비해왔음에도, 자칫 선제공격을 당해 대응조차 못하게 되는 상황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미국의 공격에 대한 극도의 `공포' 때문에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생각해 보라.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History of the Peloponnesian History)에서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팽창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먼저 공격했다는 사실을 무려 3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북-미간 북핵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북한의 선제공격 가능성은 상존한다고 믿고 있다. 1993년 팀스피릿훈련이 공식적으로 종식된 이후에도 명칭을 달리한 한-미 군사훈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내가 직접 확인한 북한의 전시 대비 상황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내가 북한을 거쳐 남한에 와보면 완전히 딴 세상이란 것이다. 남쪽에서는 팀스피릿훈련 중에도 전쟁 가능성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한은 북-미간의 심각한 긴장구조와 그로인해 반복적으로 전쟁 상태에 내몰리는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서 느끼는 극심한 공포와 그 공포에 따른 선제공격 가능성은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
단지 그런 실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색깔론'만 난무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색깔론 강변이 곧 애국적 행위인 것처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그처럼 공허한 색깔론으로 한반도의 참혹한 전쟁을 방지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이 터져도 북한이라는 `악마'가 일으켰다고 저주만 할 것인가?
“전쟁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직 누가 살아남는지만을 결정할 뿐이다.” ("War does not determine who is right. Only who is left." - Bertrand Russell)
버트런드 러셀의 이 경구를 기억하는 것, 한반도 평화의 길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출처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80·90년대 북에서 겪은 ‘팀스피릿’
한미 연합군사훈련에 ‘전시’ 초비상
농번기 맞물리면 한해 농사 악영향
집집마다 미군 공습 대비 ‘야간소등’
나사 위성촬영 사진 ‘남북 대비’ 선전
“북 전력난 극심-남 경제발전” 왜곡
“미군이 돌연 선제공격하면 어쩌나”
학자·고위급 정치지도자들 ‘공포감’
‘완전·검증 가능·불가역적 비핵화’
북-미 서로 불신하는한 실현 불가능
[한겨레] 박한식 조지아대 석좌교수, 구술정리 박연진 | 등록 : 2019-05-05 21:01 | 수정 : 2019-05-05 21:09
▲ 2014년 1월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찍은 한반도의 야경 사진으로, 그해 <로이터>에서 ‘올해의 사진’으로 뽑혀 화제를 모았다. 박한식 교수는 흔히 ‘남북한의 경제 발전상 대비 자료’로 널리 쓰이고 있는 이런 사진이 미국의 북한에 대한 ‘인식론적 제국주의’ 시각을 상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북핵위기'는 그로부터 무려 26년이 지난 2019년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미국, 중국, 북한, 한국 등이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예컨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가 체결되었고, 2005년에는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성과는 이내 와해되고 말았다. 또한 그런 협상이 반복될수록 북핵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북핵위기는 오히려 악화되는 패턴을 보였다. 북한은 현재 실질적인 핵 보유국가가 되지 않았는가? 도대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기이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198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후 지금까지 50회 이상 다녀오면서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북한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북한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시각으로 북한을 해석하고, 또 심지어 그런 시각을 북한에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각을 통해서는 북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시각은 오늘도 여전히 북한을 강제하고 있다.
나는 그런 시각으로 북한을 재단하는 행위를 ‘인식론적 제국주의’(epistemic imperialism)란 용어로 개념화했다. 아울러 인식론적 제국주의에 입각해서 입안된 모든 북핵위기 해법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난 26년 동안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궁극적 까닭 역시 인식론적 제국주의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본다.
나는 2002년 <통념을 넘어서 본 북한정치>(North Korea: The Politics of Unconventional Wisdom·린 리너 출판)를 출간했다. 북한의 정치문화를 직접 관찰하고, 또 북한 내부 학자들과 진지한 토론을 거듭하면서 터득한 주체사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2년 나는 또 한 권의 북한 연구서를 동료 학자들과 함께 펴냈는데, <탈신비화시킨 북한>(North Korea Demystified·케임브리지 프레스)이 그것이다. 우리의 통념으로 각색된 북한의 모습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2018년에는 우리말로 된 북한 연구서 <선을 넘어 생각한다>(부키)를 펴냈다.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통념의 한계를 넘어서서 북한을 이해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다.
▲ <통념을 넘어서 본 북한정치> 저자 : 박한식, 2002년 린 리너 출판
(North Korea: The Politics of Unconventional Wisdom - Han S. Park, Lynne Rienner Publishers, 2002)
(North Korea: The Politics of Unconventional Wisdom - Han S. Park, Lynne Rienner Publishers, 2002)
▲ <탈신비화시킨 북한> 저자 : 박한식, 2012년 케임브리지 프레스
(North Korea Demystified - Han S. Park, Cambria Press, 2012)
(North Korea Demystified - Han S. Park, Cambria Press, 2012)
▲ <선을 넘어 생각한다> 저자 : 박한식,강국진, 2018년 부키
그런데 약 10년을 주기로 출간된 나의 책 제목들이 어떤 공통의 명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넘어서서 북한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담고고 있었다. 그런 나의 연구 태도를 ‘엠퍼시’(empathy)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는데, 우리말로 의역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은 현재 이른바 CVID,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북한에 요구하고 있다.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뜻하는 PVID, ‘최종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를 뜻하는 FFVD 등의 용어도 사용하고 있지만, CVID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CVID가 미국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전형적으로 반영한 개념이라고 판단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북한의 핵 개발 동기를 전적으로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조건 핵을 없애라고 강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실현 불가능한 비현실적 개념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만 한다.
CVID에서 ‘시’(C), 즉 ‘완전한’(Complete)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은 크게 일반사찰과 특별사찰로 나뉜다. 보통은 일반사찰로 한다.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무기 소재지와 핵무기 수량 등을 신고하면 원자력기구 에서 현지를 방문해서 검증한다. 북한이 신고한 곳의 일부를 샘플로 선별해서 검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사찰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려면 반드시 북한에 대한 ‘신뢰'를 전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 원자력기구나 미국은 북한을 극단적으로 불신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아무리 정직하게 신고한다손 치더라도 믿지를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사찰은 더더욱 어렵다. 원자력기구에서 북한이 신고한 곳뿐만 아니라, 자체 분석에 따라 핵무기 소재지로 의심되는 곳까지 검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사실상 북한의 모든 곳을 뒤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그런데도 원자력기구와 미국이 특별사찰을 강행한다면 북한은 자국의 주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총격전을 의미할 수도 있다.
CVID에서 ‘브이’(V), 즉 ‘검증 가능한’(Verifiable) 비핵화는 더욱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핵무기 전문가가 북한이 신고한 지역을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원자력기구와 미국은 근본적으로 북한을 믿지 않으니 신고 지역만 보고 검증할 생각이 없다.
CVID에서 ‘아이’(I), 즉 ‘불가역적’(Irreversible) 비핵화 역시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고, 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전문가, 핵무기를 만든 경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원료 등도 보유했다. 따라서 북한이 현재 보유한 핵무기를 모두 폐기한다손 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불가역적' 비핵화가 가능하겠는가?
이런 분석을 종합해보면 CVID는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핵위기의 해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CVID는 이제 그만 얘기해야만 한다.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북한의 처지에서 핵을 보유한 까닭을 정확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앞에서 얘기한 엠퍼시(역지사지)를 통해서 그런 진단을 해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 1980년부터 최근까지 거의 해마다 북한을 방문해온 박한식 교수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팀스피릿훈련’ 때마다 전쟁 상황에 휩싸이는 북한 지도자들과 주민들의 공포를 현지에서 여러차례 체험했다. 사진은 1984년 팀스피릿훈련 때 ‘청군’으로 참가한 주한미군의 모습이다. 사진 국방홍보원
나는 이른바 남쪽의 ‘팀스피릿훈련'(1976~93) 기간 중에 북한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본 적이 여러번 있었다. 팀스피릿훈련은 북한 공격을 목적으로 시행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이었다. 해마다 두 달 남짓 동안 냉전시대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으로서 참가병력이 20만~30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남쪽에서 팀스피릿훈련이 시작되면 북한은 곧바로 전쟁상태에 돌입한다. 미국은 훈련이라지만, 언제든지 총부리를 북한으로 돌릴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쟁 상태에서 일상생활은 전면적으로 마비된다. 팀스피릿훈련이 주로 농번기여서 북한은 농사 준비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악순환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면서 북한은 필사적으로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내 찾아낸 해법이 바로 ‘핵무기'였다. 더욱이 북한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핵무기를 포기하면서 이내 죽음을 당하고, 또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미국에 의해 쉽게 살해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핵무기가 정답이라는 판단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 1976년 박정희 정권의 요청으로 시작해 93년까지 해마다 시행된 팀스피릿 훈련은 ‘평화수호를 위한 한미 결속의 훈련’(1990년) 구호처럼 방어작전을 표방했으나 북한이 자구책으로 ‘핵개발’에 나서는 빌미가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나는 팀스피릿훈련 시기에 북한의 교수나 일반 주민의 집을 방문해서 그들의 대처방식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들은 밤이 되면 일제히 소등을 하고 창문에 커튼을 친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틀어막는 것이다. 혹시라고 불빛이 새어 나가면 정부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는다. 그러면 북한 전역이 곧바로 칠흑 같은 어두움에 휩싸인다.
그런데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에서 위성으로 촬영한 한반도의 야경 사진을 종종 잡지나 언론을 통해 널리 유포되고 있다. 온통 깜깜한 북한의 모습과 대낮같이 밝은 남한의 모습을 선명하게 대비되는 사진이다. 팀스피릿훈련 같은 때 북한에 머문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실소를 하거나 때로는 화가 날 정도로 북한의 현실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얼마나 전기가 없으면 북한 전역이 저렇게 깜깜할 수 있단 말인가? 전기가 풍족한 남한은 저렇게 대낮처럼 밝은데 말이다. 참으로 지옥과 같은 북한과 비교하니 남한과 같은 천국이 따로 없지 않은가?!' 내가 직접 목격한 북한의 밤이 평상시에는 그 정도로 깜깜한 적은 없었다.
▲ 2005년 3월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을 주도했던 럼스펠드(맨왼쪽) 미 국방장관이 ‘남북 대비 한반도 야경 사진’을 미국 방문중 펜타곤의 집무실을 찾은 박근혜(맨오른쪽·유신폐계, 503) 당시 한나라당 대표 일행에게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2005년 미 국무장관 럼스펠드가 공개해 화제를 모은 집무실 탁자 위의 한반도 야경 사진. 나사에서 2003년 9월 위성으로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팀스피릿훈련이 진행되는 와중에 북한의 학자나 고위급 정치지도자과 대화를 해본 적도 여러차례인데, 그럴 때면 내겐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특히 북한의 고위급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막강한 무력을 준비해왔음에도, 자칫 선제공격을 당해 대응조차 못하게 되는 상황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미국의 공격에 대한 극도의 `공포' 때문에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생각해 보라.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History of the Peloponnesian History)에서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팽창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먼저 공격했다는 사실을 무려 3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북-미간 북핵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북한의 선제공격 가능성은 상존한다고 믿고 있다. 1993년 팀스피릿훈련이 공식적으로 종식된 이후에도 명칭을 달리한 한-미 군사훈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내가 직접 확인한 북한의 전시 대비 상황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남쪽에서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할 때마다 북한은 모든 일상이 ‘전시 태세’에 돌입한다. 2013년 3월 팀스피릿에서 이름을 바꾼 한미 키리졸브훈련 때 황해제철소 노동자들의 군사훈련 모습. 사진 <노동신문>
그런데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내가 북한을 거쳐 남한에 와보면 완전히 딴 세상이란 것이다. 남쪽에서는 팀스피릿훈련 중에도 전쟁 가능성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한은 북-미간의 심각한 긴장구조와 그로인해 반복적으로 전쟁 상태에 내몰리는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서 느끼는 극심한 공포와 그 공포에 따른 선제공격 가능성은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
단지 그런 실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색깔론'만 난무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색깔론 강변이 곧 애국적 행위인 것처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그처럼 공허한 색깔론으로 한반도의 참혹한 전쟁을 방지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이 터져도 북한이라는 `악마'가 일으켰다고 저주만 할 것인가?
“전쟁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직 누가 살아남는지만을 결정할 뿐이다.” ("War does not determine who is right. Only who is left." - Bertrand Russell)
버트런드 러셀의 이 경구를 기억하는 것, 한반도 평화의 길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출처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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