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5·18’을 흔드는가
‘5월 광주’를 소환하는 정치
[경향신문] 정희완·박순봉 기자 | 입력 : 2019.05.18 06:00 | 수정 : 2019.05.18 06:01
1989년 12월 31일 살인마 전두환이 국회 증인석에 앉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와 ‘제5공화국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비리특위) 청문회였다. 그는 굳은 얼굴로 5·18 유혈 진압에 대해 “자위권 발동”이라고 되뇌었다. 격분한 야당 의원들은 “발포 명령자 밝혀라”, “살인마”라며 소리를 질렀고 일부는 증인석으로 돌진하거나 명패를 던졌다. 그때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 의원들이 막아섰고, 청문회는 육탄전이 벌어져 7차례나 정회됐다.
‘89년 청문회’서 뻔뻔했던 전두환
다시 선 법정서 “왜 이래” 또 막말
‘5·18 폄훼’ 처벌 않는 제1 야당
지도부는 “광주 참배” 민심 자극
발포 책임 등 진실 규명 못한 사이
가해자들 집요한 은폐·왜곡 반복
5월 주역들 “역사가 거꾸로 간다”
민정당은 5공 신군부 세력이 만든 정당이다. 14시간 청문회에서 살인마 전두환 증언은 단 2시간에 그쳤다. 1990년 1월 1일 0시 5분 그가 국회 1층 현관을 나설 때 도열한 민정당 의원·당원 수십명은 손뼉을 쳤다. 살인마 전두환은 손을 들어 보이며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5·18이 겪게 될 긴 수난을 예고한 ‘악어의 미소’였다.
39년이 흘렀다.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매김하고, 국가기념일로 정하고, 유공자 명예회복과 보상 절차는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도 광주의 아픔은 아물지 못하고 상처는 덧나고 있다. 툭하면 5·18을 흔들고 제멋대로 소환하는 ‘정치’의 책임이 크다.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헬기 사격은 있었는지, 행방이 묘연한 실종자는 어디에 묻혔는지…. ‘가해자 신군부’가 집권한 12년(5·6공화국)간 은폐·조작·왜곡부터 된 탓에 국가폭력의 진실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선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중단되거나 푸대접을 받았다. 지난해 9월 시행된 ‘5·18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발족해야 할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사무실만 얻어놓은 채 8개월째 위원 구성도 못 하고 공전하고 있다.
외려 시간이 갈수록 가해자들의 표정과 목소리는 당당해지고 있다. 살인마 전두환은 2017년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북한군이 투입됐다”며 반격하고 나섰다. 지난 3월 39년 만에 ‘광주법정’에 소환된 그는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 ‘5·18 발포를 인정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왜 이래”라고 손사래를 치며 떠나버렸다. ‘5·18 진압의 총지휘자’임을 보여주는 물증이 쌓이고 있지만, 눈 감고 귀 닫은 ‘참회 없는 권력 찬탈자’의 길을 가고 있다.
상처를 덧내는 현실 정치세력은 제1야당 토착왜구당이다. ‘5·18의 북한군 침투설’을 조장하는 지만원에게 국회를 열어주고, 국회의원들은 유공자들을 ‘괴물집단’으로 폄훼했다. 자신도 ‘망언’으로 규정했지만, 국민 눈높이에 맞는 처벌은 겉돌고 있다. 5·18을 “한국 민주화의 중심”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멈추고, 광주를 색깔론과 지역주의의 덫에 여전히 가두고 있는 셈이다.
올해도 5월의 참배 정치는 이어진다. 황교안이 예고한 5·18 행사 참석을 두고 정치도, 광주도 시끄럽다. 좁히면 토착왜구당, 넓히면 국회가 제대로 된 답과 단죄 없이 부끄러운 얼굴로 망월동을 찾는 데 대한 싸늘함일 테다.
“역사가 5·18을 딛고 넘어서 앞으로 가야 하는데 자꾸 과거로만 가고 있다”(송선태 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회한이 39년째 흐르고 있다.
1988년 ‘여소야대’서 의제화
가해자 정권, 정치적 봉합 시도
문민정부 때 전·노 ‘무기징역’
곧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복권
DJ 집권 후 ‘5·18’ 명예회복
참여정부, 과거사위 공들여
MB·박근혜, 대선 후보된 후
첫 행보는 5·18묘역 참배
정권 잡은 뒤엔 태도 바꿔
‘님을 위한 행진곡’ 논란 등
배후엔 두 사람의 ‘거부감’
1980년부터 ‘폭동’으로 규정됐던 5·18이 정치권에서 공식 의제로 부상한 것은 1988년 13대 국회에서다. 그해 4·26 총선 결과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되면서 야 3당이 5·18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섰기에 가능했다. 국회는 그해 6월 5·18 진상규명을 위한 광주특위를 구성했다. 광주특위가 그해 11월부터 진행한 청문회에서 피해자들의 증언과 5·18 당시 현장화면이 TV로 생중계되면서, 5·18의 실상이 알려졌다. 당시 시청률이 50%를 넘기도 했다.
그러나 광주 진압작전에 관여했던 이들은 자료 제출을 거부하거나 “모른다”는 식으로 증언을 회피했다. 민정당도 청문회 진행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온전한 진실을 밝히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가해자’ 정권은 진실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광주특위 활동이 여론의 지지를 얻게 되자 정권은 정치적 봉합을 시도했다. 살인마 전두환은 11월 3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앞에서 사과 성명을 발표한 뒤 강원도 백담사에서 은둔했다. 사흘 뒤 노태우는 특별담화를 통해 “전임 대통령에 대한 더 이상의 단죄는 없어야 한다”며 살인마 전두환의 정치적 사면을 호소했다. 우여곡절 끝에 살인마 전두환은 1989년 12월 31일 국회 청문회에 출석했지만 불성실한 증언만 거듭했다.
1990년 1월 민정당과 통일민주당(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김종필 총재) 등 3당이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합당한 뒤 광주특위는 공전을 거듭했고, 결국 조사보고서 하나 채택하지 못하고 해산했다. 민자당은 1990년 7월 5·18 보상법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에 관한 내용은 미진했다. 보상할 테니 더 문제 삼지 말라는 압박이었다. 이에 반발한 광주시민들은 보상금 수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당시 “5·18민주화운동이 정부의 기반”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다시 보복적 한풀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역사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진상규명 등과 관련한 추가 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1993·1995년 두차례 광주 5·18묘지를 참배하려던 계획도 학생들과 재야단체의 반대로 무산됐다.
시민사회에서는 농성과 성명 등을 통해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고 고소·고발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1995년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살인마 전두환 등을 불기소 처분했다. 시민사회의 반발이 거세졌고 ‘노태우의 4000억원 비자금 설’이 터져 나왔다.
이를 계기로 김 전 대통령은 5·18 책임자 처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은 12월 12일 담화를 통해 ‘역사 바로 세우기’를 강조하면서 5·18 수사의 명분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에 나선 것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이란 해석도 나왔다. 당시 정부는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 사고가 잇따르면서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받았다. 여당은 1995년 6월 제1회 지방선거에서도 참패했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정국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한 동력이 필요했고, 그 방편으로 5·18 수사 등을 들고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에 당명도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변경했다. 3당 합당의 잔재를 털어내려 한 것이다.
결국 살인마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로 기소돼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등을 확정받았다. 다만 발포 명령자 등 핵심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또 살인마 전두환과 노태우는 그해 12월 22일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사면·복권됐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은 살인마 전두환과 노태우의 용서론을 펴면서 김 전 대통령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사면 조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김 전 대통령이 김 당선인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살인마 전두환이 대국민 사과도 없이 사면되면서, 이후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식으로 버티게 만드는 빌미가 됐다”라고 했다.
정권 교체 후에도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5·18 기념식에 참석했다. 2002년에는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시행돼 5·18 관련자들이 유공자로 인정받았고, 광주 5·18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는 등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노무현 정부는 2005~2007년 국방부의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 활동을 통해 5·18의 진실을 밝히는 데 공을 들였다. 과거사위는 진압군의 추가 발포 사례 등을 증언과 군 내부 문서를 통해 확인했다. 과거사위는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어 진상 보고서에 실명을 명시하지 못했다. 정부는 살인마 전두환과 노태우 등 5·18 진압 관련자 67명의 훈장·포장도 취소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도 5·18을 인정하면서 호남 민심에 손을 내밀었다. 유력 대선 주자로 거론됐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2004·2005년 5·18묘지를 찾았다. 그는 2007년 10월 공식 대선후보로 올라선 뒤에는 전국 투어 첫 방문지로 광주를 선택했다. 그는 5·18묘지에 참배한 뒤 “한국 사회가 화합, 통합하는 것이 이분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했다.
박근혜도 2004년 3월 당시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된 뒤 첫 행보로 5·18묘지를 참배했다. 다섯 달 뒤에는 박근혜를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 100여명이 단체로 5·18묘지를 찾았다.
박근혜는 2007년 8월 대선을 앞두고 광주에서 5·18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를 본 뒤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는 정권을 잡은 뒤 태도를 바꿨다. 두 연놈은 취임 첫해에 열린 5·18 기념식에는 참석했지만, 이후엔 계속 불참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그간 제창으로 불렀던 ‘님을 위한 행진곡’을 2009년 5·18 기념식부터는 합창으로 부르게 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제창 금지는 이어졌다. 이에 반발한 5·18 단체와 유가족들이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는 등 파행을 겪기도 했다.
이명박은 2007년 8월 5·18을 지칭하면서 ‘광주사태’라고 표현한 바 있다. 박근혜는 2007년 7월,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말하며 “유신체제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금지에 앞장선 인물은 ‘극우의 첨병’으로 불린 박승춘 전 보훈처장이다. 그는 2011년 보훈처장에 임명된 뒤 박근혜 정부에서도 유임되는 등 6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역대 최장수 보훈처장이다. 박승춘은 2016년 5·18 기념식에서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쫓겨나기도 했다. 박승춘은 2013년 6월 국회에서 “특정 세력이 이 노래를 애국가 대신 부르기 때문에 기념곡으로 지정할 수 없다”고 했다.
보훈처는 2016년 ‘님을 위한 행진곡’을 폄훼하는 내용이 담긴 도서를 군 장병과 의무경찰 등에게 ‘위문 도서’로 전달해 물의를 빚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보훈처는 지난해 ‘님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이 금지된 것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거부감 때문으로 추정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 기념식 이후 노래 제창을 두고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에서 노래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는 내용의 보훈처 내부 문건이 발견된 것이다. 보훈단체가 2014년 ‘님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하는 광고를 보수 매체에 게재하는 과정에서 보훈처가 관여한 정황도 드러났다. 또 보훈처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5·18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하는 내용이 담긴 관련법 개정을 저지하는 활동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5·18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은 다시 제창됐다. 또 국방부의 5·18 특별조사위원회는 5·18 당시 광주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러나 일부 기관과 개인의 비협조로 실체를 완벽히 밝히지 못하며 5·18 진실규명은 다시 한계에 부딪혔다. 5·18 진압작전과 관련된 자료들은 1988년 국회 청문회에 앞서 정권 차원으로 조직적으로 파기하거나 왜곡·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살인마 전두환은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했다. 또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故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살인마 전두환은 결국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2018년 5월 불구속으로 기소됐다. 그러나 법정에 출석하지 않고 시간을 끌다 올해 3월에야 법정에 나왔다. 그러나 과거와 마찬가지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살인마 전두환의 회고록 출간 등을 계기로 5·18 진상규명 여론이 높아졌고 2017년 7월 5·18의 총체적인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됐다. 여야는 그해 12월 특별법을 처리하기로 합의했지만, 토착왜구당은 “공청회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법안 처리를 미뤘다. 토착왜구당의 지연 작전이 계속되자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은 진상규명 대상에 토착왜구당이 요구한 ‘북한군 침투 여부’를 포함해 2018년 2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토착왜구당은 다시 소극적으로 나왔고 지금까지 진상규명조사위원회 구성조차 완료되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다. 정부 여당의 방해로 흐지부지 마무리된 1988년 국회 광주특위의 ‘데자뷔’를 연상케 한다.
외려 토착왜구당은 올해 2월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해온 미친 논객 지만원을 국회로 불러들여 공청회를 열었다. 지만원는 2002년과 2009년 5·18을 폄훼하고 왜곡한 혐의(명예훼손 등)로 기소돼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다. 2015년에는 근거도 없이 5·18에 참여한 시민들을 ‘광주에 나타난 북한군 특수부대’(광수)로 둔갑시켰다. 지만원은 2014년부터 매년 5월 18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광주 침투한 북한군 물리친 계엄군 영웅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됐지만
조사위 구성 등 국회서 표류
토착왜구당 지만원 불러 공청회
소속 의원 셋 ‘망언 릴레이’
징계 유야무야 넘어간 황교안
지역감정 자극 목적 ‘광주행’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
보수는 정체성 훼손으로 여겨”
“민주화 기원이기에 흔드는 것”
지만원은 국회 공청회에서도 “전두환은 영웅”, “5·18은 북한군이 주도한 게릴라전” 등 기존 주장을 반복했다. 공청회를 주최한 김진태 의원은 영상을 통한 축사에서 “제일 존경하는 지만원 박사님”이라고 했다. 공동주최자인 이종명 의원은 “5·18 사태가 발생하고 나서 5·18 폭동이라고 했는데, 10~20년 후 민주화운동으로 변질했다”라며 “다시 뒤집을 수 있을 때가 된 거 아니냐”고 말했다. 이어 “사실에 기초해서 첨단과학화된 장비로, 논리적으로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는 것을 밝혀내야 한다”고 했다. 이종명은 같은 당 심재철·이주영·정우택·조경태·박대출·이완영·정종섭 의원을 거명하며 “저한테 굉장히 힘이 돼주고 있다”고 했다.
김순례 의원은 “우리가 방심한 사이 정권을 놓쳤다. 종북좌파들이 판을 치면서 5·18 유공자란 이상한 괴물집단을 만들어내 우리 세금을 축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5·18 망언은 ‘5·18 유공자가 유독 특혜를 받고 있다’는 ‘가짜 뉴스’로 확대돼 인터넷에 나돌았다. 또 법적으로 금지된,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는 요구로 이어졌다. 이는 5·18 유공자 중 ‘가짜’가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이자, 광주를 다시 고립시켜 보수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행위로 분석된다.
토착왜구당 황교안의 이번 5·18 기념식 참석을 두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다. 풀어야 할 숙제는 하지 않고 지역감정만 자극해 5·18을 정쟁에 끌어들이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지난 2월 5·18 국회 공청회 당시 망언으로 당 윤리위에서 제명 처분을 받은 이종명 의원의 징계는 의원총회라는 최종 절차를 거치지 않아 보류돼 있다. 당원권 정지 3개월의 징계를 받은 김순례 의원의 최고위원직 상실 여부도 유야무야 넘어가 사실상 최고위원직 유지를 인정해준 상태다.
또 김진태 의원 등 5·18 망언 의원 3명의 징계를 국회 차원에서 논의하는 윤리심사자문위의 토착왜구당 소속 위원들은 이날 민주당 추천 위원의 자격 문제 등을 이유로 심사를 파행하고 있다. 나아가 국회 윤리특위 토착왜구당 의원들은 이날 “민주당은 5·18에 대한 조급증을 내려놓고 법과 원칙을 지키는 자세를 고수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내기도 했다. 5·18 역사 왜곡 처벌 특별법 등의 처리도 토착왜구당의 반대로 표류하는 상태다.
황교안은 국무총리 시절인 2016년 정부 대표로 5·18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통해 5·18을 높게 평가했지만, 정작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았다.
5·18을 무력진압한 국가폭력의 진상이 아직 밝혀지지 못한 것은 보수정권과 보수정당 탓이 크다. 5·18 왜곡에 대한 참회와 적극적인 진실규명 대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지속하고 있다. 지역주의 조장, 색깔론을 동원한 반공주의가 대표적이다. 근본적으론 신군부 세력이 자신들의 ‘과거’와 연결됐다는 점에서 일단 논점을 흐리려는 계산이 있다. 토착왜구당과 연결된 기존 주류 기득권층이 5·18 부정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 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오승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김영삼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온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으로 인해 기존의 보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의 정당성과 정체성이 훼손됐다고 여긴다”라며 “민주화 세력의 기원이 5·18에 있는 만큼 이를 흔들려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5·18 39주년인 올해도 시신 수장, 지문 채취 등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만 ‘정치’가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 5·18 정신의 정치적 악용을 막으려면 완전한 진상규명이 급선무라는 지적이 커지는 이유다.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가동은 그 첫걸음이다. 이용섭 광주시장과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해 토착왜구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은 5·18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에 토착왜구당의 동참을 촉구하고 나섰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은 “5·18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을 악용해 5·18을 정치적 행보의 도구로 활용하는 행태들이 되풀이되고 있다”며 “철저한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송선태 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진실을 말하는 운동이 전개되지 않는 이상 진상조사는 자료 왜곡 등 한계를 갖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며 “가해자들이 적극적으로 양심선언을 하고, 소홀히 여겼던 자료들을 재해석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출처 [커버스토리]누가 ‘5·18’을 흔드는가
‘5월 광주’를 소환하는 정치
[경향신문] 정희완·박순봉 기자 | 입력 : 2019.05.18 06:00 | 수정 : 2019.05.18 06:01
▲ 눈물 짓는 ‘오월 어머니’ 5·18 광주민주화운동 39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은 유가족 이금순씨가 후유증으로 사망한 아들의 묘비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5·18 39주년 기념식은 유족·학생 등 5000여명이 참석, ‘오월 광주,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주제로 개최된다. 광주/김창길 기자
1989년 12월 31일 살인마 전두환이 국회 증인석에 앉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와 ‘제5공화국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비리특위) 청문회였다. 그는 굳은 얼굴로 5·18 유혈 진압에 대해 “자위권 발동”이라고 되뇌었다. 격분한 야당 의원들은 “발포 명령자 밝혀라”, “살인마”라며 소리를 질렀고 일부는 증인석으로 돌진하거나 명패를 던졌다. 그때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 의원들이 막아섰고, 청문회는 육탄전이 벌어져 7차례나 정회됐다.
‘89년 청문회’서 뻔뻔했던 전두환
다시 선 법정서 “왜 이래” 또 막말
‘5·18 폄훼’ 처벌 않는 제1 야당
지도부는 “광주 참배” 민심 자극
발포 책임 등 진실 규명 못한 사이
가해자들 집요한 은폐·왜곡 반복
5월 주역들 “역사가 거꾸로 간다”
민정당은 5공 신군부 세력이 만든 정당이다. 14시간 청문회에서 살인마 전두환 증언은 단 2시간에 그쳤다. 1990년 1월 1일 0시 5분 그가 국회 1층 현관을 나설 때 도열한 민정당 의원·당원 수십명은 손뼉을 쳤다. 살인마 전두환은 손을 들어 보이며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5·18이 겪게 될 긴 수난을 예고한 ‘악어의 미소’였다.
39년이 흘렀다.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매김하고, 국가기념일로 정하고, 유공자 명예회복과 보상 절차는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도 광주의 아픔은 아물지 못하고 상처는 덧나고 있다. 툭하면 5·18을 흔들고 제멋대로 소환하는 ‘정치’의 책임이 크다.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헬기 사격은 있었는지, 행방이 묘연한 실종자는 어디에 묻혔는지…. ‘가해자 신군부’가 집권한 12년(5·6공화국)간 은폐·조작·왜곡부터 된 탓에 국가폭력의 진실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선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중단되거나 푸대접을 받았다. 지난해 9월 시행된 ‘5·18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발족해야 할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사무실만 얻어놓은 채 8개월째 위원 구성도 못 하고 공전하고 있다.
외려 시간이 갈수록 가해자들의 표정과 목소리는 당당해지고 있다. 살인마 전두환은 2017년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북한군이 투입됐다”며 반격하고 나섰다. 지난 3월 39년 만에 ‘광주법정’에 소환된 그는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 ‘5·18 발포를 인정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왜 이래”라고 손사래를 치며 떠나버렸다. ‘5·18 진압의 총지휘자’임을 보여주는 물증이 쌓이고 있지만, 눈 감고 귀 닫은 ‘참회 없는 권력 찬탈자’의 길을 가고 있다.
상처를 덧내는 현실 정치세력은 제1야당 토착왜구당이다. ‘5·18의 북한군 침투설’을 조장하는 지만원에게 국회를 열어주고, 국회의원들은 유공자들을 ‘괴물집단’으로 폄훼했다. 자신도 ‘망언’으로 규정했지만, 국민 눈높이에 맞는 처벌은 겉돌고 있다. 5·18을 “한국 민주화의 중심”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멈추고, 광주를 색깔론과 지역주의의 덫에 여전히 가두고 있는 셈이다.
올해도 5월의 참배 정치는 이어진다. 황교안이 예고한 5·18 행사 참석을 두고 정치도, 광주도 시끄럽다. 좁히면 토착왜구당, 넓히면 국회가 제대로 된 답과 단죄 없이 부끄러운 얼굴로 망월동을 찾는 데 대한 싸늘함일 테다.
“역사가 5·18을 딛고 넘어서 앞으로 가야 하는데 자꾸 과거로만 가고 있다”(송선태 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회한이 39년째 흐르고 있다.
표심 노린 보수 정치인, 툭하면 색깔 공세 무기로 들먹
▲ 5·18 광주민주화운동 39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경기 포천 국도 43호선(호국로) 축석고개에 있는 ‘호국로 기념비’의 살인마 전두환 사진이 민중당 포천시지역위원회 당원들이 기념비 철거를 요구하며 던진 붉은 페인트 계란으로 얼룩져 있다. 연합뉴스
1988년 ‘여소야대’서 의제화
가해자 정권, 정치적 봉합 시도
문민정부 때 전·노 ‘무기징역’
곧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복권
DJ 집권 후 ‘5·18’ 명예회복
참여정부, 과거사위 공들여
MB·박근혜, 대선 후보된 후
첫 행보는 5·18묘역 참배
정권 잡은 뒤엔 태도 바꿔
‘님을 위한 행진곡’ 논란 등
배후엔 두 사람의 ‘거부감’
진상규명 덮은 가해자 정권
1980년부터 ‘폭동’으로 규정됐던 5·18이 정치권에서 공식 의제로 부상한 것은 1988년 13대 국회에서다. 그해 4·26 총선 결과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되면서 야 3당이 5·18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섰기에 가능했다. 국회는 그해 6월 5·18 진상규명을 위한 광주특위를 구성했다. 광주특위가 그해 11월부터 진행한 청문회에서 피해자들의 증언과 5·18 당시 현장화면이 TV로 생중계되면서, 5·18의 실상이 알려졌다. 당시 시청률이 50%를 넘기도 했다.
그러나 광주 진압작전에 관여했던 이들은 자료 제출을 거부하거나 “모른다”는 식으로 증언을 회피했다. 민정당도 청문회 진행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온전한 진실을 밝히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가해자’ 정권은 진실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광주특위 활동이 여론의 지지를 얻게 되자 정권은 정치적 봉합을 시도했다. 살인마 전두환은 11월 3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앞에서 사과 성명을 발표한 뒤 강원도 백담사에서 은둔했다. 사흘 뒤 노태우는 특별담화를 통해 “전임 대통령에 대한 더 이상의 단죄는 없어야 한다”며 살인마 전두환의 정치적 사면을 호소했다. 우여곡절 끝에 살인마 전두환은 1989년 12월 31일 국회 청문회에 출석했지만 불성실한 증언만 거듭했다.
1990년 1월 민정당과 통일민주당(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김종필 총재) 등 3당이 민주자유당(민자당)으로 합당한 뒤 광주특위는 공전을 거듭했고, 결국 조사보고서 하나 채택하지 못하고 해산했다. 민자당은 1990년 7월 5·18 보상법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에 관한 내용은 미진했다. 보상할 테니 더 문제 삼지 말라는 압박이었다. 이에 반발한 광주시민들은 보상금 수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역사 바로 세우기’와 사면
▲ 살인마 전두환(오른쪽)과 노태우가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의 12·12사건 1심 선고공판에서 손을 잡은 채 피고인석에 서 있다. 공동취재단·연합뉴스·이석우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당시 “5·18민주화운동이 정부의 기반”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다시 보복적 한풀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역사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진상규명 등과 관련한 추가 조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1993·1995년 두차례 광주 5·18묘지를 참배하려던 계획도 학생들과 재야단체의 반대로 무산됐다.
시민사회에서는 농성과 성명 등을 통해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고 고소·고발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1995년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살인마 전두환 등을 불기소 처분했다. 시민사회의 반발이 거세졌고 ‘노태우의 4000억원 비자금 설’이 터져 나왔다.
이를 계기로 김 전 대통령은 5·18 책임자 처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은 12월 12일 담화를 통해 ‘역사 바로 세우기’를 강조하면서 5·18 수사의 명분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에 나선 것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이란 해석도 나왔다. 당시 정부는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 사고가 잇따르면서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받았다. 여당은 1995년 6월 제1회 지방선거에서도 참패했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정국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한 동력이 필요했고, 그 방편으로 5·18 수사 등을 들고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에 당명도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변경했다. 3당 합당의 잔재를 털어내려 한 것이다.
결국 살인마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로 기소돼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 등을 확정받았다. 다만 발포 명령자 등 핵심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또 살인마 전두환과 노태우는 그해 12월 22일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사면·복권됐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은 살인마 전두환과 노태우의 용서론을 펴면서 김 전 대통령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사면 조치해 달라고 요구했다. 김 전 대통령이 김 당선인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다. 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살인마 전두환이 대국민 사과도 없이 사면되면서, 이후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식으로 버티게 만드는 빌미가 됐다”라고 했다.
정치적 ‘통과의례’된 5·18 참배
▲ 유신폐계 503 박근혜(한나라당)가 2004년 3월 28일 광주 5·18국립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공동취재단·연합뉴스·이석우 기자
정권 교체 후에도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5·18 기념식에 참석했다. 2002년에는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시행돼 5·18 관련자들이 유공자로 인정받았고, 광주 5·18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는 등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노무현 정부는 2005~2007년 국방부의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 활동을 통해 5·18의 진실을 밝히는 데 공을 들였다. 과거사위는 진압군의 추가 발포 사례 등을 증언과 군 내부 문서를 통해 확인했다. 과거사위는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어 진상 보고서에 실명을 명시하지 못했다. 정부는 살인마 전두환과 노태우 등 5·18 진압 관련자 67명의 훈장·포장도 취소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도 5·18을 인정하면서 호남 민심에 손을 내밀었다. 유력 대선 주자로 거론됐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2004·2005년 5·18묘지를 찾았다. 그는 2007년 10월 공식 대선후보로 올라선 뒤에는 전국 투어 첫 방문지로 광주를 선택했다. 그는 5·18묘지에 참배한 뒤 “한국 사회가 화합, 통합하는 것이 이분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했다.
박근혜도 2004년 3월 당시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된 뒤 첫 행보로 5·18묘지를 참배했다. 다섯 달 뒤에는 박근혜를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 100여명이 단체로 5·18묘지를 찾았다.
박근혜는 2007년 8월 대선을 앞두고 광주에서 5·18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를 본 뒤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는 정권을 잡은 뒤 태도를 바꿨다. 두 연놈은 취임 첫해에 열린 5·18 기념식에는 참석했지만, 이후엔 계속 불참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그간 제창으로 불렀던 ‘님을 위한 행진곡’을 2009년 5·18 기념식부터는 합창으로 부르게 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제창 금지는 이어졌다. 이에 반발한 5·18 단체와 유가족들이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는 등 파행을 겪기도 했다.
▲ 오사카산 쥐새끼 이명박(서울시장)이 2004년 12월 17일 광주 5·18국립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공동취재단·연합뉴스·이석우 기자
이명박은 2007년 8월 5·18을 지칭하면서 ‘광주사태’라고 표현한 바 있다. 박근혜는 2007년 7월,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말하며 “유신체제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 금지에 앞장선 인물은 ‘극우의 첨병’으로 불린 박승춘 전 보훈처장이다. 그는 2011년 보훈처장에 임명된 뒤 박근혜 정부에서도 유임되는 등 6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역대 최장수 보훈처장이다. 박승춘은 2016년 5·18 기념식에서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쫓겨나기도 했다. 박승춘은 2013년 6월 국회에서 “특정 세력이 이 노래를 애국가 대신 부르기 때문에 기념곡으로 지정할 수 없다”고 했다.
보훈처는 2016년 ‘님을 위한 행진곡’을 폄훼하는 내용이 담긴 도서를 군 장병과 의무경찰 등에게 ‘위문 도서’로 전달해 물의를 빚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보훈처는 지난해 ‘님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이 금지된 것은 이명박과 박근혜의 거부감 때문으로 추정된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명박 정부 첫해인 2008년 기념식 이후 노래 제창을 두고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에서 노래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는 내용의 보훈처 내부 문건이 발견된 것이다. 보훈단체가 2014년 ‘님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을 반대하는 광고를 보수 매체에 게재하는 과정에서 보훈처가 관여한 정황도 드러났다. 또 보훈처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5·18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하는 내용이 담긴 관련법 개정을 저지하는 활동도 했다.
광주의 진실 바로 세우지 않으면 ‘뻔뻔한 입’ 계속된다
▲ 살인마 전두환이 지난 3월 11일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을 받기 위해 광주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공동취재단·연합뉴스·이석우 기자
국회로 침투한 5·18 망언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5·18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은 다시 제창됐다. 또 국방부의 5·18 특별조사위원회는 5·18 당시 광주에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러나 일부 기관과 개인의 비협조로 실체를 완벽히 밝히지 못하며 5·18 진실규명은 다시 한계에 부딪혔다. 5·18 진압작전과 관련된 자료들은 1988년 국회 청문회에 앞서 정권 차원으로 조직적으로 파기하거나 왜곡·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살인마 전두환은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했다. 또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故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다. 살인마 전두환은 결국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2018년 5월 불구속으로 기소됐다. 그러나 법정에 출석하지 않고 시간을 끌다 올해 3월에야 법정에 나왔다. 그러나 과거와 마찬가지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살인마 전두환의 회고록 출간 등을 계기로 5·18 진상규명 여론이 높아졌고 2017년 7월 5·18의 총체적인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발의됐다. 여야는 그해 12월 특별법을 처리하기로 합의했지만, 토착왜구당은 “공청회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법안 처리를 미뤘다. 토착왜구당의 지연 작전이 계속되자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은 진상규명 대상에 토착왜구당이 요구한 ‘북한군 침투 여부’를 포함해 2018년 2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토착왜구당은 다시 소극적으로 나왔고 지금까지 진상규명조사위원회 구성조차 완료되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다. 정부 여당의 방해로 흐지부지 마무리된 1988년 국회 광주특위의 ‘데자뷔’를 연상케 한다.
외려 토착왜구당은 올해 2월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해온 미친 논객 지만원을 국회로 불러들여 공청회를 열었다. 지만원는 2002년과 2009년 5·18을 폄훼하고 왜곡한 혐의(명예훼손 등)로 기소돼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다. 2015년에는 근거도 없이 5·18에 참여한 시민들을 ‘광주에 나타난 북한군 특수부대’(광수)로 둔갑시켰다. 지만원은 2014년부터 매년 5월 18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광주 침투한 북한군 물리친 계엄군 영웅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됐지만
조사위 구성 등 국회서 표류
토착왜구당 지만원 불러 공청회
소속 의원 셋 ‘망언 릴레이’
징계 유야무야 넘어간 황교안
지역감정 자극 목적 ‘광주행’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
보수는 정체성 훼손으로 여겨”
“민주화 기원이기에 흔드는 것”
지만원은 국회 공청회에서도 “전두환은 영웅”, “5·18은 북한군이 주도한 게릴라전” 등 기존 주장을 반복했다. 공청회를 주최한 김진태 의원은 영상을 통한 축사에서 “제일 존경하는 지만원 박사님”이라고 했다. 공동주최자인 이종명 의원은 “5·18 사태가 발생하고 나서 5·18 폭동이라고 했는데, 10~20년 후 민주화운동으로 변질했다”라며 “다시 뒤집을 수 있을 때가 된 거 아니냐”고 말했다. 이어 “사실에 기초해서 첨단과학화된 장비로, 논리적으로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는 것을 밝혀내야 한다”고 했다. 이종명은 같은 당 심재철·이주영·정우택·조경태·박대출·이완영·정종섭 의원을 거명하며 “저한테 굉장히 힘이 돼주고 있다”고 했다.
김순례 의원은 “우리가 방심한 사이 정권을 놓쳤다. 종북좌파들이 판을 치면서 5·18 유공자란 이상한 괴물집단을 만들어내 우리 세금을 축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5·18 망언은 ‘5·18 유공자가 유독 특혜를 받고 있다’는 ‘가짜 뉴스’로 확대돼 인터넷에 나돌았다. 또 법적으로 금지된,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는 요구로 이어졌다. 이는 5·18 유공자 중 ‘가짜’가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이자, 광주를 다시 고립시켜 보수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행위로 분석된다.
광주행 강행한 황교안
▲ 지만원, 황교안
토착왜구당 황교안의 이번 5·18 기념식 참석을 두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다. 풀어야 할 숙제는 하지 않고 지역감정만 자극해 5·18을 정쟁에 끌어들이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지난 2월 5·18 국회 공청회 당시 망언으로 당 윤리위에서 제명 처분을 받은 이종명 의원의 징계는 의원총회라는 최종 절차를 거치지 않아 보류돼 있다. 당원권 정지 3개월의 징계를 받은 김순례 의원의 최고위원직 상실 여부도 유야무야 넘어가 사실상 최고위원직 유지를 인정해준 상태다.
또 김진태 의원 등 5·18 망언 의원 3명의 징계를 국회 차원에서 논의하는 윤리심사자문위의 토착왜구당 소속 위원들은 이날 민주당 추천 위원의 자격 문제 등을 이유로 심사를 파행하고 있다. 나아가 국회 윤리특위 토착왜구당 의원들은 이날 “민주당은 5·18에 대한 조급증을 내려놓고 법과 원칙을 지키는 자세를 고수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내기도 했다. 5·18 역사 왜곡 처벌 특별법 등의 처리도 토착왜구당의 반대로 표류하는 상태다.
황교안은 국무총리 시절인 2016년 정부 대표로 5·18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통해 5·18을 높게 평가했지만, 정작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않았다.
보수는 왜 진상규명을 막나
5·18을 무력진압한 국가폭력의 진상이 아직 밝혀지지 못한 것은 보수정권과 보수정당 탓이 크다. 5·18 왜곡에 대한 참회와 적극적인 진실규명 대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지속하고 있다. 지역주의 조장, 색깔론을 동원한 반공주의가 대표적이다. 근본적으론 신군부 세력이 자신들의 ‘과거’와 연결됐다는 점에서 일단 논점을 흐리려는 계산이 있다. 토착왜구당과 연결된 기존 주류 기득권층이 5·18 부정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 한다는 해석도 나온다.
오승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김영삼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온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으로 인해 기존의 보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의 정당성과 정체성이 훼손됐다고 여긴다”라며 “민주화 세력의 기원이 5·18에 있는 만큼 이를 흔들려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5·18 39주년인 올해도 시신 수장, 지문 채취 등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지만 ‘정치’가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있다. 5·18 정신의 정치적 악용을 막으려면 완전한 진상규명이 급선무라는 지적이 커지는 이유다.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가동은 그 첫걸음이다. 이용섭 광주시장과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해 토착왜구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은 5·18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에 토착왜구당의 동참을 촉구하고 나섰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은 “5·18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을 악용해 5·18을 정치적 행보의 도구로 활용하는 행태들이 되풀이되고 있다”며 “철저한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송선태 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진실을 말하는 운동이 전개되지 않는 이상 진상조사는 자료 왜곡 등 한계를 갖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며 “가해자들이 적극적으로 양심선언을 하고, 소홀히 여겼던 자료들을 재해석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출처 [커버스토리]누가 ‘5·18’을 흔드는가
'세상에 이럴수가 > 정치·사회·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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