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나온 광주판 ‘안네의 일기’…숨가빴던 오월의 기록
당시 전남대 3학년, 도청 상황실에 있던 김현경씨
체포 대비해 일부 내용 한글 자모 등 암호로 표기
“5·18 왜곡 맞서 당시 순수했던 열망 전하고 싶다”
[한겨레] 글·사진 안관옥 기자 | 등록 : 2019-05-17 04:59 | 수정 : 2019-05-17 19:21
“그때 공포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예비역 육군 중령 김현경(59·서울)씨는 15일 <한겨레>와 만나 계엄군 진입 전날 전남도청 안의 비장한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20살이었던 그는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공수부대가 퇴각한 뒤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자 상황실에 배치돼 거리방송, 성명 낭독, 원고 준비 등을 맡았다.
그는 숨 가빴던 1980년 5월 열흘 동안의 체험을 대학노트에 빼곡하게 정리했다. 전체 40여쪽 가운데 절반가량은 시민군 지도부가 활동했던 전남도청 상황실의 상황이 담겼다.
“어디서 전투가 벌어졌는지, 시신이 몇구나 발생했는지, 구급차는 출동했는지 등을 챙기느라 숨 가쁘게 돌아가는 낮 시간에는 기록을 할 수 없었어요. 통행금지 직전에 친구 집이나 친지 집에 찾아가 자면서 그날 중요한 일들을 정리하려 했지요.”
그는 체포됐을 때 남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자신만 알 수 있는 암호로 내용을 적었다. 민감한 부분은 한글 자모 24개를 아라비아 숫자와 알파벳 소문자로 변환해 표기했다. 중간에 글자를 빼거나 순서를 바꾸어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도록 체계를 만들었다.
“옆 사람 이름조차 묻지 말라고 했어요. (계엄군 편의대 활동 등으로) 전남도청 안에서 독침 사건이 발생하는 등 누구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그래서 기록을 한다는 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었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일기를 써온 그는 누군가 역사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느꼈다. 그가 39년 동안 보관하다가 이날 내놓은 기록은, 나치 치하의 암스테르담에 은신했던 가족의 생활을 일기로 쓴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를 연상하게 했다.
‘광주판 안네의 일기’에는 개인적인 시위 경험과 시민군 지도부의 활동이 깨알 같은 손글씨로 정리되어 있다. 그는 “시위 대열에 들었다가 계엄군에 쫓겨 두세차례 체포의 고비를 넘겼다. 충장로 가정집에선 화장실이 비좁아 안방 장롱 속에 숨었다가 살아났고, 광주극장 앞 관음사에선 미나리를 다듬고 있던 보살들이 몸뻬(헐렁한 일 바지)를 입혀주는 바람에 위기를 넘겼다”고 회고했다. 상황실에 들어갔을 땐 같은 과 1년 후배가 ‘도청에 있으면 죽는다’며 자꾸 나오라고 했지만 끝내 고집을 피웠다는 일화도 전했다.
또 그는 집회 발언을 정리한 메모, 미국이 항모 2대를 파견했다는 기대, 계엄군 진입에 대한 두려움, 시민군의 결연한 의지, 수습파와 항쟁파의 치열한 갈등, 주먹밥을 나르던 여성들의 헌신 등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는 시민군 지도부가 꾸려진 23일 오전 ‘대학생은 모여달라’는 말을 듣고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나흘 동안 상황실과 기획실을 오가며 거리방송, 성명 낭독, 원고 준비 등 임무를 수행했다. 계엄군의 진입이 임박하자 시민군 지도부는 26일 저녁 ‘나이 어린 학생과 여성은 집으로 돌아가 우리의 진실을 알려달라’고 등을 떠밀었다.
일기에는 눈물을 머금고 도청을 떠난 이후 그의 안타깝고 부끄러운 심경을 표현한 대목이 여러 차례 나온다. “부끄러워 부끄러워 태양을 바로 볼 수 없다. 죄스러워 죄스러워 고개를 쳐들고 다닐 수 없다. 차라리 돌아앉지 않은 강산이 눈물겹다.”
도청이 함락된 뒤 그는 용케 체포를 면했고 일기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친분있는 선배들을 따라다녀 학생회나 동아리의 기록에 남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계엄군에 대한 반감이 높았던 광주에서는 드물게 여군 장교에 지원했다. 해병대 출신인 오빠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장교가 되는 꿈을 꾸어왔기 때문이다. 면접관이 “80년에 시위를 했느냐”고 물었다. 망설이던 그는 “그때 광주시민은 모두가 시위를 했다”고 답했다. 83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임관했다. 90년 여군병과가 해체되자 정보로 돌아 여군 최초로 전방군단 정보대대장, 사단 정보참모 등을 지냈다. 2012년 중령으로 30여년 동안의 군생활을 마감했다. 예편 뒤인 2016년 경기대에 ‘한국 여성의 국방참여 확대방안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군대에 있을 땐 광주에 관심을 두기 어려웠다. 지금 극렬해진 5·18 왜곡에 마음이 많이 아프다. 그때 순수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열망과 행동을 전달해 진실의 조각을 맞추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출처 [단독] 또 나온 광주판 ‘안네의 일기’…숨가빴던 오월의 기록
당시 전남대 3학년, 도청 상황실에 있던 김현경씨
체포 대비해 일부 내용 한글 자모 등 암호로 표기
“5·18 왜곡 맞서 당시 순수했던 열망 전하고 싶다”
[한겨레] 글·사진 안관옥 기자 | 등록 : 2019-05-17 04:59 | 수정 : 2019-05-17 19:21
▲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판 ‘안네의 일기’를 쓴 김현경씨.
“그때 공포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예비역 육군 중령 김현경(59·서울)씨는 15일 <한겨레>와 만나 계엄군 진입 전날 전남도청 안의 비장한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20살이었던 그는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공수부대가 퇴각한 뒤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자 상황실에 배치돼 거리방송, 성명 낭독, 원고 준비 등을 맡았다.
그는 숨 가빴던 1980년 5월 열흘 동안의 체험을 대학노트에 빼곡하게 정리했다. 전체 40여쪽 가운데 절반가량은 시민군 지도부가 활동했던 전남도청 상황실의 상황이 담겼다.
“어디서 전투가 벌어졌는지, 시신이 몇구나 발생했는지, 구급차는 출동했는지 등을 챙기느라 숨 가쁘게 돌아가는 낮 시간에는 기록을 할 수 없었어요. 통행금지 직전에 친구 집이나 친지 집에 찾아가 자면서 그날 중요한 일들을 정리하려 했지요.”
그는 체포됐을 때 남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자신만 알 수 있는 암호로 내용을 적었다. 민감한 부분은 한글 자모 24개를 아라비아 숫자와 알파벳 소문자로 변환해 표기했다. 중간에 글자를 빼거나 순서를 바꾸어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도록 체계를 만들었다.
“옆 사람 이름조차 묻지 말라고 했어요. (계엄군 편의대 활동 등으로) 전남도청 안에서 독침 사건이 발생하는 등 누구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그래서 기록을 한다는 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었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일기를 써온 그는 누군가 역사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느꼈다. 그가 39년 동안 보관하다가 이날 내놓은 기록은, 나치 치하의 암스테르담에 은신했던 가족의 생활을 일기로 쓴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를 연상하게 했다.
‘광주판 안네의 일기’에는 개인적인 시위 경험과 시민군 지도부의 활동이 깨알 같은 손글씨로 정리되어 있다. 그는 “시위 대열에 들었다가 계엄군에 쫓겨 두세차례 체포의 고비를 넘겼다. 충장로 가정집에선 화장실이 비좁아 안방 장롱 속에 숨었다가 살아났고, 광주극장 앞 관음사에선 미나리를 다듬고 있던 보살들이 몸뻬(헐렁한 일 바지)를 입혀주는 바람에 위기를 넘겼다”고 회고했다. 상황실에 들어갔을 땐 같은 과 1년 후배가 ‘도청에 있으면 죽는다’며 자꾸 나오라고 했지만 끝내 고집을 피웠다는 일화도 전했다.
또 그는 집회 발언을 정리한 메모, 미국이 항모 2대를 파견했다는 기대, 계엄군 진입에 대한 두려움, 시민군의 결연한 의지, 수습파와 항쟁파의 치열한 갈등, 주먹밥을 나르던 여성들의 헌신 등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는 시민군 지도부가 꾸려진 23일 오전 ‘대학생은 모여달라’는 말을 듣고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나흘 동안 상황실과 기획실을 오가며 거리방송, 성명 낭독, 원고 준비 등 임무를 수행했다. 계엄군의 진입이 임박하자 시민군 지도부는 26일 저녁 ‘나이 어린 학생과 여성은 집으로 돌아가 우리의 진실을 알려달라’고 등을 떠밀었다.
일기에는 눈물을 머금고 도청을 떠난 이후 그의 안타깝고 부끄러운 심경을 표현한 대목이 여러 차례 나온다. “부끄러워 부끄러워 태양을 바로 볼 수 없다. 죄스러워 죄스러워 고개를 쳐들고 다닐 수 없다. 차라리 돌아앉지 않은 강산이 눈물겹다.”
도청이 함락된 뒤 그는 용케 체포를 면했고 일기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친분있는 선배들을 따라다녀 학생회나 동아리의 기록에 남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계엄군에 대한 반감이 높았던 광주에서는 드물게 여군 장교에 지원했다. 해병대 출신인 오빠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장교가 되는 꿈을 꾸어왔기 때문이다. 면접관이 “80년에 시위를 했느냐”고 물었다. 망설이던 그는 “그때 광주시민은 모두가 시위를 했다”고 답했다. 83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임관했다. 90년 여군병과가 해체되자 정보로 돌아 여군 최초로 전방군단 정보대대장, 사단 정보참모 등을 지냈다. 2012년 중령으로 30여년 동안의 군생활을 마감했다. 예편 뒤인 2016년 경기대에 ‘한국 여성의 국방참여 확대방안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군대에 있을 땐 광주에 관심을 두기 어려웠다. 지금 극렬해진 5·18 왜곡에 마음이 많이 아프다. 그때 순수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열망과 행동을 전달해 진실의 조각을 맞추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 1980년 5월 23일의 일기와 발각에 대비한 표기 체계.
▲ 김현경씨가 작성한 1980년 5월 열흘 동안의 기록 중 일부.
▲ 김현경씨는 1980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학생으로 전남도청의 시민군 상황실에서 상황 전파 등의 활동을 했다.
출처 [단독] 또 나온 광주판 ‘안네의 일기’…숨가빴던 오월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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