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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옥고까지 치렀는데... 또 ‘독립유공’ 인정 못받은 권승욱 선생

옥고까지 치렀는데... 또 ‘독립유공’ 인정 못받은 권승욱 선생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운동 벌였으나 “일제 말기 행적 불분명” 사유로 탈락... 재심 필요해
[오마이뉴스] 글: 박용규, 편집: 김예지 | 19.08.25 13:36 | 최종 업데이트 : 19.08.25 13:36


2019년 8월 9일, 필자는 조선어학회 소속으로 한글 운동을 펼쳤던 권승욱 선생의 아들 권오운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아버님이 또 독립유공 심사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다음 날인 10일, 권오운씨를 만났다. 권오운씨는 국가보훈처로부터 받은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결과 안내’라는 종이 한 장을 보여주었다. 권승욱이 포상되지 못한 이유로 “일제 말기의 행적 불분명”을 들고 있었다. 필자는 국가보훈처의 ‘공적심사 결과 안내문’이 너무도 소략하고 부실해서 경악했다.

필자는 이미 저서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2012)와 ‘우리말 말살책’에 맞선 권승욱, 그 후손을 찾습니다-독립운동 업적 누락…지금이라도 예우해야(<오마이뉴스>, 2012. 12. 8.)라는 글을 통해 권승욱의 독립유공 포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 권승욱 선생 (1917~1973) 권승욱 ⓒ 권한솔

필자는 2013년 1월 15일에 자료를 제출하여 국가보훈처에 권승욱에 대한 독립유공 공훈심사를 신청했다. 하지만 그해 광복절 이전에 포상이 어렵다는 통지를 받았다. 필자는 다시 증빙 서류를 제출하여 2013년 10월 21일에 재심을 요구했다.

다음 해인 2014년 광복절 이전에 국가보훈처로부터 포상이 어렵다는 심사 결과를 통보받았다. 국가보훈처는 ‘일제 말기 권승욱의 금융조합 취직’을 문제 삼았다. 재심에서도 독립유공 훈장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필자는 국가보훈처의 공훈심사과가 나서서 ‘권승욱의 금융조합 취직 사실과 친일부역 행위 여부’를 밝혀주기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밝히지 못한다면 독립 유공 포상을 할 것을 요청했다. 이후 공훈심사과 공무원은 필자에게 직접 벌교에 내려가 사실 확인을 하겠다고 말했다.

몇 달 뒤 공훈심사과 공무원으로부터 “벌교에 내려가 권승욱의 금융조합 취업에 대한 자료나 증언을 듣고자 했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라는 말씀을 직접 들었다. 필자는 그렇다면 담당 공무원에게 “권승욱의 언어 독립투쟁이 명백히 있었음이 밝혀졌고, 1년간의 옥고를 치렀으니 결론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2014년 8월에서 2019년의 지금까지 5년간 국가보훈처의 공훈심사과는 ‘권승욱의 금융조합 취직 사실과 친일부역 행위 여부’를 하나도 입증해 내지 못하고 있다.

공훈심사과의 공무원과 심사 위원이 지금까지 일제 말기 권승욱의 금융조합 취직 건에 대해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하고서, “일제 말기의 행적 불분명”이라는 불포상 사유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공훈심사과 공무원의 직무유기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공훈심사과의 공무원이 2차 자료에만 나오는 자료, 즉 최호연의 <조선어학회, 청진동 시절>(상)(1992, 진명문화사) 4쪽에 나오는 “금융조합에 취직은 했으나”라는 문구를 가지고, 권승욱이 ‘금융조합에 취직했기에 포상을 승인할 수 없다’라는 사유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점에 대해 필자는 너무 지나친 처사라고 판단한다.

2차 자료에만 나오는 자료를 가지고서, 1년간 옥고(1942. 10. 1.∼1943. 9. 18)를 치렀고, 더욱이 함흥경찰서(1942. 10. 1.∼1942. 10. 23.)에서 당한 물고문의 후유증으로 폐결핵에 걸려 이후 1973년 서거할 때까지 고통을 당했던 항일투사 권승욱의 공적을 외면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인정하지 않은 권승욱의 독립운동

2014년 광복절에 필자는 ‘독립유공 포상 불가’라는 국가보훈처의 심사 결과를 통보받은 이후, 권승욱에 대한 자료나 증언을 확보하고자 발 벗고 나섰다.

필자는 일찍이 일제 말기와 해방 이후 권승욱의 행적을 이렇게 기술했다. 권승욱은 스승 정인승으로부터 조선어사전의 편찬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1938년 6월에 조선어학회에 참여했다. 조선어사전 편찬의 전임 위원으로 이극로, 정인승, 이중화, 한징, 권덕규, 정태진 등과 함께 활동했다. 권승욱도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조선어대사전 편찬 작업, 즉 언어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때 최연소자로, 1942년 10월 1일에 피검되었다. 함경도 함흥경찰서에서 일제 경찰로부터 구타와 발길질, 물먹이기(일명 해전)를 당해 폐(허파)에 물이 들어가는 고문도 여러 날을 당했다. 홍원경찰서에서도 옷을 전부 벗겨놓은 상태에서 고춧가루 물을 먹는 물먹이기(일명 해전)와 비행기 태우기(일명 공중전) 등의 고문을 당했다. 함흥경찰서와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년 만인 1943년 9월 18일에 기소유예 처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출옥 뒤 고향 광주에서 쉬고 있었는데, 독립운동가 서민호(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 옥고를 치름.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가 그를 벌교에 있는 송명학교 교사로 취직시켜주었다. 1944년 1월 15일부터 송명학교에 근무했으나, 1944년 3월 학교가 폐교된 뒤에 사임했다. 이후 금융조합에 취직했다.

해방 뒤 전남 벌교에서 열린 국어강습회에 강사로 강연했다. 1945년 9월 초 서울로 올라가 조선어학회가 추진 중이던 조선말큰사전 편찬 사업에 편찬 위원으로 다시 참여했다. 우리말의 뜻풀이를 계속했다. 1947년에서 1957년에 걸쳐 총 6권의 <조선말 큰사전>이 발간될 때에 모두 참여했다. 그 공로로 1957년 문교부장관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1957년 10월에 국정교과서 도서편찬심의회 국어과 위원(문교부 장관 위촉)으로 활동했다. 1958년 8월 중앙 지명 제정 위원회 위원(국방부장관 위촉)에 선임됐다. 1963년 10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1973년 3월 17일에 서거했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2014년 겨울에 필자는 권승욱의 친구 이영균(李榮均, 1917년생)님을 발굴하여, 그로부터 같은 해 12월 30일에 권승욱과 관련한 글 한 편을 얻게 되었다. 이영균은 권승욱과 동갑이었고, 고창고보 선후배 사이로 만났다.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고, 1940년 3월에 졸업했다. 1938년경에는 서울 종로 4가에서 권승욱과 함께 1년 넘게 하숙을 하기도 했다.

이영균은 경성의전 재학 시절에 성적 순으로 자리를 배치했는데, 공부를 잘해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1943년경 전북 고창읍에서 작은 의원을 개업했다. 1948년 ‘이영균 산부인과’로 개업해, 이후 전주와 광주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필자는 2014년 12월 30일 자택에서 이영균님을 뵌 적이 있다. 2019년 8월 10일 필자가 권오운씨를 만났을 때, 올해 8월 7일에 이영균님이 서거했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다.

▲ 권승욱 친구 이영균 선생. 필자가 경기도 안양시 평촌동에 거주하신 선생의 자택에서 촬영. (2014. 12. 30) ⓒ 박용규

이에 필자는 이영균님이 2014년 12월 30일에 작성한 글 한 편을 최초로 공개하고자 한다.

<나의 친구 권승욱>

“내가 처음 권승욱을 만난 것은 전북 고창읍에 있는 사립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였다. 1931년에 나의 고향 고창에 있는 고창고보에 입학하였었는데, 나의 반에 권승락 학생이 있었는데 그의 동생인 권승욱은 한 학년 윗반에 있는 선배였다.

권승욱은 나와 동갑(1917년생)이었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었고 달리기와 야구부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다시 그를 만난 것은 서울에서였다.

1936년 봄 내가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다닐 때, 고창고보 동창회에서 권승욱을 만났고, 그는 ‘조선어학회’에 다닌다고 하였다. 화동에 있는 조선어학회로 승욱을 찾아갔었는데, 조선어학회는 낡은 건물로, 좁은 공간에 책상이 가득하였고, 책상 위에는 고서(古書) 등 책이 많이 쌓여 있었으며, 그 당시 유명한 학자, 선생님들이 여러분 계셨고, 승욱 친구는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목표로 일하고 있으며, ‘낱말’ 수집과 연구를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1938년경에는 서울 종로 4가의 하숙집에서 승욱과 함께 1년 넘게 하숙을 하기도 했었다. 1943년 경 고창읍에서 내가 작은 의원을 개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편지를 받았는데 ‘홍원 경찰서 권승욱’이라는 발신 편지였고, 내용은 “내가 지금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여기 와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인데, 병이 나서 의사의 진찰을 받은바 폐결핵으로 약을 복용해야 한다는데, 약값을 마련할 수 없으니 자네가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요청한 금액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그 후 1945년 해방 후 서울에서 승욱을 만났는데, 몸이 상당히 쇠약하여 있었다. 홍원경찰서에는 어학회 선생님들이 여러분 함께 구속되어 있었는데, 저들의 조사와 고문으로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다고 했다. 승욱도 많은 고생을 겪었다고 했다.

승욱이는 해방 후에도 조선어학회, 한글학회에서 계속 연구와 큰사전 편찬에 힘을 썼으며, 1955년(?)경에는 전북 전주시에 있는 전주여자고등학교에 와서 국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1948년부터 나는 전주에서 의원을 개업하고 1982년까지 계속했다.

권승욱은 그 후 전주에서 서울로 복귀하여 한글학회에 나갔고, 서울 배재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조선말 큰사전이 많은 노력 끝에 출간되니까 권승욱은 제일 먼저 그 제일권을 내게 보내주었고, 차례차례 나올 때마다 모두 내게 보내주었다.

승욱은 평생 빈한한 가운데 지냈고, 1972년 1월 그의 자택에 찾아갔을 때는 몸이 극도로 쇠약하였고, 각혈도 하고, 거동이 불편하였고, 말기가 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고, 1973년 드디어 별세하게 되었다.

일제의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헌신적으로 노력한 그는, 권승욱은 단명으로 떠나갔다.

2014년 12월 30일
경기도 안양시에서 이영균 씀.

다음은 위 글의 원본이다. 노트 두 장에 적어준 친필 글이다.

▲ 이영균, 나의 친구 권승욱 이영균의 글 ⓒ 박용규

▲ 이영균, 나의 친구 권승욱 이영균의 글 ⓒ 박용규

이영균의 글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친구 권승욱이 1936년부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어학회에 다니며, ‘조선말 큰사전’ 편찬 일을 하고 있었으며, 1943년 홍원경찰서에 있을 때 이미 폐결핵 진단을 의사로부터 받았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1945년 해방 후에 몸이 쇠약한 상태에 있었고, 그 와중에도 조선어학회에 들어가 ‘큰사전’ 편찬에 계속 참여하고 있었으며, 급기야 1972년에는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말기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1973년에 별세했다는 점을 확인했다.

여기에서 권승욱이 왜 홍원경찰서 수감 시절에 폐결핵 진단을 받게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겠다. 이때 생긴 폐결핵은 이후 서거할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1949년 4월에 잡지 <민성>에 ‘조선어학회 수난의 회고’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권승욱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가 함흥경찰서에서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형사는 나를 끌어가며 ‘바른 대로 말 안하면 죽인다’고 얼러댄다. 그러나 아무 감각이 없이 돌과 같이 그저 끌려갈 뿐이다. 취조실에 들어섰다. 형사 7,8인이 죽 늘어앉았다. 마치 백정과 같이 살기를 띠고 ‘어학회의 목적이 무엇이냐?’ 그러고 ‘이극로랑 한 이야기를 말하라’ 하고 밑도 끝도 없는 말로 묻는다. 나는 ‘학술연구기관이다’ 그러고 ‘학술문제 외에는 한 말이 별로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요 녀석 무엇이 어째’하고 뺨을 후려갈긴다. 눈에는 불이 번쩍, 정신이 아찔하다.” (59쪽)

“나체로 벌거숭이를 만들고는 옆방으로 끌고 간다. 끌리어 가보니 수도가 있고 그 밑에는 큰 물통이 놓여있고 석되들이 주전자가 서너개 있으며 수술대 같은 긴 나무로 된 의자 같은 틀이 가로놓여 있었다. 싸늘하고 무시무시하다. 틀에다가 뉘어 놓고는 두 다리의 발목을 틀에 동여매고 팔은 뒤로 젖히어 팔목을 동여매어 꼼짝 못하게 하여 놓는다. 나는 ‘기절할 때까지’를 입속으로 외웠다. 예수나 석가와 같이 태연하였다. 다만 물 따르는 소리밖에 아니 들린다. 한 놈은 발에 올라타고, 한 놈은 머리를 움켜쥐어 꼼짝 못하게 하고는 한 놈은 주전자를 들어 염불하듯이 ‘물을 먹으면 저승에 가고, 저승에 못 가면 폐병이 걸린다’ 하면서 가슴에다 폭포수와 같이 붓기를 시작한다.

온 몸이 싸늘하여 지는데 입과 코에다가 떨어뜨린다. 그러니 숨 쉬는 바람에 물을 아니 마실 수 없다. 폐로 물이 들어가게 되니 숨이 막히고 위로 삼키어 넘기게 된다. 숨이 막히는 바람에 물을 벌컥 넘기며 고통에 못 이기어 ‘아!’하고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친다.” (59쪽)

“서너 주전자를 먹는 중에 위를 중심삼아 온 심줄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상태에 이르더니 위가 불룩하여지며 분수처럼 입으로 토한다. 토하고 나니 그치었다. 정신이 아찔하고 개 떨리듯 떨리며 고추 설 기력이 없다.” (59쪽)

▲ 권승욱, 조선어학회 수난의 회고, <민성>, 1949, 4. 2. 고문 받은 실태를 기록한 글. ⓒ 박용규

이렇게 권승욱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 형사들에게 혹독하게 심문을 받으며, 특히 물고문을 당한 내용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형사 3명이 그에게 달려들어 물고문을 자행했던 것이다. 일제 형사가 말한 것과 같이, 폐에 물이 가득차서 폐병에 걸리기에 이르렀다. 폐결핵은 물고문 후유증에서 비롯됐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발생한 폐질환 때문에, 그는 해방 이후 내내 월급의 약 80%를 약값으로 지불해야만 했다. (2013년 1월 11일 아들 권오운씨 증언) 청년시절 만능 운동선수로 너무도 건강했던 그도, 끝내 젊은 나이인 57세에 서거했다.

‘물고문’ 하면 전두환 폭압 정권 시기에 목숨을 잃은 박종철 열사가 떠오른다. 박종철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6월 민주항쟁으로 꽃을 피워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정착시켰다. 대한민국 정부는 박종철 열사에게 민주화 유공자로 포상하여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일제 말기, 권승욱의 분명한 행적

다음으로 일제 말기 권승욱의 ‘금융조합 취직 건’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일제의 탄압을 받아 1944년 3월 30일자로 사립 송명학교는 폐교되었다. 계속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이후 금융조합에 취직했다. 금융조합에 취직했으나, 월급이 적어 제대로 먹을 수도 없이 지냈다.

이를 딱하게 여긴 독립운동가 서민호가 1944년 11월경에 알고 지내던 최호연에게 권승욱을 도와주라는 부탁을 했다. 권승욱은 최호연의 도움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권승욱의 ‘금융조합 취직 건’과 해방정국기의 활동과 관련한 내용은 2차 자료에 해당하는 최호연의 <조선어학회, 청진동 시절>(상)(1992, 진명문화사)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내가 처음으로 「조선어학회」를 알게 된 것은 1944년 11월로 기억된다. 그 무렵, 나는 「조선 미곡 창고 주식회사」 벌교지구 주임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일터는 모든 양곡을 보관하는 일이었다. ……어느 날 선생(서민호 지칭 :필자)께서 ‘최군!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가능하면 도와주게나’하고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이라는 10. 1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자신(월파 선생)보다 앞서 나온 젊은이(권승욱 지칭:필자)를 그가 경영하는 송명학교 교사로 데려왔는데 이 학교가 폐교되므로, 금융조합(현 농협)에 취직은 했으나 제대로 먹지 못하여 건강이 염려된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선생댁을 하직하고 나와 바로 그분을 찾아갔다. 그 이름은 ‘권승욱’인데 고교 시절에는 유도 선수에다, 야구 포수에 축구 수문장 등 만능 운동선수에 수재로 알려진 분이었다. 특히, 국어 성적이 뛰어나서 건재 정인승 스승의 부름을 받고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에 종사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에 최연소자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출옥하여, 고향인 광주에서 놀고 있었는데, 월파 선생께서 그를 기용하여 벌교로 데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건장한 체격에 비해 그가 배급받고 있는 양곡은 너무도 모자라는 형편이었다. 나는 찾아온 까닭을 간단하게 얘기하고, 저녁에 내 하숙집으로 초청했다. 그날 밤, 조촐한 요리를 장만케 한 다음, 밤이 지새는 줄도 모르고 ‘조선어학회 사건’의 전모를 경청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식사 한끼만은 나와 같이 하자고 제의했더니 쾌히 승낙한 것이다. (중략)

일본이 드디어 손을 들다.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끼에 투하된 원자탄의 위력은 마침내 일본 천황으로 하여금 무조건 항복을 하게 했다. 우리 겨레가 이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기를 그 몇해던가! 나는 몇몇 친구들에게 알려서 이제 정식으로 ‘권승욱’ 형을 위로하고 또 광복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앞으로 국어 강습회를 열기로 하되, 강사로는 월파 선생과 권승욱 형을 모시기로 했다. 수강생은 전 국민 학교 교사와 구제 중학 이상 나온 분들로, 기간은 두 주일로 정하고, 벌교 남초등학교 교실을 빌어 쓰기로 하고, 마침내 강습회가 시작되어 예정대로 진행이 되어 드디어 첫 번째 수료생을 내게 되었다.” (3쪽∼5쪽)

위의 자료에 의하면 권승욱은 금융조합에 취직은 했으나,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이 좋지 못했다. 이에 1944년 11월에 ‘조선 미곡 창고 주식회사’ 벌교지구 주임으로 있던 최호연은 독립운동가 서민호로부터 “권승욱을 도와주라”는 말을 듣고, 이후 최호연이 권승욱을 만나 그가 배급을 받고 있는 양곡이 너무도 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호연이 권승욱에게 “식사 한 끼를 나와 같이 하자”라고 말했고, 이후 둘은 해방이 될 때까지 함께 끼니를 이어나갔다. 이것이 일제 말기의 권승욱의 분명한 행적이었다. 일제 패망 이후 곧바로 권승욱은 전남 벌교에서 열린 국어강습회에서 두 주일간 서민호와 함께 강사로 강연을 했다.

이상을 통해서 보면, 권승욱은 사립 송명학교가 1944년 3월 30일자로 폐교된 이후 금융조합에 취직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금융조합에 몇 년, 몇 월, 몇 일에 취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취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배급 받은 양곡이 너무도 적었던 것으로 보아 임시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융조합의 조직은 조합장, 이사, 감사, 서기와 서기견습으로 이루어졌다. 조합장, 이사는 일본인이 다수 임명되었다. 이사에 간혹 조선인이 임명되기도 했다. 말단 직원이 서기와 서기 견습이었다.

친일연구가인 정운현의 연구(링크)에 의하면, 일제시기 금융조합은 조선총독부 식민지 정책을 수행하는 기관이었고, 농민들을 착취하는 수탈기관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금융조합에 근무했던 경력은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금융조합 이사는 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이 있어야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제헌국회에서 만든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의 제4조 9항과 노무현정부 시절에 제정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제2조 18항에 의거하여 보더라도, 금융조합 이사를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볼 수는 없다.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 47’에 의하면, 일제시기 금융조합에 근무한 것만을 가지고서는 친일 행적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권승욱의 경우 최종학교가 고창고등보통학교 졸업에 불과했다. 1944년 3월 30일자로 송명학교가 폐교된 이후, 그는 단지 금융조합에 취직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써 그의 금융조합 취직만을 가지고서는 친일부역 행위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에 필자는 공훈발굴과가 권승욱에 대해 기재한 ‘포상되지 못한 사유’가 타당하지 못함을 낱낱이 제시한다. 이 글로써 권승욱의 공로에 대해 다시 심사해주기를 정중히 요청한다.

첫째, 권승욱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에 맞서 조선어대사전 편찬 작업, 즉 언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38년 6월부터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난 1942년 10월 1일에 피검될 때까지 4년간 조선어학회에서 조선어사전 편찬의 전임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함흥경찰서와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년만인 1943년 9월 18일에 기소유예 처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났다.

둘째, 독립운동가 서민호가 세워 운영하고 있던 사립 송명학교에서 1944년 1월 15일부터 1944년 3월 30일에 폐교될 때까지 교사로 근무하며 민족교육을 실천했다.

셋째, 1938년 6월에서 1957년 10월 9일까지 20년간 ‘조선말 큰사전’의 편찬 위원으로 일관되게 활동했다. 조국 광복 이전과 이후에 걸쳐서 국어대사전 편찬에 혼신을 다 바쳤던 것이다.

1957년 10월 9일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6권이 완간됐다. 이날에 대한민국 정부의 문교부장관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두 개의 표창장을 수여했다. 권승욱이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항거하여, 20년 간 ‘조선말 큰사전’의 편찬 위원으로 활동한 일이 민족 독립운동에 기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권승욱의 아들인 권범씨가 필자에게 해당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표창장에 그의 공로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표창장 - 권승욱

“이 분은 한글학회 회원으로서 왜정의 혹독한 우리 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항거하여 다년간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국어에 관한 학술적 연구 사업과 국어 운동을 솔선 전개하여 민족 독립 운동에 큰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년간 연구 노력한 국어 국문이 오늘날 한국 문화의 바탕이 되어 국어 학계와 일반 국민의 문화 생활에 이바지한 바 매우 크므로 그 공로를 찬양하여 이에 표창함”

단기 4290년(1957) 10월 9일
문교부장관 최규남

▲ 권승욱 표창장 1957. 10. 9. 표창장. ⓒ 권범

표창장 - 권승욱

“이 분은 한글학회 엮은 ‘큰 사전’의 편찬 위원으로 만 21년의 오랜 세월을 하루 같이 근속하여 ‘큰 사전’의 완성을 보게 되어 민족 문화 향상에 그 공적이 현저하므로 이에 이를 표창함”

단기 4290년(1957) 10월 9일
문교부장관 최규남

▲ 권승욱, 표창장, 1957. 10, 9. 표창장. ⓒ 권범

1963년 10월 9일에 대통령 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다음은 이때 받은 공로패다.

▲ 권승욱, 공로패, 1963. 10. 9. 공로패 ⓒ 권범

국가보훈처는 “일제 말기 권승욱의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포상을 보류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이상과 같은 근거를 제시하여, 일제 말기의 권승욱의 행적을 밝혀냈다.

해방 전후 20년에 걸쳐 권승욱이 일관되게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참여하여 우리말을 지켜낸 사실로 미루어 그가 변절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제 말기 권승욱을 지켜본 최호연이, 광복이 되자마자 권승욱을 위로하는 축하 잔치를 벌여준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권승욱이 변절자였다면 잔치를 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권승욱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연루되어 김선기, 이병기, 윤병호, 이은상, 서민호 등과 함께 동일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김선기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이병기는 1990년 애국장을, 윤병호는 1990년 애족장을, 이은상은 1990년 애국장을, 서민호는 2001년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지금까지 조선어학회 33인 가운데 25명이 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아직까지 권승욱은 받지 못했다. 국가보훈처는 권승욱에 대해 제대로 심사하여 주기를 바란다.


출처  옥고까지 치렀는데... 또 ‘독립유공’ 인정 못받은 권승욱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