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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같은 농촌 이주노동자의 삶 “아파도 일…고향반찬 먹고 힘내”

노비 같은 농촌 이주노동자의 삶 “아파도 일…고향반찬 먹고 힘내”
[2020 노동자의 밥상] ⑦농촌 이주노동자들
하루 12시간, 끝없는 밭일…비닐하우스 80동 관리
월 25만 원씩 떼는 비닐하우스 ‘냉골 컨테이너’가 숙소
난방은커녕 온수도 안 나와…‘뜨라이뚜어’와 고향식 카레 특식
소박한 만찬 준비하는 와중에도 주방 수도는 자꾸만 끊겨

[한겨레] 배지현 기자 | 등록 : 2020-01-21 04:59 | 수정 : 2020-01-21 07:55


▲ 경기도 외곽의 채소농장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의 밥상. 캄보디아인들이 자주 먹는 차크다오(닭고기 카레볶음), 뜨라이뚜어(말린 생선)를 반찬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새벽 6시부터 12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고된 노동 탓에, 농업 이주노동자들은 세끼를 챙겨 먹을 시간도, 여력도 없다. 김명진 기자

고소하고 코릿한 생선 냄새가 코를 찌르자 프까(45·이하 모두 가명)의 얼굴이 환해졌다. 얼마 만에 맛보는 ‘뜨라이뚜어’인지 모른다. 생선을 꾸덕꾸덕하게 말려 만든 뜨라이뚜어는 한국의 코다리 같은 생선이다. 프까의 고향 캄보디아에선 매우 흔한 밑반찬인데, 짠 쥐포 맛이 난다. 캄보디아 시장에는 어디나 실에 꿰어 말린 뜨라이뚜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8년 전 한국에 이주한 농업 노동자 프까가 향수병을 앓을 때 챙겨 먹는 ‘솔푸드’(마음을 위로하는 음식)다. “아파도 일해야 해요. 감기 걸려도 못 쉬어요. 아플 때 뜨라이뚜어랑 물에 만 밥 먹는 게 최고예요.” 경기도 외곽의 한 농장 비닐하우스 안에 자리 잡은 컨테이너에서 만난 프까가 프라이팬 위의 뜨라이뚜어를 뒤집으며 말했다. 손잡이가 없는 프라이팬이어서 휴지를 말아 위태롭게 붙잡고 있었다. 연기를 빨아들이는 후드는 그을음이 눌어붙어 시커멓다.

▲ 지난달 12일 경기도 외곽의 한 농장 비닐하우스에서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 프까와 동료들이 상추를 수확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 캄보디아인들이 자주 먹는 차크다오(닭고기 카레볶음)와 뜨라이뚜어(말린 생선), 그리고 밥. 김명진 기자

뜨라이뚜어를 공수해온 건 캄보디아에 갔다가 하루 전 돌아온 농장 동료다. 농장 인근 동남아 식재료상도 뜨라이뚜어를 팔지만, 값이 3~4배는 된다. 언감생심이다. 동료 덕분에 모처럼 제대로 된 끼니가 되었다. 둘러앉아 캄보디아식 밥상을 차리니 고향 집에 온 듯 웃음이 흘렀다. 모여 앉은 곳이 집 대신 컨테이너이고, 바닥이 얼음장이라는 점을 뺀다면 말이다.


새벽 6시부터 12시간 농사짓지만…

지난달 12일 저녁 경기도 외곽의 한 비닐하우스를 찾았을 때 프까를 포함한 캄보디아인 8명은 웅크리고 앉아 상추를 따고 있었다. 약속한 듯 수건 두른 모자에 흙 묻은 패딩,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한 채당 가로 10m, 세로 100~150m 크기의 비닐하우스 80동이 8명의 일터다. 1명이 10동씩 관리해야 한다. 이곳에선 여름에 오이를 재배하고 겨울엔 상추나 시금치를 재배한다. 비닐하우스 60동을 가진 농장주가 1년에 20억 원가량 번다고 알려져 있다.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 이후까지 허리 한번 펼 새 없이 일하는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이익이다.

그런데도 농업 이주노동자의 삶은 사실상 ‘사노비’에 가깝다. 이주노동자들은 입국할 때 제조업과 농업으로 나뉘는데, 한국어 점수가 낮으면 농업, 높으면 제조업으로 직행한다. 농업 이주노동자들은 농장주가 부르면 주말에도 나와야 한다. 농한기에 일이 일찍 끝날 때는 갑자기 비닐하우스 한파 방지 등과 같은 추가 노동도 시킨다.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주의 부당한 지시를 거스를 수 없다. 이주노동자들의 비전문취업비자는 기본 3년 체류에 1년 10개월 연장이 가능하다. 한국에 한 번 더 오려면 특별한국어시험을 친 뒤 ‘성실근로자’로 인정받아야 한다. 성실근로자는 사업장 변경 없이 한 사업장에서 근무해온 노동자만 뽑는다. 사업주의 평가는 이주노동자가 한국으로 재이주할 때 절대적인 기준이다.

프까의 동료들은 월급 170만 원을 받는다. 농장주는 급여에서 매달 ‘기숙사’비 25만 원을 공제한다. 지난해 7월부터는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건강보험 ‘지역가입자’로 분류되면서 매달 건강보험료도 11만2850원씩 빠져나간다.

지난해 주 40시간 일한 한국인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월 174만5천 원. 프까와 동료들은 하루 11~12시간 일하는 데다 주 6일 이상 노동하니 최저임금을 훨씬 웃돌아야 하지만, 현실은 법의 예외 상태에 놓여 있다. 한국어 점수가 낮아서일까. 한국의 근로기준법은 농축산업 노동자에 대해선 근로시간, 휴게시간, 휴일에 관해 예외 조항을 둔다.

이주노동자 지원 활동을 하는 김달성 목사는 “우리 밥상에 올라가는 모든 채소는 이주노동자 손에서 나온다. 일요일만 되면 경기도 농촌 지역에는 이주노동자만 보인다고 할 정도”라며 “대부분 20~30대 한창 젊고 창창할 나이에 여기 와서 일하다가 배터리 갈듯 5년 안 쓰고 교체된다”고 말했다. 프까와 같은 농업 이주노동자는 법무부 기준 2만8천여 명(2018년)이다.


얼음장 같은 15평 샌드위치 패널 숙소

15평(49.6㎡) 남짓한 크기의 기숙사는 비닐하우스 안에 샌드위치 패널로 지은 컨테이너다. 프까를 비롯한 여성 5명, 남성 3명이 이곳에서 지낸다. 5평짜리 원룸 세 개를 이어놓은 구조로 2~3명씩 방을 나눠 쓴다. 화재에 취약한 건 물론이거니와, 언제든 비닐하우스로 출동할 수 있게 농장 끝에 붙어 있는 탓에 이들은 논밭과 한 몸처럼 산다. 참나물, 시금치, 상추, 근대 상자 수백 개, 그리고 목장갑이 산처럼 입구 양쪽에 쌓여 있다.

▲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프까가 손잡이도 없는 프라이팬을 붙잡고 차크다오(닭고기 카레볶음)를 요리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동남아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한국 경기 북부의 겨울은 유독 춥지만, 조립식 가건물에는 난방이 되지 않는다. 방바닥이 냉골이다. 온열기만 덜렁 놓여 있다. 따뜻한 샤워조차 할 수 없다. 찬물마저 나오다 끊기길 반복한다. 식수를 제외하면 지하수로 씻고 요리하는데, 농작물에 뿌리는 농약이 쉽게 섞일 수 있는 구조다. 8명이 사는 기숙사 냉장고엔 근래 사온 뜨라이뚜어 말곤 먹을 것이 없다. 대신 부엌 귀퉁이에 이들의 허기를 급히 달래주었을 바나나와 귤껍질이 가득하다.

잘 먹고 잘살려고 한국까지 왔지만, 이들의 밥상은 캄보디아에 살 때보다 초라하다. 일감에 쫓기는 데다 열악한 주방 상황까지 겹치니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는 건 불가능하다. “캄보디아에선 요리하는 거 좋아해서 밥 먹을 때 요리 3개씩은 만들어 먹었는데 한국에선 생일에도 반찬 하나 놓고 먹어요. 일이 힘들어 뭘 차려 먹을 시간이 없어요.” 프까와 함께 일하는 썸낭(30)이 말했다.

한국 텔레비전에선 온종일 ‘먹방’을 하지만 프까와 동료들은 1년에 한 번 고깃집 가기도 힘들다. 새벽에 일어나 나가야 하니 아침밥은 건너뛸 수밖에 없다. 30분 안팎의 점심시간에도 뭘 차려 먹긴 힘들다. 대개 라면으로 때운다. 이 지역에서 10년 동안 동남아 식자재 가게를 운영해온 한 한국인은 “근처에 동남아 식자재 파는 데가 30곳 정도 있는데 파는 물건 중에선 라면이 제일 잘 나간다”라고 전했다.

종일 주린 배를 달래야 하는 저녁도 고봉밥에 반찬 하나가 전부다. 다만 이날은 ‘특식’인 뜨라이뚜어가 있어 2개의 반찬을 준비할 수 있었다. 프까가 뜨라이뚜어를 굽고 캄보디아식 카레인 ‘차크다오’를 만드는 중에도 주방 수도는 자꾸 끊겼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양념을 볶아 캄보디아식 액젓인 피시 소스를 추가하고 손질한 닭을 넣었다. 붉은고추를 얇게 썰어 넣고 ‘롯디’(타이 조미료)를 넣으니 차크다오가 완성됐다. 프까가 “다 됐다”며 패널 벽을 치자 크메르어(캄보디아어)로 수다 떠는 목소리와 함께 동료들이 건너왔다.

▲ 경기도 외곽의 한 외국인음식 상가. 이곳에는 소규모 공장과 농장에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어 외국음식 상가들이 많이 있다. 김명진 기자


그래도 미래를 위해 나무를 심는다

고봉밥은 20분 만에 비워졌다. 잠깐의 식사 시간 동안 고향의 가족들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남편과 사별하고 한국에 온 프까는 캄보디아의 부모와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프까는 한국에서 번 돈으로 땅을 사서 열대과일 나무들을 심는다. 프까가 한국에서 남의 땅을 돌보는 사이, 가족들은 프까의 땅을 돌본다.

4년 전 한국에 온 썸낭도 몸살로 앓아누울 때마다 고향의 아이와 부모를 떠올리며 버틴다. 다른 농장에서 일하는 캄보디아 여성과 2년 전 결혼했다. 8개월 된 아이는 캄보디아의 부모가 돌보고 있다.

“아이가 보고 싶어요. 하지만 우리 미래를 위해 계속 한국에서 돈 많이 벌고 싶어요.” 컨테이너 방의 냉기로 잔뜩 몸을 웅크린 썸낭이지만, 아이 이름을 부르는 그의 얼굴에 잠시 고향 캄보디아 캄포트의 미풍이 불어오는 듯했다.


출처  노비 같은 농촌 이주노동자의 삶 “아파도 일…고향반찬 먹고 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