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전일빌딩 헬기사격 목격자 홍성표 씨
27일 새벽 3시 계엄군 호텔 난입, 피신한 620호 창문 통해 목격
헬기 특정하지는 못 했으나, 사선으로 떨어지는 총탄은 확신
5·18 연구자들, 그의 증언 토대로 ‘호텔리어의 오월…’ 곧 출간
[경향신문] 고희진 기자 | 입력 : 2020.05.10 19:06 | 수정 : 2020.05.10 20:42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두환 계엄사령부는 전남도청에서 항전하는 광주시민을 진압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도청 근처에 위치한 고층 건물인 전일빌딩과 광주관광호텔을 점령하기로 한다. 호텔은 시민항쟁이 시작된 뒤 19일부터 영업을 중지했지만, 일부 종업원이 남아 건물을 지켰다. 26세 나이로 호텔 영업과장을 맡고 있던 홍성표씨(66)가 그중 하나였다.
새벽 3시쯤, 군인들이 호텔 정문에 내려진 셔터를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항쟁 기간 무고한 시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던 계엄군의 모습이 떠오른 홍씨와 동료들은 군인들을 피해 6층 객실로 숨어들었다. 박정희의 전용객실이었던 VIP룸이 있던 601호는 방탄유리로 돼 있어 안전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6층까지 올라온 군인들이 601호 방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시 같은 층의 620호로 숨어들었다. 동료 두 명이 소리를 참기 위해 수건을 입에 물고 침대 밑에 몸을 숨겼다.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홍씨가 바깥 상황을 살피기 위해 창밖에 얼굴을 내밀었다.
금남로에는 도청과 주변 건물 진압을 위해 계엄군들이 모여 있었다. 이때 호텔과 대각선에 위치한 전일빌딩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전일빌딩 고층부에 자리 잡았던 시민군이 계엄군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전일빌딩 고층에서 날아오는 총알에 지상 계엄군의 위치가 불리해 보였다. 총탄을 피하는 군인들의 욕설이 들렸다. 3시 40분쯤, ‘두두두두두’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불꽃이 일었다. 일반 소총 소리와는 다른 굉음이었다. 시민군이 있는 전일빌딩의 고층을 향해 공중에서 총알이 날아온 것이다.
2018년,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당시 계엄군이 5월 21일 광주천 일대와 27일 전일빌딩에 헬기 사격을 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해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으로 기소된 전두환 재판에서 21일 헬기 사격 목격담 등은 다수 소개됐다. 27일 전일빌딩 헬기 사격 목격자는 현재까지 홍씨가 유일하다.
홍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계엄군은 지상에서 전일빌딩 점령이 어려워지자 헬기에 공중 사격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길정 5·18기념재단 자문위원은 “홍씨가 헬기를 특정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전일빌딩에 무장 헬기가 사격한 까닭을 밝히기 위해 중요한 증언”이라고 했다.
지금은 다른 건물로 바뀐 광주관광호텔은 8층 건물이었다. 10층짜리 전일빌딩 다음으로 금남로에서 높았다. 창문이 시원하게 난 일부 객실에서는 금남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VIP룸이 있는 고급 호텔이던 이곳은 당시 공무원·정치인·기자 등 지역 유력인사들이 모이는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개업 이후, 24시간 연중무휴였던 호텔은 1980년 5월 19일 잠정 폐쇄된다. 지난달 29일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만난 홍씨는 “5월 초가 되면서 산업시찰단, 외국인 단체관광객의 씨가 말랐다. 경찰 출신이었던 당시 호텔 사장은 정보가 빨랐다. 18일 간부들을 모아놓고는 ‘시위가 더 심각해질 거다. 호텔 셔터를 내려야겠다’고 말했다. ‘호텔이 영업을 안 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놀랐다”고 말했다.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기자들도 호텔을 떠났다. 객실 폐쇄가 이뤄진 19일 밤까지 이곳에 남아있던 언론인은 일본인 기자였다. 홍씨는 거리에 뿌려진 최루가스를 피해 방독면을 쓴 채 호텔 옥상에서 사진을 찍으며 취재하던 기자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호텔 교환실에서 본국에 광주항쟁 사실을 전한 기자는 홍씨에게 “덕분에 특종을 했다”며 고마워했다.
일본인 기자 등 남아 있던 투숙객들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뒤에는 홍씨와 직원 서너명이 남았다. 홍씨는 이곳에서 24살 때부터 일했다. 호텔은 당시 선망의 직장인 동시에 공부하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잃을 수 없는 소중한 일터’였다. 홍씨는 “자취하는 집은 전남도청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방향에 있었다. 어차피 집에 가기도 어려워진 마당에 호텔이라도 지켜야겠다고 생각해 남았다”고 말했다.
20일, 홍씨는 함께 살던 동생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자취방에 다녀왔다. 그는 “그날 동생에게 절대 시위에 참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에 곡성 시골에서 광주까지 유학 와 공부하는 동생이 걱정됐다. ‘(대학생들이) 공부나 하지 뭐 잘났다고 시위에 나오나’라는 생각이 홍씨에게도 있었다.
호텔에는 다리를 저는 후문 담당 경비원, 조리사 등 몇 명만 남았다. 매일같이 화려한 라운지바와 나이트클럽을 누비던 유력인사들은 전화로만 금남로의 안부를 물어왔다. 항쟁이 본격화된 이후로 지역 유지들은 도심을 떠나 모처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호텔에선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무장한 군인들과 대적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부상을 입은 시민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볼 때는 홍씨도 부아가 치밀었다.
21일 호텔 앞에는 계엄군의 장갑차가 도열해 있었다. 홍씨는 대규모 총격전을 넋 놓고 바라봤다. 후문 경비실에 총에 맞은 학생들이 피신을 왔다는 얘기가 들렸다. 홍씨는 “호텔이 망가지면 직장을 잃는 것이니까 호텔이 전투 장소가 되는 걸 막고 싶긴 했다”면서도 “쓰러진 학생의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봤다. 객실에서 욕실용 수건을 찾아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게 학생의 옆구리를 조여맸다. 학생을 부축해 시민군에게 병원에 보내라고 요청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날은 계엄군과 시민군의 교전이 격렬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도 부지기수로 죽었다. 홍씨는 “호텔 근처 삼양맨션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이 또 가봤더니 4층 계단에 한 남자가 가슴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지혈하기 위해 수건을 가져오려는데, 남자가 아들에게 유언을 하며 숨을 거뒀다. 남자가 말한 집으로 달려가 죽음을 알렸다”고 했다. 이날 홍씨가 죽음을 지켜본 삼양맨션의 남성은 공수부대의 조준사격에 사망했다.
시민군과 계엄군 중 한쪽에 티 나는 도움을 줬다가는 호텔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홍씨는 시민군을 간접적으로만 도왔다. 그럼에도 항쟁 기간 호텔이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다. ‘관광호텔 특실에 전두환 동생 전경환이 투숙해 광주 사정을 염탐하고 있다더라’는 소문이 시민군 일부에 퍼졌다. 홍씨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지만, 흥분한 시위대가 이 말을 믿고 호텔에 방화라도 할까봐 겁이 났다. 사람들을 붙잡고 ‘내가 호텔 직원인데 거짓말’이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내 얼굴을 아는 시민군 일부가 동조해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항쟁은 격화됐지만, 호텔 안은 조용했다. 호텔에 남은 직원 몇몇은 화투를 하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홍씨는 “‘내가 나가도 결국 개죽음만 당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나를 변명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27일 새벽, 여느 때처럼 4층 객실에 누워 있던 그는 군인들이 호텔 정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홍씨는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항쟁을 지켜보기만 했어도 군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소리를 듣자마자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에 객실로 도망쳤다”고 말했다.
군인들을 피해 숨어든 6층 객실에서 그는 27일 새벽 전일빌딩에 가해진 헬기 사격 정황을 목격했다. 비록 헬기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전일빌딩 고층을 향해 공중에서 사선으로 내려오는 총탄의 모습을 지켜봤다는 점에서 이는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증언으로 여겨진다. 21일 광주천 일대 헬기 사격과 27일 전남도청 부근 헬기 사격을 증언하는 이들은 몇몇 있지만, 27일 전일빌딩에 가해진 헬기 사격을 목격한 증언자는 현재까지 홍씨뿐이다.
지상의 총탄 흔적과 달리 10층짜리 전일빌딩 고층부에 나 있는 총탄 흔적은 이것이 전일빌딩보다 높은 상공에서 이뤄진 사격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총탄이 들어온 자국의 각도를 통해 발사 지점의 고도를 역계산한 결과 지상 30, 40층 높이에서 사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홍씨는 자신의 목격담을 37년이 지난 2017년 국방부 특조위에 처음 털어놨다. 특조위에 참여했던 5·18 연구자 김정한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는 “5월 21일 오후 1시 집단 발포 상황과 저격수들의 조준사격, 27일 새벽 전일빌딩을 향한 헬기 사격은 홍씨만이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고 했다.
연구자들은 홍씨의 증언이 계엄군의 헬기 사격 이유 등을 밝히는 데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봤다. 특조위 활동 종료 후, 연구자들은 홍씨 구술을 구체화해 홍씨가 1980년 5월 19일에서 27일까지 호텔에 머물며 겪었던 이야기를 책 <호텔리어의 오월 노래>로 엮어 곧 출판할 예정이다. 홍씨가 구술, 5·18 연구자인 안길정 자문위원이 집필, 김정한 교수가 해제를 각각 맡았다.
출처 5월27일 새벽3시40분, 호텔 창밖으로 그가 본 것은...518 전일빌딩 헬기사격 목격자 홍성표 씨
27일 새벽 3시 계엄군 호텔 난입, 피신한 620호 창문 통해 목격
헬기 특정하지는 못 했으나, 사선으로 떨어지는 총탄은 확신
5·18 연구자들, 그의 증언 토대로 ‘호텔리어의 오월…’ 곧 출간
[경향신문] 고희진 기자 | 입력 : 2020.05.10 19:06 | 수정 : 2020.05.10 20:42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두환 계엄사령부는 전남도청에서 항전하는 광주시민을 진압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도청 근처에 위치한 고층 건물인 전일빌딩과 광주관광호텔을 점령하기로 한다. 호텔은 시민항쟁이 시작된 뒤 19일부터 영업을 중지했지만, 일부 종업원이 남아 건물을 지켰다. 26세 나이로 호텔 영업과장을 맡고 있던 홍성표씨(66)가 그중 하나였다.
새벽 3시쯤, 군인들이 호텔 정문에 내려진 셔터를 세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항쟁 기간 무고한 시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던 계엄군의 모습이 떠오른 홍씨와 동료들은 군인들을 피해 6층 객실로 숨어들었다. 박정희의 전용객실이었던 VIP룸이 있던 601호는 방탄유리로 돼 있어 안전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6층까지 올라온 군인들이 601호 방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시 같은 층의 620호로 숨어들었다. 동료 두 명이 소리를 참기 위해 수건을 입에 물고 침대 밑에 몸을 숨겼다. 잠시 조용해진 틈을 타 홍씨가 바깥 상황을 살피기 위해 창밖에 얼굴을 내밀었다.
금남로에는 도청과 주변 건물 진압을 위해 계엄군들이 모여 있었다. 이때 호텔과 대각선에 위치한 전일빌딩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전일빌딩 고층부에 자리 잡았던 시민군이 계엄군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전일빌딩 고층에서 날아오는 총알에 지상 계엄군의 위치가 불리해 보였다. 총탄을 피하는 군인들의 욕설이 들렸다. 3시 40분쯤, ‘두두두두두’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불꽃이 일었다. 일반 소총 소리와는 다른 굉음이었다. 시민군이 있는 전일빌딩의 고층을 향해 공중에서 총알이 날아온 것이다.
2018년,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당시 계엄군이 5월 21일 광주천 일대와 27일 전일빌딩에 헬기 사격을 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해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으로 기소된 전두환 재판에서 21일 헬기 사격 목격담 등은 다수 소개됐다. 27일 전일빌딩 헬기 사격 목격자는 현재까지 홍씨가 유일하다.
홍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계엄군은 지상에서 전일빌딩 점령이 어려워지자 헬기에 공중 사격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길정 5·18기념재단 자문위원은 “홍씨가 헬기를 특정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전일빌딩에 무장 헬기가 사격한 까닭을 밝히기 위해 중요한 증언”이라고 했다.
▲ 광주 헬기사격 목격자 홍성표씨가 지난달 29일 오후 전일빌딩 10층 총탄자국 앞에서 당시 근무하던 광주 관광호텔 쪽을 바라보고 있다 . 현재 광주관광호텔은 증축돼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 광주 헬기사격 목격자 홍성표씨가 29일 오후 전일빌딩 10층 총탄자국 앞에서 당시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일빌딩 10층은 5.18 기억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우철훈 선임기자
호텔 폐쇄 직전까지 남았던 일본인 기자
지금은 다른 건물로 바뀐 광주관광호텔은 8층 건물이었다. 10층짜리 전일빌딩 다음으로 금남로에서 높았다. 창문이 시원하게 난 일부 객실에서는 금남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VIP룸이 있는 고급 호텔이던 이곳은 당시 공무원·정치인·기자 등 지역 유력인사들이 모이는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개업 이후, 24시간 연중무휴였던 호텔은 1980년 5월 19일 잠정 폐쇄된다. 지난달 29일 광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만난 홍씨는 “5월 초가 되면서 산업시찰단, 외국인 단체관광객의 씨가 말랐다. 경찰 출신이었던 당시 호텔 사장은 정보가 빨랐다. 18일 간부들을 모아놓고는 ‘시위가 더 심각해질 거다. 호텔 셔터를 내려야겠다’고 말했다. ‘호텔이 영업을 안 할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놀랐다”고 말했다.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기자들도 호텔을 떠났다. 객실 폐쇄가 이뤄진 19일 밤까지 이곳에 남아있던 언론인은 일본인 기자였다. 홍씨는 거리에 뿌려진 최루가스를 피해 방독면을 쓴 채 호텔 옥상에서 사진을 찍으며 취재하던 기자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호텔 교환실에서 본국에 광주항쟁 사실을 전한 기자는 홍씨에게 “덕분에 특종을 했다”며 고마워했다.
일본인 기자 등 남아 있던 투숙객들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뒤에는 홍씨와 직원 서너명이 남았다. 홍씨는 이곳에서 24살 때부터 일했다. 호텔은 당시 선망의 직장인 동시에 공부하는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잃을 수 없는 소중한 일터’였다. 홍씨는 “자취하는 집은 전남도청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방향에 있었다. 어차피 집에 가기도 어려워진 마당에 호텔이라도 지켜야겠다고 생각해 남았다”고 말했다.
▲ 1980년대 광주 금남로 주변 건물 배치도. <호텔리어의 오월 노래>
▲ 홍성표씨가 그린 1980년 5월 27일 전일빌딩 사격 당시 모습. <호텔리어의 오월 노래>
피 흘리는 시민군을 돕다
20일, 홍씨는 함께 살던 동생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자취방에 다녀왔다. 그는 “그날 동생에게 절대 시위에 참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에 곡성 시골에서 광주까지 유학 와 공부하는 동생이 걱정됐다. ‘(대학생들이) 공부나 하지 뭐 잘났다고 시위에 나오나’라는 생각이 홍씨에게도 있었다.
호텔에는 다리를 저는 후문 담당 경비원, 조리사 등 몇 명만 남았다. 매일같이 화려한 라운지바와 나이트클럽을 누비던 유력인사들은 전화로만 금남로의 안부를 물어왔다. 항쟁이 본격화된 이후로 지역 유지들은 도심을 떠나 모처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호텔에선 쇠파이프와 각목 등으로 무장한 군인들과 대적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부상을 입은 시민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볼 때는 홍씨도 부아가 치밀었다.
21일 호텔 앞에는 계엄군의 장갑차가 도열해 있었다. 홍씨는 대규모 총격전을 넋 놓고 바라봤다. 후문 경비실에 총에 맞은 학생들이 피신을 왔다는 얘기가 들렸다. 홍씨는 “호텔이 망가지면 직장을 잃는 것이니까 호텔이 전투 장소가 되는 걸 막고 싶긴 했다”면서도 “쓰러진 학생의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봤다. 객실에서 욕실용 수건을 찾아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게 학생의 옆구리를 조여맸다. 학생을 부축해 시민군에게 병원에 보내라고 요청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날은 계엄군과 시민군의 교전이 격렬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도 부지기수로 죽었다. 홍씨는 “호텔 근처 삼양맨션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어쩔 수 없이 또 가봤더니 4층 계단에 한 남자가 가슴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지혈하기 위해 수건을 가져오려는데, 남자가 아들에게 유언을 하며 숨을 거뒀다. 남자가 말한 집으로 달려가 죽음을 알렸다”고 했다. 이날 홍씨가 죽음을 지켜본 삼양맨션의 남성은 공수부대의 조준사격에 사망했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관광호텔 앞에 모여있는 계엄군들. 5.18기념재단
전일빌딩으로 날아오는 ‘공중’ 사격
시민군과 계엄군 중 한쪽에 티 나는 도움을 줬다가는 호텔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홍씨는 시민군을 간접적으로만 도왔다. 그럼에도 항쟁 기간 호텔이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다. ‘관광호텔 특실에 전두환 동생 전경환이 투숙해 광주 사정을 염탐하고 있다더라’는 소문이 시민군 일부에 퍼졌다. 홍씨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지만, 흥분한 시위대가 이 말을 믿고 호텔에 방화라도 할까봐 겁이 났다. 사람들을 붙잡고 ‘내가 호텔 직원인데 거짓말’이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내 얼굴을 아는 시민군 일부가 동조해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항쟁은 격화됐지만, 호텔 안은 조용했다. 호텔에 남은 직원 몇몇은 화투를 하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홍씨는 “‘내가 나가도 결국 개죽음만 당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나를 변명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27일 새벽, 여느 때처럼 4층 객실에 누워 있던 그는 군인들이 호텔 정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홍씨는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항쟁을 지켜보기만 했어도 군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소리를 듣자마자 ‘걸리면 죽는다’는 생각에 객실로 도망쳤다”고 말했다.
군인들을 피해 숨어든 6층 객실에서 그는 27일 새벽 전일빌딩에 가해진 헬기 사격 정황을 목격했다. 비록 헬기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전일빌딩 고층을 향해 공중에서 사선으로 내려오는 총탄의 모습을 지켜봤다는 점에서 이는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증언으로 여겨진다. 21일 광주천 일대 헬기 사격과 27일 전남도청 부근 헬기 사격을 증언하는 이들은 몇몇 있지만, 27일 전일빌딩에 가해진 헬기 사격을 목격한 증언자는 현재까지 홍씨뿐이다.
지상의 총탄 흔적과 달리 10층짜리 전일빌딩 고층부에 나 있는 총탄 흔적은 이것이 전일빌딩보다 높은 상공에서 이뤄진 사격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총탄이 들어온 자국의 각도를 통해 발사 지점의 고도를 역계산한 결과 지상 30, 40층 높이에서 사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홍씨는 자신의 목격담을 37년이 지난 2017년 국방부 특조위에 처음 털어놨다. 특조위에 참여했던 5·18 연구자 김정한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는 “5월 21일 오후 1시 집단 발포 상황과 저격수들의 조준사격, 27일 새벽 전일빌딩을 향한 헬기 사격은 홍씨만이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고 했다.
연구자들은 홍씨의 증언이 계엄군의 헬기 사격 이유 등을 밝히는 데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봤다. 특조위 활동 종료 후, 연구자들은 홍씨 구술을 구체화해 홍씨가 1980년 5월 19일에서 27일까지 호텔에 머물며 겪었던 이야기를 책 <호텔리어의 오월 노래>로 엮어 곧 출판할 예정이다. 홍씨가 구술, 5·18 연구자인 안길정 자문위원이 집필, 김정한 교수가 해제를 각각 맡았다.
출처 5월27일 새벽3시40분, 호텔 창밖으로 그가 본 것은...518 전일빌딩 헬기사격 목격자 홍성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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