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박원순 시장, 18년전 유언 ‘눈길’.. “못 다한 몫은…”
아내에게 “법률책 서울대 법대에 기증해달라…후학들에게 도움 됐으면”
[고발뉴스닷컴] 김미란 기자 | 승인 : 2020.07.10 14:41:58 | 수정 : 2020.07.10 14:58:16
故박원순 서울시장의 유서가 공개된 가운데, 이와 함께 18년 전 박 시장이 자신의 저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 나눔’에 남긴 생전 유언이 다시금 눈길을 끌고 있다.
10일 서울시 관계자들이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예식장 앞에서 공개한 유언장에는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 달라. 모두 안녕”이란 짧은 글이 담겼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박원순 시장. 그는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시절인 2002년 자신의 저서에 아내와 자녀, 지인들에게 전하는 3통의 유언을 실었다.
박 시장은 당시 자녀들에게 “그토록 원하는 걸 못해준 경우도 적지 않았고, 함께 가족 여행을 떠나거나 함께 모여 따뜻한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며 “그런 점에서 이 세상 어느 부모보다 역할을 제대로 못한 점을 실토한다”고 했다.
그는 거듭 “너희에게 제대로 시간을 내지 못했고, 무언가 큰 가르침도 남기지 못했으니 그저 미안하게 생각할 뿐”이라며 “다만, 그래도 아빠가 세상 사람들에게 크게 죄를 짓거나 욕먹을 짓을 한 것은 아니니 그것으로나마 작은 위안을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전했다.
아내에게는 “변호사 부인이면 그래도 누구나 누렸을 일상의 행복이나 평온 대신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서의 거친 삶을 옆에서 지켜주느라 고되었을 당신에게 무슨 유언을 할 자격이 있겠냐”며 “오히려 유언장이라기보다는 내 참회문이라 해야 적당할 것”이라고 미안함을 전했다.
박 시장은 ‘내가 당신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내가 소중히 하던 책들을 어느 대학 도서관에 모두 기증해 주기 바란다’며 “아무래도 법률책이 많으니 고시 관련서만 가득한 서울대 법대에 기증하는 것도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책들은 내가 평생 이 나라와 여러 나라에서 소중하게 모은 것 아니냐”며 “당신 밥 한끼 사주는 대신 함께 모은 것들이니 한 곳에 전해져 그 분야에 관심 있는 후학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박원순 시장은 또 “내 마지막을 지키러 오는 사람들에게 조의금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내 영혼은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 반가울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모든 가족과 지인들을 가리켜 “그 모든 분에게 나는 큰 신세를 졌다. 많은 배움과 도움을 얻었다. 때로는 내 원만하지 못한 성격으로 상처를 입기도 했을 것이고, 억지스런 요구로 손실을 입기도 했을 것”이라며 “그래도 우리는 함께 꿈꾸어 오던 깨끗하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고, 그 못다한 몫은 바로 이제 여러분들이 이뤄줄 것임을 믿는다”고 당부했다.
한편, 박원순 시장은 경찰 실종신고 7시간 만인 10일 오전 0시께 서울 북악산 숙정문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장례는 서울특별시장 5일장으로 치러지며, 시민 조문을 위해 청사 앞에 분향소가 설치될 예정이다.
2002년 박원순 시장의 저서에 실린 유서
내 딸과 아들에게
유언장이라는 걸 받아 들면서 아빠가 벌이는 또 하나의 느닷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제대로 남길 재산 하나 없이 무슨 유언인가 하고 내 자신이 자괴감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유산은커녕 생전에도 너희의 양육과 교육에서 남들만큼 못한 점에 오히려 용서를 구한다.
그토록 원하는 걸 못해준 경우도 적지 않았고 함께 가족 여행을 떠나거나 함께 모여 따뜻한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구나. 그런 점에서 이 세상 어느 부모보다 역할을 제대로 못한 점을 실토한다.
가난했지만 내 부모님께서 내게 해주신 것으로 보면 특히 그렇단다. 우리 부모님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바치신 분들이다. 평생 농촌에서 땅을 파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워 나를 뒷바라지해 주신 그분들은 내게 정직함과 성실함을 무엇보다 큰 유산으로 남겨 주셨다.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재대로 시간을 내지도 못했고, 무언가 큰 가르침도 남기지 못했으니 그저 미안하게 생각할 뿐이다. 다만 그래도 아빠가 세상 사람들에게 크게 죄를 짓거나 욕먹을 짓을 한 것은 아니니 그것으로나마 작은 위안을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 부모님의 선한 심성과 행동들이 아빠의 삶의 기반이 되었듯 내가 인생에서 이룬 작은 성취들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바른 생각들이 너희의 삶에서도 작은 유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분명 아빠의 변명이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홀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단지 책 보따리 하나 들고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로 와서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컸다. 학창시절에는 감옥도 가고 학교로부터 제적이 되어 긴 방랑의 세월도 가졌다. 긴 고통과 고난의 세월도 있었다.
그러나 아빠는 그것에 굴하기는커녕 언제나 당당히 맞서 극복해 왔다. 그런 힘든 나날이 오히려 더 큰 용기와 경험,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니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는 말이 진리임에는 틀림없는 듯 싶구나.
당연히 너희의 결혼을 치러 주는 것이 내 소망이다. 하지만 그때 내가 너희에게 집 한 채 마련해주지 못하고 세간조차 제대로 사주지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말아라. 그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이 아빠에게도 왜 없겠냐마는, 그래도 그런 능력이 안되는 나를 이해해다오. 우리가 약속했듯 대학까지만 졸업하고 나면 나머지 모든 것은 너희가 다 알아서 해결하고 개척해 가렴.
그러나 너희가 아무런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고, 거창한 부모를 가지지 못했다 해도 전혀 기죽지 말아라. 첫출발은 언제나 초라하더라도 나중은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인생은 긴 마라톤 같은 것이다. 언제나 꾸준히 끝까지 달리는 사람이 인생을 잘사는 것이란다.
더구나 인생은 그렇게 돈이나 지위만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너희는 돈과 지위 이상의 커다란 이상과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 그런 점에서 아빠가 아무런 유산을 남가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큰 유산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 아내에게
평생 아내라는 말, 당신 또는 여보라는 말 한마디조차 쑥스러워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아내라고 써 놓고 보니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참 잘못했다는 반성부터 앞서는구려.
변호사 부인이면 그래도 누구나 누렸을 일상의 행복이나 평온 대신 인권 변호사와 시민 운동가로서의 거친 삶을 옆에서 지켜주느라 고되었을 당신에게 무슨 유언을 할 자격이 있겠소. 오히려 유언장이라기보다는 내 참회문이라 해야 적당할 것이오.
그래도 적으나마 수입이 있던 시절, 그 돈으로 집을 사고 조금의 여윳돈이 있던 시절, 내가 다른 가족들이나 이웃, 단체들에게 그 돈을 나누어주는 것을 옆에서 말리기는커녕 당신 또한 묵묵히 동의해 주었소. 당신도 내 낭비벽의 공범이었으니 나만 탓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 조금이나마 따로 저축이나 부동산을 남겨두었다가 이럴 때 비밀스럽게 내놓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오.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없는 법.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전세금이나 고향에 부모님들이 물려주신 조그만 땅이 있으니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자위하지만 그래도 장래 우리 아이들의 결혼 비용이나 교육비에는 턱없이 부족할 테니 사실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는구려.
그러나 우리가 그랬듯 살아가는 동안 겪는 어려움과 고난은 오히려 우리 아이들을 더욱더 건강하고 강하게 만들 것이니 모든 것은 운명에 맡겨 두는 것이 좋을 듯하오.
당신에게 용서를 구할 게 또 하나 있소. 아직도 내 통장에는 저금보다 부채가 더 많다오. 적지 않은 빚이 있는데, 다행히 나와 함께 일하는 간사가 내가 마구 쓰는 것을 견제하면서 조금씩 적금을 들고 있는 모양이니 조만간 많이 줄어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러나 혹시 그걸 다 갚지 못한다면 역시 당신 몫이 될 테니 참으로 미안하기만 하오. 내 생전 그건 어떻게든 다 해결하도록 노력하겠소.
내가 당신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몇 가지 또 처리해 줘야 할 일이 있소. 내가 소중히 하던 책들, 이사할 때마다 당신을 고생시키며 모아온 그 책들은, 우리 아이들이 원하면 가지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느 대학 도서관에 모두 기증해 주기를 바라오. 아무래도 법률책이 많으니 고시 관련서만 가득한 서울대 법대에 기증하는 것도 좋겠소. 그 책들은 내가 평생 이 나라와 여러 나라에서 소중하게 모은 것들 아니오? 당신 밥 한끼 사주는 대신 함께 모은 것들이니 한 곳에 전해져 그 분야에 관심있는 후학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소.
이미 안구와 장기를 생명나눔실천회에 기부했으니 그분들에게 내 몸을 맡기도록 부탁하오. 그 다음 화장을 해서 시골 마을 내 부모님이 계신 산소 옆에 나를 뿌려주기 바라오. 양지바른 곳이니 한겨울에도 따뜻한 햇볕을 지키면서 우리 부모님에게 못다 한 효도를 했으면 좋겠소. 원컨대 당신도 어느 날 이 세상 인연이 다해 내 곁에 온다면 나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겠소. 그래서 우리 봄 여름 가을 겨울 함께 이 생에서 다하지 못한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으면 하오.
그리고 내 마지막을 지키러 오는 사람들에게 조의금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소. 내 영혼은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 반가울 것이요. 내 부음조차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소. 신문에 내는 일일랑 절대로 하지 마오.
무책임한 남편이 끝까지 무책임한 말로써 이별하려 하니 이제 침묵하는 것이 좋겠소. 부디 몸조심하고 남은 인생을 잘 보내고 다음 세상에서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겠소. 감히 다시 만나자고 할 염치조차 없지만 그래도 당신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으니 나로서야 또 만나자고 할 형편이오. 어떡하겠소? 다만 이 모든 것을 용서해 주오.
모든 가족과 지인들에게
오늘날의 나를 만든 많은 분이 계시지만 그 가운데 내 형제들을 잊을 수는 없겠습니다. 어린 시절 내 학비를 보태고 부모님을 돌보던 큰누님과 매형, 아들만 귀히 여기는 집안 분위기와 부모님의 인식 때문에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외지에서 무진 고생만 한 둘째누님, 셋째누님, 시골에서 부모님 농사일을 돕느라 시집갈 때까지 온몸을 바쳐 일한 넷째누님, 학문의 길을 걷느라 어려우신 걸 뻔히 알면서도 제대로 도와드리지 못한 형님, 그리고 오빠들 때문에 중학교까지밖에 못 다니고 내내 농사일만 하던 막내 여동생.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희생과 헌신에 대해 아무것도 갚지 못하고 떠나는 마음이 아리기만 합니다. 변호사 동생 또는 오빠를 두었으니 뭔가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아픈 가슴만 남았습니다. 다음 세상에서 혹시 그럴 위치가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동생 또는 오빠가 되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 향가 '제망매가'에서는 '같은 가지에 태어나 가는 곳 모르겠소'라고 노래했지만, 우리는 다음 세상에서 다시 함께 '같은 가지'로 태어났으며 좋겠습니다.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동네 친구들, 장난꾸러기에 지나지 않던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신 초등학교 선생님들, 많은 꿈을 심어주신 중고등학교 선생님들, 함께 유년 시절과 소년시절을 뛰놀며 꿈을 꾸던 친구들, 변호사 일을 하는 동안 나를 도운 사무장과 사무원들, 인권 변론을 함께 하면서 그 어두운 시절을 보낸 동료, 선배 변호사님들, 참여연대,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에서 함께 희망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밤낮을 잊으면 살고 있는 간사들, 거기에 기꺼이 회원이 되고 도움을 주신 분들.
그 모든 분에게 나는 큰 신세를 졌습니다. 많은 배움과 도움을 얻었습니다. 때로는 내 원만하지 못한 성격으로 상처를 입기도 했을 것이고 억지스런 요구로 손실을 입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꿈꾸어 오던 깨끗하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고, 그 못다한 몫은 바로 이제 여러분들이 이뤄 줄 것임을 믿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세상에서 반가운 얼굴로 맞겠습니다.
출처 故박원순 시장, 18년전 유언 ‘눈길’.. “못 다한 몫은…”
아내에게 “법률책 서울대 법대에 기증해달라…후학들에게 도움 됐으면”
[고발뉴스닷컴] 김미란 기자 | 승인 : 2020.07.10 14:41:58 | 수정 : 2020.07.10 14:58:16
▲ 故박원순 시장의 유언장. <사진제공=뉴시스>
故박원순 서울시장의 유서가 공개된 가운데, 이와 함께 18년 전 박 시장이 자신의 저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 나눔’에 남긴 생전 유언이 다시금 눈길을 끌고 있다.
10일 서울시 관계자들이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예식장 앞에서 공개한 유언장에는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 화장해서 부모님 산소에 뿌려 달라. 모두 안녕”이란 짧은 글이 담겼다.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박원순 시장. 그는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시절인 2002년 자신의 저서에 아내와 자녀, 지인들에게 전하는 3통의 유언을 실었다.
박 시장은 당시 자녀들에게 “그토록 원하는 걸 못해준 경우도 적지 않았고, 함께 가족 여행을 떠나거나 함께 모여 따뜻한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며 “그런 점에서 이 세상 어느 부모보다 역할을 제대로 못한 점을 실토한다”고 했다.
그는 거듭 “너희에게 제대로 시간을 내지 못했고, 무언가 큰 가르침도 남기지 못했으니 그저 미안하게 생각할 뿐”이라며 “다만, 그래도 아빠가 세상 사람들에게 크게 죄를 짓거나 욕먹을 짓을 한 것은 아니니 그것으로나마 작은 위안을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전했다.
아내에게는 “변호사 부인이면 그래도 누구나 누렸을 일상의 행복이나 평온 대신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서의 거친 삶을 옆에서 지켜주느라 고되었을 당신에게 무슨 유언을 할 자격이 있겠냐”며 “오히려 유언장이라기보다는 내 참회문이라 해야 적당할 것”이라고 미안함을 전했다.
박 시장은 ‘내가 당신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내가 소중히 하던 책들을 어느 대학 도서관에 모두 기증해 주기 바란다’며 “아무래도 법률책이 많으니 고시 관련서만 가득한 서울대 법대에 기증하는 것도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책들은 내가 평생 이 나라와 여러 나라에서 소중하게 모은 것 아니냐”며 “당신 밥 한끼 사주는 대신 함께 모은 것들이니 한 곳에 전해져 그 분야에 관심 있는 후학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박원순 시장은 또 “내 마지막을 지키러 오는 사람들에게 조의금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내 영혼은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 반가울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모든 가족과 지인들을 가리켜 “그 모든 분에게 나는 큰 신세를 졌다. 많은 배움과 도움을 얻었다. 때로는 내 원만하지 못한 성격으로 상처를 입기도 했을 것이고, 억지스런 요구로 손실을 입기도 했을 것”이라며 “그래도 우리는 함께 꿈꾸어 오던 깨끗하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고, 그 못다한 몫은 바로 이제 여러분들이 이뤄줄 것임을 믿는다”고 당부했다.
한편, 박원순 시장은 경찰 실종신고 7시간 만인 10일 오전 0시께 서울 북악산 숙정문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장례는 서울특별시장 5일장으로 치러지며, 시민 조문을 위해 청사 앞에 분향소가 설치될 예정이다.
▲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故박원순 서울시장 빈소가 마련돼 있다. <사진제공=서울시/뉴시스>
2002년 박원순 시장의 저서에 실린 유서
내 딸과 아들에게
유언장이라는 걸 받아 들면서 아빠가 벌이는 또 하나의 느닷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제대로 남길 재산 하나 없이 무슨 유언인가 하고 내 자신이 자괴감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유산은커녕 생전에도 너희의 양육과 교육에서 남들만큼 못한 점에 오히려 용서를 구한다.
그토록 원하는 걸 못해준 경우도 적지 않았고 함께 가족 여행을 떠나거나 함께 모여 따뜻한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구나. 그런 점에서 이 세상 어느 부모보다 역할을 제대로 못한 점을 실토한다.
가난했지만 내 부모님께서 내게 해주신 것으로 보면 특히 그렇단다. 우리 부모님은 인생의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바치신 분들이다. 평생 농촌에서 땅을 파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워 나를 뒷바라지해 주신 그분들은 내게 정직함과 성실함을 무엇보다 큰 유산으로 남겨 주셨다.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재대로 시간을 내지도 못했고, 무언가 큰 가르침도 남기지 못했으니 그저 미안하게 생각할 뿐이다. 다만 그래도 아빠가 세상 사람들에게 크게 죄를 짓거나 욕먹을 짓을 한 것은 아니니 그것으로나마 작은 위안을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 부모님의 선한 심성과 행동들이 아빠의 삶의 기반이 되었듯 내가 인생에서 이룬 작은 성취들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바른 생각들이 너희의 삶에서도 작은 유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분명 아빠의 변명이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홀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단지 책 보따리 하나 들고 야간 열차를 타고 서울로 와서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컸다. 학창시절에는 감옥도 가고 학교로부터 제적이 되어 긴 방랑의 세월도 가졌다. 긴 고통과 고난의 세월도 있었다.
그러나 아빠는 그것에 굴하기는커녕 언제나 당당히 맞서 극복해 왔다. 그런 힘든 나날이 오히려 더 큰 용기와 경험,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러니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는 말이 진리임에는 틀림없는 듯 싶구나.
당연히 너희의 결혼을 치러 주는 것이 내 소망이다. 하지만 그때 내가 너희에게 집 한 채 마련해주지 못하고 세간조차 제대로 사주지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말아라. 그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이 아빠에게도 왜 없겠냐마는, 그래도 그런 능력이 안되는 나를 이해해다오. 우리가 약속했듯 대학까지만 졸업하고 나면 나머지 모든 것은 너희가 다 알아서 해결하고 개척해 가렴.
그러나 너희가 아무런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고, 거창한 부모를 가지지 못했다 해도 전혀 기죽지 말아라. 첫출발은 언제나 초라하더라도 나중은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인생은 긴 마라톤 같은 것이다. 언제나 꾸준히 끝까지 달리는 사람이 인생을 잘사는 것이란다.
더구나 인생은 그렇게 돈이나 지위만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너희는 돈과 지위 이상의 커다란 이상과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 그런 점에서 아빠가 아무런 유산을 남가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큰 유산으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 아내에게
평생 아내라는 말, 당신 또는 여보라는 말 한마디조차 쑥스러워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아내라고 써 놓고 보니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참 잘못했다는 반성부터 앞서는구려.
변호사 부인이면 그래도 누구나 누렸을 일상의 행복이나 평온 대신 인권 변호사와 시민 운동가로서의 거친 삶을 옆에서 지켜주느라 고되었을 당신에게 무슨 유언을 할 자격이 있겠소. 오히려 유언장이라기보다는 내 참회문이라 해야 적당할 것이오.
그래도 적으나마 수입이 있던 시절, 그 돈으로 집을 사고 조금의 여윳돈이 있던 시절, 내가 다른 가족들이나 이웃, 단체들에게 그 돈을 나누어주는 것을 옆에서 말리기는커녕 당신 또한 묵묵히 동의해 주었소. 당신도 내 낭비벽의 공범이었으니 나만 탓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때 조금이나마 따로 저축이나 부동산을 남겨두었다가 이럴 때 비밀스럽게 내놓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하오.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없는 법.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전세금이나 고향에 부모님들이 물려주신 조그만 땅이 있으니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자위하지만 그래도 장래 우리 아이들의 결혼 비용이나 교육비에는 턱없이 부족할 테니 사실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는구려.
그러나 우리가 그랬듯 살아가는 동안 겪는 어려움과 고난은 오히려 우리 아이들을 더욱더 건강하고 강하게 만들 것이니 모든 것은 운명에 맡겨 두는 것이 좋을 듯하오.
당신에게 용서를 구할 게 또 하나 있소. 아직도 내 통장에는 저금보다 부채가 더 많다오. 적지 않은 빚이 있는데, 다행히 나와 함께 일하는 간사가 내가 마구 쓰는 것을 견제하면서 조금씩 적금을 들고 있는 모양이니 조만간 많이 줄어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그러나 혹시 그걸 다 갚지 못한다면 역시 당신 몫이 될 테니 참으로 미안하기만 하오. 내 생전 그건 어떻게든 다 해결하도록 노력하겠소.
내가 당신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몇 가지 또 처리해 줘야 할 일이 있소. 내가 소중히 하던 책들, 이사할 때마다 당신을 고생시키며 모아온 그 책들은, 우리 아이들이 원하면 가지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느 대학 도서관에 모두 기증해 주기를 바라오. 아무래도 법률책이 많으니 고시 관련서만 가득한 서울대 법대에 기증하는 것도 좋겠소. 그 책들은 내가 평생 이 나라와 여러 나라에서 소중하게 모은 것들 아니오? 당신 밥 한끼 사주는 대신 함께 모은 것들이니 한 곳에 전해져 그 분야에 관심있는 후학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소.
이미 안구와 장기를 생명나눔실천회에 기부했으니 그분들에게 내 몸을 맡기도록 부탁하오. 그 다음 화장을 해서 시골 마을 내 부모님이 계신 산소 옆에 나를 뿌려주기 바라오. 양지바른 곳이니 한겨울에도 따뜻한 햇볕을 지키면서 우리 부모님에게 못다 한 효도를 했으면 좋겠소. 원컨대 당신도 어느 날 이 세상 인연이 다해 내 곁에 온다면 나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겠소. 그래서 우리 봄 여름 가을 겨울 함께 이 생에서 다하지 못한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으면 하오.
그리고 내 마지막을 지키러 오는 사람들에게 조의금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소. 내 영혼은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 반가울 것이요. 내 부음조차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소. 신문에 내는 일일랑 절대로 하지 마오.
무책임한 남편이 끝까지 무책임한 말로써 이별하려 하니 이제 침묵하는 것이 좋겠소. 부디 몸조심하고 남은 인생을 잘 보내고 다음 세상에서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겠소. 감히 다시 만나자고 할 염치조차 없지만 그래도 당신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으니 나로서야 또 만나자고 할 형편이오. 어떡하겠소? 다만 이 모든 것을 용서해 주오.
모든 가족과 지인들에게
오늘날의 나를 만든 많은 분이 계시지만 그 가운데 내 형제들을 잊을 수는 없겠습니다. 어린 시절 내 학비를 보태고 부모님을 돌보던 큰누님과 매형, 아들만 귀히 여기는 집안 분위기와 부모님의 인식 때문에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외지에서 무진 고생만 한 둘째누님, 셋째누님, 시골에서 부모님 농사일을 돕느라 시집갈 때까지 온몸을 바쳐 일한 넷째누님, 학문의 길을 걷느라 어려우신 걸 뻔히 알면서도 제대로 도와드리지 못한 형님, 그리고 오빠들 때문에 중학교까지밖에 못 다니고 내내 농사일만 하던 막내 여동생.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희생과 헌신에 대해 아무것도 갚지 못하고 떠나는 마음이 아리기만 합니다. 변호사 동생 또는 오빠를 두었으니 뭔가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아픈 가슴만 남았습니다. 다음 세상에서 혹시 그럴 위치가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동생 또는 오빠가 되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 향가 '제망매가'에서는 '같은 가지에 태어나 가는 곳 모르겠소'라고 노래했지만, 우리는 다음 세상에서 다시 함께 '같은 가지'로 태어났으며 좋겠습니다.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동네 친구들, 장난꾸러기에 지나지 않던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 주신 초등학교 선생님들, 많은 꿈을 심어주신 중고등학교 선생님들, 함께 유년 시절과 소년시절을 뛰놀며 꿈을 꾸던 친구들, 변호사 일을 하는 동안 나를 도운 사무장과 사무원들, 인권 변론을 함께 하면서 그 어두운 시절을 보낸 동료, 선배 변호사님들, 참여연대, 아름다운 재단, 아름다운 가게에서 함께 희망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밤낮을 잊으면 살고 있는 간사들, 거기에 기꺼이 회원이 되고 도움을 주신 분들.
그 모든 분에게 나는 큰 신세를 졌습니다. 많은 배움과 도움을 얻었습니다. 때로는 내 원만하지 못한 성격으로 상처를 입기도 했을 것이고 억지스런 요구로 손실을 입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꿈꾸어 오던 깨끗하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고, 그 못다한 몫은 바로 이제 여러분들이 이뤄 줄 것임을 믿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세상에서 반가운 얼굴로 맞겠습니다.
출처 故박원순 시장, 18년전 유언 ‘눈길’.. “못 다한 몫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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