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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박정희 독재 맞선 장준하 선생, 의문사 규명해 넋 위로를”

“이승만·박정희 독재 맞선 장준하 선생, 의문사 규명해 넋 위로를”
37주기 추모·‘장준하공원’ 제막식
[경향신문] 파주 | 이상호·김진우 기자 | 입력 : 2012-08-17 21:38:59 | 수정 : 2012-08-17 23:04:48


유신시절 독재정권과 맞서다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의 37주기 추모식과 추모공원 제막식이 17일 경기 파주시 탄현면 통일공원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와 장남 장호권씨 등 유족, 민주통합당 이해찬 대표, 정세균 대선 경선 후보 등 야당 인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 재야 인사, 장준하 기념사업회 관계자, 시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해 선생의 업적과 뜻을 기렸다.

이해찬 대표는 추념사에서 “개인적으로 (저는) 장준하 선생을 만나면서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며 “이젠 타살의 흔적이 역력히 확인된 만큼 진상을 규명해 선생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몫”이라고 말했다.

▲ 장준하 선생 37주기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이 돌베개 모양의 봉분 앞에서 선생의 뜻을 기리고 있다. 파주 | 김영민 기자

▲ 장준하 선생 장남 호권씨
“유신독재가 다시 꿈틀거리는 시기 아버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완성하라는 뜻”


장준하 선생의 장남 호권씨는 유족대표 인사말에서 “유신정권이 다시 꿈틀거리는 시기에 아버님이 나타난 것은 생전에 못다 이룬, 진정한 민주주의를 완성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며 “아버님 생전의 뜻인 국민이 사랑하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나라가 만들어지길 간곡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기념사업회 측은 이날 문을 연 추모공원에 선생의 이름을 따 ‘장준하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념사업회 측은 이 공원을 자유로가 내려다보이는 탄현면 성동리 3967㎡ 부지에 짓고, 백두대간 형상 조형물을 세워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새겨 넣었다. 가로 50㎝, 세로 70㎝ 크기로 선생의 흉상부조도 설치했다.

▲ 경기 파주시 탄현면 장준하공원에서 17일 열린 장준하 선생 37주기 추모식에서 장 선생 부인 김희숙 여사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흉상부조를 어루만지고 있다. 파주 | 김영민 기자

공원 위쪽 양지바른 곳에는 지난 1일 광탄면 신산리 나사렛 천주교 공동묘지에서 선생의 유골을 옮겨 안장한 묘를 조성했다. 선생의 항일기록 저서인 <돌베개>의 정신을 받들어 돌베개 모양의 바위로 봉분을 삼았다.

이날 공원에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대학생 시절 장 선생과 반군사정권 운동을 함께했던 곽분이씨(70·경기 광주성폭력상담소 상임이사)는 “장 선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며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을 눈물로 보냈다. 이 시대에도 장 선생의 의문사를 밝히는 데 방해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분하다”고 말했다.

장 선생이 다닌 한국신학대학 후배인 고민영씨(75)는 “반드시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며 돌무덤을 어루만졌다.

앞서 지난 1일 유족과 장준하기념사업회가 장 선생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두개골 오른쪽 뒤에서 외부 충격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지름 6㎝ 크기의 구멍을 확인하면서 장 선생의 타살 의혹이 재점화됐다.

<파주 | 이상호 기자 shlee@kyunghyang.com>


■ 장준하 선생은 누구
김준엽과 학도병 탈출, ‘사상계’ 창간… 반독재 활동하다 결국 의문사


장준하 선생은 1960~1970년대 박정희 유신체제에 맞선 사상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이다.

1918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장 선생은 1944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학도병으로 중국에 끌려갔다가 탈출,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 등과 함께 6000여리의 길을 걸어 충칭에 있는 광복군 본대에 합류했다. 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미 정보기관(OSS)의 특수게릴라 훈련을 받고 대기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해 김구 주석의 수행비서 등으로 일했다.

1953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월간 사상계를 창간, 이승만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또 5·16 쿠데타 후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과 베트남 파병, 유신의 부당성을 알렸다. 당시 사상계는 지식인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으며, 이 공로로 1962년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언론상)을 수상했다.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무릅쓰며 박정희 정권에 저항한 그는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운동 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돼 3개월간 투옥됐으며 그해 6월 옥중출마로 서울 동대문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73년 12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고, 1974년 4월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2월 지병 악화로 가석방됐다. 출옥 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발표하는 등 민주화투쟁에 주력했다. 1975년 8월17일 경기 포천군 이동면 도평 3리 약사봉에서 추락사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저서로 <돌베개>가 있다.


출처 : “이승만·박정희 독재 맞선 장준하 선생, 의문사 규명해 넋 위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