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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백골단 양심선언’ 박석진 활동가 “평화 위한 연대로 우리 사회 바꿔야죠”

‘백골단 양심선언’ 박석진 활동가
“평화 위한 연대로 우리 사회 바꿔야죠”
[민중의소리] 신종훈 기자 | 발행 : 2016-09-07 09:16:03 | 수정 : 2016-09-07 09:23:28


"얼마 전까지 같이 진압복을 입고 방독면을 쓰고 고생했던 전경 동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학생들이 우리의 적일까요? 정말 학생들이 던지는 화염병과 돌 때문에 우리가 다치고 고생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가 돌과 화염병을 막아야 합니까? 우린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에 왔습니다. 더 이상 국민들과 학생들을 상대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싸울 수 없습니다."
- 1991. 5. 4 박석진 일경

지난 1991년 노태우 군부 정권 시절, 거리에는 노태우 정권 퇴진과 실질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학생·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상적으로 들끓었다. 반정부 투쟁이 거세질수록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폭압적인 진압에 열을 올렸다. 그 과정에는 정권 보위의 선봉에 동원된 약 6만명에 달하는 전·의경들이 있었다.

▲ 백골단(자료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반정부 투쟁의 열기가 한창 달아오르던 1991년 봄, 노태우 정권은 종전의 해산 위주의 시위진압을 넘어 '전원 검거'를 위한 공격적 진압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진압중대의 3분의 1을 사복체포조로 재편한다. 소위 말하는 '백골단'이다.

'백골단'을 내세운 강경진압에 시위도 덩달아 격렬해지던 그해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 씨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한 달 남짓 동안 대학생들의 분신과 농성이 줄을 잇고, 전국적으로 노동자·학생들의 가두투쟁(가투)이 지속됐다.


군대 갔더니 시위대 때려잡는 '백골단'으로 차출

▲ 1991년 5월 4일 양심선언하고 있는 서울시경 제1기동대 1중대 박석진 일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경대 학생의 죽음에 항거하며 '백골단 해체의 날'로 선포된 5월 4일, '백골단'으로 시위 진압에 나서던 서울시경 제1기동대 1중대 박석진 일경은 가투 대비 현장을 이탈해 연세대 '강경대군치사사건범국민대책회의'로 달려갔다. 그는 '국방의 의무' 대신 폭력적인 시위진압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며 ▲전경 해체 ▲부대 내 구타 및 시위대 구타 금지 ▲독재정권 퇴진 등을 요구하는 공개 양심선언을 했다.

군 입대 후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전경으로 차출돼 '백골단'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박석진 씨는 자신의 또래인 강경대 학생의 죽음을 목격한 뒤 '격렬한 문제의식'에 휩싸였다. 그는 "이젠 '사람까지 죽이는구나' 싶었다. 더 이상 이런 일이 발생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서 정치적 양심선언을 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전경에 복무하며 사실은 마음 고생이 심했어요.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일단 저한테는 시위에 나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정당한 주장이라는 인식이 있었어요. 학생이나 노동자들의 시위가 정당한 요구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저는 그들을 진압해야 하는 입장인 거에요. 그래서 내적 갈등이 많았어요."

정권의 사수대로 내세우기 위해 전경으로 차출된 젊은이들은 애초에 그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입대한 또래들이었다. 박석진 씨는 그들이 거리로 뛰쳐 나온 이웃과 친구들을 적개심과 증오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든 정권에 분노했다.

"당시 전경들은 시위대를 증오하는 분위기였어요. 시위대와 부딪치고 돌·화염병에 맞아 서로 다치는 과정에서 증오가 시위대로 가는 거죠. 자기를 그곳에 세운 정권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건 당시의 본질이 아닌 거에요. 우리를 서로 싸우게 만든 정권이 문제의 본질인데 분노가 잘못 표출되고 있었던 거죠."

그는 양심선언 후 2년 2개월간 힘든 수배투쟁을 이어갔다. 하지만 박석진 씨 이후에도 군·경 복무자 10여 명의 양심선언이 이어졌다. 1993년 5월, 그는 이들과 만나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같은 뜻을 갖고 뭉친 이들의 요구는 ▲양심선언 군인·전경의 명예회복 ▲군대 민주화 ▲전경 해체 ▲한국군 자주권 회복 등이었다. 농성은 두 달간 계속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시설에 대한 공권력 투입은 쉽게 이뤄지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7월에 김영삼 정부의 김정남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이 제안을 해왔어요. '불구속 수사를 받게 해주겠다. 대신 처벌은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사법처리를 전제로 한 제안은 받을 수 없다고 했죠. 그래서 더이상 김영삼 정권에 기대할 건 없다고 판단하고 우리 요구조건 내걸고 청와대로 행진했어요. 전경이 5명, 군인이 3명. 군번 대신 '양심선언 000' 이름표 달고 행진하다 체포됐어요."

문민정부로 출범한 김영삼 정권이 정말 군사정권이 아니라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봤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그는 15개월간의 잔여복무를 마치고 1995년 10월이 돼서야 민간인 신분이 됐다. 1990년 6월 입대한 뒤 5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물론 그동안 '백골단'은 해체됐다.


본격 평화활동가로서의 삶..."평화 문제는 연대로 풀어야"

▲ ‘열린군대를 위한 시민연대’ 박석진 상임활동가. ⓒ민중의소리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온 박석진 씨는 자신이 추구해야 할 삶의 의미와 가치를 그의 언어로 그려보았다. 그는 "힘들었지만 양심선언하던 시절에 품고 있던 가치, 세상과의 약속들이 떠올랐다. 군대 민주화, 자주권 회복, 평화 등의 가치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고민 끝에 우리 사회를 바꾸기 위해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평화활동가가 된 박석진 씨는 2005년 평택 대추리·도두리 미군 기지 이전·확장 반대 투쟁을 시작으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저지 투쟁에 이르기까지 항상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는 "국민들이 구체적으로는 군 기지를 통해 군대와 접촉하기 때문에 군 기지가 어떤 양상으로 주민들과 공존하느냐가 저의 화두였다"며 "대추리의 경험을 통해, 평화를 지킨다는 군사기지가 국민의 평화적 삶을 파괴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됐고 이후 강정 싸움까지 추동한 계기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석진 씨는 현재 '열린군대를 위한 시민연대'(열군)의 상임활동가로 지내고 있다. 물론 25년 전 함께 양심선언을 했던 '동지'들과 함께다.

"군대가 어마어마하게 큰 조직이고, 제대로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역할을 감당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군 인권과 민주주의, 군대의 부정부패뿐만 아니라, 기지문제를 통해 국민과 만나는 민군관계 영역 등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죠. 물론 한국 군대는 기본적으로 미국에 의지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군사주권을 비롯한 자주권의 문제에도 포커스를 맞추고 있어요."

"우리 사회의 평화운동이 많이 어려워지고 있어요. 이명박 정권 이후에는 종북프레임을 중심으로 한 적대적 인식과 관계로 틀이 짜졌죠. 거기에 효과적으로 대응을 못해 왔어요. '외부세력' 프레임이죠. 지금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반대하면서도 우리가 그걸 너무 의식하고 있어요. 그러면 동력이 금방 떨어져요. 평화의 문제는 연대를 통해 힘을 합쳐 풀 수밖에 없다고 봐요."

▲ 청와대 앞에서 ‘사드 배치 반대’ 1인시위 중인 박석진 상임활동가. ⓒ‘열군’ 제공


출처  [만민보] ‘백골단 양심선언’ 박석진 활동가 “평화 위한 연대로 우리 사회 바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