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 형태 불안할수록 최저시급 높은 ‘노동자 천국’
김여란의 호주호구
[경향신문] 김여란 전 경향신문 기자 | 입력 : 2017.01.13 19:29:00 | 수정 : 2017.01.13 22:28:39
‘B.C.’는 ‘Before Christ’가 아니라 ‘Before Chicken’이라고, 닭공장 사람들이 그랬다. 호주 브리즈번의 한 닭공장에서 일한 지도 반년이 흘렀고, 연말연시 성수기에 무섭게 쏟아지는 닭에 치일 땐 ‘망할 치킨’이란 소리가 절로 나오곤 했다. 그래도 “넌 닭 만지는 게 뭐가 그렇게 행복해서 웃고 있냐”는 소리를 가끔 들을 만큼 기쁜 마음으로 일했던 소중한 일터였다. 한곳에서 6개월 이상 일할 수 없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 규정상 공장은 이번주로 그만두었지만, 그동안은 내가 평생 가졌던 노동에 관한 관념이 뒤바뀌는 시간이었다.
나는 비정규직으로 고용돼 허벅지살 라인에서 일했는데 나보다 오래 일한 정규직보다도 내 시급이 높았다. 기본임금에 캐주얼 수당 23%가 더 붙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는 비정규직을 ‘캐주얼’ 노동자라고 부른다. 캐주얼은 언제든지 사용자의 사정에 따라 해고할 수 있으며 유급 휴가(1년 5주)와 병가가 없다. 물론 아프면 진단서를 내고 쉬면 되지만 무급 병가가 된다. 일이 적으면 캐주얼에게는 조기 퇴근도 요구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당일에 출근 여부 통보를 받기도 한다. 다만 연금 9.5%는 똑같이 적립된다.
고용형태가 불안한 만큼 더 많은 돈을 준다는 게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서, 심지어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은 절반밖에 받지 못하고 해고 불안에 시달리는 하청·파견·용역·계약직 등등 온갖 종류의 이름이 붙은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에 익숙했으니 그럴 테다. 이제는 불안한 처지니까 당연히 돈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으니 호주물 좀 먹었다고 해도 되려나 싶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채용 절차부터 한국과 다른 이 공장에서는 처음 사람을 뽑을 때는 모두 캐주얼로 채용했다가 8개월쯤 지나 평판에 별문제가 없다면 정규직으로 전환시킨다. 그렇기에 노조도 캐주얼의 임금, 노동 조건에 많이 신경을 쓴다. 한국 노조들은 보통 비정규직 가입을 받지 않거나 정규직과 구분돼 있는데 이 공장에선 구분이 없어서 나도 노조에 가입했다. 사측과 노조가 노동 조건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근무 시간 중에 라인을 멈추고 노동자들을 모아서 설명하고 의견을 받는 시간을 갖곤 했다.
노동 강도와 스트레스는 임금에 비례하며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임금만 주는 게 당연하다는 한국산 노동 상식도 깨졌다.
내가 하는 일은 허벅지살을 집어서 포장하고 주물럭거리며 뼈가 있는지 확인하는 게 주인데 특별한 능력도 필요 없고 힘쓸 것도 없는 일이라 누구나 바로 할 수 있다. 시급은 34.8호주달러(약 3만원, 이하 달러)이고 노동 시간이 하루 7.5시간을 초과하면 48.7달러이다. 초과 근무는 원하는 사람만 한다. 일한 지 3개월이 지날 때쯤 평가를 거쳐 ‘레벨업’을 해서 임금을 올려 받았다.
일주일에 한번쯤 식료품 장을 보러 가는데 1시간 시급이면 넉넉했다. 과일과 채소 세일을 곧잘 하는 동네 마트에서 양파 1㎏, 감자 1㎏, 바나나 1.25㎏, 복숭아 1.5㎏, 사과 0.8㎏, 체리 500g, 계란 700g, 우유 2ℓ를 샀던 날에는 25달러가 나왔다. 한국에서는 제대로 장을 본 적이 없어서 비교가 어렵지만 식료품 절대 물가는 호주가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것 같다. 대신 외식비는 높지만 이 역시 최저임금 대비로 따지면 호주가 더 비싸다고 하긴 어렵다.
하루는 한국인 동료가 한국의 최저임금을 묻는 뉴질랜드인 동료에게 7달러 정도라고 말해줬더니 그가 깜짝 놀라더라면서 “이곳 사람들은 한국이 무슨 가난한 나라인 줄 알겠어요”라며 웃었다. 왠지 얼굴이 달아오른 내가 ‘직종별로, 일한 기간별로 다르다고 설명을 해줘야겠다’고 주절거렸더니 동료가 하는 말이 “뭐, 그게 맞잖아요”라는데 말문이 막혔다. 한국 경제 규모는 세계 11위라지만 많은 한국인이 최저임금을 평생임금으로 받고 사는 게 사실이다. 그래 한국은 가난한 나라구나, 새삼 뼈아프게 인정했다. 2016년 기준 한국 노동자의 3분의 1이 비정규직이며 그들은 정규직 임금의 53%를 받는다.
호주는 직종별로, 고용형태별로 최저임금이 조금씩 달리 책정돼 있다. 이전에 일식당에서 일할 때는 최저임금 17.3달러(약 1만5200원)를 받았고 호텔에서는 캐주얼 수당이 붙어 24달러쯤 받았다. 주말과 공휴일에 근무할 경우에는 1.25~2배가 된다. 공장에서는 기본임금에 캐주얼 수당, 오후반 수당이 붙었다.
호주가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게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최저임금 수준 때문만은 아니다. 호주 노동청 격인 페어워크(Fair work)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휴게 시간 설계의 세밀함을 보고 충격받은 적이 있었다. 직종별로, 고용형태별로 일을 시작한 시간에서 최소 최대 얼마 경과 후 휴게 시간을 줘야 하는지, 무급 휴식과 유급 휴식의 기준, 전날 일을 끝낸 시간과 다음날 일 시작 시간까지의 간격 등등이 아주 자세히 쓰여 있었다. 이 규정이 내가 일했던 모든 일터에서 정확하게 지켜졌다는 게 당연한데도 놀라운 일이었다.
닭공장은 호주에서 나의 다섯번째 일터였는데 매번 노동계약 때마다 나는 수십장의 서류를 읽고 서명해야 했다. 일주일에 한두번 일하던 호텔에서도 양면으로 40장에 가까운 서류를 받아 다 읽고 사인하는 데 두어시간이 걸렸다. 기본적인 세금, 연금 같은 실무에 관한 서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직장 내 성희롱, 왕따, 각종 차별에 대한 정의, 처벌 등 규정들이 각각 두세장씩 포함됐다. 부당 노동행위를 당했을 때 신고할 페어워크에 관한 안내문도 함께였다. 공장이나 호텔처럼 대기업이 아니라 직원이 스무명 안되는 식당에서 일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절차가 필수인 곳과 기본적인 노동계약서 자체가 드문 곳에서 직장 내 각종 문제가 생겼을 때 노동자를 보호하고 대처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를지는 일을 해보니 이해가 갔다. 무엇보다 노동자의 안전에 대한 강조가 그랬다. 공장에서의 안전 교육과 규정은 그저 요식이 아니라 매 순간 잘 지켜지고 있는지 감시됐고 작은 사고라도 철저히 기록으로 남겼다. 하루는 공장 출근길에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가벼운 찰과상을 입어 공장 의무실에 갔는데, 소독과 밴드 붙이는 처치 정도였는데도 사고 상황과 일시 등을 정확하게 기록해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호텔에서도 그랬다. 일하다 사람이 다치거나 죽어도 사용자가 헐값 치르고 나면 그만일 수 없도록 법과 제도가 가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리라.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나는 한국에서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는 뜻으로 ‘야매’ 채식을 몇 년 했었지만 이 닭공장에서 무던하게 일할 수 있었다. 너희도 사람에게 먹히려고 길러졌지만 그래도 생전에 행복했겠지, 호주의 동물단체와 법이 너희가 비참하게 살도록 두지 않았겠지 싶은 것이다.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에는 동물단체 승인을 받았다는 표시가 붙어 판매된다. 어느 땅에서는 닭 수천만마리가 생매장당하는데 너희는 그래도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오는 닭 조각을 만지면서 생각하곤 했다.
호주라고 모든 고용주가 천사라서 천국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아닐 테다. 어떻게든 이윤을 최대화하고 싶은 고용주 마음은 어디나 비슷할 것이고, 특히 한인 및 아시아계 이민자 고용주들 사이에서 노동법 위반은 숨 쉬듯 자연스럽다. 그러나 만일 부당한 대우를 당해서 페어워크에 신고했을 때 적절한 증거가 있다면 법은 노동자 편을 들어줄 것이고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가 호주에서 일하는 동안 어느새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처음 호주에 왔을 때 여러 일터 면접을 보면서는 불안정한 노동자 처지에 기본적인 노동 조건에 관해 묻는 것조차 왠지 껄끄러웠는데, 이제는 상사에게나 면접 시에 내 권리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 요구하는 일이 편안해졌다.
아직 호주 사회가 어떻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다. 나는 언어조차 온전치 못한 외국인 노동자로서 소수자고 이방인인데도 이곳에서 행복을 느낄 만큼 적절한 임금과 존중을 받고 있으니 이 사회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다.
한국에 살면서는 식당에서, 마트에서, 편의점에서 직원들이 심하게 친절할 때, 택시를 탈 때, 그렇지 않아도 이미 저렴한 물건에 무료배송 태그가 붙은 것을 보았을 때, 극심하게 깨끗한 건물에 들어섰을 때, 어떤 서비스를 받을 때건 값싼 사람값이 생각나 불편했다.
그저 밥 먹고 쇼핑하는 평범한 일상을 마음 편히 살 수 있다는 것이 호주에서 내 행복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원래 독일이나 캐나다 유학을 계획했으나 호주에 반해 이곳에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서는 기자로 4년여간 일했고 팟캐스트 <답없수다>를 진행했다.
2016년 초 한국을 떠나기로 한 뒤 사표를 냈고 앞으로 산림과 환경 관련 직종에서 일하는 게 목표다.
출처 [다른 삶] 고용 형태 불안할수록 최저시급 높은 ‘노동자 천국’
김여란의 호주호구
[경향신문] 김여란 전 경향신문 기자 | 입력 : 2017.01.13 19:29:00 | 수정 : 2017.01.13 22:28:39
▲ 호주의 한 닭고기 가공공장에서 모자와 장갑, 앞치마를 착용한 노동자들이 닭의 뼈와 살을 발라 상품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B.C.’는 ‘Before Christ’가 아니라 ‘Before Chicken’이라고, 닭공장 사람들이 그랬다. 호주 브리즈번의 한 닭공장에서 일한 지도 반년이 흘렀고, 연말연시 성수기에 무섭게 쏟아지는 닭에 치일 땐 ‘망할 치킨’이란 소리가 절로 나오곤 했다. 그래도 “넌 닭 만지는 게 뭐가 그렇게 행복해서 웃고 있냐”는 소리를 가끔 들을 만큼 기쁜 마음으로 일했던 소중한 일터였다. 한곳에서 6개월 이상 일할 수 없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 규정상 공장은 이번주로 그만두었지만, 그동안은 내가 평생 가졌던 노동에 관한 관념이 뒤바뀌는 시간이었다.
나는 비정규직으로 고용돼 허벅지살 라인에서 일했는데 나보다 오래 일한 정규직보다도 내 시급이 높았다. 기본임금에 캐주얼 수당 23%가 더 붙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는 비정규직을 ‘캐주얼’ 노동자라고 부른다. 캐주얼은 언제든지 사용자의 사정에 따라 해고할 수 있으며 유급 휴가(1년 5주)와 병가가 없다. 물론 아프면 진단서를 내고 쉬면 되지만 무급 병가가 된다. 일이 적으면 캐주얼에게는 조기 퇴근도 요구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당일에 출근 여부 통보를 받기도 한다. 다만 연금 9.5%는 똑같이 적립된다.
▲ 김여란씨와 같은 닭고기 가공공장에서 일하는 한도근씨가 펜으로 그린 일터의 작업 모습.
고용형태가 불안한 만큼 더 많은 돈을 준다는 게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서, 심지어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임금은 절반밖에 받지 못하고 해고 불안에 시달리는 하청·파견·용역·계약직 등등 온갖 종류의 이름이 붙은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에 익숙했으니 그럴 테다. 이제는 불안한 처지니까 당연히 돈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으니 호주물 좀 먹었다고 해도 되려나 싶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채용 절차부터 한국과 다른 이 공장에서는 처음 사람을 뽑을 때는 모두 캐주얼로 채용했다가 8개월쯤 지나 평판에 별문제가 없다면 정규직으로 전환시킨다. 그렇기에 노조도 캐주얼의 임금, 노동 조건에 많이 신경을 쓴다. 한국 노조들은 보통 비정규직 가입을 받지 않거나 정규직과 구분돼 있는데 이 공장에선 구분이 없어서 나도 노조에 가입했다. 사측과 노조가 노동 조건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근무 시간 중에 라인을 멈추고 노동자들을 모아서 설명하고 의견을 받는 시간을 갖곤 했다.
노동 강도와 스트레스는 임금에 비례하며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최소한의 임금만 주는 게 당연하다는 한국산 노동 상식도 깨졌다.
내가 하는 일은 허벅지살을 집어서 포장하고 주물럭거리며 뼈가 있는지 확인하는 게 주인데 특별한 능력도 필요 없고 힘쓸 것도 없는 일이라 누구나 바로 할 수 있다. 시급은 34.8호주달러(약 3만원, 이하 달러)이고 노동 시간이 하루 7.5시간을 초과하면 48.7달러이다. 초과 근무는 원하는 사람만 한다. 일한 지 3개월이 지날 때쯤 평가를 거쳐 ‘레벨업’을 해서 임금을 올려 받았다.
일주일에 한번쯤 식료품 장을 보러 가는데 1시간 시급이면 넉넉했다. 과일과 채소 세일을 곧잘 하는 동네 마트에서 양파 1㎏, 감자 1㎏, 바나나 1.25㎏, 복숭아 1.5㎏, 사과 0.8㎏, 체리 500g, 계란 700g, 우유 2ℓ를 샀던 날에는 25달러가 나왔다. 한국에서는 제대로 장을 본 적이 없어서 비교가 어렵지만 식료품 절대 물가는 호주가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것 같다. 대신 외식비는 높지만 이 역시 최저임금 대비로 따지면 호주가 더 비싸다고 하긴 어렵다.
하루는 한국인 동료가 한국의 최저임금을 묻는 뉴질랜드인 동료에게 7달러 정도라고 말해줬더니 그가 깜짝 놀라더라면서 “이곳 사람들은 한국이 무슨 가난한 나라인 줄 알겠어요”라며 웃었다. 왠지 얼굴이 달아오른 내가 ‘직종별로, 일한 기간별로 다르다고 설명을 해줘야겠다’고 주절거렸더니 동료가 하는 말이 “뭐, 그게 맞잖아요”라는데 말문이 막혔다. 한국 경제 규모는 세계 11위라지만 많은 한국인이 최저임금을 평생임금으로 받고 사는 게 사실이다. 그래 한국은 가난한 나라구나, 새삼 뼈아프게 인정했다. 2016년 기준 한국 노동자의 3분의 1이 비정규직이며 그들은 정규직 임금의 53%를 받는다.
호주는 직종별로, 고용형태별로 최저임금이 조금씩 달리 책정돼 있다. 이전에 일식당에서 일할 때는 최저임금 17.3달러(약 1만5200원)를 받았고 호텔에서는 캐주얼 수당이 붙어 24달러쯤 받았다. 주말과 공휴일에 근무할 경우에는 1.25~2배가 된다. 공장에서는 기본임금에 캐주얼 수당, 오후반 수당이 붙었다.
호주가 ‘노동자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게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최저임금 수준 때문만은 아니다. 호주 노동청 격인 페어워크(Fair work)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휴게 시간 설계의 세밀함을 보고 충격받은 적이 있었다. 직종별로, 고용형태별로 일을 시작한 시간에서 최소 최대 얼마 경과 후 휴게 시간을 줘야 하는지, 무급 휴식과 유급 휴식의 기준, 전날 일을 끝낸 시간과 다음날 일 시작 시간까지의 간격 등등이 아주 자세히 쓰여 있었다. 이 규정이 내가 일했던 모든 일터에서 정확하게 지켜졌다는 게 당연한데도 놀라운 일이었다.
닭공장은 호주에서 나의 다섯번째 일터였는데 매번 노동계약 때마다 나는 수십장의 서류를 읽고 서명해야 했다. 일주일에 한두번 일하던 호텔에서도 양면으로 40장에 가까운 서류를 받아 다 읽고 사인하는 데 두어시간이 걸렸다. 기본적인 세금, 연금 같은 실무에 관한 서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직장 내 성희롱, 왕따, 각종 차별에 대한 정의, 처벌 등 규정들이 각각 두세장씩 포함됐다. 부당 노동행위를 당했을 때 신고할 페어워크에 관한 안내문도 함께였다. 공장이나 호텔처럼 대기업이 아니라 직원이 스무명 안되는 식당에서 일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절차가 필수인 곳과 기본적인 노동계약서 자체가 드문 곳에서 직장 내 각종 문제가 생겼을 때 노동자를 보호하고 대처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를지는 일을 해보니 이해가 갔다. 무엇보다 노동자의 안전에 대한 강조가 그랬다. 공장에서의 안전 교육과 규정은 그저 요식이 아니라 매 순간 잘 지켜지고 있는지 감시됐고 작은 사고라도 철저히 기록으로 남겼다. 하루는 공장 출근길에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가벼운 찰과상을 입어 공장 의무실에 갔는데, 소독과 밴드 붙이는 처치 정도였는데도 사고 상황과 일시 등을 정확하게 기록해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호텔에서도 그랬다. 일하다 사람이 다치거나 죽어도 사용자가 헐값 치르고 나면 그만일 수 없도록 법과 제도가 가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리라.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나는 한국에서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는 뜻으로 ‘야매’ 채식을 몇 년 했었지만 이 닭공장에서 무던하게 일할 수 있었다. 너희도 사람에게 먹히려고 길러졌지만 그래도 생전에 행복했겠지, 호주의 동물단체와 법이 너희가 비참하게 살도록 두지 않았겠지 싶은 것이다.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에는 동물단체 승인을 받았다는 표시가 붙어 판매된다. 어느 땅에서는 닭 수천만마리가 생매장당하는데 너희는 그래도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오는 닭 조각을 만지면서 생각하곤 했다.
호주라고 모든 고용주가 천사라서 천국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아닐 테다. 어떻게든 이윤을 최대화하고 싶은 고용주 마음은 어디나 비슷할 것이고, 특히 한인 및 아시아계 이민자 고용주들 사이에서 노동법 위반은 숨 쉬듯 자연스럽다. 그러나 만일 부당한 대우를 당해서 페어워크에 신고했을 때 적절한 증거가 있다면 법은 노동자 편을 들어줄 것이고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가 호주에서 일하는 동안 어느새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처음 호주에 왔을 때 여러 일터 면접을 보면서는 불안정한 노동자 처지에 기본적인 노동 조건에 관해 묻는 것조차 왠지 껄끄러웠는데, 이제는 상사에게나 면접 시에 내 권리에 관해 이것저것 묻고 요구하는 일이 편안해졌다.
아직 호주 사회가 어떻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다. 나는 언어조차 온전치 못한 외국인 노동자로서 소수자고 이방인인데도 이곳에서 행복을 느낄 만큼 적절한 임금과 존중을 받고 있으니 이 사회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다.
한국에 살면서는 식당에서, 마트에서, 편의점에서 직원들이 심하게 친절할 때, 택시를 탈 때, 그렇지 않아도 이미 저렴한 물건에 무료배송 태그가 붙은 것을 보았을 때, 극심하게 깨끗한 건물에 들어섰을 때, 어떤 서비스를 받을 때건 값싼 사람값이 생각나 불편했다.
그저 밥 먹고 쇼핑하는 평범한 일상을 마음 편히 살 수 있다는 것이 호주에서 내 행복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여란씨는 호주 브리즈번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머물면서 현지 닭고기 가공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원래 독일이나 캐나다 유학을 계획했으나 호주에 반해 이곳에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서는 기자로 4년여간 일했고 팟캐스트 <답없수다>를 진행했다.
2016년 초 한국을 떠나기로 한 뒤 사표를 냈고 앞으로 산림과 환경 관련 직종에서 일하는 게 목표다.
출처 [다른 삶] 고용 형태 불안할수록 최저시급 높은 ‘노동자 천국’
'세상에 이럴수가 > 노동과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중공업, 노조원 등급 매겨 사찰” (0) | 2017.01.18 |
---|---|
수백억 소송에 무너지는 노동자들 (0) | 2017.01.18 |
‘총파업’ 화물연대 부산신항서 물류저지 투쟁... 연행자 속출 (0) | 2016.10.11 |
알바 대하는 이랜드 ‘애슐리’ 꼼수···15분 단위 ‘임금 꺾기’ (0) | 2016.10.05 |
화물노동자들이 박근혜 정부에 맞서 파업 결의하는 이유 (0) | 2016.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