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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17m 구덩이 속 야만, 금정굴 추모공원으로 잊지 말아야

17m 구덩이 속 야만, 금정굴 추모공원으로 잊지 말아야
1950년 10월, 153명 민간인이 죽은 '금정굴 사건'을 기억합니다
[오마이뉴스] 고상만 | 12.10.01 11:11 | 최종 업데이트 12.10.01 11:11


▲ 금정굴 입구 표시 ⓒ 유혜준

1950년 10월 9일,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남쪽으로 밀려났던 국군이 다시 서울과 경기도를 수복한 직후였습니다. 아주 초라한 행색의 사람들이 전깃줄로 손목이 묶인 채 고양시 황룡산과 고봉산으로 이어지는 74m 야산에 위치한 수직 폐광굴로 끌려 갔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을 흔히 '금정굴'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하루에 20명에서 많게는 40여명 가량의 사람들이 금정굴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끌려간 이들을 다시 본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그때, 과연 금정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비극의 시간은 1950년 10월 2일로 돌아갑니다.


'전쟁 부역자'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설마 부역자의 친척이라고 죽이기야 하겠어. 내 잠시 다녀올게."

1950년 10월 2일이었습니다. 당시 고양군(지금의 고양시)에 살던 고산돌씨가 잡혀가면서 가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잡혀간 고산돌씨는 연행 후 일주일이 지난 10월 9일, 비슷한 사연으로 잡혀간 또 다른 마을 주민 20여 명과 함께 금정굴로 끌려 갔습니다.

그곳에서 벌어진 참상은 차마 끔찍하여 필설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오전 11시경, 끌려온 이들이 도착한 곳은 줄을 타고 17m를 내려가야 하는 직각 형태의 금정굴 입구 앞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경찰과 치안대원들은 끌고온 주민들을 다섯명씩 데리고 올라가 금정굴 벼랑 입구를 바라보고 꿇어 앉도록 했습니다.

잠시 후 영문을 모른 채 두려움에 떨던 이들의 등 뒤에서 '빵' 소리가 울렸습니다. 경찰이 희생자들을 상대로 등 뒤에서 조준 사격을 한 것입니다. 양손이 전깃줄로 묶인 희생자들은 이내 외마디 비명과 함께 17m 깊이의 금정굴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두 명의 손목이 같이 묶인 희생자들은 다른 한편이 떨어지는 끌림에 함께 떨어졌고 또 어떤 이들은 옆에서 난 총소리에 놀라 지레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 고양시 탄현동 금정굴 유골 발굴현장(1995.9.30). ⓒ 연합뉴스

살려달라는 비명과 울부짖음. '나는 잘못이 없다'는 처절한 절규 역시 이내 잦아들었습니다. 잠시 후 희생될 사람들을 모두 '처리'한 경찰관과 치안대원들은 그들이 떨어진 금정굴 안으로 흙을 퍼 부었습니다. 설령 목숨을 잃지 않은 누군가가 있었다 하더라도 생매장이 되어 죽게 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일은 그후 20여 일간 계속되었습니다.

한편,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죽으러 가는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경찰이 "문산으로 재판을 받으러 간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희생자들은 경찰의 재판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기뻐했다고 합니다. 재판을 통해 '부역자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고양경찰서 유치장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한 이유였습니다. 그곳에서 보낸 지난 일주일간의 수감 생활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부역자'의 정확한 의미는 "한국전쟁 시기 북한의 침공으로 인한 적치 3개월동안 인민군의 통치 행위 전반에 협력한 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재판을 통해 행위 사실에 대한 확인 및 선별 과정을 통해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1950년 12월 1일 제정된 '부역자 처벌법' 어디에도 단지 '부역자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체포되거나 이로 인해 죽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금정굴에서 희생된 이들의 유족들이 가슴에 한이 남도록 억울해 하는 것 역시 이것입니다.

부역자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 부역 혐의로 연행된 이들 역시 자신이 처벌받을 것으로 생각한 이들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고양군이 국군에 의해 수복될 때 북으로 피난은 고사하고 오히려 국군을 환영하러 나간 자리에서 체포된 이들도 있었습니다.

부역자로 낙인된 대부분의 혐의 사실 역시 과연 그들이 죽임을 당할만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인민군의 강요로 쌀을 내주거나 또는 서너시간 보초를 서 있으라는 요구에 나갔다가 돌아온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희생자들을 연행한 후 끝내 총살후 암매장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한편 한국 전쟁중 피난가지 않고 그대로 고향에 남은 것 역시 사실상의 부역이며 인민군을 환영한 행위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일부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거짓 방송을 논하지 않고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사실을 잘 알지 못한 말이거나 만약 알면서도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 금정굴사건의 희생자 유골들. 17년간 서울대 임시보관실에 보관하다가 지난 2011년, 파주 청아공원에 안치됐다. ⓒ 이안수


이승만 대통령의 '대국민' 사기극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이틀이 지나가는 1950년 6월 27일 밤 10시경. 피난을 가야 하는지, 아니면 이대로 남아 있어도 되는지를 두고 극도의 혼란에 빠진 국민들 사이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담화가 라디오를 통해 발표될 것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약속된 잠시 후, 대통령 이승만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왔습니다.

이승만의 어조는 단호하고 분명했습니다. 그는 "우리 국군이 적을 물리치고 있으니 국민과 공무원은 정부 발표를 믿고 동요하지 말며 대통령도 서울을 떠나지 않고 국민과 함께 서울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국민들은 당연히 안심했습니다. 대통령도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니 정말 우리가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피난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이승만의 엄청난 '대국민 사기극'이었습니다. 진실은 충격적입니다. 방송이 나오기 불과 3시간 전인 27일 저녁 7시경. 당시 서울 중앙방송국에 한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발신지는 대전에 위치한 '충남지사 관저'였고 전화를 걸어온 이는 대통령 이승만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이 생방송이며 당연히 대통령도 서울에 있는 것으로 믿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방송이 있기 18시간 전인 27일 새벽 2시경, 이미 이승만은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 등 각료와 함께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피난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신이 서울에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대통령도 서울에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며 서울을 사수하자고 방송을 한 것입니다. 이같은 이승만의 방송은 밤 10시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새벽 2시까지 4시간동안 되풀이하여 계속 됩니다.

비극은 그로부터 불과 30분이 지나던 28일 새벽 2시 30분경 터졌습니다. 이승만의 방송에도 불구하고 수백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한강 인도교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이미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피난갔다는 사실이 알음알음으로 퍼졌고 이에 따라 뒤늦게 출발한 피난민들이 한강 인도교를 건너던 그때 서울 미아리 고개에는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입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서울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당시 국방부는 수많은 피난민이 지나던 한강 인도교를 사전 예고도 없이 한 순간에 폭파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순간 피난민 수천명은 그 자리에서 이름도 없이 죽었습니다. 바로 62년 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 금정굴 희생자 유물 사진. ⓒ 이종찬


밥도, 물도 주지 않은 고양경찰서

그렇기에 당시 이들은 연행한 고양경찰서의 처우는 아무리 전시중이지만 명백한 '불법'이며 '반 인권의 집약판'이었습니다. 도피한 부역 혐의자의 소재를 대라며 때리고 고문하는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인권 유린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이 전하는 증언은 그래서 참담했습니다.

연행된 순간부터 경찰과 치안대원으로부터 개머리판이나 장작개비로 무조건 맞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극심한 고통은 목마름과 배고픔이었습니다. 연행한 이들에게 경찰은 밥 한톨, 물 한모금도 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오줌을 받아 마시며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고양경찰서의 유치장 순경으로 근무했던 정모씨의 증언입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연행된 이들을 남녀 구별없이 한방에 몰아 넣었다고 합니다. 불과 7~8명 들어가는 유치장에 20여 명을 강제로 밀어 넣었으니 그야말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는 것입니다. 생리 현상에 의한 소변을 참지 못한 여자들이 서서 소변을 보는 모습, 그리고 아침마다 고문으로 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했던 정씨에게 당시 기억은 떠 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인지 너무나 끔찍합니다.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 요구를 거절한 채 살아남은 이가 있다면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말을 믿고 피난가지 않았다가 맞이한 인민군 치하에서 그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요구한 부역에 응했다는 이유만으로, 또는 그들과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처럼 개, 돼지만도 못한 처우를 받아야 할까요.

희생자의 유족들이 억울해하는 것 역시 이점입니다. 당시 국군에 의해 고양군이 수복되자 고양경찰서와 치안대는 부역자들을 체포한다며 피난가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던 이들을 체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는 자신이 상당한 부역을 했다고 스스로 판단한 이들은 이미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떠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남은 이들은 그저 전쟁 기간중 어쩔수 없이 협조한 이들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인민군의 요구에 의해 쌀을 내주거나 두어시간 보초를 서 있으라는 요구에 응한 것, 또는 집이 넓으니 인민 재판소로 쓰자는 인민군의 강요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자신들이 인민군의 강요에 의해 하기 싫은 일을 당한 피해자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그저 '부역자의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잡혀갈줄은 상상도 못했던 이들에게는 어떠했을까요 그야말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금정굴의 유일한 생존자를 구한 이병순의 증언

이렇게 10월 2일부터 약 20여일에 걸쳐 벌어진 금정굴 학살 행위는 법적인 정당성이 있었던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금정굴 학살이 중단된 것은 약 20여일에 걸쳐 최소한 153명 이상이 죽고난 11월 2일이었습니다. 희생자 유족중 일부가 부역자 처리를 위해 설치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 진정서를 제출한 덕이었습니다.

한편 이같은 금정굴 사건이 제대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2006년 4월의 일이었습니다. 금정굴 희생자 유족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에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화해위는 약 1년에 걸친 조사를 통해 2007년 6월 26일 이 사건이 당시 고양경찰서장 이무영의 지휘 아래 고산돌을 포함한 최소 153명 이상의 고양 및 파주 주민을 '부역혐의자' 또는 그 가족을 이유로 경찰관이 불법으로 집단 총살한 사건으로 결정했습니다.

특히 이 조사 과정에서 유일한 생존자인 이경선씨를 구해준 이병순씨의 증언은 너무나 끔찍해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집단 학살된 첫날인 10월 9일, 금정굴에서 희생되었다는 말을 들은 후 사건 현장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의 증언입니다.

"(아버지의 희생) 소식을 듣고 억울하지만 아버님의 시신이나마 수습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그 즉시 작은 아버지와 동네 어른 등 일곱명과 같이 금정굴로 갔습니다. 이때가 점심 때 즈음이었습니다. 밧줄을 이용해서 작은 아버지와 동네 어른 두 분이 (17m 아래) 금정굴 안으로 내려가셨습니다.

두 분이 내려 가시자 "사람 살려"라는 소리가 나서 살펴 보니 살아있는 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 분이 바로 (금정굴의 유일한 생존자) 이경선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굴 안에서 꺼내주자마자 그는 바로 고봉산쪽으로 도망갔습니다. 나중에 이경선씨 사위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 때 이경선씨는 뺨에 총알이 스치는 상처만 입었다고 하더군요.

잠시후에 작은 아버지가 굴에서 올라왔는데 하시는 말씀이 그냥 피비린내 나고, 생명이 덜 끊어져 살려달라고 악을 쓰는 사람, 팔이 떨어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올라왔다고 합니다. 흙이 조금씩 덮여 있었고요. 비록 시간은 점심때였지만 굴 안은 캄캄했고 비좁아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어요."


▲ 혈육을 잃은 현장인 금정굴에서 '빨갱이 가족'으로 60년을 인고해야했던 세월을 토로하고 있는 마임순, 이경순 유족 (2010년 9월) ⓒ 이안수


희생자의 '부인'을 차지한 치안대, 야만의 '극치'

그러나 고통은 희생된 이들만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 역시 참담할 뿐이었습니다. 차마 일일이 그것을 다 적어 내기가 고통스러운 사연들이 차고 넘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은 말 그대로 '한 많은 지난 세월'이었습니다.

사건 이후에도 일부 희생자 가족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치안대에 땅과 살림살이 등 재산을 빼앗겨야 했습니다. 또한 연좌제에 따라 희생자의 자식들은 취업하거나 육사 등에 진학할 수 없었고 늘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되어 감시를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피해 사례들은 희생자들의 부인이 당한 '성적 치욕' 앞에서는 차라리 무색해집니다.

고양시 덕이리에 살던 남편 박모씨가 금정굴에서 죽임을 당한 후, 그의 부인 역시 치안대에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강제로 자신의 남편을 죽인 치안대원의 첩이 되어야 했다고 박씨의 아들은 증언했습니다. 사건 당시 불과 6살이었던 박씨의 아들은 이듬해 자신을 돌봐주던 할머니 마저 돌아 가신 후,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야만 했던 지난 모진 기억앞에서 서럽게 울었습니다.

기막힌 일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당시 치안대 대장이었던 김모씨 역시 억울하게 죽은 노모씨의 부인을 성적으로 괴롭혀 결국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으며 또 다른 희생자인 최모씨의 부인 이모씨 역시 자신이 겪은 참담한 일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가 경찰지소로 끌려간 때는 남편이 죽임을 당한 후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4시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찰의 심문 내용이 너무나 기가 막혔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빨리 재혼을 하라는 경찰의 강요였던 것입니다. 남편을 죽인것도 모잘라 이런 말도 안되는 강요를 받은 이씨가 너무 억울하고 기가 막혀 끝내 답변하지 않자 경찰은 "왜 말 안하냐. 니 자식들 길러 (나에게) 원수를 갚으려 하냐. 2주 안으로 팔자 고쳐"라고 하면서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고 그는 증언합니다.

너무도 끔찍한 야만의 그때였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불법 행위에 대해 그 처리 결과를 확인하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다물수가 없습니다. 고작 1명이었습니다. 그것도 이 사건 진짜 책임자인 당시 고양경찰서장 이무영이 아니라 하위직 경찰관 1명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1950년 12월 22일 서울지방법원에서 '부역자 불법 처형'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그 역시 진짜 처벌 받았는지도 확인 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사형을 집행받았다고 알려진 대구형무소의 기록을 확인한 결과 그가 수감되었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그의 사형 처분 역시 끝내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마찬가지로 '어처구니없는 결말'이었습니다.


10월 2일, '62회' 금정굴 희생자 위령제에 초대합니다

어느덧 이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62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적지않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난 2007년 진실화해위의 결정으로 '금정굴 집단 학살 사건'이 경찰에 의한 불법 행위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이후 지난 8월 2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금정굴 유족들의 '국가를 상대로한 손해 배상 소송' 항소심 결정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받기도 한 것입니다. 적어도 국가기관과 법원에서 희생자와 유족들의 억울함은 분명하게 인정된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사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화해위가 권고한 사항이 전혀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진상규명 결정을 내리면서 동시에 '금정굴 사건 희생자 유족들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사과'와 '임시 보관 중인 유해 영구 봉안' 그리고 이들을 추념하는 '평화 공원 설립' 및 '위령시설 설치 '등을 위한 기관에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2012년 현재 이같은 권고가 이뤄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 이들을 가해한 측은 국가기관과 법원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생자와 그 유족들을 빨갱이라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2010년 지방선거 당시 고양시민단체가 요구한 '금정굴 희생자를 위한 평화공원 건립'을 약속하며 야권연대 후보로 당선된 일부 시의원들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도대체 언제 이 문제가 해결 될지도 알 수 없으며 이러한 세월만큼 이 억울한 유족들의 한은 더 쌓여가는 실정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고양 금정굴 유족회'와 '고양시민사회연대회의'는 이들 희생자가 연행된 첫날인 오는 10월 2일 오후3시, '일산 문화공원'(미관광장)에서 사건 발생 후 62주기를 맞아 '고양지역 민간인 학살 희생자 합동 위령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고양시와 국가인권위원회 등이 후원하는 이 위령제는 지난 1993년 처음 거행된 후 올해로 꼭 20년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령제 외에도 지난 과거의 비극적 고통을 딛고 평화 도시 고양으로 거듭나고자 다채로운 행사도 함께 치러집니다. '2012 고양 평화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준비되는 이 행사는 10월 2일부터 이틀에 걸쳐 매일 저녁 7시까지 위령제와 같은 장소인 고양 '일산 문화공원'에서 개최됩니다. 주요 행사로는 전시물과 참가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평화 엑스포를 비롯하여 문화행사(상여 퍼포먼스, 평화 음악회, 풍물 대동제) 및 평화시민 걷기 대회 등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62년 전, 이념적 갈등으로 빚어진 한국 전쟁은 이제 더 이상 안 됩니다. 이념이 인간의 존엄성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다시는 이같은 비극적인 참상이 되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수백억원의 돈으로 지은 '용산 전쟁기념관'보다 이처럼 억울한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평화를 위한 교육을 위해서라도 '금정굴 평화공원'은 반드시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저는 강력하게 호소합니다.

끝으로 62년 전 그날, 한국전쟁 과정에서 '숨져간 모든 이들을 추모'하며 가족을 잃고 고통받은 그 '모든 유족에게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출처 : 17m 구덩이 속 야만, 금정굴 추모공원으로 잊지 말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