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2년 만에 무너진 ‘박근혜 정통성’
원세훈 공직선거법 위반 3년 실형 판결로 사실상 ‘죄인이 된 정부’
[주간경향 1115호] 박송이 기자 | 2015.03.03
‘포스트(post) 박근혜 시대.’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학과 교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이렇게 진단했다. “남은 3년은 대통령이 있되, 대통령이 사라진 시기가 될 것이다. 대통령은 뉴스에서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정치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조로(早老) 정권. 여권 핵심 관계자의 자조적인 말이다. “‘레임덕’이라는 말도 사치다. ‘레임덕’은 임기 말이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제 겨우 2년 지났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국정운영이 불가능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저 임기만 무사히 마치길 바랄 뿐이다.” 박근혜 정권이 잘 되길 바랐다는 이 관계자는 이제는 자포자기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잇따른 실정에 쐐기를 박은 건 정통성 위기다. 지난 2월 9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국가정보원법 위반, 공직선거법 위반이다. 1심에서 공직선거법은 무죄였다. 항소심에서 공직선거법마저 유죄를 선고받았고, 법정구속까지 됐다. 서울고등법원이 제시한 양형의 이유다. “이로써 (피고인들은) 대의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하였다는 근본적인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왜곡 및 침해의 정도는 이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길이 없어 그 왜곡 및 침해의 정도를 두고 정치 및 선거에 관여한 모든 정당과 정치인,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들 사이에 의견 대립을 야기할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행위 자체로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주게 된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사실상 이 정부는 죄인이 된 셈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1심만으로도 죄인이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국가정보원법을 위반한 1심 판결만을 잣대로 삼더라도 민주공화국의 근간을 위협한 일이라고 말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 선거 결과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측량할 길이 없다. 대통령은 본인이 도움 받은 것은 없다고 했지만, 제도적으로 하자가 생긴 것만은 분명하다. 국가정보기관의 제도적 중립성은 한국 현대사에서 국민들이 희생을 지불하고 획득한 역사적 성과인데 이를 건드린 것이다. 민주국가 최고지도자로서 대통령이 도의적 책임을 이야기하고 사태의 재발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끔 국정원을 혁파해야 한다.”
하지만 박근혜는 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 왔다. 오히려 야당을 향해 책임을 물었다. 2012년 대선을 닷새 앞두고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 작업 의혹이 대선 막판 최대 이슈로 불거지자 박근혜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정원 댓글 의혹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만든 허위사실이면 문재인 후보가 책임져야 한다.” 취임 뒤에도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여파가 계속되자 “저는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하지만 항소심 판결로 박근혜 정권은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공간이 더욱 좁아졌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민주주의는 ‘결과에 대한 신뢰’로 작동하는 체제가 아니라, ‘과정에 대한 신뢰’로 작동하는 체제”라고 말했다. “이는 선거공약을 지키지 않은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약을 지키지 못해도 선거 결과를 뒤집지 못하는 이유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로 당선됐기 때문이다. 항소심 판결은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결과에 대한 승복도 어렵다. 치명적인 문제다.”
치명상을 입은 박근혜 정부에 남은 선택지가 있을까. 유일한 선택지는 정면돌파다. 이택광 교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소환하는 것만이 박근혜 정부가 지지율을 올리고 정치력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라고 말했다. “유권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소환해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박근혜 자신이 연루되지 않았음을 보여줘야 한다. 박근혜가 이 전 대통령을 소환할까 안 할까? 박근혜가 행동을 안 하는 순간 박근혜 정부는 이대로 주저앉고 정치력은 상실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온도는 다르다. 여권에서는 이미 ‘꼬리 자르기’로 사태를 무마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여권 관계자는 “우리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선에서 끝내고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친이계 관계자는 원세훈 전 원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교감에 대해 묻자 원 전 원장의 단독행동으로 선을 그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워낙에 알아서 (충성을) 잘하는 사람이니까 국정원장 자리까지 간 것 아니겠나. 국정원장이 구청 부서장도 아닌데 그걸 일일이 대통령에게 지시받고 보고하면서 했겠나.” 그러나 권력에 대한 충성은 ‘나 좀 알아달라’는 인정투쟁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상식이다. 정치권의 전략통은 “당대표만 바뀌어도 그쪽으로 온갖 보고서가 다 올라간다. 서로서로 눈도장 찍으려는 충성경쟁이다. 마찬가지로 원세훈 전 원장이 권력에 대한 사심 없는 외사랑으로 혼자서 그렇게 했을까. 충성은 권력에 드러나게 하는 게 상식적인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권은 이번 판결을 ‘묻히고 지나갈 이슈’ 정도로 쉽게 생각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항소심 판결이 1심과 다르게 났지만, 당내에서 어느 누구와도 이 이슈에 대해서 논의한 적은 없다. 이미 지난 이슈이기도 하고 이완구 총리 후보자 청문회, 자원외교 문제 등 산적한 현안이 많다”고 말했다. 법원 판결문이 ‘대의민주주의 근간을 훼손했다’고 판결한 사건이지만, 여권이 이를 유야무야 뭉개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새정치연합 또한 이 사안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 문제는 새정치연합으로서도 스탠스를 잡기 힘든 ‘뜨거운 감자’다.
새정치연합은 정권 초, 국정원의 대선 개입 문제를 제기했을 때 ‘대선불복’이라고 역풍을 받은 데 대한 상처가 깊다. 항소심 판결이 난 다음날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명박 정부에서 저질러진 일이지만 박근혜도 이 문제에 대해 사과해야 마땅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론적인 입장 표명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문재인 대표 측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전했다. “국가기관에서 전방위적 대선 개입이 드러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하는 게 마땅하다는 취지로 발언을 한 것인데, 이에 대한 대책은 아직 준비하지 않고 있다. 솔직히 과거의 일을 다시 자꾸 들추는 이미지를 주는 것도 부담스럽다.” 새정치연합의 전략통은 항소심 판결에 대해서는 여야 모두 행동의 변화가 생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제가 시간도 많이 흘렀고 너무 많이 와버렸다. 이제 와서 대통령 내려가라고 할 수도 없다.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부정선거라는 주장을 강화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정당에서 받아주지 못하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박근혜의 지지율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활용할 부분도 크지 않고, 여론의 움직임도 없기 때문에 전격적으로 이를 쟁점화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 유·불리를 따질 문제도, 지지율 향방에 따라서 반응할 문제도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사무국장은 이번 판결이 박근혜의 지지율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묻자 “지지율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론 지지도의 향방을 떠나서 정치권에서는 어떻게든 제도적으로 수습해 가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즉각적인 지지율로 반응이 나오지는 않지만, 18대 대선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유권자들이 받은 내상은 보기보다 깊다. 서복경 연구위원은 “한국 정치의 비극은 여기서 야당까지도 정치적인 부담이나 유·불리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이 판결이 나왔을 때 제1야당 대표가 일성으로 해야 할 일은 ‘이명박 정부가 권력기관을 통해 선거에 개입할 때 제1야당으로서 견제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야당 일각에서 새정치연합은 이를 까맣게 몰랐다는 식으로 박근혜 하나만 공격하고 희화화시킬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선거과정이 훼손되면 유권자들은 제도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서 연구위원의 말이다. “정치 개입은 있었지만, 선거 개입은 아니라는 내용의 1심 판결이 나왔을 때 유권자들이 보였던 태도는 냉소였다. 만약 대법원에서 이를 파기환송해서 2심으로 돌려보내면 또 어떻게 되겠는가. 1심만이 아니라 전체 사법부 차원에서 제도적 신뢰는 사라지고 제도가 희화화될 것이다. 다음 대통령선거는 어떨까. 근거가 있든 없든 간에, 선거 결과를 누구는 믿고 누구는 안 믿을 것이다. 전혀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자라나는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검찰 발표도, 법원 판결도 못 믿고 공식 제도가 무력화되고 음모론이 자라는 환경이 조장될 것이다.”
그런 만큼 유권자들의 냉소에 대한 정치권의 진지한 반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항소심 판결이 나온 후, 신경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문재인 대표를 만났다. 신 의원은 국정원대선개입무죄공작저지특별위원회 소속 의원이다. 신 의원은 문재인 대표에게 국정원 및 권력기관을 감시할 수 있는 당내 공식기구나 국회 내 중립적인 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기구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공정하지 못한 선거과정을 통해 선출된 정부라는 메시지와 새정치연합이 공정선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아직 논의 중이고 본격적으로 추진되지는 않고 있다.
윤평중 교수는 우리 사회의 오래된 적폐 중 하나를 ‘망각’으로 들었다. “한국 사회는 사건이 터지고 사회적 갈등이 양산돼도 그때 그때 해결이 안 된다. 그냥 시간이 무작정 흐르고 다른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잊혀지고 묻혀진다. 국정원 선거 개입 문제도 그런 양상으로 가고 있는데 정치권에서 무작정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출처 집권 2년 만에 무너진 ‘박근혜 정통성’
원세훈 공직선거법 위반 3년 실형 판결로 사실상 ‘죄인이 된 정부’
[주간경향 1115호] 박송이 기자 | 2015.03.03
‘포스트(post) 박근혜 시대.’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학과 교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이렇게 진단했다. “남은 3년은 대통령이 있되, 대통령이 사라진 시기가 될 것이다. 대통령은 뉴스에서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정치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조로(早老) 정권. 여권 핵심 관계자의 자조적인 말이다. “‘레임덕’이라는 말도 사치다. ‘레임덕’은 임기 말이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제 겨우 2년 지났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국정운영이 불가능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저 임기만 무사히 마치길 바랄 뿐이다.” 박근혜 정권이 잘 되길 바랐다는 이 관계자는 이제는 자포자기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 2월 9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에서 열린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의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원 전 국정원장은 항소심에서 징역 3년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됐다. | 강윤중 기자 |
“임기만 무사히 마치길 바랄 뿐”
잇따른 실정에 쐐기를 박은 건 정통성 위기다. 지난 2월 9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국가정보원법 위반, 공직선거법 위반이다. 1심에서 공직선거법은 무죄였다. 항소심에서 공직선거법마저 유죄를 선고받았고, 법정구속까지 됐다. 서울고등법원이 제시한 양형의 이유다. “이로써 (피고인들은) 대의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하였다는 근본적인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왜곡 및 침해의 정도는 이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길이 없어 그 왜곡 및 침해의 정도를 두고 정치 및 선거에 관여한 모든 정당과 정치인,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들 사이에 의견 대립을 야기할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행위 자체로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주게 된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사실상 이 정부는 죄인이 된 셈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1심만으로도 죄인이었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국가정보원법을 위반한 1심 판결만을 잣대로 삼더라도 민주공화국의 근간을 위협한 일이라고 말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 선거 결과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측량할 길이 없다. 대통령은 본인이 도움 받은 것은 없다고 했지만, 제도적으로 하자가 생긴 것만은 분명하다. 국가정보기관의 제도적 중립성은 한국 현대사에서 국민들이 희생을 지불하고 획득한 역사적 성과인데 이를 건드린 것이다. 민주국가 최고지도자로서 대통령이 도의적 책임을 이야기하고 사태의 재발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끔 국정원을 혁파해야 한다.”
하지만 박근혜는 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 왔다. 오히려 야당을 향해 책임을 물었다. 2012년 대선을 닷새 앞두고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 작업 의혹이 대선 막판 최대 이슈로 불거지자 박근혜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정원 댓글 의혹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만든 허위사실이면 문재인 후보가 책임져야 한다.” 취임 뒤에도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여파가 계속되자 “저는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하지만 항소심 판결로 박근혜 정권은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공간이 더욱 좁아졌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민주주의는 ‘결과에 대한 신뢰’로 작동하는 체제가 아니라, ‘과정에 대한 신뢰’로 작동하는 체제”라고 말했다. “이는 선거공약을 지키지 않은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약을 지키지 못해도 선거 결과를 뒤집지 못하는 이유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로 당선됐기 때문이다. 항소심 판결은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결과에 대한 승복도 어렵다. 치명적인 문제다.”
▲ 2월 3일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국무위원들과 티타임을 갖고 있다. 박 대통령 뒤로 이명박 사진이 보인다. | 연합뉴스 |
하지만 정치권의 온도는 다르다. 여권에서는 이미 ‘꼬리 자르기’로 사태를 무마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여권 관계자는 “우리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선에서 끝내고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친이계 관계자는 원세훈 전 원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교감에 대해 묻자 원 전 원장의 단독행동으로 선을 그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워낙에 알아서 (충성을) 잘하는 사람이니까 국정원장 자리까지 간 것 아니겠나. 국정원장이 구청 부서장도 아닌데 그걸 일일이 대통령에게 지시받고 보고하면서 했겠나.” 그러나 권력에 대한 충성은 ‘나 좀 알아달라’는 인정투쟁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 상식이다. 정치권의 전략통은 “당대표만 바뀌어도 그쪽으로 온갖 보고서가 다 올라간다. 서로서로 눈도장 찍으려는 충성경쟁이다. 마찬가지로 원세훈 전 원장이 권력에 대한 사심 없는 외사랑으로 혼자서 그렇게 했을까. 충성은 권력에 드러나게 하는 게 상식적인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권은 이번 판결을 ‘묻히고 지나갈 이슈’ 정도로 쉽게 생각하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항소심 판결이 1심과 다르게 났지만, 당내에서 어느 누구와도 이 이슈에 대해서 논의한 적은 없다. 이미 지난 이슈이기도 하고 이완구 총리 후보자 청문회, 자원외교 문제 등 산적한 현안이 많다”고 말했다. 법원 판결문이 ‘대의민주주의 근간을 훼손했다’고 판결한 사건이지만, 여권이 이를 유야무야 뭉개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새정치연합 또한 이 사안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 문제는 새정치연합으로서도 스탠스를 잡기 힘든 ‘뜨거운 감자’다.
새정치연합은 정권 초, 국정원의 대선 개입 문제를 제기했을 때 ‘대선불복’이라고 역풍을 받은 데 대한 상처가 깊다. 항소심 판결이 난 다음날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명박 정부에서 저질러진 일이지만 박근혜도 이 문제에 대해 사과해야 마땅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론적인 입장 표명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문재인 대표 측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전했다. “국가기관에서 전방위적 대선 개입이 드러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하는 게 마땅하다는 취지로 발언을 한 것인데, 이에 대한 대책은 아직 준비하지 않고 있다. 솔직히 과거의 일을 다시 자꾸 들추는 이미지를 주는 것도 부담스럽다.” 새정치연합의 전략통은 항소심 판결에 대해서는 여야 모두 행동의 변화가 생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제가 시간도 많이 흘렀고 너무 많이 와버렸다. 이제 와서 대통령 내려가라고 할 수도 없다.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부정선거라는 주장을 강화할 수 있겠지만, 정치적으로 정당에서 받아주지 못하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박근혜의 지지율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활용할 부분도 크지 않고, 여론의 움직임도 없기 때문에 전격적으로 이를 쟁점화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치적 유·불리를 따질 문제도, 지지율 향방에 따라서 반응할 문제도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한울 동아시아연구원 사무국장은 이번 판결이 박근혜의 지지율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묻자 “지지율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론 지지도의 향방을 떠나서 정치권에서는 어떻게든 제도적으로 수습해 가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정권의 남은 선택은 이명박 소환뿐
즉각적인 지지율로 반응이 나오지는 않지만, 18대 대선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유권자들이 받은 내상은 보기보다 깊다. 서복경 연구위원은 “한국 정치의 비극은 여기서 야당까지도 정치적인 부담이나 유·불리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이 판결이 나왔을 때 제1야당 대표가 일성으로 해야 할 일은 ‘이명박 정부가 권력기관을 통해 선거에 개입할 때 제1야당으로서 견제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야당 일각에서 새정치연합은 이를 까맣게 몰랐다는 식으로 박근혜 하나만 공격하고 희화화시킬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선거과정이 훼손되면 유권자들은 제도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서 연구위원의 말이다. “정치 개입은 있었지만, 선거 개입은 아니라는 내용의 1심 판결이 나왔을 때 유권자들이 보였던 태도는 냉소였다. 만약 대법원에서 이를 파기환송해서 2심으로 돌려보내면 또 어떻게 되겠는가. 1심만이 아니라 전체 사법부 차원에서 제도적 신뢰는 사라지고 제도가 희화화될 것이다. 다음 대통령선거는 어떨까. 근거가 있든 없든 간에, 선거 결과를 누구는 믿고 누구는 안 믿을 것이다. 전혀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자라나는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검찰 발표도, 법원 판결도 못 믿고 공식 제도가 무력화되고 음모론이 자라는 환경이 조장될 것이다.”
그런 만큼 유권자들의 냉소에 대한 정치권의 진지한 반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항소심 판결이 나온 후, 신경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문재인 대표를 만났다. 신 의원은 국정원대선개입무죄공작저지특별위원회 소속 의원이다. 신 의원은 문재인 대표에게 국정원 및 권력기관을 감시할 수 있는 당내 공식기구나 국회 내 중립적인 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기구는 두 가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공정하지 못한 선거과정을 통해 선출된 정부라는 메시지와 새정치연합이 공정선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한다는 것이다. 아직 논의 중이고 본격적으로 추진되지는 않고 있다.
윤평중 교수는 우리 사회의 오래된 적폐 중 하나를 ‘망각’으로 들었다. “한국 사회는 사건이 터지고 사회적 갈등이 양산돼도 그때 그때 해결이 안 된다. 그냥 시간이 무작정 흐르고 다른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잊혀지고 묻혀진다. 국정원 선거 개입 문제도 그런 양상으로 가고 있는데 정치권에서 무작정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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