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독립투사들을 고문하던 형사였어
[시사IN Live 413호]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 승인 : 2015.08.14 10:47:24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았다. 1910년 일본과 한국을 합친다는 선언이 공표된 건 8월 29일이었지만 이미 1주일 전인 8월 22일 양국 대표가 조약에 서명을 끝냈다고 하니, 일제 강점은 딱 1주일 모자라는 만 35년이었던 셈이야. 영화 <암살>을 보면서 가장 뭉클했던 장면 중 하나는 일본의 항복 모습을 지켜보며 환호하던 독립투사들이 “집에 가자!”를 합창하는 장면이었어. 짧아야 몇 년, 길면 수십 년 동안 집에 가지 못하고 고향 풍경을 그리워하기만 한 사람들이지 않았겠니.
어쨌든 일제는 물러갔어. 하지만 일제 강점 35년은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우리 역사에 남게 돼. 신석정이라는 시인은 <꽃덤불>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 맞아. 기어이 그날을 보고자 했지만 끝내 먼 길 떠난 벗들은 얼마며, 천만리 머나먼 어딘가에서 그리움을 부르는 친구는 좀 많았겠어.
하지만 문제는 ‘맘을 팔고 몸을 팔아버린’ 벗들이었지. 나라를 팔아치워 팔자 고치려던 인간이나 그 앞잡이 노릇을 하며 설치던 인간말종은 ‘벗’도 아니겠지만 그들 말고 많은 ‘벗’들도 35년을 살아내야 했거든. 결연히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지만, 나중에는 일제의 충실한 앞잡이가 된 ‘몸을 팔아버린 벗들’도 있고, 해방은 올 것 같지 않고 일단 먹고살아나 보자며 순응했던 ‘맘을 팔아버린’ 벗들까지. 우리는 그 모두를 일컬어 ‘친일파’라 뭉뚱그려 부른단다.
일제 치하에서 인간 이하의 짓을 했던 악질 친일파를 솎아내지 못한 건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야. 영화 <암살>에서 사실성이 떨어지는 장면은 마지막 장면일 거다.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그렇게 ‘응징’을 받은 예는 극히 드무니까. 하판락이라는 사람 얘길 해보자.
하판락은 독립투쟁 등 일본에 저항하는 이들을 때려잡는 것을 주 임무로 하는 고등계 형사였지. 동시에 악독한 고문의 명수였는데 즐겨 한 고문 중의 하나는 ‘착혈고문’이었다고 해. 2007년 사망한 독립투사 이광우 선생은 하판락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사람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했다. 그리곤 혈관을 통해 주사기 하나 가득 피를 뽑아내서는 뽑아낸 사람에게 뿌렸다”라고 증언하고 있어. ‘사람의 피를 짜낸’ 이 악마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 넘겨지지만, 끝끝내 자신이 아닌 부하가 고문했다고 잡아떼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 그리고 평생을 잘 먹고 잘산단다. 부산에서 무슨 노인회 회장도 하고 부산 시장 표창까지 받으면서 말이지.
그의 존재가 다시 드러난 건 그에게 고문당해 평생을 불구로 산 독립투사 덕분이었어. 투옥 기록 등 독립투쟁의 증거가 사라져 독립투쟁 서훈을 받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한 독립투사의 아들이 하판락의 생존 사실을 알아내고, 하판락의 진술과 그 주변 서류를 통해 아버지의 독립투쟁 사실을 증명했거든. 하판락을 만나러 가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한 맺힌 말을 던졌다는구나. “하판락을 만나면 직이뿌라(죽여버려라). 그놈은 인두겁을 쓴 짐승이다.”
이런 악마들을 때려잡지 못한 것, 그들이 짓밟은 사람의 무덤 위에서 잘 먹고 잘살며 한세상 보내게 한 것은 우리 역사의 수치야. 그들조차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으니 다른 친일파에 대해서도 서슬을 세울 겨를이 없었지. 그런 상태에서 전쟁과 독재의 폭풍이 우리 역사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친일이란 키워드는 어느새 일종의 블랙홀이 돼버렸어. 모든 것을 빨아들일 만큼 강력하지만, 그 깊이와 범위를 알 수 없고,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맺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조금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이원수라는 아동문학가가 계셔. 남북한 사람들이 합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노래라는 <고향의 봄> 작사가지. 그 부인 최순애 씨는 역시 유명한 동요 <오빠 생각>을 작사한 분이고. 그 노래 가사를 쓸 때 놀랍게도 두 분은 10대 소년 소녀였고 각각 수원과 경상도에 살면서 편지로만 데이트했어. 어느 날 마침내 소년 이원수가 경부선 열차를 타고 올라오기로 했지만, 수원역에서 기다리던 소녀 최순애는 이원수를 만나지 못해. 독립투쟁 혐의로 잡혀가서 감옥에 갇혀버렸거든. 이원수 선생은 그 후 평생 조선의 아이들, 한국의 소년들을 위해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했고 어린이들에게 식민지의 현실과 전쟁의 아픔과 가난의 고통에 대한 위로를 선사해주었어.
아동 문학가 이오덕 선생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만났던 분 가운데 가장 맑고 바르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으로서 “4·19와 전태일을 동화로 쓴 유일한” 분이었지. 하지만 일제 말기에 동시 두 편, 자유시 한 편, 수필 두 편 해서 모두 다섯 편의 친일 작품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기관지 <반도의 빛(半島の光)>에 발표한 것이 드러나면서 이분은 ‘친일파’ 명단에 오른단다. <고향의 봄>도 한때 교과서에서 삭제됐고 고향 창원에서 진행하려던 이원수 기념사업은 “자유· 정의·인권·평화와 같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관을 가진 세계인들의 비웃음을 살 일이며 죄 없는 창원시민을 망신시키는 일”이라는 반대에 부딪혀야 했어.
과연 이분은 친일파일까? 하판락 같은 망종까지는 아니더라도 ‘맘을 팔아버린 벗’ ‘몸을 팔아버린 벗’으로서 결국은 하판락과 같은 범주에 올라야 마땅한 사람이고 그를 기리는 것이 “세계인의 비웃음을 살 일”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옳은 일일까?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구나. 그렇게 ‘친일’의 스펙트럼은 70년 세월의 두께 속에서 수십 가지 색깔로 갈라지고 있음도 우리는 기억해야 해.
우리에게 ‘친일 청산’이란 무엇일까. 먼저 필요한 건 역사의 온전한 복원이라고 생각해. 하판락 같은 악질 친일파부터 ‘맘을 팔아버린’ 벗들까지 그 모두의 행적이 지금보다 더 선명하고 소상히 드러나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원수 선생의 친일 작품이 밝혀지고 사전에 오른 자체는 당연한 일이고, 하판락 같은 자들의 행적은 깡그리 까발려져야 한다고 봐. 하지만 그 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단죄와 규정이 아니라 오늘에 필요한 교훈을 얻는 일일 거야.
나이 아흔셋에 죽었으니 명도 지독하게 길었던 하판락의 악행을 저주하고 그에게 천벌을 내리지 않은 신과 그를 때려죽이지 못한 할아버지들을 원망하는 건 어렵지 않아. 이원수 선생의 친일 시를 낭독하며 그 잘못을 규탄하는 것도 마음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역사에서 배워야 할 건 도덕이 아니라 지혜란다. 왜 그들은 그렇게 됐는가를 분석하고 그들의 삶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다시는 역사에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거울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야.
더하여 가장 중요한 것. 하판락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독립투사 서훈의 증거가 마련됐듯, ‘친일 청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잃어버린 독립투쟁의 역사를 되찾는 일일 거야. 이름 없이 보상도 없이 스러져 간 독립투사들의 삶을 더듬어 꿰맞추고 그 희생의 무게에 짓눌려 힘겹게 살아온 그 후손에게 우리가 미처 드리지 못한 명예와 경의를 돌려줄 때 ‘친일’은 청산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출처 그는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형사였어
꽃 덤불 - 신석정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 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시사IN Live 413호]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 승인 : 2015.08.14 10:47:24
친일 스펙트럼은 70년 세월 속에서 수십 가지 색깔로 갈라져 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건 도덕이 아니라 지혜다. 중요한 건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투사의 삶과 독립투쟁의 역사를 되찾는 일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았다. 1910년 일본과 한국을 합친다는 선언이 공표된 건 8월 29일이었지만 이미 1주일 전인 8월 22일 양국 대표가 조약에 서명을 끝냈다고 하니, 일제 강점은 딱 1주일 모자라는 만 35년이었던 셈이야. 영화 <암살>을 보면서 가장 뭉클했던 장면 중 하나는 일본의 항복 모습을 지켜보며 환호하던 독립투사들이 “집에 가자!”를 합창하는 장면이었어. 짧아야 몇 년, 길면 수십 년 동안 집에 가지 못하고 고향 풍경을 그리워하기만 한 사람들이지 않았겠니.
어쨌든 일제는 물러갔어. 하지만 일제 강점 35년은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우리 역사에 남게 돼. 신석정이라는 시인은 <꽃덤불>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 맞아. 기어이 그날을 보고자 했지만 끝내 먼 길 떠난 벗들은 얼마며, 천만리 머나먼 어딘가에서 그리움을 부르는 친구는 좀 많았겠어.
하지만 문제는 ‘맘을 팔고 몸을 팔아버린’ 벗들이었지. 나라를 팔아치워 팔자 고치려던 인간이나 그 앞잡이 노릇을 하며 설치던 인간말종은 ‘벗’도 아니겠지만 그들 말고 많은 ‘벗’들도 35년을 살아내야 했거든. 결연히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지만, 나중에는 일제의 충실한 앞잡이가 된 ‘몸을 팔아버린 벗들’도 있고, 해방은 올 것 같지 않고 일단 먹고살아나 보자며 순응했던 ‘맘을 팔아버린’ 벗들까지. 우리는 그 모두를 일컬어 ‘친일파’라 뭉뚱그려 부른단다.
▲ 하판락(위)은 독립투사들을 고문하던 고등계 형사였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회부(맨 왼쪽)됐지만 풀려났다.
일제 치하에서 인간 이하의 짓을 했던 악질 친일파를 솎아내지 못한 건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야. 영화 <암살>에서 사실성이 떨어지는 장면은 마지막 장면일 거다. 우리나라 친일파들이 그렇게 ‘응징’을 받은 예는 극히 드무니까. 하판락이라는 사람 얘길 해보자.
▲ 2007년 사망한 독립투사 이광우. ⓒ부산일보
그의 존재가 다시 드러난 건 그에게 고문당해 평생을 불구로 산 독립투사 덕분이었어. 투옥 기록 등 독립투쟁의 증거가 사라져 독립투쟁 서훈을 받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한 독립투사의 아들이 하판락의 생존 사실을 알아내고, 하판락의 진술과 그 주변 서류를 통해 아버지의 독립투쟁 사실을 증명했거든. 하판락을 만나러 가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한 맺힌 말을 던졌다는구나. “하판락을 만나면 직이뿌라(죽여버려라). 그놈은 인두겁을 쓴 짐승이다.”
이런 악마들을 때려잡지 못한 것, 그들이 짓밟은 사람의 무덤 위에서 잘 먹고 잘살며 한세상 보내게 한 것은 우리 역사의 수치야. 그들조차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으니 다른 친일파에 대해서도 서슬을 세울 겨를이 없었지. 그런 상태에서 전쟁과 독재의 폭풍이 우리 역사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친일이란 키워드는 어느새 일종의 블랙홀이 돼버렸어. 모든 것을 빨아들일 만큼 강력하지만, 그 깊이와 범위를 알 수 없고,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맺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조금 다른 예를 들어보자.
그 아동문학가는 ‘친일파’일까?
이원수라는 아동문학가가 계셔. 남북한 사람들이 합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노래라는 <고향의 봄> 작사가지. 그 부인 최순애 씨는 역시 유명한 동요 <오빠 생각>을 작사한 분이고. 그 노래 가사를 쓸 때 놀랍게도 두 분은 10대 소년 소녀였고 각각 수원과 경상도에 살면서 편지로만 데이트했어. 어느 날 마침내 소년 이원수가 경부선 열차를 타고 올라오기로 했지만, 수원역에서 기다리던 소녀 최순애는 이원수를 만나지 못해. 독립투쟁 혐의로 잡혀가서 감옥에 갇혀버렸거든. 이원수 선생은 그 후 평생 조선의 아이들, 한국의 소년들을 위해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했고 어린이들에게 식민지의 현실과 전쟁의 아픔과 가난의 고통에 대한 위로를 선사해주었어.
아동 문학가 이오덕 선생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만났던 분 가운데 가장 맑고 바르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으로서 “4·19와 전태일을 동화로 쓴 유일한” 분이었지. 하지만 일제 말기에 동시 두 편, 자유시 한 편, 수필 두 편 해서 모두 다섯 편의 친일 작품을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기관지 <반도의 빛(半島の光)>에 발표한 것이 드러나면서 이분은 ‘친일파’ 명단에 오른단다. <고향의 봄>도 한때 교과서에서 삭제됐고 고향 창원에서 진행하려던 이원수 기념사업은 “자유· 정의·인권·평화와 같은 인류 보편적인 가치관을 가진 세계인들의 비웃음을 살 일이며 죄 없는 창원시민을 망신시키는 일”이라는 반대에 부딪혀야 했어.
▲ 아동문학가 이원수(오른쪽)와 그의 부인 최순애씨. ⓒ이원수문학관 제공
우리에게 ‘친일 청산’이란 무엇일까. 먼저 필요한 건 역사의 온전한 복원이라고 생각해. 하판락 같은 악질 친일파부터 ‘맘을 팔아버린’ 벗들까지 그 모두의 행적이 지금보다 더 선명하고 소상히 드러나야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원수 선생의 친일 작품이 밝혀지고 사전에 오른 자체는 당연한 일이고, 하판락 같은 자들의 행적은 깡그리 까발려져야 한다고 봐. 하지만 그 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한 단죄와 규정이 아니라 오늘에 필요한 교훈을 얻는 일일 거야.
나이 아흔셋에 죽었으니 명도 지독하게 길었던 하판락의 악행을 저주하고 그에게 천벌을 내리지 않은 신과 그를 때려죽이지 못한 할아버지들을 원망하는 건 어렵지 않아. 이원수 선생의 친일 시를 낭독하며 그 잘못을 규탄하는 것도 마음먹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역사에서 배워야 할 건 도덕이 아니라 지혜란다. 왜 그들은 그렇게 됐는가를 분석하고 그들의 삶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다시는 역사에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거울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야.
더하여 가장 중요한 것. 하판락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독립투사 서훈의 증거가 마련됐듯, ‘친일 청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잃어버린 독립투쟁의 역사를 되찾는 일일 거야. 이름 없이 보상도 없이 스러져 간 독립투사들의 삶을 더듬어 꿰맞추고 그 희생의 무게에 짓눌려 힘겹게 살아온 그 후손에게 우리가 미처 드리지 못한 명예와 경의를 돌려줄 때 ‘친일’은 청산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출처 그는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형사였어
꽃 덤불 - 신석정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 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세상에 이럴수가 > 정치·사회·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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