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해고'가 문제? 더 두려운 건 따로 있다
[게릴라칼럼] 새로운 헬게이트 노사정 합의... 정신적 종속 불러올 것
[오마이뉴스] 손우정 | 15.09.18 10:54 | 최종 업데이트 15.09.18 10:54
1970년 11월 13일,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은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근로기준법을 규탄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자신의 몸이 화마에 휩싸이는 순간에도 그는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한국 노동운동의 선구자다.
만일 전태일이 지난 15일 한국노총이 참여해 최종 서명한 '노사정 합의문'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무리 톺아봐도 타협 같지 않지만,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간결한 부제가 붙은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합의문'은 전태일의 후예들에게 짙은 어둠만 드리우고 있다.
한국 경제사회의 새로운 도약과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만들었다는 노사정 합의문은 ▲노사정 협력을 통한 청년고용의 활성화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사회안전망 확충 ▲불확실성의 제거 ▲노사정 파트너십 구축 ▲합의사항 이행 및 확산이라는 6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합의문은 '대타협'이라는 부제가 무색해질 정도로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노동시장을 개혁한다면서 기업에게는 자율과 인센티브를, 노동자에겐 강제와 패널티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들여다보자. 합의문은 대타협의 가장 큰 목표였던 청년고용 확대를 위해 청년고용을 확대하는 기업에게 '세대 간 상생고용지원, 고용창출투자세액공제, 세무조사 면제 우대, 중소기업 장기근속 지원, 공공조달계약 가점 부여' 등 다양한 정책 지원을 약속하는 동시에 지나치게 높은 연봉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고소득 임·직원'에게 "자율적"으로 임금 "인상" 자제를 '부탁'하고 있다.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임금피크제를 적용해 삭감된 임금을 청년고용에 활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화룡점정은 따로 있다. 합의문에 따르면 경영상 사유로 고용조정이 필요한 경우에 경영계는 감원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노동계는 이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합의문에는 모호하게 표현됐지만, 회사가 근무 성과가 나쁘거나 근무태도가 불량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근로기준법에도 없는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완화 조치다.
합의문의 내용이 이런 식이니 왜 한국노총이 산하 노조 위원장의 분신 시도에도 이 합의안을 밀어붙였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일부 언론에서는 고용노동부가 한국노총에 배정된 국고보조금을 늑장 집행하거나 한국노총 산하 노조위원장의 횡령 및 배임혐의를 빌미로 노사정 합의를 압박한 의혹이 짙다는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사실이 무엇이든, 무덤 속의 전태일이 한탄할 일이다.
한국노총의 합의에 무슨 배경이 있는지는 몰라도, 일반해고가 불러올 파장은 만만치 않다. 당장 민주노총과 야당은 이 조항이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더 낮은 임금과 성과 강요, 해고를 안겨줄 '재앙'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완화는 곧 쉬운 해고라는 진단이다.
이런 우려를 인식한 듯 지난 14일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쉬운 해고를 하는 게 아니라 공정한 해고를 하는 것"이라고 반박한 데 이어, 다음 날 박근혜 역시 "결코 희생을 강요하고 쉬운 해고를 강제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언급이 반복되는 것 자체가 이번 합의의 핵심이 '해고'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즉, 쉽든 어렵든, 공정하든 불공정하든 청년고용확대를 기존 노동자의 해고를 통해 만들어 내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해고 자체보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완화가 가져올 노동시장 내부의 '정치적 효과'다. 현재의 근로기준법상 해고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는 해고 대상이 된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문제해결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러나 '성과'나 '근무태도 불량' 등 개인적 사유로 진행되는 해고는 그것이 어떤 방식이건 노동자들을 개별화·파편화로 이끈다. 해고가 구조적인 원인 때문에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개인의 문제' 때문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이를 막을 방법과 책임 역시 개인에게 넘겨질 수밖에 없다.
많은 전문가들은 일반해고가 노조가 없는 90%의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우선적인 치명타를 입힐 것이라고 진단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상상해보라. 개인의 성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성실한, 혹은 불량한 근무 태도는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 노조활동이 기업의 근무 분위기를 해친다거나 내부 고발자를 성과불량자로 몰아가는 마타도어는 지금도 충분히 활개를 치고 있다. 게다가 설령 노조가 있더라도 자신의 '개인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능력에 따른 해고'로 포장된 다른 이들을 위해 싸워줄 조합원은 점차 줄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결코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식의 일반해고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 노동자 개인의 평가는 철저히 '상대평가' 체제로 전환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즉, 직원들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내야하고, 어느 정도로 근무태도가 훌륭해야 하는지와 상관없이, 바로 옆 동료와의 비교평가를 통해 항상 일정비율의 하위 노동자를 골라낼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상대평가가 도입된 이후 살벌해진 대학 교실 풍경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상대평가'를 통해 해고 대상자를 결정하는 무한경쟁 방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결국 이 위대한 노동시장 개혁은 노조는 노조대로, 미조직 단위에는 미조직 단위대로 항시적 불안을 활용한 최적화된 노동통제전략을 보여줄 것이다. 실제로 해고가 진행될 것이냐는 문제와 무관하게, 항시적 해고 가능성이 만들어낼 불안의 정치적·문화적 변화는 육체적 종속을 넘어 기업과 사주에 대한 정신적 종속으로까지 나아갈 것이다.
문제는 이런 문제가 충분히 예상됨에도, 이를 막을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힘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이번 합의로 두둑한 떡고물을 챙긴 것으로 보이는 경제인 단체들은 외려 표정관리에 나선 모양새다. 지난 15일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노사정 합의에 대한 경제계 입장'을 내고 노사정 합의에서 '부족한 부분'에 대한 보완책으로 국회 입법청원에 나서겠다고 주장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박병원 경총 회장은 기자들에게 "노조와 합의되는 것만 하려고 하면 노조에 다 맡겨야 할 것"이라면서 "정부와 정치권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경총을 비롯한 경제인 단체의 의도는 '노조와의 합의가 필요없는 해고'의 관철일 뿐, 다른 것들은 부차적일 뿐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정부와 새누리당 역시 한국노총의 합의로 명분이 축적된 이상, 속도를 내겠다는 심산이다. 16일 개최된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는 노동계와 합의한 핵심 사항은 쏙 뺀 채, 정부 주장만을 그대로 담은 근로기준법과 고용보험법, 산재보헌법, 기간제근로자법, 파견근로자법 개정안을 소속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발의했다. 한국노총의 참여로 대타협이라는 명분을 챙겼으니 더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는 태도다.
반면, 덩치만 거대 야당인 새정치연합은 혁신안을 둘러싼 내홍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다. 합의안 타결 직후 진행된 다양한 여론조사에서는 합의안에 대한 찬성여론이 반대여론을 압도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합의안에 감춰진 문제점들이 속속 분석되면서 반대여론이 높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뚜렷한 돌파구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나마 민주노총이 가장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17일에는 전평수련원에서 '전국 단위사업장 대표자 대회'를 열고 9월 23일 총파업과 상경투쟁을 결의했다. 그러나 추석 연휴를 앞두고 진행되는 총파업과 상경투쟁이 일회성 항의를 넘어설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게다가 민주노총은 2013년 말 철도노조의 갑작스런 파업 철회 이후 겉으로 내세운 화끈한 구호만큼의 위력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개악의 흐름을 어느 정도라도 저지하기 위해서는 그나마 남아 있는 조직 노동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경험을 여러 차례 반복했더라도, 남아 있는 비빌 언덕은 그들 외엔 찾기 어렵다. 여론전이 중요하다든가 노조 조직률을 높이는 게 우선이라는 주장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선후차를 따질 일이 아니다. 지금 상황은 여론을 통한 조직화, 조직화를 통한 여론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당장 19일(토)로 예정된 민주노총 총파업 선포 결의대회가 주목되는 이유다.
인간을 개별화·파편화시키고 개인적 욕망을 성장동력으로 삼은 신자유주의의 첨병 역할을 했던 미국과 영국에서는 '새로운 방향, 새로운 대안'을 요구하는 좌파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뒷걸음만 치고 있다. 복잡한 문제들은 많지만, 지금 당장은 그 뒷걸음을 막아내는 것 이외에 다른 수는 없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손우정 기자는 바꿈 이사입니다.
출처 '쉬운 해고'가 문제? 더 두려운 건 따로 있다
[게릴라칼럼] 새로운 헬게이트 노사정 합의... 정신적 종속 불러올 것
[오마이뉴스] 손우정 | 15.09.18 10:54 | 최종 업데이트 15.09.18 10:54
1970년 11월 13일,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은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근로기준법을 규탄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자신의 몸이 화마에 휩싸이는 순간에도 그는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한국 노동운동의 선구자다.
만일 전태일이 지난 15일 한국노총이 참여해 최종 서명한 '노사정 합의문'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무리 톺아봐도 타협 같지 않지만,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간결한 부제가 붙은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합의문'은 전태일의 후예들에게 짙은 어둠만 드리우고 있다.
기업엔 인센티브, 노동자에겐 패널티가 대타협?
지난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노사정 대표, 최경환 경제부총리, 상임위원 등이 참석한 노사정위원회 제 89차 본위원회가 열렸다. ⓒ 이희훈
한국 경제사회의 새로운 도약과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만들었다는 노사정 합의문은 ▲노사정 협력을 통한 청년고용의 활성화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사회안전망 확충 ▲불확실성의 제거 ▲노사정 파트너십 구축 ▲합의사항 이행 및 확산이라는 6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합의문은 '대타협'이라는 부제가 무색해질 정도로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노동시장을 개혁한다면서 기업에게는 자율과 인센티브를, 노동자에겐 강제와 패널티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들여다보자. 합의문은 대타협의 가장 큰 목표였던 청년고용 확대를 위해 청년고용을 확대하는 기업에게 '세대 간 상생고용지원, 고용창출투자세액공제, 세무조사 면제 우대, 중소기업 장기근속 지원, 공공조달계약 가점 부여' 등 다양한 정책 지원을 약속하는 동시에 지나치게 높은 연봉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고소득 임·직원'에게 "자율적"으로 임금 "인상" 자제를 '부탁'하고 있다.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임금피크제를 적용해 삭감된 임금을 청년고용에 활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화룡점정은 따로 있다. 합의문에 따르면 경영상 사유로 고용조정이 필요한 경우에 경영계는 감원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노동계는 이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합의문에는 모호하게 표현됐지만, 회사가 근무 성과가 나쁘거나 근무태도가 불량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근로기준법에도 없는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완화 조치다.
합의문의 내용이 이런 식이니 왜 한국노총이 산하 노조 위원장의 분신 시도에도 이 합의안을 밀어붙였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일부 언론에서는 고용노동부가 한국노총에 배정된 국고보조금을 늑장 집행하거나 한국노총 산하 노조위원장의 횡령 및 배임혐의를 빌미로 노사정 합의를 압박한 의혹이 짙다는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사실이 무엇이든, 무덤 속의 전태일이 한탄할 일이다.
쉬운 해고? 진짜 문제는 항시적 해고 가능성의 정치적 효과
한국노총의 합의에 무슨 배경이 있는지는 몰라도, 일반해고가 불러올 파장은 만만치 않다. 당장 민주노총과 야당은 이 조항이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더 낮은 임금과 성과 강요, 해고를 안겨줄 '재앙'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완화는 곧 쉬운 해고라는 진단이다.
이런 우려를 인식한 듯 지난 14일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쉬운 해고를 하는 게 아니라 공정한 해고를 하는 것"이라고 반박한 데 이어, 다음 날 박근혜 역시 "결코 희생을 강요하고 쉬운 해고를 강제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언급이 반복되는 것 자체가 이번 합의의 핵심이 '해고'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즉, 쉽든 어렵든, 공정하든 불공정하든 청년고용확대를 기존 노동자의 해고를 통해 만들어 내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해고 자체보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완화가 가져올 노동시장 내부의 '정치적 효과'다. 현재의 근로기준법상 해고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는 해고 대상이 된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문제해결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러나 '성과'나 '근무태도 불량' 등 개인적 사유로 진행되는 해고는 그것이 어떤 방식이건 노동자들을 개별화·파편화로 이끈다. 해고가 구조적인 원인 때문에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개인의 문제' 때문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이를 막을 방법과 책임 역시 개인에게 넘겨질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 "박근혜 정부 가짜 노동개혁 중단하라"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노사정 야합 조인식 저지 및 대표자 투쟁 결의대회'에 참석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총파업을 결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이들은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에 대해 "정부여당과 노사정위원회 대표자들은 노동자와 서민을 대표해 어떤 사회적 합의도 할 자격이 없다"며 합의문에 쓰여질 그들의 서명은 대타협이 아니라 노동재앙을 불러들인 역사적 죄인들의 서명이 될 것이다"고 규탄했다. ⓒ 유성호
많은 전문가들은 일반해고가 노조가 없는 90%의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우선적인 치명타를 입힐 것이라고 진단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상상해보라. 개인의 성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성실한, 혹은 불량한 근무 태도는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 노조활동이 기업의 근무 분위기를 해친다거나 내부 고발자를 성과불량자로 몰아가는 마타도어는 지금도 충분히 활개를 치고 있다. 게다가 설령 노조가 있더라도 자신의 '개인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능력에 따른 해고'로 포장된 다른 이들을 위해 싸워줄 조합원은 점차 줄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결코 기우만은 아닐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식의 일반해고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 노동자 개인의 평가는 철저히 '상대평가' 체제로 전환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즉, 직원들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내야하고, 어느 정도로 근무태도가 훌륭해야 하는지와 상관없이, 바로 옆 동료와의 비교평가를 통해 항상 일정비율의 하위 노동자를 골라낼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상대평가가 도입된 이후 살벌해진 대학 교실 풍경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상대평가'를 통해 해고 대상자를 결정하는 무한경쟁 방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결국 이 위대한 노동시장 개혁은 노조는 노조대로, 미조직 단위에는 미조직 단위대로 항시적 불안을 활용한 최적화된 노동통제전략을 보여줄 것이다. 실제로 해고가 진행될 것이냐는 문제와 무관하게, 항시적 해고 가능성이 만들어낼 불안의 정치적·문화적 변화는 육체적 종속을 넘어 기업과 사주에 대한 정신적 종속으로까지 나아갈 것이다.
누가 노동시장 개악을 막을 것인가?
문제는 이런 문제가 충분히 예상됨에도, 이를 막을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힘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이번 합의로 두둑한 떡고물을 챙긴 것으로 보이는 경제인 단체들은 외려 표정관리에 나선 모양새다. 지난 15일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노사정 합의에 대한 경제계 입장'을 내고 노사정 합의에서 '부족한 부분'에 대한 보완책으로 국회 입법청원에 나서겠다고 주장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박병원 경총 회장은 기자들에게 "노조와 합의되는 것만 하려고 하면 노조에 다 맡겨야 할 것"이라면서 "정부와 정치권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경총을 비롯한 경제인 단체의 의도는 '노조와의 합의가 필요없는 해고'의 관철일 뿐, 다른 것들은 부차적일 뿐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정부와 새누리당 역시 한국노총의 합의로 명분이 축적된 이상, 속도를 내겠다는 심산이다. 16일 개최된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는 노동계와 합의한 핵심 사항은 쏙 뺀 채, 정부 주장만을 그대로 담은 근로기준법과 고용보험법, 산재보헌법, 기간제근로자법, 파견근로자법 개정안을 소속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발의했다. 한국노총의 참여로 대타협이라는 명분을 챙겼으니 더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는 태도다.
반면, 덩치만 거대 야당인 새정치연합은 혁신안을 둘러싼 내홍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여론도 호의적이지 않다. 합의안 타결 직후 진행된 다양한 여론조사에서는 합의안에 대한 찬성여론이 반대여론을 압도하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합의안에 감춰진 문제점들이 속속 분석되면서 반대여론이 높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뚜렷한 돌파구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상균 "필사즉생 각오로 싸우겠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15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노사정 야합 분쇄투쟁 선포 기자회견'에서 삭발한 뒤 노사정 야합을 규탄하고 있다. 이날 한 위원장은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짓밟는 박근혜 정부를 우리는 독재 정권으로 규정한다"며 "모든 것을 걸고 필사즉생의 각오로 싸워 승리하겠다"고 밝혔다. ⓒ 유성호
그나마 민주노총이 가장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17일에는 전평수련원에서 '전국 단위사업장 대표자 대회'를 열고 9월 23일 총파업과 상경투쟁을 결의했다. 그러나 추석 연휴를 앞두고 진행되는 총파업과 상경투쟁이 일회성 항의를 넘어설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게다가 민주노총은 2013년 말 철도노조의 갑작스런 파업 철회 이후 겉으로 내세운 화끈한 구호만큼의 위력적인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개악의 흐름을 어느 정도라도 저지하기 위해서는 그나마 남아 있는 조직 노동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경험을 여러 차례 반복했더라도, 남아 있는 비빌 언덕은 그들 외엔 찾기 어렵다. 여론전이 중요하다든가 노조 조직률을 높이는 게 우선이라는 주장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선후차를 따질 일이 아니다. 지금 상황은 여론을 통한 조직화, 조직화를 통한 여론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당장 19일(토)로 예정된 민주노총 총파업 선포 결의대회가 주목되는 이유다.
인간을 개별화·파편화시키고 개인적 욕망을 성장동력으로 삼은 신자유주의의 첨병 역할을 했던 미국과 영국에서는 '새로운 방향, 새로운 대안'을 요구하는 좌파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뒷걸음만 치고 있다. 복잡한 문제들은 많지만, 지금 당장은 그 뒷걸음을 막아내는 것 이외에 다른 수는 없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손우정 기자는 바꿈 이사입니다.
출처 '쉬운 해고'가 문제? 더 두려운 건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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