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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박근혜의 ‘명령 경제’...될 일이 아니었던 블랙 프라이데이

박근혜의 ‘명령 경제’...될 일이 아니었던 블랙 프라이데이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최종업데이트 2015-10-01 19:54:32


1952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민주당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대항마로 뽑혔다. 아이젠하워의 어깨에는 20년 만에 정권을 공화당으로 찾아와야 한다는 책임감이 놓여 있었고, 전쟁 영웅이었던 그는 꽤 큰 격차로 여론조사에서 앞서 나가며 당선 가능성을 높였다. 8년의 재임기간을 끝으로 퇴임할 예정이었던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은 다가오는 대선에서 아이젠하워의 승리를 예견하며 이런 걱정을 남겼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군인 출신답게 늘 하던 대로 이렇게 명령하겠지. 당장 이걸 해! 당장 저걸 고쳐! 그런데 그거 알아? 아이젠하워가 아무리 명령을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 말이야. 그게 군대와 사회의 차이점이라고.”

박근혜의 머릿속을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박근혜의 두뇌에도 이런 ‘명령 증후군’이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그녀는 명색이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입은 보수 정부의 수장. 그런데 그녀가 보고 배운 것은 모두 군인출신 대통령이었던 ‘아버지의 명령’과 그 명령이 일사불란하게 이뤄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재임 기간 중에 쉴 새 없이 호통을 치고, 쉴 새 없이 명령을 한다. 자신이 명령을 내리면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고, 아니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심지어 그녀는 자유주의의 수장답지 않게 시장에다 대고도 끊임없이 명령을 쏟아 붓는다.

“소비가 부진하다고? 당장 돈을 쓰란 말이야! 국민들이 돈을 안 쓴다고? 그러면 대대적인 세일 행사를 하란 말이야!”

코리아블랙프라이데이 시작을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에 행사를 알리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다. ⓒ제공 : 뉴시스


그래서 졸속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 박근혜의 명령 한 마디에 멀쩡히 가을 정기세일을 준비하던 유통업체들이 허겁지겁 그 세일을 ‘블랙 프라이데이’ 행사로 전환했다. 그래서 국민들이 지갑을 열었냐고? 블랙 프라이데이 첫날이었던 1일, 유통 매장에서는 “이게 가을 정기 세일하고 다른 점이 뭐냐?”는 소비자들의 불만만 넘쳐났다.


효과가 있을 리 없는 블랙 프라이데이

백문의 불여일견. 블랙 프라이데이를 겪은 소비자들의 반응을 살펴보자. 작위적으로 나쁜 반응을 추출한 게 아니라 주요 포털에 올라온 블랙 프라이데이 관련 기사에서 추천을 많이 받은 댓글을 순서대로 추출한 것이다.

“말이 블랙 프라이데이지 그냥 백화점에서 통상하는 정기세일임.”

“그럼 블랙 프라이데이란 말 자체를 쓰지 마. 코리아 그랜드 세일 이따위 건 개나 줘버리고. 호객은 백화점 대형마트 니들이 하는 거잖아.”

“누구 대가리에서 나온 거냐? ㅋㅋ 국민들이 빠가사린 줄 아나.”


다음은 각종 언론 보도에 나온 소비자들의 반응.

“내가 사려는 신상(신상품)은 세일 전혀 안 해요.”

“미국 블랙 프라이데이를 기대한 내가 잘못이죠. 미국에서는 90% 세일을 해서 왕창 샀는데 정말 대실망이에요.”

“뭔 세일은 전부 재고떨이에 이월상품 뿐이에요. 이게 무슨 그랜드 세일이에요?”

“평소에도 마트에서는 1+1 행사 많이 하는데, 그때랑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요.”


다음은 유통업체와 제조업체의 반응.

“코리아 그랜드 세일과 겹치는데다가, 갑자기 블랙 프라이데이를 발표해서 할인 행사에 참여할 수가 없었어요.”(제조업체)

“밑지고 팔 수는 없잖아요? 이런 할인은 재고와 신상품 출시 계획을 섬세하게 살펴 몇 달 동안 준비해야 하는 거예요. 사실상 추석 며칠 전에 행사가 기획된 셈인데, 참가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인 거죠.”(제조업체)

“코리아 그랜드 세일이 9월 말부터 진행됐고, 가을 정기 세일도 해야 하는데, 갑자기 블랙 프라이데이를 하라고 하니 고객들에게 차별점이 뭔지 알리기 어렵네요.”(유통업체)


블랙 프라이데이가 애초부터 될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확인하는 데 딱 하루 걸렸다. 사실 이 문제를 확인하는 데에 하루씩이나 걸릴 문제도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박근혜가 나서서 “싸게 팔아라!”고 호통을 친다고 해서, 밑지고 싸게 팔 제조업체도, 유통업체도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의 명령이 시장에서 전혀 먹히지 않는 것은 박근혜가 중요한 사실 두 가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사회주의 경제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라는 사실, 그리고 그녀는 대통령이지 시장의 지배자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박근혜 식 블랙 프라이데이의 본질

블랙 프라이데이의 원조는 미국이다. 전통적으로 이 시기 미국에서는 연중 최대의 세일이 진행된다. 그런데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가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세일을 주도하는 쪽이 제조업체들이기 때문이다. 제조업체들은 새해맞이 신상품을 준비하며 재고 상품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이 시기 큰 폭의 할인율을 책정한다.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재고 상품을 처리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이 세일을 하는 것이다.

2013년 12월 28일(현지시간) 이랜드가 운영하는 브랜드 후아유(WHO.A.U) 미국 뉴욕 매장에 시민들이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후아유는 이날 뉴욕 매장에서 BLACK FRIDAY를 맞아 할인행사를 진행, 하루에만 15만 불의 매출을 올려 미국 진출 후 단일 매장으로는 자체 최고매출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뉴시스/후아유 제공


그런데 한국의 블랙 프라이데이는 박근혜의 명령에 정부가 유통업체들을 ‘쪼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정부의 압박에 유통업체들은 허겁지겁 제조업체들과 협의를 시작했는데, 계획에도 없던 세일을 진행할 제조업체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는 매년 하는 정기 가을 세일 수준 이상의 할인이 이뤄질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문제는 블랙 프라이데이가 세간의 조롱으로 끝났다는 점이 아니다. 고객들이 속은 기분에 화가 나고, 실제 소비가 별로 늘어나지 않았다는 점만 견딜 수 있다면 블랙 프라이데이는 그냥 ‘안하느니만 못한 행사’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있다.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 행사로 나라의 수장 머리에 “내가 명령하면 이뤄져야 한다”는 호통 경제, 명령 경제 마인드가 확실히 있음을 확인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제조업체들도 몇 개월씩이나 주판알을 퉁겨가며 세일 기간 할인율을 정하는데, 박근혜는 전 국가적 할인 행사를 그냥 책상에서 명령하는 방식으로 기획한다.

갑자기 “광복절 연휴를 하루 더 늘려”라거나, “군인들을 전부 외박 보내”라거나, “고속도로 통행료를 받지 마”라거나 하는 식의 명령도 모두 그녀의 이런 두뇌 구조에서 나온 산물이다.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 행사의 본질은 바로 명령과 호통으로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박근혜의 여왕적 사고방식인 것이다.


자유주의 정부 맞아?

‘명령 경제’는 사실 데자뷰 현상과도 같다. 멀리 유신시절까지 돌아갈 필요도 없이 불과 5년 전 이명박 정부 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 두 사람 모두 시장경제 질서에 정부 개입을 자제하는 신자유주의 보수경제의 간판을 걸고 당선된 인물들이다.

MB는 ‘시장을 존중한다’는 신자유주의 깃발을 앞세우고도 엉뚱하게 “내가 대통령이 되면 국민소득이 4만 불이 된다”는 영웅주의에 사로잡혔다. 건설회사 사장 출신인 그는 국민들을 자신이 명령하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건설사 직원 정도로 생각했다. 국민들에게 747공약(7% 경제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실현, 세계 7위권 경제 대국 실현)이라는 엄청난 거짓말로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자신의 출현으로 한국 경제가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망상가였다. 그래서 뜬금없이 라면 값을 100원 내리라고 명령하기도 하고, 멀쩡한 4대강을 파헤치라고 지시를 한다. 숭례문이 불에 탔을 때 “국민 성금으로 숭례문을 복원하자”는 개그는 그의 CEO 마인드를 극적으로 드러내주는 희대의 코미디였다.

박근혜는 747공약의 유사품인 474공약을 들고 나왔다. 경제성장률 4%, 고용률 70%, 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공약이 턱도 없는 소리라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이런 현실이 안타깝다. 그녀는 ‘내가 하겠다고 했으면 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뜬금없이 청년 실업률을 낮추겠다며 ‘청년희망펀드’를 지시하고, 소비를 늘리겠다며 블랙 프라이데이를 명령한다. 한 시중의 유력 은행이 직원들에게 청년희망펀드 가입을 강제(그들 설명으로는 정보 공유)했다는 사실은, 박근혜의 여왕 마인드가 사회의 일반적 의사소통 구조를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내주는 또 다른 코미디였다.

블랙 프라이데이는 다행히도 ‘별 효과 없는 것’으로 마무리될 모양이다. 이것이 다행인 이유는 블랙 프라이데이가 ‘별로 효과가 없었을 뿐’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속은 기분이 든 소비자들의 분노는 시간이 가면 가라앉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금까지 늘 그렇게 일을 해왔으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내년 총선 전까지 그럴싸한 경제 성적표를 손에 쥐고자 하는 박근혜가 어떤 또 다른 호통과 명령으로 시장 질서를 교란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정부의 시장 개입은 그 자체로 충분히 고려할 만한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시장 개입이 이렇게 아무렇게나 박근혜의 명령 한 마디에 복종하는 형식으로 이뤄져서는 절대 안 된다. 소비의 활성화가 한국 경제의 당면한 문제라면, 소비자들의 소득을 어떻게 올려줄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는 게 상식 아닌가? 정부의 시장 개입은 바로 국민들의 소득,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임금 소득을 어떻게 높이는가 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출처  박근혜의 ‘명령 경제’...될 일이 아니었던 블랙 프라이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