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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쉬운 해고 못하고 비정규직이 모자라 경제위기가 온다고?

쉬운 해고 못하고 비정규직이 모자라 경제위기가 온다고?
[민중의소리] 이완배 기자 | 최종업데이트 2015-12-08 19:07:02


‘노동시장 유연화’가 연말 한국 사회의 핵심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세월호 참사 때 골든타임을 놓쳐 수 백 명 어린 생명을 잃게 만든 현 정부가 어디서 ‘골든타임’이라는 말을 잘 못 배워왔는지 시도 때도 없이 “노동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경제가 박살난다”는 협박을 일삼는다.

각종 경제 단체를 앞세운 재계도 골든타임 운운하며 노동법 개악을 밀어붙인다. 그것도 모자라 친박의 수장 서청원 의원은 “1996년 정리해고 노동법 날치기가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외환위기가 왔다”는 듣도 보도 못한 주장을 펼친다. 부디 서 의원의 멍멍이(!) 소리가 외신을 통해 세계에 알려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망신은 국내에서만 당해야 좀 덜 쪽팔린 법이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과연 한국 경제를 살릴 묘수인지를 점검하기 전에, 최근 벌어지고 있는 황당한 논쟁이 상기시키는 사건이 하나 있어 먼저 소개한다. 2003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한국경제신문> 등 보수 일간지들이 ‘노조의 폐해’를 소개한답시고 독일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보도한 일이 있었다. <조선일보>는 ‘노조 경영에 지나친 관여, 독일 유럽의 경제병자로’라는 기사를, <중앙일보>는 ‘노동자 천국 독일 성장률 뒷걸음질… 실업자 400만 넘어’라는 기사를, <한국경제신문>은 아예 ‘독일의 실패에서 배운다’는 시리즈물을 연재했다.

참다못한 주한독일대사관 크리스티나 바인호프 상무관이 KBS 미디어 포커스에 출연해 “한국 언론 보도가 안타깝다. 독일 경제 악화는 노조가 원인이 아니다. 독일 노조는 약 100년 전통의 노사공동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독일 사회복지를 충족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축”이라고 해명하기에 이르렀다. 독일 국민들이 이 논쟁을 들었다면 한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망신을 당해도 최소한 국내에서 당해야 덜 쪽팔린’ 아주 좋은 예가 바로 이런 것이다.

▲ 지난 달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쉬운해고 평생 비정규직 노동개악 저지 민주노총 공공노동자 파업대회 참가자들이 정부의 노동정책을 규탄하며 청계광장으로 행진하고 있다. ⓒ양지웅 기자



노동 개혁 안하면 경제가 위험?

박근혜 정부와 여당이 밀어붙이는 이른바 노동개혁에는 모두 다섯 개의 법안이 포함돼 있다. 기간제근로자보호법, 파견근로자보호법, 근로기준법, 고용보험법, 산재보험법 등 5개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하나 따져볼 필요도 없이 이 다섯 개 법안 개정이 노리는 바는 분명하다.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경영자에게 아무 때나 노동자들을 쉽게 해고할 권한을 주겠다는 것이다. 이 행위가 왜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 교수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개혁법안의 통과”라면서 “효율적인 기업 구조조정이 안 되면 기업 부실이 금융 부실로 전이돼 위기가 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96년 말 상황이 지금과 같았다”면서 “1996년 말 노동개혁법 통과가 안 되고 1997년에 기업 구조조정을 못하면서 한국 경제가 위기를 맞았다”고 말했다.
- 12월 3일자 <한국경제신문>


이 긴 주장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쉬운 해고의 권한을 경영자에게 부여해, 그들이 마음대로 노동자를 자를 수 있어야 기업이 비용을 절감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노동시장이 유연해지면, 그래서 기업이 마음대로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다면 한국경제가 살아날까?

현 정부의 경제 수장인 최경환 부총리가 2014년 청문회에서 한 말을 다시 떠 올려보자. 그는 “경제 침체의 원인은 소비 부진이고, 이를 해결하는 중요한 방법은 국민들의 가처분소득을 높이는 일이다. 특히 일자리의 질적 측면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가계의 가처분소득을 늘리는 차원에서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끌어올리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고도 했다. 결국 최 부총리의 진단은 “국민들의 소득이 부족해 경제가 침체됐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기업이 시도 때도 없이 노동자를 해고할 경우 국민들의 가처분소득은 늘어날까, 줄어들까?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문제다. 당연히 줄어든다. 쉬운 해고를 필두로 한 노동개혁이 끝내 최 부총리 스스로 인정한 한국 경제의 핵심 문제, 즉 가처분소득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점은 누가 봐도 분명한 셈이다. 최 부총리의 논리에 따르더라도 노동시장 유연화는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더 침체시킬 원인이 된다.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쉬운 해고의 권한을 줘서 구조조정을 앞당겨야 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오 교수의 논리는 어떨까? 극심한 적자로 생존의 기로에 선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해서라도 인건비를 아껴야 한다는 게 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 주장을 100% 받아들인다고 쳐도, 위기에 처한 기업들은 노동개혁씩이나 할 필요도 없이 지금도 충분히 구조조정을 할 수 있다. 한국의 근로기준법에는 정리해고가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한 기업은 정리해고를 활용하면 되는데, 왜 굳이 ‘통상해고’를 더 쉽게 만들어 기업에게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줘야 하나? 이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사실 지금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위기에 처하지 않은 기업들은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5대 재벌들에게 고용을 늘리라고 최근까지도 독려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결국은 돈 문제, 쉬운 해고는 재벌 살 찌우기

쉬운 해고와 노동시장 유연화는 현재 한국 상황에서 결코 경제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고용을 줄이고 국민 가처분소득을 감소시켜 한국 경제의 취약점인 소비 부진을 더 가중시킬 것이 명확하다. 그런데도 정부와 여당, 재계가 입을 맞춘 듯 노동시장 유연화를 서두르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들의 관심사는 경제 회복이 아니라 일부 재벌 대기업들의 돈벌이에 맞춰졌기 때문이다.

고용보험통계연보에 따르면 2012년 한 해 한국에서는 무려 560만 명이 직장을 그만 뒀다. 전체 노동자의 무려 31.6%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 수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은 결코 고용 안정성이 보장된 나라가 아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특별히 돈을 안 들이고도 노동자를 자를 수 있는 ‘징계해고’는 고작 5,300명, 직장을 잃은 전체 노동자 가운데 0,1%에 불과하다. 반면 ‘경영상 필요에 의한 퇴직’은 1.5%, ‘회사 사정에 의한 퇴직’은 13.9%나 된다. 아웃소싱, 비정규직 전환, 명예퇴직 등의 이유로 해고되는 노동자 숫자가 무려 180만 명이고 이 가운데 90만 명이 명예퇴직이나 희망퇴직으로 일자리를 잃는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해고에는 돈이 든다. 희망퇴직이건 명예퇴직이건, 어떻게 이름을 붙여도 해고되는 노동자들의 최소한 생계를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


지금 정부와 재계의 노동시장 유연화는 바로 이 돈을 내주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을 저성과자로 낙인을 찍은 뒤 해고하면 돈을 아낄 수 있다. 그래서 기업이 돈을 아꼈다고 치자. 그 돈이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 어떻게 사용될까? 지금 대기업들은 돈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다. 한국 10대 재벌이 금고에 깔고 앉은 현금성 자산은 이미 400조 원이 넘는다. 경제 위기는 ‘재벌들이 노동자들을 못 잘라서’ 생긴 현상이 아니라 그들이 이 거액의 돈을 깔고 앉아 안 쓰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기업부터 살려야 그 떡고물이 국민에게도 떨어진다”는 신자유주의의 낙수효과는 이제 선진국에서도 모두 폐기처분된 이론이다. 국민에게 먹을 것을 쥐어주는 것이 목표라면, 재벌과 대기업에게 떡을 던져주고 그 떡고물이 국민에게 떨어지길 기다릴 이유가 없다. 그냥 국민들에게 먼저 떡을 쥐어주는 게 더 현명하다. 그것이 바로 최경환 부총리도 인정한 ‘소득 효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득 효과를 통해 경제를 제대로 발전시키기 위해 결단코 도입해서는 안 될 일이 바로 노동시장 유연화다.


노동 악법 저지를 위해 연대가 필요한 이유

한국 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기업이 살아야 국가 경제가 산다”는 미신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노동시장 유연화에 반대하면 마치 반(反)기업정서를 가진 사람 취급을 받아야 했다. 경제는 어떻게 되건 당장 노동자만 쳐다보는 근시안적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소득 효과를 지지하는 이들 중 누구도 ‘국가 경제가 살아야 한다’는 대의 명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기업이 살아야 국가 경제가 산다”는 미신을 넘어서서 “국민 소득이 늘어야 국가 경제가 산다”는 새로운 신념을 갖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한계기업이 하루 빨리 구조조정을 해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할 요량이라면, 지금도 버젓이 근로기준법에 명시돼 있는 정리해고를 이용하면 해결될 일이다.

정부가 ‘노동 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한국 경제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고 갈 ‘노동 개악’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먼 산 쳐다보듯 외면한다. ‘나는 쉬운 해고 대상이 아니니까’, ‘나는 비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낮으니까’, ‘나는 버젓이 대기업에 잘 다니고 있으니까’ 등의 감정이 노동법 개악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게 만든다.

▲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관음전에서 창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양지웅 기자


하지만 우리 모두가 태생적 금수저가 아니라면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침묵하고 “나는 이번 해고 대상이 아니었어!”라는 환희를 누릴 때, 그 환희의 순간이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와는 달리 노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런 공통점 덕분에 시민사회에서는 ‘저 노동자의 권리’가 바로 ‘나라는 노동자’의 권리가 된다. 연대는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함께 싸우는 일은 그렇게 서로의 버팀목이 되는 법이다. 정리해고를 내주고, 쉬운 해고를 내주고…, 그래서 마침내 그들이 나를 덮치기 위해 찾아왔을 때, 독일 신학자 마르틴 뉘밀러의 말처럼 나의 주변에는 나를 위해 함께 싸워줄 소중한 동료 노동자들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다.


출처  쉬운 해고 못하고 비정규직이 모자라 경제위기가 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