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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날아온 징병검사 안내서에 세월호 아빠는 또 울었다

어느날 날아온 징병검사 안내서에 세월호 아빠는 또 울었다
세월호 참사 단원고 희생자에 징병검사 안내서 보낸 병무청
[민중의소리] 박소영 기자 | 최종업데이트 2016-01-15 23:40:10


“귀하께서는 병역법 제11조의 규정에 의하여 2016년도 징병검사 대상자임을 알려드립니다”

지난 13일 우편함을 연 이청원(가명·47)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병무청이 아들 앞으로 보낸 징병검사 안내문이 들어 있었다. 아들 이름으로 온 학원 전단만 봐도 눈물을 떨구던 그였다. 시간은 1년이 훌쩍 지나 2년이 되어 갔지만, 가슴은 또 한 번 와르르 무너졌다. 이청원씨의 아들은 3년 전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단원고 학생 故 이동규(가명)군이다.

“나쁜 나라에서 참 가지가지 하네. 학살할 때는 언제고 공짜 밥 먹으러 오라네. 그래 그럼 하늘나라에 가서 붙잡아 데려다 맥여. 참고로 둘째는 죽어도 군에 못 보낸다. 이게 나라고 내가 국민이더냐, 이 아침 아들 이름 석 자에 눈물지을 부모님들 생각에 가슴이 아려온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청원 씨는 사실을 알리기로 작정했다. 잊고 싶은 기억이었지만 사람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난 13일 자신의 SNS를 통해 위와 같은 글과 함께 징병검사 안내문 사진을 게재했다.

▲ 세월호 희생자 앞으로 온 징병검사 안내문. ⓒ출처 : 세월호 희생자 아버지 페이스북


<민중의소리>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청원 씨와 통화를 시도한 건 안내문이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난 15일에서였다. 전화를 받은 그는 여전히 정부의 무책임함에 치를 떨었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청원 씨는 한숨을 내쉬며 “나중에 통화하자”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다시 통화가 된 건 8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힌 듯한 목소리로 “우리 애기들 네 명이 아직 배 속에 있어요, 선생님도 두 분이나 계시고….”라며 말문을 열었다.

청원 씨도 아들에게 온 징병검사 안내문이 단순한 행정착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1997년생인 아들에게 올해 안내문이 나오리란 사실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저 차디찬 바다에 있는 애기들하고 선생님 나오시면, 그때나 사망신고를 할까요…. 더 원하는 게 있다면 진상규명이 되는 날, 뭐 2~3년 안에 끝날 일도 아니고 10년은 가야 되겠죠...”

동규는 키가 180cm에 달했다. 교복 바지 치수는 115. 아빠보다 크고 듬직했던 동규만큼은 맹골수도의 거친 물살을 이겨 내리라 믿었다. ‘전원구조’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 속으론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규는 끝내 차디찬 주검으로 발견됐다. 디지털 포렌식으로 동규의 휴대전화를 복원해 보니 2014년 4월 16일 오전 9시 50분이 마지막 통화시도였다. 아빠에게 건 전화였지만 결국 발신이 되지 않았다. “재미있게 놀다 와”라고 건넨 말이 부자간의 마지막 대화가 됐고 그때 쥐여준 돈 20만 원은 함께 발견된 지갑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커다란 덩치와는 다르게 동규는 유난히 섬세했다. 청원 씨가 “손이 시린 데 너희도 장갑을 끼고 다니라”고 말한 지 일주일 만에 식탁 위에는 편지와 함께 새 장갑이 놓여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장갑을 사고 동생에게는 용돈을 줬다. 동규의 꿈은 일본관광가이드였다. 어릴 때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 봐 온 동규는 자막이 없이도 코믹 일본 드라마를 보며 깔깔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애 할머니가 동규 참 좋아했는데 아직도 죽은 지 몰라요. 팔순 넘고 몸이 편찮으셔서 그냥 일본 고등학교에 유학 보냈다고 해놨죠. 이제 일본에서 대학 다닌다고 해야겠네요….”

416가족협의회에 따르면 청원 씨처럼 아직 아이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세월호의 조속한 인양과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유가족들이 상당수다. 인천지방병무청은 유족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고 단원고로부터 희생 학생들의 명단을 전달받아 관련 업무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출처  어느날 날아온 징병검사 안내서에 세월호 아빠는 또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