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소의 강제 알몸검신…분노와 수치심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유흥희 금속노조 기륭분회장이 <한겨레>에 보내온 ‘강제노역기’
[한겨레] 유흥희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 | 등록 :2016-05-13 16:17
4월 29일 화창한 봄날 서울지방중앙검찰청 앞에는 조촐하면서도 서러움과 분노의 눈물이 하나 된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불의한 벌금을 단 한 푼도 낼 수가 없어 스스로 노역을 선택한 감옥행 기자회견이었습니다. 지나간 10여 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공장점거 파업 농성,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단식, 하늘에 매달려 절규하던 고공농성, 바퀴 아래 누워야 했고 아슬아슬한 전깃줄을 붙잡고 버텨야 했던 굴착기 투쟁, 한겨울 오체투지까지…. 우리는 죽는 것 빼고는 다 했다고 할 만큼 처절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10년 투쟁의 결론은 ‘좋은 노예제가 없듯이 좋은 비정규직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조합원들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꼬마는 자라서 대학생이 됐고, 농성장에서 태어난 아이는 올해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올해 8주기를 맞는 권명희 조합원의 죽음도 투쟁 과정에서 마주해야 했습니다. 최근 큰 수술을 하고 투병생활을 하는 오석순 조합원도 있습니다.
기륭전자 비정규 노동자들은 1,895일 투쟁 끝에 2010년 11월 1일 정규직으로 복귀한다고 회사와 합의했습니다. 2년 6개월을 기다려 8년 만에 현장에 복귀했지만, 회사는 “기다려 달라”며 업무배치도 하지 않고 임금도 주지 않다 2013년 12월 30일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우리는 도망간 공장을 찾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최동열 회장의 집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면담요청을 위해 아파트 현관문 벨을 눌렀다는 이유로 ‘주거침입죄’가 되어 벌금 150만 원을 대법원으로부터 확정받았습니다. 현재 최동열 회장의 근로기준법 위반(체불임금) 사건은 검찰에 송치되어 검사까지 배당되어 있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피해자는 가해자가 됐습니다. 10년간 해고자로 살아온 저한테는 낼 돈도 없고, 있더라도 불의한 돈을 10원 한 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동열 회장의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검찰청에 넣고, 스스로 노역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나름 쉼 없이 달려왔던 10년을 되돌아보는 자리가 될 거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떠난 휴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쉴 팔자는 아니었습니다.
화창한 날씨였지만 마음은 허탈했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집행과로 들어가는데, 저를 보는 동지들의 짠한 눈빛과 무거운 발걸음 때문에 마음이 정말 아팠습니다. 잠시 기다렸다가 호송이 시작된 오후 2시 30분. 다른 여자분과 함께 나란히 한쪽 손목에 수갑을 차고 호송버스를 탔습니다. 밖의 멋진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은 온통 딴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잘 견딜 수 있을까?” 불안했지만 “구치소도 사람 사는 곳”이라던 빵(?) 선배들의 조언을 떠올리며 애써 긍정하려 했습니다. 제가 동지들을 면회하러 가던 그 길을 이제는 내가 수갑을 차고 들어간다는 일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아 새삼 제 손목을 들여다보는데 쓴웃음만 나오더군요. 만감이 교차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요? 노랫말대로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살아온 거야!’(민중가요 <길, 그 끝에 서서>)라며 자신을 위로하는 사이에 어느새 서울구치소에 도착했습니다.
4월 29일 구치소에서의 첫날 바로 문제의 ‘강제적 알몸검신’이 벌어졌습니다. 공권력에 의해 강제적이고 집단으로 벗겨진 충격적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도착해서 수갑을 풀고, 검신실로 이동했습니다. 신체 검사실에 한 교도관이 들어와서는 저에게 속옷까지 완전히 탈의할 것을 요구하며 “수술자국이 있는지, 문신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속옷까지 모두 탈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수술자국도 없고 문신도 없으며, 속옷까지 탈의하는 것은 마약사범이나 강력 범죄자들에게 행해지는 것인데 알몸 탈의는 부당하며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이라서 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교도관은 “이건 정당한 공무집행이며, 여기 오는 사람은 모두가 해야 한다”며 빨리 벗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저는 “부당한 검신을 할 수 없다”며 탈의실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러자 교도관이 나가더니 2명의 교도관을 데리고 와서는 “지금 벗지 않으면 당장 강제 탈의하겠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세상이 바뀌었다. 버텨봤자 아무 소용없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 가지고…”라며 혼자 저항하는 저에게 비웃는 투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도 거부하자 두 명의 교도관이 저의 양팔을 붙잡고, 한 명의 교도관은 속옷을 포함한 상의를 강제 탈의했습니다.
분노로 손이 떨렸습니다. 교도관은 소리치고 저항하는 저에게 바지도 이렇게 벗지 않으려면 스스로 벗으라고 했습니다. 전 분노로 떨면서도 차마 바지까지도 교도관들의 손에 벗김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완력으로 강행하는 검신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2명의 교도관은 나가달라고 했습니다. 두 명의 교도관이 나갔지만, 수치심과 분노로 저는 망설였습니다. 그런 사이에 두 명의 교도관이 다시 들어와서 “왜 아직까지 탈의하지 않았냐”며 하의 속옷까지 강제로 벗겼습니다. 제가 울면서 계속 항의하자 속옷과 수인복을 제게 입혔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검신실 내부에 가운이 걸려 있었지만, 교도관들로부터 갈아입고 검신하라는 아무런 고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분노와 수치심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만 나왔습니다. 제가 짐승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할 터이니 진정서 양식을 달라고 수차례 요구하자 다음 날인 30일 오전에 면전신청서(조사관이 직접 와서 진정을 접수해달라고 요구하는 신청서)를 내주었습니다. 하지만 대면조사까진 열흘가량 걸리기 때문에 곧장 서면으로 인권위에 신청할 수 있도록 서면 신청서를 달라고 했지만, 구치소 쪽은 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A4용지에 별도로 쓴 진정서를 면전신청서에 첨부해 냈습니다.
알몸 검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오른쪽 팔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는 교도관이 휴대전화로 찍어 갔습니다. 구치소에 맨소래담이나 파스 등 진통제를 요구했지만, 처방전이 있어야 한다면서 미루더군요. 몇 번의 요구 끝에 진통제를 받아먹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서 정말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치욕적이지만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수용인들은 죄명과 상관없이 “속옷까지 스스로 벗으라”는 교도관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처지에 있고, 교도관들은 자신들이 행위가 법적으로 부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용자들은 심지어 생리할 때도 팬티를 벗으라고 하고, 마약사범이 아니어도 알몸으로 앉았다 일어나기를 시킨다고 이야기합니다.
교도관들도 자신의 방식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제가 구치소에 있다가 검찰청이나 법원에 가 검신당할 때마다 저항하니까 “우리들도 하기 싫은데 내려오는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한다”고 합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구치소의 수용인 보호는 규칙이나 규범이 아니라 인권을 높이면 저절로 해소될 문제입니다.
부당한 알몸검신은 더는 없어야 하기에 서울구치소 소장과 강제 알몸 탈의를 한 당사자 3명에 대한 처벌과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하게 된 것입니다. 서울구치소에 들어가면 그 안에 ‘믿음의 법치, 믿음의 교정’이라고 쓰여 있지만, 서울구치소의 말처럼 되려면 서울구치소 수용자들이 체감하는 인권지수를 높여야 할 것입니다.
2주간의 노역을 짧은 휴가 정도로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가고 전쟁 같은 2주를 보냈습니다. 알몸검신을 바깥세상에 알리기 위해 동지들이 하루빨리 저를 면회오기를 기대하면서 창밖의 운동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기억도 납니다. 구치소 안에서 민주노총 집회 참석 등 3건 관련 조사를 받으러 간 서울중앙지검에서 민주노총 간부인 배태선 동지를 우연히 만나 제가 ‘알몸검신’을 당했다고 알렸더니 교도소 쪽이 공범도 아닌 둘을 바로 분리해 버린 일도 생각납니다. 검찰청 대기실, 일명 까치방에서 2시간가량 읽히지도 않던 책을 손에 들고 넘겼던 기억, 서울구치소 인권유린 규탄 기자회견이 구치소 밖에서 있던 날 계장이 호출해 면담한 일, 주거침입 혐의 관련 추가 재판이 있던 날 구치소 쪽이 관련 서류가 넘어오지 않았다며 차량을 마련해주지 않아 구치소의 담당 계장을 설득해 20인용 호송차량에 나만 홀로 탄 채 법원에 가서 재판을 받던 기억도 나네요. 그날 우연히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만나는 기쁨도 만끽했습니다. 12일 새벽 5시가 돼야 나갈 수 있다는 구치소를 대상으로 인권위 진정서를 또 썼던 기억 등등 정신없는 2주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노역 기간에 얻은 가장 소중한 교훈은 “당신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의 운명을 개선해 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이었습니다. 그리운 건 밖에서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동지들이었습니다.
5월 11일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2명이 오전에 나와서 조사를 했습니다. 당일 있었던 구체적 사실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했고, 서울구치소 수용자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도 전달해주었습니다. 면접관들이 조사를 끝낸 후 오후에 다시 저를 불러서 피진정인들을 조사했다고 하면서 검신 받은 과정을 재현해 줄 수 있냐고 물어서 재현했습니다. 뭔가 속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조사라도 나오니 정말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출소자 대기실에서의 마지막 밤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진짜 옥살이를 하고 있단 생각에 더 그런가 봅니다. 누워서 뒤척이다 깜박 잠이 들었고 집회 음악 소리에 소스라쳐 일어났습니다. 창문으로 달려가 동지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퇴근하자마자 구치소로 달려왔을 동지들의 마음이 고맙고 눈물이 났습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들, 쉰 목소리가 번갈아가면서 “12시가 넘었다, 유흥희를 석방하라!”, “인권유린 자행하는 서울구치소 규탄한다”는 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구성진 민요를 불러대고 익숙한 목소리의 시인이 나와 서울구치소와 경찰을 향해 규탄 연설을 하고, 집시여인을 개사해 징허게 노래를 못하는 만화가님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정말 감동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한참을 울었습니다.
꼬박 밤을 새우고 새벽 5시에 동지들을 만나러 나오자마자 창피했습니다. 누가 보면 몇 년 살다 나온 사람을 환영하듯 부끄러울 만큼 엄청난 환영인파들이 있었습니다. 플래카드를 만들고 슬라이드를 틀고 사진가들과 신문기자가 사진을 찍어대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미치도록 고마운 동지들 앞에서 “제가 구치소 안에서 잘 싸우지 못해 밖의 동지들을 고생시켰다. 살면서 두고두고 고마움을 갚겠다”고 했습니다.
감옥은 스스로 들어갔지만 원하지 않았던 감옥 안의 인권유린만이라도 이제 제대로 바로 잡아야겠다고 맘먹고 14일의 여정을 마쳤습니다.
출처 구치소의 강제 알몸검신…분노와 수치심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유흥희 금속노조 기륭분회장이 <한겨레>에 보내온 ‘강제노역기’
[한겨레] 유흥희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 | 등록 :2016-05-13 16:17
불법파견·불법해고·임금체불·약속위반을 저지른 회사가 아니라 12년 동안 “불법을 해소해달라”고 싸워 온 노동자만 구치소를 가야 하는 세상입니다. 유흥희 금속노조 기륭분회장은 서울구치소에서 강제 알몸검신까지 당하며 수치스러움에 온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그의 경험은 자본에 되술래잡힌 이 시대 노동자의 모습이자 인권이 발길에 차이는 수많은 ‘흙수저’들을 상징합니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12일 새벽 5시에 석방된 유 분회장이 첫잠에서 깨자마자 펜을 잡은 배경입니다. 유 분회장이 <한겨레>에 보내온 ‘강제노역기’를 소개합니다.
4월 29일 화창한 봄날 서울지방중앙검찰청 앞에는 조촐하면서도 서러움과 분노의 눈물이 하나 된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불의한 벌금을 단 한 푼도 낼 수가 없어 스스로 노역을 선택한 감옥행 기자회견이었습니다. 지나간 10여 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공장점거 파업 농성,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단식, 하늘에 매달려 절규하던 고공농성, 바퀴 아래 누워야 했고 아슬아슬한 전깃줄을 붙잡고 버텨야 했던 굴착기 투쟁, 한겨울 오체투지까지…. 우리는 죽는 것 빼고는 다 했다고 할 만큼 처절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10년 투쟁의 결론은 ‘좋은 노예제가 없듯이 좋은 비정규직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조합원들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꼬마는 자라서 대학생이 됐고, 농성장에서 태어난 아이는 올해 초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올해 8주기를 맞는 권명희 조합원의 죽음도 투쟁 과정에서 마주해야 했습니다. 최근 큰 수술을 하고 투병생활을 하는 오석순 조합원도 있습니다.
기륭전자 비정규 노동자들은 1,895일 투쟁 끝에 2010년 11월 1일 정규직으로 복귀한다고 회사와 합의했습니다. 2년 6개월을 기다려 8년 만에 현장에 복귀했지만, 회사는 “기다려 달라”며 업무배치도 하지 않고 임금도 주지 않다 2013년 12월 30일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우리는 도망간 공장을 찾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최동열 회장의 집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면담요청을 위해 아파트 현관문 벨을 눌렀다는 이유로 ‘주거침입죄’가 되어 벌금 150만 원을 대법원으로부터 확정받았습니다. 현재 최동열 회장의 근로기준법 위반(체불임금) 사건은 검찰에 송치되어 검사까지 배당되어 있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피해자는 가해자가 됐습니다. 10년간 해고자로 살아온 저한테는 낼 돈도 없고, 있더라도 불의한 돈을 10원 한 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동열 회장의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검찰청에 넣고, 스스로 노역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나름 쉼 없이 달려왔던 10년을 되돌아보는 자리가 될 거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떠난 휴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쉴 팔자는 아니었습니다.
▲ 정규직 전환 합의를 깨고 야반도주한 최동열 대표이사에게 항의하다 주거침입으로 고소당해 벌금형을 선고받은 유흥희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열린 ‘항의 노역 돌입’ 기자회견에서 최 회장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든 채 눈물을 훔치고 있다. 대법원에서 15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유 지회장은 ‘불의한 벌금을 단돈 10원도 낼 수 없다’는 항의의 표시로, 벌금을 내는 대신 14일 동안 노역을 살기로 했다. 김태형 기자
‘알몸검신’의 실체
화창한 날씨였지만 마음은 허탈했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집행과로 들어가는데, 저를 보는 동지들의 짠한 눈빛과 무거운 발걸음 때문에 마음이 정말 아팠습니다. 잠시 기다렸다가 호송이 시작된 오후 2시 30분. 다른 여자분과 함께 나란히 한쪽 손목에 수갑을 차고 호송버스를 탔습니다. 밖의 멋진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은 온통 딴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잘 견딜 수 있을까?” 불안했지만 “구치소도 사람 사는 곳”이라던 빵(?) 선배들의 조언을 떠올리며 애써 긍정하려 했습니다. 제가 동지들을 면회하러 가던 그 길을 이제는 내가 수갑을 차고 들어간다는 일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아 새삼 제 손목을 들여다보는데 쓴웃음만 나오더군요. 만감이 교차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요? 노랫말대로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살아온 거야!’(민중가요 <길, 그 끝에 서서>)라며 자신을 위로하는 사이에 어느새 서울구치소에 도착했습니다.
4월 29일 구치소에서의 첫날 바로 문제의 ‘강제적 알몸검신’이 벌어졌습니다. 공권력에 의해 강제적이고 집단으로 벗겨진 충격적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도착해서 수갑을 풀고, 검신실로 이동했습니다. 신체 검사실에 한 교도관이 들어와서는 저에게 속옷까지 완전히 탈의할 것을 요구하며 “수술자국이 있는지, 문신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속옷까지 모두 탈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수술자국도 없고 문신도 없으며, 속옷까지 탈의하는 것은 마약사범이나 강력 범죄자들에게 행해지는 것인데 알몸 탈의는 부당하며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이라서 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교도관은 “이건 정당한 공무집행이며, 여기 오는 사람은 모두가 해야 한다”며 빨리 벗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저는 “부당한 검신을 할 수 없다”며 탈의실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러자 교도관이 나가더니 2명의 교도관을 데리고 와서는 “지금 벗지 않으면 당장 강제 탈의하겠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세상이 바뀌었다. 버텨봤자 아무 소용없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 가지고…”라며 혼자 저항하는 저에게 비웃는 투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래도 거부하자 두 명의 교도관이 저의 양팔을 붙잡고, 한 명의 교도관은 속옷을 포함한 상의를 강제 탈의했습니다.
분노로 손이 떨렸습니다. 교도관은 소리치고 저항하는 저에게 바지도 이렇게 벗지 않으려면 스스로 벗으라고 했습니다. 전 분노로 떨면서도 차마 바지까지도 교도관들의 손에 벗김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완력으로 강행하는 검신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2명의 교도관은 나가달라고 했습니다. 두 명의 교도관이 나갔지만, 수치심과 분노로 저는 망설였습니다. 그런 사이에 두 명의 교도관이 다시 들어와서 “왜 아직까지 탈의하지 않았냐”며 하의 속옷까지 강제로 벗겼습니다. 제가 울면서 계속 항의하자 속옷과 수인복을 제게 입혔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검신실 내부에 가운이 걸려 있었지만, 교도관들로부터 갈아입고 검신하라는 아무런 고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분노와 수치심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만 나왔습니다. 제가 짐승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할 터이니 진정서 양식을 달라고 수차례 요구하자 다음 날인 30일 오전에 면전신청서(조사관이 직접 와서 진정을 접수해달라고 요구하는 신청서)를 내주었습니다. 하지만 대면조사까진 열흘가량 걸리기 때문에 곧장 서면으로 인권위에 신청할 수 있도록 서면 신청서를 달라고 했지만, 구치소 쪽은 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A4용지에 별도로 쓴 진정서를 면전신청서에 첨부해 냈습니다.
알몸 검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오른쪽 팔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는 교도관이 휴대전화로 찍어 갔습니다. 구치소에 맨소래담이나 파스 등 진통제를 요구했지만, 처방전이 있어야 한다면서 미루더군요. 몇 번의 요구 끝에 진통제를 받아먹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서 정말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치욕적이지만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수용인들은 죄명과 상관없이 “속옷까지 스스로 벗으라”는 교도관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처지에 있고, 교도관들은 자신들이 행위가 법적으로 부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용자들은 심지어 생리할 때도 팬티를 벗으라고 하고, 마약사범이 아니어도 알몸으로 앉았다 일어나기를 시킨다고 이야기합니다.
교도관들도 자신의 방식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제가 구치소에 있다가 검찰청이나 법원에 가 검신당할 때마다 저항하니까 “우리들도 하기 싫은데 내려오는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한다”고 합니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구치소의 수용인 보호는 규칙이나 규범이 아니라 인권을 높이면 저절로 해소될 문제입니다.
부당한 알몸검신은 더는 없어야 하기에 서울구치소 소장과 강제 알몸 탈의를 한 당사자 3명에 대한 처벌과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하게 된 것입니다. 서울구치소에 들어가면 그 안에 ‘믿음의 법치, 믿음의 교정’이라고 쓰여 있지만, 서울구치소의 말처럼 되려면 서울구치소 수용자들이 체감하는 인권지수를 높여야 할 것입니다.
시끄럽던 14일간의 노역살이
2주간의 노역을 짧은 휴가 정도로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가고 전쟁 같은 2주를 보냈습니다. 알몸검신을 바깥세상에 알리기 위해 동지들이 하루빨리 저를 면회오기를 기대하면서 창밖의 운동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기억도 납니다. 구치소 안에서 민주노총 집회 참석 등 3건 관련 조사를 받으러 간 서울중앙지검에서 민주노총 간부인 배태선 동지를 우연히 만나 제가 ‘알몸검신’을 당했다고 알렸더니 교도소 쪽이 공범도 아닌 둘을 바로 분리해 버린 일도 생각납니다. 검찰청 대기실, 일명 까치방에서 2시간가량 읽히지도 않던 책을 손에 들고 넘겼던 기억, 서울구치소 인권유린 규탄 기자회견이 구치소 밖에서 있던 날 계장이 호출해 면담한 일, 주거침입 혐의 관련 추가 재판이 있던 날 구치소 쪽이 관련 서류가 넘어오지 않았다며 차량을 마련해주지 않아 구치소의 담당 계장을 설득해 20인용 호송차량에 나만 홀로 탄 채 법원에 가서 재판을 받던 기억도 나네요. 그날 우연히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만나는 기쁨도 만끽했습니다. 12일 새벽 5시가 돼야 나갈 수 있다는 구치소를 대상으로 인권위 진정서를 또 썼던 기억 등등 정신없는 2주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 유흥희 금속노조 기륭분회 분회장(가운데)이 12일 오전 경기 의왕시 포일동 서울구치소를 나서며 김소연 전 분회장(맨 오른쪽)과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왼쪽) 등 동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의왕/이정아 기자
인권을 높이면 사람이 보인다
노역 기간에 얻은 가장 소중한 교훈은 “당신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의 운명을 개선해 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이었습니다. 그리운 건 밖에서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는 동지들이었습니다.
5월 11일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관 2명이 오전에 나와서 조사를 했습니다. 당일 있었던 구체적 사실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했고, 서울구치소 수용자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도 전달해주었습니다. 면접관들이 조사를 끝낸 후 오후에 다시 저를 불러서 피진정인들을 조사했다고 하면서 검신 받은 과정을 재현해 줄 수 있냐고 물어서 재현했습니다. 뭔가 속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조사라도 나오니 정말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출소자 대기실에서의 마지막 밤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진짜 옥살이를 하고 있단 생각에 더 그런가 봅니다. 누워서 뒤척이다 깜박 잠이 들었고 집회 음악 소리에 소스라쳐 일어났습니다. 창문으로 달려가 동지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퇴근하자마자 구치소로 달려왔을 동지들의 마음이 고맙고 눈물이 났습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들, 쉰 목소리가 번갈아가면서 “12시가 넘었다, 유흥희를 석방하라!”, “인권유린 자행하는 서울구치소 규탄한다”는 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구성진 민요를 불러대고 익숙한 목소리의 시인이 나와 서울구치소와 경찰을 향해 규탄 연설을 하고, 집시여인을 개사해 징허게 노래를 못하는 만화가님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정말 감동의 눈물이 뚝뚝 떨어져 한참을 울었습니다.
꼬박 밤을 새우고 새벽 5시에 동지들을 만나러 나오자마자 창피했습니다. 누가 보면 몇 년 살다 나온 사람을 환영하듯 부끄러울 만큼 엄청난 환영인파들이 있었습니다. 플래카드를 만들고 슬라이드를 틀고 사진가들과 신문기자가 사진을 찍어대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미치도록 고마운 동지들 앞에서 “제가 구치소 안에서 잘 싸우지 못해 밖의 동지들을 고생시켰다. 살면서 두고두고 고마움을 갚겠다”고 했습니다.
감옥은 스스로 들어갔지만 원하지 않았던 감옥 안의 인권유린만이라도 이제 제대로 바로 잡아야겠다고 맘먹고 14일의 여정을 마쳤습니다.
출처 구치소의 강제 알몸검신…분노와 수치심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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