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개신교 뿌리는 제주 4.3 학살 주도한 서북청년단
[민중의소리] 권종술 기자 | 발행 : 2019-04-03 07:18:06 | 수정 : 2019-04-03 07:18:06
“이 질곡의 역사 속에 교회는 분단과 냉전을 신학적으로 정당화면서 빛을 잃고, 일부는 신앙의 이름으로 자매․형제․부모 그리고 이웃을 총칼 앞에 서게 했습니다. 싸늘한 주검 위에 흙 한 줌 뿌릴 시간마저 빼앗긴 수난의 역사 앞에서 교회는 침묵하였습니다. 편을 가르고 등을 돌리며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죄악에 동참하였습니다. 우리 안의 무서운 폭력성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잘못을 사죄합니다. 십자가 아래 화해의 여정에 무릎을 꿇고 참여합니다.”
제주 4.3항쟁 70주년을 맞이한 지난해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정의평화위원회와 인권센터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주 4·3 역사 정의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제주 4.3 유족들과 국민에게 학살에 동참했던 과거를 사죄했다.
이에 앞서 3월 28일엔 제주를 직접 방문해 제주 4.3 희생자들이 묻혀있는 의귀리의 현의합장묘와 송령이골 무장대 무덤에 식수하며 “아직 우리는 유족들이 내밀어 주시는 용서의 손길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유족들이 전해 준 고결한 화해의 메시지를 값싸게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국 기독교는 4.3의 치유와 화해를 위해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해 사실을 고백하지도 못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4.3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유족들의 손을 덥석 잡기에는 우리 손은 여전히 희생자들의 피로 적셔져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제주 4.3항쟁 70주년을 맞아 개신교계 연합기관인 교회협이 사죄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제주 4.3항쟁 당시 민간인 학살 등을 자행한 ‘서북청년단’(서북청년회)의 중심세력이 바로 개신교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북청년단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개신교 세력은 이후 한국개신교의 주류가 됐고, 지금 거리에서 극우세력과 함께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극우개신교의 사상적 기반이다.
서북청년단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악명’ 높은 이름이다.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30일 서울 종로 YMCA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출범한 단체로 공식 명칭은 ‘서북청년회’지만 대중들은 이들을 ‘서북청년단’이라 불렀다. 서북청년단은 이후 해방공간에서 좌익세력을 대상으로 암살과 테러를 자행했고, 특히 제주4.3항쟁에 토벌군으로 참여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범죄를 저질렀다.
지난 2003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서북청년회는 4.3사건 발발 전부터 도민들과 갈등을 빚어 사건 발생의 한 원인으로까지 지목받아왔는데, 이승만과 미군은 강경작전을 앞두고 서북청년회를 아예 군경에 편입시켰다. 이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대량 주민 희생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북청년회 위주로 경찰이 재편됐고, 군대에는 ‘서청중대’가 따로 편성됐다”며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 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밝히고 있다.
4.3항쟁 당시 9연대 보급과 선임하사로 제주에 있었던 윤태웅 씨는 지난 2001년 진상조사위와의 인터뷰에서 “서북청년 이놈들이 고얀 놈들입니다.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이놈들이 사건을 악화시켰습니다. 진압하라고 했으면 진압만 하지…. 그래서 도망갈 길 없는 주민들이 더 산으로 오른 겁니다”라고 증언했다.
서북청년단은 영락교회 청년회가 중심이 돼 만들어진 조직이다. 영락교회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초대회장을 지내는 등 한국개신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한경직 목사가 1945년 세운 교회다. 1945년 12월 베다니전도교회로 시작해 1946년 영락교회로 개명했다. 한경직 목사는 1945년 신의주 제이교회 담임목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소련군이 진주하기 시작하자 신의주 제일교회 윤하영 목사와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어 대항했다. 이후 지부 결성 과정 등에서 여러 차례 소련 군정과 충돌했고, 결국 1946년 윤하영 목사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게 됐다.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지난 2월 발간한 ‘우리는 너무 몰랐다’에서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대체로 서북지역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제일 먼저 모이는 곳이 교회였다. 우리나라 해방 후 대형교회문화가 생겨나는 현상도 이러한 분단 현실 속에서 잘 설명된다. 영락교회는 서북지역(황해도 평안남북도) 사람들의 집결지였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실은 한경직 목사가 생전에 한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1982년 규장문화사에서 출간된 ‘한경직 목사’라는 제목의 자서전 형식의 책에서 한경직 목사는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되었지요”라고 증언했다.
서북지역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반공 의식을 가지고 제주4.3학살에 가담한 이유는 무엇일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한 최태육 목사(한반도통일역사연구소)는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통해 1948년 5월 10일 열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계기였다고 설명했다. 최태육 목사는 “당시 개신교인들은 남한에 친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련 공산주의에 먹힌다고 생각했다. 공산주의가 득세하면 개신교가 생존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미 북에서 이런 경험을 가진 개신교인들은 정치·생존적 입장으로 5.10 선거를 만났다. 이를 방해하는 세력은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제주 4.3과 여순사건 진압 등에 개신교인들이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개신교인들이 이런 정치 생존적 입장만으로 학살에 가담할 수 있었을까? 학살의 죄의식을 지워줄 장치가 필요했다. 남한 단독정부, 친미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세력을 악마화한 것이다. ‘교회와 권력’이란 책에서 김진호 목사(제3세계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는 “공산주의자들은 적이고, 그들을 궤멸하면 우리에게 종교적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영락교회를 이끈 한경직 목사가 1946년과 1947년에 한 설교를 살펴보면 서북청년단의 이러한 종교적 배경을 잘 알 수 있다.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가 2009년 발간한 ‘한경직 목사 설교선집1’에 수록된 ‘기독교와 정치’라는 제목의 설교(1946년)에서 한경직 목사는 “신자의 사명은 여기에 있습니다. 천고에 빛나는 진리를 파악한 우리가 철저한 사상교화 운동에 나서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강연회나 토론회를 개최하고, 잡지나 소책자를 발간하는 등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국으로 이 운동을 추진시켜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잠잠합니다. 최선의 정치 이념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퇴영적(退靈的)입니까? 좀 더 주도성을 가집시다. 십자가를 가지고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합시다. 전후(戰後)에 각국의 기독교 민주당이 일어나 주도성을 가지고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보시오! 일어나 일합시다!”라며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한다. 한 목사의 이런 설교는 그해 11월 설립된 서북청년회에 영락교회 청년들이 참여하도록 이끄는 계기가 됐다.
1947년에 한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설교에선 이렇게 말했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한 괴물이 유럽을 횡행하고 있다. 곧 공산주의란 괴물이다.’ 저들의 말 그대로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입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한 목사는 공산주의를 괴물이라고 지칭하며 그 괴물과 싸울 것을 설교를 통해 독려했다. 이듬해 제주4.3항쟁 진압에 서북청년단이 참여한 것도 바로 이런 독려가 바탕이 된 것이다.
제주 4.3항쟁 초기 진압 책임자로 개신교인이었던 조병옥 경무부장은 1948년 4월 20일 서울 경무부 경찰공보실이 발행한 ‘총선거와 좌익의 몰락’이라는 책자를 통해 “이제 세계(世界)는 조직된 공산주의(共産主義) 악도(惡徒)의 도량(跳梁)을 막기 위하야 일어나 조직하고 있다. 그것은 유엔이오. 미 영 불 중의 동심협력(同心協力)이요. 로마 왕법(法王)의 명령(命令)이다. 이제 파괴되랴는 인류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하야 반공세력(防共勢力)이 나날이 결속(結束)되고 있다. 저 사탄의 진영(陣營)이 순순히 굴복하면 몰라도 여전히 그의 악을 계속(繼續)한다면 그들이 무저갱으로 전락하는 운명의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태육 목사는 지난해 쓴 ‘제주4.3과 기독교인이 돌아봐야 할 것’이라는 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긍정적 자아로, 이에 동조하지 않는 개인과 단체를 부정적 타자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를 신학화한다”며 “공산주의 진영, 즉 ‘사탄의 진영’은 무저갱으로 굴러떨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공산주의 악도의 도량’을 막는 세력이다. 그는 신학적 해석을 통해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을 사탄의 진영과 의의 진영으로 발전시켰다”고 설명했다.
서북청년단을 비롯해 북에서 내려온 개신교인들에게 있어 반공은 단순히 사상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붉은 용’과 ‘사탄’을 비롯한 악마의 세력과의 전쟁이었고, 빨갱이 낙인이 찍히면 가차 없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좌익 전력자를 전향시킨다는 명목으로 만든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하는 등 평안남도 출신으로 공안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 검사와 제주 토벌대 출신인 채명신 장군과 이세호 장군이 영락교회에서 장로를 지낸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극우적 신앙은 고스란히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1년 8월 30일 장충체육관에서 재향군인회(회장 박세환)와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 금란교회(감독 김홍도), 청교도영성훈련원(전광훈 목사) 등 보수 단체와 대형교회 신도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반공·애국국민총궐기대회에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목회만 하면 되지 무슨 정치 운동에 참가하고 앞장서냐고 말하는 이 있다. 나도 목회만 하고 싶은데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사탄과의 싸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보수개신교 정당인 기독자유민주당의 창당준비대회 성격으로 열린 이 날 행사에서의 이런 발언은 극우적 성향 개신교인들의 정치 활동이 과거 서북청년단처럼 마치 사탄의 세력과의 전쟁을 치르듯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 목사는 역시 북의 서북지역인 평안북도 출신의 피난민이다.
김용옥 교수는 ‘우리는 너무 몰랐다’에서 “서북청년단의 특징은 반공정신의 맹렬성과 맹목성에 있다. 북한에서 당한 저주를 풀기 위해 ‘빨갱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무조건 폭력과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북한에서 내려온 이 열혈한 정년들을 이승만은 정권장악의 가장 확고한 지지세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라며 “이승만은 이 서북청년단의 인력을 남한 사회의 반공화를 위한 프론티어로 활용했다. 며칠간의 훈련만 받으면 곧바로 경찰과 군인의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겉으로 보면 버젓한 군인이고, 경찰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질 않았다. 마음대로 약탈하고, 겁탈하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서북청년단에 관한 한, 아무런 룰이 없었다. 이 서북청년단의 아버지가 바로 조병옥이고, 장택상이었다. 빨갱이라면 전후좌우 맥락을 무시하고 때려잡는 사람들, 이들은 대체로 반공의 투사들이었고, 열렬한 예수쟁이였고, 인간 평등관을 거부하는 서북의 지주자제들이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반공 의식은 우리가 흔히 ‘보수’라고 칭하는 개신교 일부 진영만의 의식이 아니라 ‘진보’까지 포함해 한국개신교의 보편적인 의식이었다. 진보적 신학의 대표적 인물로 한신대와 기독교장로회를 세운 김재준 목사를 비롯해 강원룡 목사, 함석헌 선생, 안병무 박사 등 1970년대부터 반독재투쟁에 나선 개신교계 인물들도 강한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이들 역시 해방 직후 북에서 소련 등에 의해 교회가 탄압받던 현실을 직접 경험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2014년엔 대표적인 민중 신학자인 안병무 박사가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을 지냈다는 의혹이 기사로 나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개신교의 반공 의식은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지난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통해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계명을 어긴 죄이며, 분단에 의하여 고통받았고 또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죄이며, 그들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지 못한 죄”라고 고백했고, “남한 그리스도인들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고,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북한 공산정권에 대하여 깊고 오랜 불신과 뼈에 사무치는 적개심을 그대로 지닌 채 반공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으로 집착해 왔다”고 반성했다.
이듬해인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평화통일방안을 협의하는 등 분단 극복을 위한 물꼬를 열었다. 문 목사는 만주에서 태어나 북을 거쳐 월남했고, 한국전쟁 당시엔 유엔군 통역관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개신교계의 이런 변화에 대해 최태육 목사는 “반공주의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체적으로 극복해냈다고 보긴 힘들다. 해외 통일 운동과 197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이어진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의 영향과 함께 젊은 목회자들의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개신교 일부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평화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동안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 교단들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1988년 선언에 반대해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만들었다. 한기총 초대회장이 바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였다. 이후 보수개신교 진영의 반공 의식은 더욱 견고해졌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개신교 내부에서도 서북청년단 활동을 사죄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개신교에선 이들을 건국세력으로까지 추켜세우고 있다.
2012년 4월 ‘한국교회사학회’와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한경직과 대한민국 건국운동:1945-1948’을 주제로 발표한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는 “우익청년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한 것이 바로 서북청년단이었다. 이북에서 자유를 찾아 남하한 서북청년들은 남한에서 좌익이 활개를 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영락교회는 이런 서북청년단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영락교회는 청년회와 대학생회를 통하여 서북청년의 반공투쟁에 관여하였고, 이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 주장했다.
이런 시각은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과도 일치한다. 뉴라이트 역사학자 등이 중심이 돼 출간한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8번째 책으로 ‘서북청년회’가 출간되기도 했다. 이 책은 “서북청년들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탈출한 월남민이었기 때문에 전투적인 반공주의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대로, 그들이 없었으면 치안 유지도, 건국도 할 수 없었던 중요한 세력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건국세력의 하나인 서북청년들의 존재에 대해 거의 완전히 잊어 왔다. 그들은 해방 직후에는 건국운동가로서, 그리고 6·25전쟁 때는 국군이나 유격대원이나 청년단원으로 좌익과 북한군에 대항해 싸웠다. 하지만 대다수는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가족이 없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도 많았다”며 서부청년단을 숨은 건국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극우적 성향의 개신교인들은 대한민국은 과거 서북청년단 등 개신교 세력이 개신교인인 이승만 박사와 함께 세운 기독교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기총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지난 2월 15일 열린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세울 때 저항했던 남로당 찌꺼기들하고, 북에서 날라온 주사파 찌꺼기들이 붙어서 청와대를 점령하고, 대한민국을 해체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도,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예수가 세운 나라다. 결단코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 고려연방제로 갈 수 없다. 성도 여러분, 이 나라를 지키자”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문제는 이런 왜곡된 역사 인식이 일부 개신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개신교 일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반공주의 시대에 인식이 여전히 머물러 있다. 최태육 목사는 “개신교가 서북청년회 활동 등 과거의 잘못을 아직 반성하지 않았다. 개신교인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모른다. 나이 든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개신교인들도 마찬가지”라며 “개신교는 언제든지 극우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출처 [극우개신교를 파헤치다①] 극우개신교 뿌리는 제주 4.3 학살 주도한 서북청년단
[민중의소리] 권종술 기자 | 발행 : 2019-04-03 07:18:06 | 수정 : 2019-04-03 07:18:06
▲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북청년단 단원들. ⓒ기타
극우세력의 활동이 심상치 않다. 극우적 성향의 유튜브 방송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난 광주항쟁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계속된다. 심지어 이런 주장이 국회에까지 등장하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한국 사회의 극우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력은 바로 한국개신교다. 개신교는 지금 태극기집회 등 극우세력 활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고, 각종 극우적 성향의 정치 논리들을 하나님의 뜻이라 믿으며 행동하고 유포한다. 개신교가 극우주의의 행동대원으로 나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개신교 극우화의 역사와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사회 극우화의 맥락을 읽는 데도 중요한 요소다. 극우개신교의 역사와 배경을 짚는 기사를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이 질곡의 역사 속에 교회는 분단과 냉전을 신학적으로 정당화면서 빛을 잃고, 일부는 신앙의 이름으로 자매․형제․부모 그리고 이웃을 총칼 앞에 서게 했습니다. 싸늘한 주검 위에 흙 한 줌 뿌릴 시간마저 빼앗긴 수난의 역사 앞에서 교회는 침묵하였습니다. 편을 가르고 등을 돌리며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죄악에 동참하였습니다. 우리 안의 무서운 폭력성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잘못을 사죄합니다. 십자가 아래 화해의 여정에 무릎을 꿇고 참여합니다.”
제주 4.3항쟁 70주년을 맞이한 지난해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정의평화위원회와 인권센터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주 4·3 역사 정의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제주 4.3 유족들과 국민에게 학살에 동참했던 과거를 사죄했다.
이에 앞서 3월 28일엔 제주를 직접 방문해 제주 4.3 희생자들이 묻혀있는 의귀리의 현의합장묘와 송령이골 무장대 무덤에 식수하며 “아직 우리는 유족들이 내밀어 주시는 용서의 손길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유족들이 전해 준 고결한 화해의 메시지를 값싸게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국 기독교는 4.3의 치유와 화해를 위해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해 사실을 고백하지도 못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4.3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유족들의 손을 덥석 잡기에는 우리 손은 여전히 희생자들의 피로 적셔져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 제주4.3항쟁 제70주기였던 지난해 4월 3일 오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제주4.3희생자들의 분장을 한 시민들이 4.3항쟁을 추모하는 403광화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제주4.3 학살에 함께한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개신교인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단체였다. ⓒ임화영 기자
제주 4.3항쟁 70주년을 맞아 개신교계 연합기관인 교회협이 사죄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제주 4.3항쟁 당시 민간인 학살 등을 자행한 ‘서북청년단’(서북청년회)의 중심세력이 바로 개신교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북청년단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개신교 세력은 이후 한국개신교의 주류가 됐고, 지금 거리에서 극우세력과 함께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극우개신교의 사상적 기반이다.
북 서북지역 출신 개신교인이 중심이 돼 만든 ‘서북청년단’
제주 4.3 토벌대로 참여해 민간인 학살 자행
제주 4.3 토벌대로 참여해 민간인 학살 자행
서북청년단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악명’ 높은 이름이다.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30일 서울 종로 YMCA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출범한 단체로 공식 명칭은 ‘서북청년회’지만 대중들은 이들을 ‘서북청년단’이라 불렀다. 서북청년단은 이후 해방공간에서 좌익세력을 대상으로 암살과 테러를 자행했고, 특히 제주4.3항쟁에 토벌군으로 참여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범죄를 저질렀다.
지난 2003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서북청년회는 4.3사건 발발 전부터 도민들과 갈등을 빚어 사건 발생의 한 원인으로까지 지목받아왔는데, 이승만과 미군은 강경작전을 앞두고 서북청년회를 아예 군경에 편입시켰다. 이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대량 주민 희생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북청년회 위주로 경찰이 재편됐고, 군대에는 ‘서청중대’가 따로 편성됐다”며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 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밝히고 있다.
4.3항쟁 당시 9연대 보급과 선임하사로 제주에 있었던 윤태웅 씨는 지난 2001년 진상조사위와의 인터뷰에서 “서북청년 이놈들이 고얀 놈들입니다.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이놈들이 사건을 악화시켰습니다. 진압하라고 했으면 진압만 하지…. 그래서 도망갈 길 없는 주민들이 더 산으로 오른 겁니다”라고 증언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서북청년단은 영락교회 청년회가 중심이 돼 만들어진 조직이다. 영락교회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초대회장을 지내는 등 한국개신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한경직 목사가 1945년 세운 교회다. 1945년 12월 베다니전도교회로 시작해 1946년 영락교회로 개명했다. 한경직 목사는 1945년 신의주 제이교회 담임목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소련군이 진주하기 시작하자 신의주 제일교회 윤하영 목사와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어 대항했다. 이후 지부 결성 과정 등에서 여러 차례 소련 군정과 충돌했고, 결국 1946년 윤하영 목사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게 됐다.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지난 2월 발간한 ‘우리는 너무 몰랐다’에서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대체로 서북지역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제일 먼저 모이는 곳이 교회였다. 우리나라 해방 후 대형교회문화가 생겨나는 현상도 이러한 분단 현실 속에서 잘 설명된다. 영락교회는 서북지역(황해도 평안남북도) 사람들의 집결지였다”고 설명한다.
▲ 지난 지난 2011년 성탄특집으로 KBS에서 방영된 故 한경직 목사 관련 다큐멘터리 방송화면 ⓒ뉴시스
이런 사실은 한경직 목사가 생전에 한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1982년 규장문화사에서 출간된 ‘한경직 목사’라는 제목의 자서전 형식의 책에서 한경직 목사는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되었지요”라고 증언했다.
서북지역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반공 의식을 가지고 제주4.3학살에 가담한 이유는 무엇일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한 최태육 목사(한반도통일역사연구소)는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통해 1948년 5월 10일 열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계기였다고 설명했다. 최태육 목사는 “당시 개신교인들은 남한에 친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련 공산주의에 먹힌다고 생각했다. 공산주의가 득세하면 개신교가 생존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미 북에서 이런 경험을 가진 개신교인들은 정치·생존적 입장으로 5.10 선거를 만났다. 이를 방해하는 세력은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제주 4.3과 여순사건 진압 등에 개신교인들이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1947년 한경직 목사 설교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개신교인들이 이런 정치 생존적 입장만으로 학살에 가담할 수 있었을까? 학살의 죄의식을 지워줄 장치가 필요했다. 남한 단독정부, 친미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세력을 악마화한 것이다. ‘교회와 권력’이란 책에서 김진호 목사(제3세계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는 “공산주의자들은 적이고, 그들을 궤멸하면 우리에게 종교적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영락교회를 이끈 한경직 목사가 1946년과 1947년에 한 설교를 살펴보면 서북청년단의 이러한 종교적 배경을 잘 알 수 있다.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가 2009년 발간한 ‘한경직 목사 설교선집1’에 수록된 ‘기독교와 정치’라는 제목의 설교(1946년)에서 한경직 목사는 “신자의 사명은 여기에 있습니다. 천고에 빛나는 진리를 파악한 우리가 철저한 사상교화 운동에 나서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강연회나 토론회를 개최하고, 잡지나 소책자를 발간하는 등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국으로 이 운동을 추진시켜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잠잠합니다. 최선의 정치 이념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퇴영적(退靈的)입니까? 좀 더 주도성을 가집시다. 십자가를 가지고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합시다. 전후(戰後)에 각국의 기독교 민주당이 일어나 주도성을 가지고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보시오! 일어나 일합시다!”라며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한다. 한 목사의 이런 설교는 그해 11월 설립된 서북청년회에 영락교회 청년들이 참여하도록 이끄는 계기가 됐다.
1947년에 한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설교에선 이렇게 말했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한 괴물이 유럽을 횡행하고 있다. 곧 공산주의란 괴물이다.’ 저들의 말 그대로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입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한 목사는 공산주의를 괴물이라고 지칭하며 그 괴물과 싸울 것을 설교를 통해 독려했다. 이듬해 제주4.3항쟁 진압에 서북청년단이 참여한 것도 바로 이런 독려가 바탕이 된 것이다.
제주 4.3 초기 진압 책임자 조병옥 경무부장(개신교인)
“저 사탄의 진영(陣營)이 순순히 굴복하면 몰라도
여전히 그의 악을 계속(繼續)한다면
그들이 무저갱으로 전락하는 운명의 날이 멀지 아니할 것”
“저 사탄의 진영(陣營)이 순순히 굴복하면 몰라도
여전히 그의 악을 계속(繼續)한다면
그들이 무저갱으로 전락하는 운명의 날이 멀지 아니할 것”
제주 4.3항쟁 초기 진압 책임자로 개신교인이었던 조병옥 경무부장은 1948년 4월 20일 서울 경무부 경찰공보실이 발행한 ‘총선거와 좌익의 몰락’이라는 책자를 통해 “이제 세계(世界)는 조직된 공산주의(共産主義) 악도(惡徒)의 도량(跳梁)을 막기 위하야 일어나 조직하고 있다. 그것은 유엔이오. 미 영 불 중의 동심협력(同心協力)이요. 로마 왕법(法王)의 명령(命令)이다. 이제 파괴되랴는 인류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하야 반공세력(防共勢力)이 나날이 결속(結束)되고 있다. 저 사탄의 진영(陣營)이 순순히 굴복하면 몰라도 여전히 그의 악을 계속(繼續)한다면 그들이 무저갱으로 전락하는 운명의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태육 목사는 지난해 쓴 ‘제주4.3과 기독교인이 돌아봐야 할 것’이라는 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긍정적 자아로, 이에 동조하지 않는 개인과 단체를 부정적 타자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를 신학화한다”며 “공산주의 진영, 즉 ‘사탄의 진영’은 무저갱으로 굴러떨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공산주의 악도의 도량’을 막는 세력이다. 그는 신학적 해석을 통해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을 사탄의 진영과 의의 진영으로 발전시켰다”고 설명했다.
▲ 제주 4.3항쟁 초기 진압 책임자 조병옥 경무부장은 개신교인이었다. 사진 왼쪽부터 조병옥, 김동성, 장면(1949년 유엔한국대표단) ⓒ국가기록원
서북청년단을 비롯해 북에서 내려온 개신교인들에게 있어 반공은 단순히 사상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붉은 용’과 ‘사탄’을 비롯한 악마의 세력과의 전쟁이었고, 빨갱이 낙인이 찍히면 가차 없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좌익 전력자를 전향시킨다는 명목으로 만든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하는 등 평안남도 출신으로 공안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 검사와 제주 토벌대 출신인 채명신 장군과 이세호 장군이 영락교회에서 장로를 지낸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탄과의 싸움”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탄과의 싸움”
이러한 극우적 신앙은 고스란히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1년 8월 30일 장충체육관에서 재향군인회(회장 박세환)와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 금란교회(감독 김홍도), 청교도영성훈련원(전광훈 목사) 등 보수 단체와 대형교회 신도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반공·애국국민총궐기대회에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목회만 하면 되지 무슨 정치 운동에 참가하고 앞장서냐고 말하는 이 있다. 나도 목회만 하고 싶은데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사탄과의 싸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보수개신교 정당인 기독자유민주당의 창당준비대회 성격으로 열린 이 날 행사에서의 이런 발언은 극우적 성향 개신교인들의 정치 활동이 과거 서북청년단처럼 마치 사탄의 세력과의 전쟁을 치르듯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 목사는 역시 북의 서북지역인 평안북도 출신의 피난민이다.
김용옥 교수는 ‘우리는 너무 몰랐다’에서 “서북청년단의 특징은 반공정신의 맹렬성과 맹목성에 있다. 북한에서 당한 저주를 풀기 위해 ‘빨갱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무조건 폭력과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북한에서 내려온 이 열혈한 정년들을 이승만은 정권장악의 가장 확고한 지지세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라며 “이승만은 이 서북청년단의 인력을 남한 사회의 반공화를 위한 프론티어로 활용했다. 며칠간의 훈련만 받으면 곧바로 경찰과 군인의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겉으로 보면 버젓한 군인이고, 경찰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질 않았다. 마음대로 약탈하고, 겁탈하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서북청년단에 관한 한, 아무런 룰이 없었다. 이 서북청년단의 아버지가 바로 조병옥이고, 장택상이었다. 빨갱이라면 전후좌우 맥락을 무시하고 때려잡는 사람들, 이들은 대체로 반공의 투사들이었고, 열렬한 예수쟁이였고, 인간 평등관을 거부하는 서북의 지주자제들이었다”고 밝혔다.
개신교 ‘진보’와 ‘보수’ 모두 가졌던 반공의식
민주화운동 등을 통해 화해와 변화
민주화운동 등을 통해 화해와 변화
그런데 반공 의식은 우리가 흔히 ‘보수’라고 칭하는 개신교 일부 진영만의 의식이 아니라 ‘진보’까지 포함해 한국개신교의 보편적인 의식이었다. 진보적 신학의 대표적 인물로 한신대와 기독교장로회를 세운 김재준 목사를 비롯해 강원룡 목사, 함석헌 선생, 안병무 박사 등 1970년대부터 반독재투쟁에 나선 개신교계 인물들도 강한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이들 역시 해방 직후 북에서 소련 등에 의해 교회가 탄압받던 현실을 직접 경험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2014년엔 대표적인 민중 신학자인 안병무 박사가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을 지냈다는 의혹이 기사로 나오기까지 했다.
▲ 1988년 3월 25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문익환 목사가 육촌동생 문익준, 문순옥 등 친척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모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개신교 진영의 반공 의식은 시대적 변화를 겪으며 바뀌었다. ⓒ통일의집 제공
하지만 개신교의 반공 의식은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지난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통해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계명을 어긴 죄이며, 분단에 의하여 고통받았고 또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죄이며, 그들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지 못한 죄”라고 고백했고, “남한 그리스도인들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고,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북한 공산정권에 대하여 깊고 오랜 불신과 뼈에 사무치는 적개심을 그대로 지닌 채 반공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으로 집착해 왔다”고 반성했다.
이듬해인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평화통일방안을 협의하는 등 분단 극복을 위한 물꼬를 열었다. 문 목사는 만주에서 태어나 북을 거쳐 월남했고, 한국전쟁 당시엔 유엔군 통역관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개신교계의 이런 변화에 대해 최태육 목사는 “반공주의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체적으로 극복해냈다고 보긴 힘들다. 해외 통일 운동과 197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이어진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의 영향과 함께 젊은 목회자들의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수개신교, 한기총 만들며 반공의식 강화
“영락교회는 청년회와 대학생회를 통하여
서북청년의 반공투쟁에 관여하였고,
이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영락교회는 청년회와 대학생회를 통하여
서북청년의 반공투쟁에 관여하였고,
이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개신교 일부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평화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동안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 교단들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1988년 선언에 반대해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만들었다. 한기총 초대회장이 바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였다. 이후 보수개신교 진영의 반공 의식은 더욱 견고해졌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개신교 내부에서도 서북청년단 활동을 사죄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개신교에선 이들을 건국세력으로까지 추켜세우고 있다.
2012년 4월 ‘한국교회사학회’와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한경직과 대한민국 건국운동:1945-1948’을 주제로 발표한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는 “우익청년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한 것이 바로 서북청년단이었다. 이북에서 자유를 찾아 남하한 서북청년들은 남한에서 좌익이 활개를 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영락교회는 이런 서북청년단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영락교회는 청년회와 대학생회를 통하여 서북청년의 반공투쟁에 관여하였고, 이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 주장했다.
▲ 지난 3월 1일 한국기독교총연합 주최로 서울 광화문 에서 열린 ‘문재인 탄핵 3·1절 국민대회’에서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발언하고 있다.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인들의 반공의식은 변하지 않고 있다. ⓒ한국기독교총연합 홈페이지
이런 시각은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과도 일치한다. 뉴라이트 역사학자 등이 중심이 돼 출간한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8번째 책으로 ‘서북청년회’가 출간되기도 했다. 이 책은 “서북청년들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탈출한 월남민이었기 때문에 전투적인 반공주의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대로, 그들이 없었으면 치안 유지도, 건국도 할 수 없었던 중요한 세력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건국세력의 하나인 서북청년들의 존재에 대해 거의 완전히 잊어 왔다. 그들은 해방 직후에는 건국운동가로서, 그리고 6·25전쟁 때는 국군이나 유격대원이나 청년단원으로 좌익과 북한군에 대항해 싸웠다. 하지만 대다수는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가족이 없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도 많았다”며 서부청년단을 숨은 건국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과거 반성 없는 개신교는 언제든지 극우주의에 빠질 수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극우적 성향의 개신교인들은 대한민국은 과거 서북청년단 등 개신교 세력이 개신교인인 이승만 박사와 함께 세운 기독교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기총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지난 2월 15일 열린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세울 때 저항했던 남로당 찌꺼기들하고, 북에서 날라온 주사파 찌꺼기들이 붙어서 청와대를 점령하고, 대한민국을 해체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도,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예수가 세운 나라다. 결단코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 고려연방제로 갈 수 없다. 성도 여러분, 이 나라를 지키자”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문제는 이런 왜곡된 역사 인식이 일부 개신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개신교 일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반공주의 시대에 인식이 여전히 머물러 있다. 최태육 목사는 “개신교가 서북청년회 활동 등 과거의 잘못을 아직 반성하지 않았다. 개신교인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모른다. 나이 든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개신교인들도 마찬가지”라며 “개신교는 언제든지 극우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출처 [극우개신교를 파헤치다①] 극우개신교 뿌리는 제주 4.3 학살 주도한 서북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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