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에 이럴수가/종교와 개독교

극우보수개신교 상징 한기총 탄생의 비밀

극우보수개신교 상징 한기총 탄생의 비밀
[민중의소리] 권종술 기자 | 발행 : 2019-04-10 17:53:21 | 수정 : 2019-04-11 12:28:14


▲ 제25대 한기총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 취임식 ⓒ한기총 홈페이지

“황교안 대표의 첫 고비가 내년 4월 총선이다. 총선에서 자유한국당이 200석을 하면 이 나라를 바로 세우고, 제2의 건국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200석을 못하면 개인적으로 이 국가가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건국을 부정하고 있다. 이런 대통령은 탄핵해야 한다.”

“이승만이 세울 때 저항했던 남로당 찌꺼기들하고, 북에서 날라온 주사파 찌꺼기들이 붙어서 청와대를 점령하고, 대한민국을 해체하려 하고 있다.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이 최근 쏟아낸 발언들이다. 토착왜구당황교안 대표를 지지하는 발언으로 한기총이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색깔론을 제기하는 등 극우적 행보에 나서고 있는 한기총에 대해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예언자적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나서던 개신교 진보세력들에 대항해 만들어진 단체가 ‘한기총임을 생각할 때 이런 정치적 행보는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1989년 한경직 목사가 개신교계 원로들을
남한산성 영락교회 수련관으로 부른 이유는?

한기총이 만들어진 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이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9년 12월에 창립한 한기총의 직접적인 설립 계기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가 1988년 2월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다. 교회협은 당시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며 분단과 이로 인해 북을 증오해왔던 반공주의를 반성하며 평화와 통일을 위해 나설 것을 다짐했다.

▲ 1990년 3월 한기총 창립 기념 예배 당시의 모습. ⓒ한기총 자료집

교회협의 선언이 발표되자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단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커졌다. 1989년 1월 한경직 목사는 은퇴 후 지내고 있던 남한산성의 영락교회 수련관으로 개신교 원로들을 모았다. 그날 모임을 통해 새로운 개신교 연합기관을 만들기로 하고 준비모임과 준비위 등을 거쳐 12월 28일 공식 출범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김진호 목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나서서 국제네트워크 등을 통해 남북의 경색 국면을 열어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교회협의회도 남북 개신교계의 대화를 지지하는 등 전 세계 개신교계에서 남북평화는 중요한 아젠다가 됐다. 이런 움직임에 위기의식을 느낀 월남자 출신의 원로 목사들이 앞장서서 만든 것이 한기총”이라고 설명했다.


한기총 창립에 안기부 종교담당 요원 개입 의혹도

1989년 5월 1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기독교 보수교단 기총련(한기총) 결성 좌경화 등 적극 대처’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한기총 설립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 기사는 그해 4월 28일 영락교회에서 열린 기총련(한기총) 창립총회를 소개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기총련(한기총)은 최근의 좌경화 경향과 시국의 혼란 등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최대의 현안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 문제에 대한 교단 차원의 대응을 제1차 목표로 잡아놓고 있다”고 밝혔고 “개신교 보수연합 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한경직 목사는 기독인은 국가의 위기에 맞서 나라를 구할 의무와 사명을 갖고 있다고 지적,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함으로써 오늘의 혼란과 위기 상황을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 1989년 5월 1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기독교 보수교단 기총련(한기총) 결성 좌경화 등 적극 대처’라는 제목의 기사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쳐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개신교 보수세력의 이러한 주장은 개신교계의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확산을 막으려는 시도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장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는 “반공주의를 매개로 신앙을 결집하고 성장해온 세력은 이런 개신교 내부 움직임에 위기김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위기감을 바탕으로 공적 기구를 통한 논의가 아니라 몇몇 유력 인사들이 움직여 한기총을 급조한 것”이라고 말했다.

최 목사는 이어 “조금 더 면밀하게 추적해봐야 하지만 이러한 한기총 결성 과정에 당시 정보기관에서 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 2005년 4월 당시 국정원과거사진실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오충일 목사가 인터넷 언론인 포럼에서 국정원 전신인 안기부 종교담당 요원이 한기총 창립에 구체적으로 개입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박정희의 삼선개헌 위해 뭉친 보수개신교
1969년 한기총 전신 ‘대한기독교연합회’ 탄생

개신교계가 사회참여를 두고 보수와 진보로 나뉜 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계는 정권을 비판하는 재야세력으로 나섰다. 처음부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박정희를 비판한 건 아니다. 5.16쿠데타를 지지하는 성명을 낼 정도였지만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에 나서는 인사들이 늘어나며 점차 변화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개신교는 신학적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친미와 반공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갈등이 일어나진 않았다.

그러다 박정희의 삼선개헌을 두고 논란이 일어나면서 1969년 개신교계는 분열하게 됐다. 5.16쿠데타 이후에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고쳐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헌법상의 제약 때문에 대통령에 다시 출마할 수 없게 되자 ‘삼선개헌’을 시도한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대한반공연맹 등 어용단체들을 동원해 개헌지지성명을 조직하는 등 여론화 작업을 벌였다. 이에 맞서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가 조직됐다. 개신교계는 김재준 목사가 투쟁위 위원장을 맡고, 함석헌 선생, 장준하 선생 등이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섰다.

김재준 목사는 그해 8월 15일 ‘전국의 신앙 동지 여러분’이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통해 삼선 개헌 반대 입장을 전하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능을 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멍에를 지고 방방곡곡이 우리의 결단을 전파하고 민중의 운동을 조직하고 실천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에 맞서 보수적 성향의 목회자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한기총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기독교연합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기독교연합회’는 조용기, 김준곤, 김윤찬 목사 등 개신교계 보수 지도자 242명이 참여한 가운데 그해 9월 4일 발표된 ‘양심자유선언을 위한 기독교 성직자 일동’ 명의의 성명을 조직한 단체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성명을 통해 김재준 목사에 대해 “목사가 직접적으로 정치적 여·야 대립 사태의 앞장에 서는 일은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성직의 권위를 도용하는 일이며 화해의 복음의 위탁을 오용하는 결과가 됩니다. 성직자나 교회의 권위가 영적, 도덕적 영역과 분수를 넘을 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교권으로 취소시킨 판단의 오류를 범할 위험성이 있다”고 비난했고, “교회는 ‘정교분리’와 ‘양심자유’의 원리와 한계를 지켜 애국적이고 양심적인 각자의 찬반의 의사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그리고 합법적으로 표시되기를 원한다. 이 양심적 의사표시의 자유를 정죄하는 자들에게 분노를 느낀다”라고 말했다.

이들의 성명은 교회가 자유롭게 입장을 밝힐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강조한 듯 보이지만 “기독교인은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날마다 그 나라의 수반인 대통령과 영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며 기도함이 없는 비판은 비생산적이며 비기독교적”이라고 밝히며 박정희 삼선개헌에 힘을 실었다.


김영삼-이명박-박근혜-황교안 지지
계속되는 한기총의 정치적 논란

이런 정치적 행보는 ‘한기총’이 출범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1992년 개신교 장로인 김영삼 민자당 후보가 대선에 출마하자 우회적으로 지지 지원에 나선 것이다. 당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등 개신교계 단체들은 대선과 관련해 중립 입장을 공식으로 천명했다. 하지만 대선을 2주일여 앞둔 1992년 12월 3일 ‘김영삼 지지 기독교장로 모임인 나라사랑협의회’가 주최한 ‘나라와 교회를 위한 목사·장로 기도회’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상임회장인 임옥 목사 등이 참석해 노골적인지지 발언은 없었지만, 기도와 축도를 해 논란을 빚었다.

▲ 1968년 대통령 조찬 기도회라는 열린 첫 공식 국가조찬기도회. 이날 기도회에서 김준곤 목사는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라고 박정희를 칭송했다.ⓒ국가기록원 홈페이지

한기총 인사들은 이후에도 보수정권 수립에 계속 힘을 보탰다. 한기총 대표화장 전광훈 목사는 지난 2007년 4월 마산에서 청교도영성훈련원이 주최한 집회에 주강사로 참석해, 교인들에게 “올해 12월 대선에서는 무조건 이명박을 찍어”라며 “만약 (이명박 후보를 찍지 않으면) 내가 생명책에서 지워버릴 거야”라고 말해 논란이 됐다.

2007년 대선 당시 한기총 대표회장이던 이용규 목사는 당내 경선에서 이기고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뒤 첫 공식 일정으로 나경원 대변인, 주호영 비서실장, 이군현 의원 등과 함께 한기총을 방문한 이명박 후보에게 “이 후보가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때로는 어렵고 힘들었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항상 힘을 주시고 능력주시고 도와주셨다”며 “앞으로도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대선 승리의 좋은 결과를 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전광훈 목사와 이용규 목사 등 전현직 한기총 임원들은 최근 개신교 전도사인 황교안 토착왜구당 대표를 만나서도 지지 발언을 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한기총은 박근혜 지지 발언으로도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박근혜 후보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한기총을 방문해 목사들을 만났을 때 대선 재외동포 선거에 교회 단체를 활용하라고 제안했다. 당시 이강평 목사는 “해외 투표를 할 때 지지자를 많이 만들도록 교회 연합을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발언했다. 황성주 목사도 “해외 이민은 기독교 중심이고 교회 중심의 이민 상황이 진행되고 있으니 그것을 유념해서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권교체로 위기 맞은 한기총 2003년 거리투쟁에…
보수개신교 극우 행동주의의로

한기총의 이런 행보는 과거 보수개신교의 행보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기총의 활동이 달라진다. 정치적 입장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행동 양식이 변화한 것이다. 김진호 목사는 “1990년대 이후 민주화가 되고, 개혁이 진행되면서 한기총은 위기의식을 가지게 된다. 또 남한의 개신교 성장은 지체되기 시작했다. 한기총 조직 구성도 월남자 출신의 원로 목사 중심의 단체에서 여러 교단이 참여한 전국적 단체로 바뀐다. 그래도 1990년대까지는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단체로 성향상 극우적 요소가 강하긴 했지만 직접 행동에 나서진 않았다. 그러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시작되면서 달라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취임한 지 일주일여 만에 ‘반핵 반김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집회’를 보수단체들과 함께 20만 명을 동원해 열었다. 노무현 정부를 공산주의로 몰았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개신교 극우파들에겐 거리투쟁이 승리의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이때 개신교 극우파는 물론 극우파들이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고, 극우 행동주의가 부활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 지난 2007년 6월 23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주최로 열린 사립학교법 재개정 특별기도회. 보수 개신교의 신도들을 동원한 전면투쟁으로 그해 7월 결국 사립학교법은 재개정되고 말았다. ⓒ뉴시스

이런 한기총을 비롯한 개신교 보수세력의 거리투쟁은 정치투쟁이면서 동시에 생존투쟁이었다. 최형묵 목사는 “1990년대 후반에 정권교체가 일어나 민주정부가 등장하면서 한기총 세력에겐 위기가 찾아왔다. 반공을 매개로 정권과 유착했는데 그런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동안 정교분리라는 그늘 뒤에 숨어있던 그들이 그런 원칙조차 버리면서 생존을 위해 거리로 나서게 됐다. 인류 보편적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들만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지적했다.

정권교체 이후 겪었던 위기와 거리투쟁에 나선 경험은 이후 한기총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기총은 2004년 사립학교법 개정과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개혁입법을 거리투쟁을 통해 좌절시켰다. (사립학교법 개정과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투쟁과 관련한 내용은 극우개신교를 파헤치다④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앞서 다룬 것과 같이 이명박·박근혜 당선을 위해 한기총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도 보수정권의 수립이 자신들의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4대강 사업, 역사교과서 국정화, 국정농단 등
보수정권 위기 때마다 구원군 자처한 ‘한기총’

보수정권이 재탄생 이후엔 사실상 정권을 위한 ‘구원군’ 역할을 자처했다. 이명박 정권이 4대강 사업 추진으로 논란을 빚던 2010년 성명을 통해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최근 지구촌 곳곳에서 이상 기후와 폭설과 폭우와 가뭄 등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여 엄청난 재산과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구호와 복구에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왔다. 이제는 구호와 복구 등 사후약방문적 대처보다는 원인을 제거하고 문제점을 개선하되, 오염되고 파괴된 생태계가 복원되도록 친환경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적극 지지함을 천명한다”고 밝혔다.

박근혜 정권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해 논란을 빚은 2015년엔 “더 이상 좌편향된 교과서로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할 수 없다”며 “정부는 국가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을 정확히 설명하는 한국사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서 그 내용을 학생들에게 바로 교육하여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멀지 않아 다가오는 통일시대에 대비할 것을 간절히 촉구하는 바”라고 밝혔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과 우병우 민정수석 관련 문제로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며 위기에 빠진 박근혜가 상황 전화을 위해 2016년 10월 24일 예산안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개헌을 제안하자 한기총은 “1987년 개정 헌법 이후 오늘날의 변화된 상황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개헌은 필요하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개헌에 대한 대통령의 용단을 환영하며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 보수 기독교단체 회원들이 2018년 3월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구국과 자유통일을 위한 3·1절 한국교회 회개의 금식기도 대성회 및 범국민대회’를 열고 있다. ⓒ임화영 기자

박근혜의 개헌 제안에도 국민적 비판 여론이 잠들지 않자 불과 3일만인 27일 또 다시 성명을 통해 “이번 최순실 사태를 보며 언론의 막강한 힘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와 언론. 그 힘의 균형추가 철저한 진상 규명이 있기도 전에 계속되는 폭로전에 의해 한쪽으로 급격히 쏠리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출렁거리고 있다”고 주장해 국정농단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을 오히려 비판했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개헌 논의가 국회 주도 하에 적극 추진되며,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와 언론이 상호 견제 속에 균형을 이루고 국민들이 진정으로 열망하는 나라, 살기 좋고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며 박근혜에게 다시 힘을 실었다.


한기총 극우화 우려?
“목소리만 큰 시끄러운 소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근혜가 결국 탄핵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한기총이 다시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 과정에서 한기총은 더욱 극우화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기총의 극우화와 보수개신교의 분열로 세력이 세력은 줄었지만,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행동도 과격해지는 양상이다. 대표적인 극우인사인 전광훈 목사가 대표회장에 당선되며 극우화는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부에선 개신교 극우세력이 소수화되면서 과격한 행동주의로 진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김진호 목사는 “개신교 내부에서 극우가 잘 통하지 않는다. 신자들도 전광훈 목사를 비롯한 인물들의 극우적 주장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극우집회 혹은 극우개신교의 모임이 많은 수가 모이지 않는데, 유튜버들이 많고 온라인을 통해 증폭돼서 전해지고, 이걸 여럿이 보면서 확대되어 보이는 것일 뿐이다. 한마디로 시끄러운 소수다. 시끄럽게 때문에 담론의 크기가 커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출처  [극우개신교를 파헤치다③] 극우보수개신교 상징 한기총 탄생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