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담 “안기부 고문조작… 검사 김학의는 외면·공모했다”
[경향신문] 정용인 기자 | 입력 : 2019.04.07 09:23:00
“내가 그랬어요. ‘사실은 안기부에서 이래저래 해서 나를 두들겨 팼는데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나. 거짓말로 조서가 다 된 것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내내 검사는 나를 노려보고 있더니 책상을 꽝 내려치며 말하는 거예요. ‘이런 쓰레기 같은 놈.’”
홍성담 화백(64)의 말이다. 30년 전, 1989년의 일이다.
그에게 ‘쓰레기’라고 말한 이는 당시 김학의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다.
바로 ‘뇌물수수·성범죄 의혹’을 받고 있는 김학의 전 차관이다.
홍 화백이 당시 곤욕을 치른 것은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사건 때문이었다.
그해 7월 북한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행사장에 1988년 홍 화백을 비롯한 전국의 30여명 화가가 나눠 그린 이 작품이 전시됐다. 안기부와 검찰의 그림표에 따르면 당시 전시에는 임수경 학생의 방북과 함께 북한의 지령을 받은 배후의 간첩단이 개입됐다는 것이다. 홍 화백은 이 미술계 간첩단의 수괴로 표시돼 있었고, 이들이 만든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민미련 건준위)’는 간첩단 조직이 되어 있었다.
“7월 31일 홍 화백이 잡혀가고 차일환씨가 잡혀간 것은 8월 4일이에요. 30년이 지났는데 날짜도 잊혀지지 않네요.”
차씨의 부인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재판을 참관했던 남규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지난 3월 28일 <주간경향>을 만난 자리에서 덮어뒀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을 힘들어했다.
고통스러워했고, 간간이 오열하기도 했다.
“당한 입장에서는 너무 어이없는 사건이잖아요. 고문으로 ‘북한에 다녀왔다’, ‘북한 공작원을 만났다’고 조작했으니…. 수소문 끝에 서초동 서울지방검찰청 9층의 공안검사실을 찾아갔어요. 저랑 홍 화백 어머니랑 찾아가서 김 검사에게 ‘사람들이 고문당했다’고 서서 이야기하니 계장이라는 사람이 ‘그냥 좀 나가시라’고 쫓아냈어요.”
호소한 내용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들이 그린 그림은 이적 표현물이라 유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검사의 논고를 재판 방청석에서 들어야 했다.
홍 화백에 따르면 검사 취조실에도, 재판을 받는 방청석에도 수시로 안기부 직원들이 드나들었다.
당시 이 사건은 덕수법률사무소 황인철, 법무법인 시민의 김선수 변호사(현 대법관)가 맡았었다.
김 변호사는 2015년 언론 기고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안기부는 검찰로 송치하면서 의견서를 10여통 이상 작성해 여기저기 보내고 수사검사는 안기부로부터 받은 의견서를 가위로 오려가면서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했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한마디로 부실조사였다는 얘기다.
“학교(서울대) 앞을 지나가는데 차 2대가 멈추더니 수사관이 쏟아져 나왔어요. 백주에 집단구타를 당했습니다. 차에 실린 후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려 밖을 못보게 했습니다. 가까운 관악경찰서로 가는 줄 알았는데 오랫동안 어디론가 가는 거예요.”
전승일씨(54)가 끌려간 곳은 안기부 대공분실이었다. 지하실에 2주 동안 구금돼 조사를 받았다. 전체 7명의 취조팀이 팀장 1명과 팀원 2명씩 3인 1조가 되어 두 팀이 돌아가면서 취조하는 형식이었다.
“취조 둘째 날로 기억합니다. 굉장히 큰 서류뭉치를 내 앞에 던져놓는 겁니다. 제목을 곁눈으로 보니 ‘홍성담 간첩사건 조사보고서’였습니다. 멘붕이 왔죠. 성담이 형이 간첩이 된 것이구나, 성담이 형이 간첩이면 우리는 간첩 지령을 받아 조직을 만든 것이고….”
수사관들은 ‘처음부터 북에 보내는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느냐’고 끊임없이 물었다.
“성담이가 북한 다녀온 거 다 실토했어. 너나 홍성담은 여기서는 급도 아니야. 여기서 피똥 싸고 나간 정치인도 많아. 너 정도는 피라미니까, 이 정도로 살살해주는 걸 다행으로 알아.”
제일 참기 힘든 것은 굴욕감이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학교 후배나 여자친구들을 잡아오겠다고 겁을 주는 것이다.
“실제로 잡혀오는 후배들도 있었어요. 법원 지하철 입구에서 검문 당해 잡혀오는 경우도 있었고….”
검찰로 넘어갔지만 역시 한통속이라고 생각해 다 체념한 상태였다고 그는 말했다.
홍성담 화백에게 적용된 간첩죄 부분은 대법원에서 무죄로 파기환송됐다.
당시 <한겨레신문> 성한용 기자는 이 대법원 판결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무리하게 적용한 안기부와 검찰은 엄중한 질책을 피할 수 없게 됐으며, 특히 검찰에서는 사건을 맡았던 검사와 간부진에 대해 문책을 가할 가능성도 높다”고 전망했다.(1990년 9월 26일)
그런데 홍 화백에게 15년을 구형한 검사 김학의는 승승장구했다.
사건을 맡은 후 검사1과로 전보된 그는 특수부(1992년), 대검연구관(1994년)을 거쳐 충주지청장(1997년)을 맡는다.
역시 고문 조작사건 피해 당사자였던 차일환씨는 “정권이 바뀌고 김기춘이 구속되었을 때 가슴속 막혔던 것이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민미련 사건 당시 검찰총장이 김기춘이었다.
홍 화백은 “당시 공소 담당 김학의, 검찰총장 김기춘, 그리고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정형근, 이 세 사람이 나를 죽이기 위해 공모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보법 위반으로 3년을 살고 나왔다.
30년이 지났지만 사건이 남긴 후유증은 여전하다.
사건 후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탈 때 알 수 없는 무력감과 공포심을 느끼는 증상을 겪던’ 전승일씨는 2011년 외상후스트레스로 인한 발작성 공황장애 판정을 받아 지금도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사건 이후 관련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적은 아직도 없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보상 결정을 내렸지만 고문에 의한 사건 조작의 진상규명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재심청구도 없었다.
차일환씨는 “아무래도 사건을 겪으면서 받은 인간적인 모멸감 같은 것이 서로에 대한 상처로 자리잡은 것 같다”고 말한다.
홍 화백은 1심 내내 공소검사로 자신의 사건을 담당했던 김학의 검사가 조사를 끝마치고 난 면담 자리에서 “어쩔 수 없다. 미안하다”고 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래도 양심은 살아있는가보군’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시도 지위상승 욕구 같은 야망 때문에 안기부 간첩조작에 가담한 것으로 봤다”며 “차관이 되고 그런 불미스런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살다 어느 순간 양심을 놓아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른바 ‘성범죄 의혹사건’에 대해 검찰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당시 박근혜와 김학의 집안의 특별한 관계로 비호를 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부친이 월남전에 다녀온 대령 출신으로 박정희의 부관이었다든가, 김학의가 ‘어린 시절 청와대 뒷동산에서 박근혜와 뛰놀던 사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사실일까.
<주간경향>이 확인한 김학의의 부친은 육사 17기로, 알려진 것처럼 대령이 아닌 중령으로 1974년 전역한 김유식씨다.
1996년 타계했다. 월남전 당시 맹호부대에서 태권도 교관을 했다.
김학의는 2016년 2월 고엽제 전우회의 고문을 맡았다. 고엽제 전우회 관계자는 “월남전 참전 인연으로 고문을 맡은 것 같은데, 당시 회장단이 주택사업 비리로 구속돼 정확한 고문 위촉 배경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육사 17기로 김학의 부친과 동기였던 임복진 전 의원은 “실제 김유식씨가 박정희 부관이었다면 진급이 늦을 리 없다”며 “생도 시절 친하게 지냈고 점잖았던 친구”라고 말했다.
임 전 의원은 <주간경향>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 김학의가 김 중령의 아들인지 몰랐다고 덧붙였다.
김학의 측은 <주간경향>에 문자로 보낸 답변에서 “(부친이 박정희의 부관이었거나 박근혜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보도에 대해) 악의적이고 근거 없는 허위보도”라며 “후일 다 모아서 법적 대응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시 1989년 민미련 사건 때 안기부 고문과 사건 조작을 외면·방조했다는 피해자들의 주장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김학의 측에 연락을 취했지만 변호사 측이나 가족들은 이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출처 [단독]홍성담 “안기부 고문조작… 검사 김학의는 외면·공모했다”
[경향신문] 정용인 기자 | 입력 : 2019.04.07 09:23:00
▲ 1989년 9월 8일 정형근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이 ‘임수경 밀입북사건 조사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경향DB 자료
김학의 부친은 1974년 중령 전역한 김유식씨로 확인돼
“내가 그랬어요. ‘사실은 안기부에서 이래저래 해서 나를 두들겨 팼는데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나. 거짓말로 조서가 다 된 것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내내 검사는 나를 노려보고 있더니 책상을 꽝 내려치며 말하는 거예요. ‘이런 쓰레기 같은 놈.’”
홍성담 화백(64)의 말이다. 30년 전, 1989년의 일이다.
그에게 ‘쓰레기’라고 말한 이는 당시 김학의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다.
바로 ‘뇌물수수·성범죄 의혹’을 받고 있는 김학의 전 차관이다.
홍 화백이 당시 곤욕을 치른 것은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사건 때문이었다.
그해 7월 북한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행사장에 1988년 홍 화백을 비롯한 전국의 30여명 화가가 나눠 그린 이 작품이 전시됐다. 안기부와 검찰의 그림표에 따르면 당시 전시에는 임수경 학생의 방북과 함께 북한의 지령을 받은 배후의 간첩단이 개입됐다는 것이다. 홍 화백은 이 미술계 간첩단의 수괴로 표시돼 있었고, 이들이 만든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민미련 건준위)’는 간첩단 조직이 되어 있었다.
간첩죄, 대법원서 무죄로 파기환송
“7월 31일 홍 화백이 잡혀가고 차일환씨가 잡혀간 것은 8월 4일이에요. 30년이 지났는데 날짜도 잊혀지지 않네요.”
차씨의 부인으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재판을 참관했던 남규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지난 3월 28일 <주간경향>을 만난 자리에서 덮어뒀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을 힘들어했다.
고통스러워했고, 간간이 오열하기도 했다.
“당한 입장에서는 너무 어이없는 사건이잖아요. 고문으로 ‘북한에 다녀왔다’, ‘북한 공작원을 만났다’고 조작했으니…. 수소문 끝에 서초동 서울지방검찰청 9층의 공안검사실을 찾아갔어요. 저랑 홍 화백 어머니랑 찾아가서 김 검사에게 ‘사람들이 고문당했다’고 서서 이야기하니 계장이라는 사람이 ‘그냥 좀 나가시라’고 쫓아냈어요.”
호소한 내용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들이 그린 그림은 이적 표현물이라 유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검사의 논고를 재판 방청석에서 들어야 했다.
홍 화백에 따르면 검사 취조실에도, 재판을 받는 방청석에도 수시로 안기부 직원들이 드나들었다.
당시 이 사건은 덕수법률사무소 황인철, 법무법인 시민의 김선수 변호사(현 대법관)가 맡았었다.
김 변호사는 2015년 언론 기고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안기부는 검찰로 송치하면서 의견서를 10여통 이상 작성해 여기저기 보내고 수사검사는 안기부로부터 받은 의견서를 가위로 오려가면서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했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한마디로 부실조사였다는 얘기다.
“학교(서울대) 앞을 지나가는데 차 2대가 멈추더니 수사관이 쏟아져 나왔어요. 백주에 집단구타를 당했습니다. 차에 실린 후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려 밖을 못보게 했습니다. 가까운 관악경찰서로 가는 줄 알았는데 오랫동안 어디론가 가는 거예요.”
전승일씨(54)가 끌려간 곳은 안기부 대공분실이었다. 지하실에 2주 동안 구금돼 조사를 받았다. 전체 7명의 취조팀이 팀장 1명과 팀원 2명씩 3인 1조가 되어 두 팀이 돌아가면서 취조하는 형식이었다.
“취조 둘째 날로 기억합니다. 굉장히 큰 서류뭉치를 내 앞에 던져놓는 겁니다. 제목을 곁눈으로 보니 ‘홍성담 간첩사건 조사보고서’였습니다. 멘붕이 왔죠. 성담이 형이 간첩이 된 것이구나, 성담이 형이 간첩이면 우리는 간첩 지령을 받아 조직을 만든 것이고….”
수사관들은 ‘처음부터 북에 보내는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느냐’고 끊임없이 물었다.
“성담이가 북한 다녀온 거 다 실토했어. 너나 홍성담은 여기서는 급도 아니야. 여기서 피똥 싸고 나간 정치인도 많아. 너 정도는 피라미니까, 이 정도로 살살해주는 걸 다행으로 알아.”
▲ 민중화가 홍성담 화백/강윤중 기자
제일 참기 힘든 것은 굴욕감이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학교 후배나 여자친구들을 잡아오겠다고 겁을 주는 것이다.
“실제로 잡혀오는 후배들도 있었어요. 법원 지하철 입구에서 검문 당해 잡혀오는 경우도 있었고….”
검찰로 넘어갔지만 역시 한통속이라고 생각해 다 체념한 상태였다고 그는 말했다.
홍성담 화백에게 적용된 간첩죄 부분은 대법원에서 무죄로 파기환송됐다.
당시 <한겨레신문> 성한용 기자는 이 대법원 판결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무리하게 적용한 안기부와 검찰은 엄중한 질책을 피할 수 없게 됐으며, 특히 검찰에서는 사건을 맡았던 검사와 간부진에 대해 문책을 가할 가능성도 높다”고 전망했다.(1990년 9월 26일)
그런데 홍 화백에게 15년을 구형한 검사 김학의는 승승장구했다.
사건을 맡은 후 검사1과로 전보된 그는 특수부(1992년), 대검연구관(1994년)을 거쳐 충주지청장(1997년)을 맡는다.
역시 고문 조작사건 피해 당사자였던 차일환씨는 “정권이 바뀌고 김기춘이 구속되었을 때 가슴속 막혔던 것이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민미련 사건 당시 검찰총장이 김기춘이었다.
홍 화백은 “당시 공소 담당 김학의, 검찰총장 김기춘, 그리고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정형근, 이 세 사람이 나를 죽이기 위해 공모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보법 위반으로 3년을 살고 나왔다.
박근혜 집안과 선대부터 아는 사이?
30년이 지났지만 사건이 남긴 후유증은 여전하다.
사건 후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탈 때 알 수 없는 무력감과 공포심을 느끼는 증상을 겪던’ 전승일씨는 2011년 외상후스트레스로 인한 발작성 공황장애 판정을 받아 지금도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사건 이후 관련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적은 아직도 없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가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보상 결정을 내렸지만 고문에 의한 사건 조작의 진상규명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재심청구도 없었다.
차일환씨는 “아무래도 사건을 겪으면서 받은 인간적인 모멸감 같은 것이 서로에 대한 상처로 자리잡은 것 같다”고 말한다.
홍 화백은 1심 내내 공소검사로 자신의 사건을 담당했던 김학의 검사가 조사를 끝마치고 난 면담 자리에서 “어쩔 수 없다. 미안하다”고 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래도 양심은 살아있는가보군’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시도 지위상승 욕구 같은 야망 때문에 안기부 간첩조작에 가담한 것으로 봤다”며 “차관이 되고 그런 불미스런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살다 어느 순간 양심을 놓아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른바 ‘성범죄 의혹사건’에 대해 검찰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당시 박근혜와 김학의 집안의 특별한 관계로 비호를 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부친이 월남전에 다녀온 대령 출신으로 박정희의 부관이었다든가, 김학의가 ‘어린 시절 청와대 뒷동산에서 박근혜와 뛰놀던 사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사실일까.
<주간경향>이 확인한 김학의의 부친은 육사 17기로, 알려진 것처럼 대령이 아닌 중령으로 1974년 전역한 김유식씨다.
1996년 타계했다. 월남전 당시 맹호부대에서 태권도 교관을 했다.
김학의는 2016년 2월 고엽제 전우회의 고문을 맡았다. 고엽제 전우회 관계자는 “월남전 참전 인연으로 고문을 맡은 것 같은데, 당시 회장단이 주택사업 비리로 구속돼 정확한 고문 위촉 배경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 지난 2016년 2월, 김학의 전 차관은 고엽제전우회의 법률고문을 맡았다. /고엽제전우회 홈페이지
육사 17기로 김학의 부친과 동기였던 임복진 전 의원은 “실제 김유식씨가 박정희 부관이었다면 진급이 늦을 리 없다”며 “생도 시절 친하게 지냈고 점잖았던 친구”라고 말했다.
임 전 의원은 <주간경향>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 김학의가 김 중령의 아들인지 몰랐다고 덧붙였다.
김학의 측은 <주간경향>에 문자로 보낸 답변에서 “(부친이 박정희의 부관이었거나 박근혜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보도에 대해) 악의적이고 근거 없는 허위보도”라며 “후일 다 모아서 법적 대응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시 1989년 민미련 사건 때 안기부 고문과 사건 조작을 외면·방조했다는 피해자들의 주장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 김학의 측에 연락을 취했지만 변호사 측이나 가족들은 이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출처 [단독]홍성담 “안기부 고문조작… 검사 김학의는 외면·공모했다”
'세상에 이럴수가 > 정치·사회·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5·18 때 공군 수송기, 김해로 ‘시체’ 옮겼다 (0) | 2019.04.08 |
---|---|
그날 민주노총은 왜 국회 담장을 넘었나 (0) | 2019.04.07 |
‘뇌물 비망록' 이팔성 “MB 도움 받으려 돈 줬다” (0) | 2019.04.05 |
‘전쟁광’ 볼턴, 백악관 경고에도 트럼프 승인 없이 대북제재 밀어붙여 (0) | 2019.04.05 |
“광고압박 없다”던 삼성, 교묘한 광고 통제 (0) | 2019.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