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석기를 ‘악마’로 만들었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재심 청구 앞두고 과거 보도 양상 살펴보니
국정원발 의혹 기정사실화해 ‘잘못된 고리’ 만든 언론
“새로운 시작점 필요”
[미디어오늘] 노지민 기자 | 2019년 04월 13일 토요일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다룬 ‘이카로스의 감옥’ 저자 문영심 작가는 ‘통합진보당 사람들’을 “유대인”에 빗대었다. 불법적 행위와 인권 탄압에 놓인 피해자들에게는 보호가 아닌 ‘종북’ 낙인과 언론의 마녀사냥이 따라왔다며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유대인들인가”라고 되물었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는 ‘내란음모’가 없었고, ‘RO 회합 녹취록’의 ‘RO(Revolution Organization)’는 실체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내란 선동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된 6년 동안 수많은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그리고 지난 3·1절 특사를 앞둔 시점에서도 ‘이석기 석방’ 구호는 사실상 경계 밖에 있었다. 과거 이 사건이 부당하다고 비판했던 진보진영도 이제는 ‘이석기’를 말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일종의 금기어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변호인단은 오는 29일 이 전 의원에 대한 재심을 청구한다. “우리 모두가 돌을 던진 가해자라고 고백하고 진심으로 뉘우쳐야 하는 사건”(함세웅 신부)에 언론은 뒤늦은 반성문을 쓸 수 있을까. 당시 사건과 보도들을 돌아봤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2013년 8월 28일 국가정보원이 이석기 의원 등 당시 통합진보당 간부 10명이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다며 이들 자택과 사무실 등을 압수 수색을 하면서 시작됐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이후 33년 만에 부활한 내란음모 혐의였다.
공안 당국이 공식으로 구체적인 혐의를 밝히기도 전에 언론은 의혹을 대서특필했다. ‘국정원 관계자’, ‘공안 당국 관계자’ 주장을 인용해 1면 기사로 썼다. 29일 자 경향신문(국정원, 진보당 이석기 의원실 압수수색), 국민일보(“이석기, 국가기간시설 타격·인명 살상 모의”), 동아일보(“이석기, 통신-철도-가스시설 파괴 모의”), 서울신문(국정원 “이석기 조직원에 총기 준비” 녹취록 확보), 세계일보(“이석기, 북 남침 때 국가시설 파괴 준비”), 조선일보(“이석기 의원, 총기 마련해 국가시설 파괴 모의”), 중앙일보(“애국가 거부 이석기, 적기가는 불렀다”) 등이다.
이날 주요 전국단위 아침신문 가운데 1면 머리기사 제목으로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은 신문은 한겨레(‘내란음모죄’의 부활), 한국일보(33년 만에 재등장한 내란음모 사건)뿐이었다.
사건의 ‘판’은 한국일보의 ‘내란음모 RO 회합’ 녹취록 단독 입수 보도로 굳어졌다. 한국일보는 30일 “A4용지 62쪽 분량의 내란음모 RO(Revolution Organization) 회합 녹취록을 단독 입수했다”며 녹취록을 근거로 ‘회합’ 내용을 보도했다. 1면 머리기사 “전쟁 준비하자…군사적 체계 찰 갖춰라”를 비롯해 “고난을 각오…시작된 전쟁 끝내자”(2면), “철도를 통제하는 곳, 이걸 파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 방법이다”(2면) 등 녹취록 상 발언 내용이 기사 제목에 소개됐다. 한국일보 녹취록 보도는 그해 8월 ‘이달의 기자상’에 선정됐다.
이 의원을 변호했던 김칠준 변호사는 2013년 보도들 가운데 △8월 30일 자 한국일보 1면 “해외 자금책, 유로화를 ‘RO’에 혁명자금으로 송금” △8월 20일 자 국민일보 1면 “경기동부연합 6~7명 최소 2차례 밀입북 포착” △9월 5일 자 동아일보 “[단독]RO 조직원 PC에 폭탄제조법 있었다” 등을 ‘매카시 광풍을 확산시킨 언론의 왜곡 보도’로 꼽았다.
그해 9월까지 사건 보도를 장악한 ‘RO 녹취록’은, 11월부터 이어진 재판에서 상당 부분이 원본이 없거나 잘못 적힌 것으로 확인됐다. 이 전 의원 변호인단이 녹취록 오류 400여 건을 지적한 가운데, 국정원과 검찰은 녹취록에 사용된 표현 272개를 수정해 다시 재판부에 제출했다. 수정 내용에 따르면 국정원은 핵 보유가 전면화될 경우 ‘전면전은 안 된다’는 이 의원 발언을 정 반대 의미인 ‘전면전야 전면전’으로, ‘시 단위’는 ‘실탄’, ‘통일적인 대응’은 ‘폭력적인 대응’, ‘남측 정국의 이해’는 ‘남측 정부의 이해’로 썼다.
그해 9월 4일 국회 체포동의안 의결 이후 자진 출석 의사를 밝힌 뒤 국회에 머물던 이 의원은 결의안 통과 3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강제 구인됐다. 이 의원에 대한 소환 절차가 충실히 진행되지 않았다는 지적 속에 강제구인까지 진행됐다는 점에서 “국회의원의 양심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게 된 선례를 남겼다”(박범계 당시 민주당 의원)는 지적이 나왔다.
앞서 이 의원 변호인 측이 제기해 온 압수수색 과정에서의 인권침해 및 변호인 방어권 침해, 의원실 압수수색 과정의 적법절차 위반 등 문제는 힘을 얻지 못했다.
진보 진영에서도 이를 방조했다는 지적과 관련해 당시 이 의원 등을 ‘종북’으로 몰아가는 보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해석도 있다. 국정원이 압수수색에 나선 8월 28일부터 이 의원 체포동의안이 의결된 9월 4일까지 온라인에서 ‘이석기’, ‘간첩’, ‘북한연계’를 키워드로 작성된 기사는 최소 610여 건에 달했다.
이 의원이 정치인으로서 일부 도가 지나친 발언을 했다는 비판과 관련 해명을 하며 입장을 번복해 신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더해지면서 정치권에서도 사실상 선 긋기 기조가 높아졌다.
이준호 이석기 구명위 팀장은 미디어오늘에 “처음에는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미디어나 국민들이 반신반의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수사기관을 통해 전해진 녹취록이 언론을 통해 이틀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이 첫 번째 뇌관이었다”며 “북 연계 잠수함 설, 해외공작원, 아들 주체사상 강요 등 이 의원 등이 직·간접적으로 북한과 연계됐다는 취지들의 보도들이 국회 본회의 체포동의안 의결을 앞두고 쏟아졌다. 이 두 가지로 여론재판은 끝나버렸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당시 미디어 환경은 지금과는 또 다른 환경이었다. 정부 여당 등이 여러 힘을 동원해 언론이 자유롭게 숨쉬기 어려운 환경이었다고 본다. 이른바 팩트체크에 대한 엄격성도 지금보다는 상대적으로 낮았던 시기라고 생각한다”며 “이미 방향이 잡혀 있는데 뒤집힐 가능성이 높지 않은 상태에서 (반론이나 반박에 나설) 필요성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도 매체 등의 성향과 또 다르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언론이 이석기에 열을 올리는 동안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은 밀려났다. 국정원의 압수수색 이후 9월 2일까지 6일간 지상파 3사(KBS·MBC·SBS)와 조선·중앙·동아일보의 내란음모 의혹 보도는 260건에 달했다.
반면 국정원 불법 선거 운동 의혹이 제기된 2012년 12월 11일 이후 원세훈 전 국정원장 ‘지시·강조 말씀’ 문건 공개(2013년 3월 18~19일),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수사외압 폭로(4월 19~20일), 검찰 수사 결과 발표(6월 14~15일),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8월 16~21일)가 있기까지 대선개입 의혹 보도는 120건으로 절반에 못 미쳤다. 사실관계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은 내란음모 사건 보도가, 공식 수사나 국회 국정조사 일정을 거친 사건에 비해 압도적인 보도량을 보인 것이다.
언론사가 사건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는 의혹의 정황이 담긴 ‘RO 녹취록’과 ‘대선개입 CCTV’ 보도를 비교하면 더 확연히 드러났다. 검찰은 대선개입 의혹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서울지방경찰청이 국정원 선거 개입 정황을 알고도 은폐한 정황이 담긴 CCTV 증거 자료를 함께 공개했다. 그러나 MBC는 이를 단 한 꼭지로도 다루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4면, 동아일보는 수사 결과를 다룬 13면 기사 일부분에서 CCTV를 언급하는 데 그쳤다.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원장은 당시 미디어오늘에 “국정원 의혹과 내란음모 혐의 관련 보도가 현저한 불균형 상태”라고 지적한 데 이어 “국정원 수사 결과와 재판 결과가 다르게 나오면 언론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라고 우려를 전하기도 했다.
김재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사실 여부를 바로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워낙 양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김 전 의원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24시간 내내 뉴스 채널 같은 곳에서 ‘통진당 이석기’ 관련 내용이 쏟아지는데 ‘팩트체크’를 할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양이 많았고, 출처는 대부분 불분명했다”며 “몇 달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재판 과정에서 언론 보도를 통해 흘러나온 얘기들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음에도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일부 언론이 자신을 ‘RO 조직원’이라고 보도한 사례를 떠올렸다. 김 전 의원은 “나를 종북, 지하혁명조직(RO) 성원으로 낙인찍은 게 분명한 명예훼손임에도 공안기관은 물론 언론조차도 처벌받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마녀사냥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며 “‘한국일보 녹취록’을 시작으로 마구잡이로 내보냈던 보도 행태에 대해서는 분명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현재 내란 선동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6년째 복역 중이다. 대법원은 지난 2015년 1월 이 전 의원에게 내란음모 무죄, 내란 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라는 항소심 판결을 확정해 징역 9년을 선고했다. ‘RO’ 실체는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헌법재판소는 대법원판결에 앞선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했다.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5월 공개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문건에는 내란음모 사건이 청와대 협조 사례로 쓰여 있었다. 재판 배당을 조작한 정황도 나타났다.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던 김미희, 김재연, 오병윤 전 의원은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사건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황교안 현 토착왜구당 대표를 지난 1월 29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고소했다. 황 대표는 이 사건의 정부 측 ‘대리인’이었다.
황교안은 같은 날 당대표 경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통합진보당은 헌법에서 정한 민주적 기본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따라서 헌법이 해산하도록 규정한 정당이다. 1년 10개월 동안 헌법재판소 심리를 통해서 충분하게 위헌성이 입증됐다”고 주장했다. 황교안 취임 후 토착왜구당은 최근 4·3 보궐선거에서 통영시고성군 후보로 박근혜 정부 시절 법무부 ‘위헌 정당 대책 TF’ 팀장을 맡았던 황교안 검찰 시절 측근 정점식 후보를 내세웠다.
소위 보수 언론은 여차하면 이 의원 사건을 소환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대문구 KT 아현지사 화재 이후 조선일보는 “‘KT 혜화전화국 습격’ 이석기 내란 선동 다시 주목”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작성했다. 중앙일보는 통신 설비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기사를 쓰며 “이래서 ‘내란음모 사건’ 때 혜화전화국 운운했었나”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김재연 전 의원은 “잘못된 고리들을 풀어나가는 시작점”이 필요하다며 “풀어야 할 여러 숙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의원 지위 확인 소송 선고가 조만간 있을 것이고, 이석기 전 의원 재심청구, 종국에는 통합진보당 해산이라는 헌재 결정에 대해 다시금 평가할 수 있는 상황도 조만간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지난 수년간 언론의 모습을 바로잡을 기회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란음모 사건으로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복역한 분들이 출소하고 이석기 전 의원만 형을 남겨둔 상황이다. 가족을 비롯해 10만명에 달했던 당원들에게도 매우 큰 아픔과 상처”라고 말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잊어도 되는, 덮어두자는 태도로는 적폐 청산이나 새로운 대한민국 만드는 일은 제대로 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언론이 지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정당이 해산되며 ‘전직 국회의원’이 되어버린 한 사람의 호소다.
출처 누가 이석기를 ‘악마’로 만들었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재심 청구 앞두고 과거 보도 양상 살펴보니
국정원발 의혹 기정사실화해 ‘잘못된 고리’ 만든 언론
“새로운 시작점 필요”
[미디어오늘] 노지민 기자 | 2019년 04월 13일 토요일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다룬 ‘이카로스의 감옥’ 저자 문영심 작가는 ‘통합진보당 사람들’을 “유대인”에 빗대었다. 불법적 행위와 인권 탄압에 놓인 피해자들에게는 보호가 아닌 ‘종북’ 낙인과 언론의 마녀사냥이 따라왔다며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유대인들인가”라고 되물었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는 ‘내란음모’가 없었고, ‘RO 회합 녹취록’의 ‘RO(Revolution Organization)’는 실체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내란 선동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된 6년 동안 수많은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그리고 지난 3·1절 특사를 앞둔 시점에서도 ‘이석기 석방’ 구호는 사실상 경계 밖에 있었다. 과거 이 사건이 부당하다고 비판했던 진보진영도 이제는 ‘이석기’를 말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일종의 금기어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변호인단은 오는 29일 이 전 의원에 대한 재심을 청구한다. “우리 모두가 돌을 던진 가해자라고 고백하고 진심으로 뉘우쳐야 하는 사건”(함세웅 신부)에 언론은 뒤늦은 반성문을 쓸 수 있을까. 당시 사건과 보도들을 돌아봤다.
▲ 내란음모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2013년 9월 2일 정기국회 첫날 오전 국회 의원회관 오병윤 의원실에서 열린 대책회의 참석을 위해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수사 시작되자마자 ‘여론재판’ 끝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은 2013년 8월 28일 국가정보원이 이석기 의원 등 당시 통합진보당 간부 10명이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다며 이들 자택과 사무실 등을 압수 수색을 하면서 시작됐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이후 33년 만에 부활한 내란음모 혐의였다.
공안 당국이 공식으로 구체적인 혐의를 밝히기도 전에 언론은 의혹을 대서특필했다. ‘국정원 관계자’, ‘공안 당국 관계자’ 주장을 인용해 1면 기사로 썼다. 29일 자 경향신문(국정원, 진보당 이석기 의원실 압수수색), 국민일보(“이석기, 국가기간시설 타격·인명 살상 모의”), 동아일보(“이석기, 통신-철도-가스시설 파괴 모의”), 서울신문(국정원 “이석기 조직원에 총기 준비” 녹취록 확보), 세계일보(“이석기, 북 남침 때 국가시설 파괴 준비”), 조선일보(“이석기 의원, 총기 마련해 국가시설 파괴 모의”), 중앙일보(“애국가 거부 이석기, 적기가는 불렀다”) 등이다.
이날 주요 전국단위 아침신문 가운데 1면 머리기사 제목으로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은 신문은 한겨레(‘내란음모죄’의 부활), 한국일보(33년 만에 재등장한 내란음모 사건)뿐이었다.
▲ 이른바 'RO 녹취록'을 단독 보도한 한국일보의 2013년 8월 30일자 1면.
사건의 ‘판’은 한국일보의 ‘내란음모 RO 회합’ 녹취록 단독 입수 보도로 굳어졌다. 한국일보는 30일 “A4용지 62쪽 분량의 내란음모 RO(Revolution Organization) 회합 녹취록을 단독 입수했다”며 녹취록을 근거로 ‘회합’ 내용을 보도했다. 1면 머리기사 “전쟁 준비하자…군사적 체계 찰 갖춰라”를 비롯해 “고난을 각오…시작된 전쟁 끝내자”(2면), “철도를 통제하는 곳, 이걸 파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 방법이다”(2면) 등 녹취록 상 발언 내용이 기사 제목에 소개됐다. 한국일보 녹취록 보도는 그해 8월 ‘이달의 기자상’에 선정됐다.
이 의원을 변호했던 김칠준 변호사는 2013년 보도들 가운데 △8월 30일 자 한국일보 1면 “해외 자금책, 유로화를 ‘RO’에 혁명자금으로 송금” △8월 20일 자 국민일보 1면 “경기동부연합 6~7명 최소 2차례 밀입북 포착” △9월 5일 자 동아일보 “[단독]RO 조직원 PC에 폭탄제조법 있었다” 등을 ‘매카시 광풍을 확산시킨 언론의 왜곡 보도’로 꼽았다.
그해 9월까지 사건 보도를 장악한 ‘RO 녹취록’은, 11월부터 이어진 재판에서 상당 부분이 원본이 없거나 잘못 적힌 것으로 확인됐다. 이 전 의원 변호인단이 녹취록 오류 400여 건을 지적한 가운데, 국정원과 검찰은 녹취록에 사용된 표현 272개를 수정해 다시 재판부에 제출했다. 수정 내용에 따르면 국정원은 핵 보유가 전면화될 경우 ‘전면전은 안 된다’는 이 의원 발언을 정 반대 의미인 ‘전면전야 전면전’으로, ‘시 단위’는 ‘실탄’, ‘통일적인 대응’은 ‘폭력적인 대응’, ‘남측 정국의 이해’는 ‘남측 정부의 이해’로 썼다.
도 넘은 종북몰이, 위법적 수사는 외면
그해 9월 4일 국회 체포동의안 의결 이후 자진 출석 의사를 밝힌 뒤 국회에 머물던 이 의원은 결의안 통과 3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강제 구인됐다. 이 의원에 대한 소환 절차가 충실히 진행되지 않았다는 지적 속에 강제구인까지 진행됐다는 점에서 “국회의원의 양심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게 된 선례를 남겼다”(박범계 당시 민주당 의원)는 지적이 나왔다.
앞서 이 의원 변호인 측이 제기해 온 압수수색 과정에서의 인권침해 및 변호인 방어권 침해, 의원실 압수수색 과정의 적법절차 위반 등 문제는 힘을 얻지 못했다.
진보 진영에서도 이를 방조했다는 지적과 관련해 당시 이 의원 등을 ‘종북’으로 몰아가는 보도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해석도 있다. 국정원이 압수수색에 나선 8월 28일부터 이 의원 체포동의안이 의결된 9월 4일까지 온라인에서 ‘이석기’, ‘간첩’, ‘북한연계’를 키워드로 작성된 기사는 최소 610여 건에 달했다.
이 의원이 정치인으로서 일부 도가 지나친 발언을 했다는 비판과 관련 해명을 하며 입장을 번복해 신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더해지면서 정치권에서도 사실상 선 긋기 기조가 높아졌다.
▲ 2013년 9월 4일 국회에서 이석기 당시 통합진보당 의원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뒤 통합진보당 소속 의원들이 손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이준호 이석기 구명위 팀장은 미디어오늘에 “처음에는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미디어나 국민들이 반신반의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수사기관을 통해 전해진 녹취록이 언론을 통해 이틀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이 첫 번째 뇌관이었다”며 “북 연계 잠수함 설, 해외공작원, 아들 주체사상 강요 등 이 의원 등이 직·간접적으로 북한과 연계됐다는 취지들의 보도들이 국회 본회의 체포동의안 의결을 앞두고 쏟아졌다. 이 두 가지로 여론재판은 끝나버렸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당시 미디어 환경은 지금과는 또 다른 환경이었다. 정부 여당 등이 여러 힘을 동원해 언론이 자유롭게 숨쉬기 어려운 환경이었다고 본다. 이른바 팩트체크에 대한 엄격성도 지금보다는 상대적으로 낮았던 시기라고 생각한다”며 “이미 방향이 잡혀 있는데 뒤집힐 가능성이 높지 않은 상태에서 (반론이나 반박에 나설) 필요성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도 매체 등의 성향과 또 다르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석기에 집중하는 동안,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은 묻혀
언론이 이석기에 열을 올리는 동안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은 밀려났다. 국정원의 압수수색 이후 9월 2일까지 6일간 지상파 3사(KBS·MBC·SBS)와 조선·중앙·동아일보의 내란음모 의혹 보도는 260건에 달했다.
반면 국정원 불법 선거 운동 의혹이 제기된 2012년 12월 11일 이후 원세훈 전 국정원장 ‘지시·강조 말씀’ 문건 공개(2013년 3월 18~19일),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수사외압 폭로(4월 19~20일), 검찰 수사 결과 발표(6월 14~15일),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8월 16~21일)가 있기까지 대선개입 의혹 보도는 120건으로 절반에 못 미쳤다. 사실관계 확인이 제대로 되지 않은 내란음모 사건 보도가, 공식 수사나 국회 국정조사 일정을 거친 사건에 비해 압도적인 보도량을 보인 것이다.
▲ 2013년 당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과 황교안 법무부장관. ⓒ연합뉴스
언론사가 사건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는 의혹의 정황이 담긴 ‘RO 녹취록’과 ‘대선개입 CCTV’ 보도를 비교하면 더 확연히 드러났다. 검찰은 대선개입 의혹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서울지방경찰청이 국정원 선거 개입 정황을 알고도 은폐한 정황이 담긴 CCTV 증거 자료를 함께 공개했다. 그러나 MBC는 이를 단 한 꼭지로도 다루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4면, 동아일보는 수사 결과를 다룬 13면 기사 일부분에서 CCTV를 언급하는 데 그쳤다.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원장은 당시 미디어오늘에 “국정원 의혹과 내란음모 혐의 관련 보도가 현저한 불균형 상태”라고 지적한 데 이어 “국정원 수사 결과와 재판 결과가 다르게 나오면 언론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라고 우려를 전하기도 했다.
김재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사실 여부를 바로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워낙 양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김 전 의원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24시간 내내 뉴스 채널 같은 곳에서 ‘통진당 이석기’ 관련 내용이 쏟아지는데 ‘팩트체크’를 할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양이 많았고, 출처는 대부분 불분명했다”며 “몇 달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재판 과정에서 언론 보도를 통해 흘러나온 얘기들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음에도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일부 언론이 자신을 ‘RO 조직원’이라고 보도한 사례를 떠올렸다. 김 전 의원은 “나를 종북, 지하혁명조직(RO) 성원으로 낙인찍은 게 분명한 명예훼손임에도 공안기관은 물론 언론조차도 처벌받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마녀사냥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며 “‘한국일보 녹취록’을 시작으로 마구잡이로 내보냈던 보도 행태에 대해서는 분명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2013년 9월 4일 미디어오늘 4면.
‘이석기 사건’은 현재 진행형
이 전 의원은 현재 내란 선동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6년째 복역 중이다. 대법원은 지난 2015년 1월 이 전 의원에게 내란음모 무죄, 내란 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라는 항소심 판결을 확정해 징역 9년을 선고했다. ‘RO’ 실체는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헌법재판소는 대법원판결에 앞선 2014년 12월 19일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했다.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5월 공개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 문건에는 내란음모 사건이 청와대 협조 사례로 쓰여 있었다. 재판 배당을 조작한 정황도 나타났다.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던 김미희, 김재연, 오병윤 전 의원은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사건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황교안 현 토착왜구당 대표를 지난 1월 29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고소했다. 황 대표는 이 사건의 정부 측 ‘대리인’이었다.
황교안은 같은 날 당대표 경선 출마 기자회견에서 “통합진보당은 헌법에서 정한 민주적 기본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따라서 헌법이 해산하도록 규정한 정당이다. 1년 10개월 동안 헌법재판소 심리를 통해서 충분하게 위헌성이 입증됐다”고 주장했다. 황교안 취임 후 토착왜구당은 최근 4·3 보궐선거에서 통영시고성군 후보로 박근혜 정부 시절 법무부 ‘위헌 정당 대책 TF’ 팀장을 맡았던 황교안 검찰 시절 측근 정점식 후보를 내세웠다.
▲ 오병윤, 김재연, 김미희 통합진보당 전 국회의원은 지난 1월 29일 서울중앙지검에 황교안을 직권남용권리행사 및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고발했다. 사진=민중의소리
소위 보수 언론은 여차하면 이 의원 사건을 소환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대문구 KT 아현지사 화재 이후 조선일보는 “‘KT 혜화전화국 습격’ 이석기 내란 선동 다시 주목”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작성했다. 중앙일보는 통신 설비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기사를 쓰며 “이래서 ‘내란음모 사건’ 때 혜화전화국 운운했었나”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김재연 전 의원은 “잘못된 고리들을 풀어나가는 시작점”이 필요하다며 “풀어야 할 여러 숙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회의원 지위 확인 소송 선고가 조만간 있을 것이고, 이석기 전 의원 재심청구, 종국에는 통합진보당 해산이라는 헌재 결정에 대해 다시금 평가할 수 있는 상황도 조만간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지난 수년간 언론의 모습을 바로잡을 기회가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내란음모 사건으로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복역한 분들이 출소하고 이석기 전 의원만 형을 남겨둔 상황이다. 가족을 비롯해 10만명에 달했던 당원들에게도 매우 큰 아픔과 상처”라고 말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잊어도 되는, 덮어두자는 태도로는 적폐 청산이나 새로운 대한민국 만드는 일은 제대로 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언론이 지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정당이 해산되며 ‘전직 국회의원’이 되어버린 한 사람의 호소다.
출처 누가 이석기를 ‘악마’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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