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미군정 특혜로 정치자금 1천만원 독식하다
이승만의 정치자금
일제에 부역했던 자산가들 중심
‘경제보국회’ 10명 2천만원 대출
이 중 1천만원 이승만에게 제공
부일행위 무마하려는 ‘보험료’ 성격
백미 1천석 살 수 있는 거금
[한겨레]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 등록 : 2019-05-11 13:48 | 수정 : 2019-05-11 13:54
이승만이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을 지내다 미국으로 돌아간 밀러드 굿펠로에게 1946년 8월 5일 편지 한 통을 보냈다. 편지는 미군정 내 친구들이 그가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전언으로 시작한다.
심지어 미군정 고문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어렵거나 그것이 그에게 자유로운 재량권을 부여할 수 없다면 이승만의 개인 고문으로, 그것은 결국 한국 정부가 수립되면 한국 정부의 고문이 되는 것을 의미하니 그 점도 고려해서 가능한 한 빨리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결정해달라고 제안한다. 편지는 미군정이나 이승만이나 굿펠로를 절실하게 원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설 고문 제안도 흥미 있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이승만이 수령한 1천만원과 관련해서 그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편지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그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복잡한 내용이고, 앞뒤 관계를 이해하려면 꽤 긴 설명이 필요하다. 이승만에게 ‘보고서’라는 제목의 진술서를 작성하고 그것에 서명한 사람들은 민규식, 전용순, 강익하, 최창학, 박기효, 하준석, 공진항, 장준섭, 김성준, 조준호 등이었다.
이승만이 수령한 1천만원이 마련되고 전달되는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대한경제보국회회원이었고 대부분 자산가였다. 경제보국회는 1945년 12월에 결성되었고, 부일(附日) 협력 경력이 짙은 경제인이 대거 참여했다. 그들이 내건 창립 목적은 미곡 수집 촉진이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표면적이었고 실은 보국기금(輔國基金), 즉 우익진영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정치자금 모집이 주목표였다.
해방 직후 정치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정치자금에 주목해야 한다. 정치자금의 동원과 흐름은 광장을 가득 메운 격렬한 구호나 거리에 난무한 폭력보다 당시 정치의 본질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치자금처럼 그것이 지향하는 현실적인 목표, 권력의 술수, 또 연루된 인간들의 욕망을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이승만의 편지에서 정치자금 내용이 눈에 쏙 들어온 이유다.
경제보국회는 경제인들과 미군정, 그리고 이승만의 의도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945년 12월 조직되었다.
미군정은 식량 위기가 점차 격화하자 미곡 수집에 이승만의 도움을 연출하여 그의 정치적 명성을 제고하고, 그것을 계기로 그에 대해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싶어 했다. 그를 중심으로 우익세력의 통합을 모색하던 때였던 만큼 미군정으로서는 그의 정치적 명성 제고나 그에 대한 경제적 지원 모두 필요한 시점이었다.
경제보국회에 참여한 자산가들은 우익진영의 최고지도자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여 그 돈을 과거 자신들의 부일협력 행위를 불식하는 보험료로 활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 미군정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서 일제가 남긴 적산 매각에 참여하는 등 이권을 확보하거나 미곡 수집과 같이 식량이나 생필품의 배급권과 통제권을 확보하여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경제적 고려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1945년 말부터 미군정의 후광 속에서 정계 통합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이승만은 정치자금 확보가 절실했다. 그가 사실상 경제보국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그는 경제인들의 모임을 주선하는 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미군정을 통해 조선은행에서 2억원을 대부받는다는 기금 모집 방안을 제시했다. 2억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어쨌든 경제보국회는 그가 제시한 방안에 따라 2천만원을 조선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았고, 그 가운데 1천만원을 이승만에게 제공했다. 그가 미군정의 후원을 받고 있는 대한경제보국회 회원들에게 이승만은 그들을 미군정과 연결하는 든든한 고리였다.
당시 은행 여신 한도는 10만원
미군정 승인 없인 불가능한 액수
특혜 대출-정치자금 흐름 배후엔
미군정 정치고문 굿펠로 있어
한국에 무기 판매 등으로 큰돈 벌어
미군정과 이승만 사이를 오가며 그가 제시한 기금 모집 방안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해준 것은 굿펠로였다.
경제보국회가 창립되어 한창 기금을 모으던 시기에 굿펠로의 주선과 공작으로 우익의 대표기구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이 수립되었고 이승만이 의장, 김구와 김규식이 부의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1946년 3월 19일 돌연 민주의원 의장직을 칭병휴직(稱病休職)했다.
그 이튿날 미소공동위원회가 시작하는 만큼 그의 반소·반탁 입장을 고려해서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물러나 있게 하려던 미군정의 배려도 있었고, 더 직접적으로는 이승만이 해방 이전 미국에서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행세하며 미국인 광산업자에게 운산금광 채굴권을 넘겼던 스캔들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굿펠로 역시 이 광업권 매각 스캔들에 연루되어 5월 24일 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출국 하루 전인 5월23일 경제보국회는 대부금 가운데 1천만원을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굿펠로는 이승만을 도와준 미국인 사설고문단(Kitchen Cabinet)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2차대전 중 미 전략국(OSS) 부국장으로 일했던 그는 해방 전부터 워싱턴의 정가·군부와 이승만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했고, 이승만이 그를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추천해서 1946년 초 남한에 들어왔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미군정 정치고문으로 다시 한국에 오는 것이 불편하면 그의 사설 고문으로 올 것을 제안했지만, 이미 그 전부터 그는 이승만의 고문인지 하지의 고문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이승만과 밀착되어 있다. 이승만의 사설고문단에 속한 미국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조사한 미 국무부 정보보고서는 이승만과 그들을 연결해준 것은 개인적 이해관계, 즉, 이권이었다고 암시했지만 굿펠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굿펠로는 이승만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던 1946년에는 오지 못했지만, 한국 정부 수립 뒤에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한국 정부에 무기, 선박 등 온갖 물품을 파는 중개상이 되었고, 1950년대 한-미 간의 사업거래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이었다.
당시 금융기관이 2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대부한 것은 명백히 특혜이자 불법이었다. 미군정은 금융기관이 어떤 단체나 개인에게도 총액 10만원을 초과하여 여신을 확장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경제보국회원 10명은 1명당 200만원을 대출받았고, 그것은 미군정 최고 당국자의 정치적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편지에서도 드러나듯 이승만은 2천만원을 독점하길 원했고, 그 돈의 운용 또한 자신이 전결하기를 원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경제보국회를 압박하여 자금의 분배상황을 진술한 ‘보고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승만이 받은 1천만원 외에 500만원은 미군정이 발간하던 <농민주보> 지원금으로, 100만원은 민주의원 지원금으로, 약 200만원은 독립촉성국민회의 등 우익계 단체들에 대한 지원금으로 제공되었다. 요약하면 이승만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조성한 정치자금 2천만원 가운데 일부는 미군정 통치자금으로, 일부는 우익단체의 활동비로 활용되었고, 그 절반이 이승만의 수중에 떨어졌다.
위 편지는 진술서에 서명한 경제보국회 회원들이 2년 안에 대부금을 상환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의로 대출받은 대부금을 자신들을 위한 보험료 내지 투자의 일환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농민주보>는 미군정이 농민 교화와 계몽을 목적으로 1945년 12월 22일 창간했고, 1948년 8월까지 미군의 점령 기간 내내 발행했다. 당시 간행된 신문 대부분이 용지 부족으로 1만~2만부 정도를 발행했고, 많아야 6만부 정도가 최대 발행 부수였던 것에 견줘 <농민주보>는 창간호로 80만부를 찍었고, 무료로 농민들에게 배포했다. 5·10 선거를 앞두고는 발행 부수를 150만부까지 늘렸다.
<농민주보>의 배급은 주로 미군정 행정 라인을 따라 군수·면장에게 일차 보급해서 지역의 가구로 배부하거나 각급 학교를 통해 학생들이 가정으로 가져가는 식이었다. 미군정 선전정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매체였고, 미군정이 자신의 정책을 농민들에게 홍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편지에서 언급한 신문과 ‘교육 활동’은 모두 <농민주보>를 의미했다.
이승만이 헌납받은 1천만원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였는지, 그가 장악한 우익 대중단체들의 활동자금으로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받은 1천만원은 당시 백미 2천석을 시세대로 한꺼번에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승만은 위 편지에서 자신이 1천만원 받은 것을 ‘사소한 사항일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경제보국회원들의 자금 제공 취지와 동원 과정, 상환 계획, 자금의 용처 등을 시시콜콜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노회한 이승만은 굿펠로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이 정치자금을 자신이 독점으로 사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미군정에 전달하는 한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자신이 받은 것은 미군정과 상관없이 경제인들이 조성하여 제공한 ‘독립에 필요한 운동자금’일 뿐이라는 점을 기록으로 남겼다.
위 편지를 쓴 때는 미군정이 조심스럽게 좌우합작운동 지원을 시작하던 무렵이었던 만큼 의구심이 가득 찬 눈초리로 그것을 지켜보던 이승만은 한층 더 세심하게 증빙서류를 챙길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출처 이승만, 미군정 특혜로 정치자금 1천만원 독식하다
이승만의 정치자금
일제에 부역했던 자산가들 중심
‘경제보국회’ 10명 2천만원 대출
이 중 1천만원 이승만에게 제공
부일행위 무마하려는 ‘보험료’ 성격
백미 1천석 살 수 있는 거금
[한겨레]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 등록 : 2019-05-11 13:48 | 수정 : 2019-05-11 13:54
▲ 미군정은 1945년 말부터 이승만을 중심으로 우익세력의 통합을 추구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하지 미군 사령관의 정치고문 굿펠로는 이승만에게 정치자금 특혜를 주선했다. 사진은 1945년 11월 28일 미군정 사령관인 하지 중장이 우익진영의 대표자 격인 이승만(맨 오른쪽)과 김구(중앙)를 면담하고 있는 모습이다. 맨 왼쪽은 이승만의 비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이승만이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을 지내다 미국으로 돌아간 밀러드 굿펠로에게 1946년 8월 5일 편지 한 통을 보냈다. 편지는 미군정 내 친구들이 그가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전언으로 시작한다.
심지어 미군정 고문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어렵거나 그것이 그에게 자유로운 재량권을 부여할 수 없다면 이승만의 개인 고문으로, 그것은 결국 한국 정부가 수립되면 한국 정부의 고문이 되는 것을 의미하니 그 점도 고려해서 가능한 한 빨리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결정해달라고 제안한다. 편지는 미군정이나 이승만이나 굿펠로를 절실하게 원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설 고문 제안도 흥미 있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이승만이 수령한 1천만원과 관련해서 그가 장황하게 늘어놓은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편지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그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우리의 대의에 1천만원을 기부한 10인의 자금 지원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미군정과의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그것을 바로잡는 데 꽤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미군정이 내 해명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당신에게 알려주려고 전문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들이 내가 써준 초안대로 당신에게 전문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 내가 써준 초안의 사본 한 통을 동봉합니다.
열 사람은 그 돈이 미군정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일체 부정하는 기명 진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그들이 제공한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2천만원을 대출받을 수 있도록 당신이 미군정의 허락을 얻어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2년 안에 대부금을 갚고자 합니다.
나는 왜 미군정이 그들에게 ‘교육 활동’과 민주의원 지원을 위해 총액 2천만원을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그 기부자들은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한 기부였다고 진술서를 작성했습니다.
당신이 한국에서 출국하기 전에 내가 자필 서명이 들어간 진술서의 확보를 요구했다는 점을 당신은 기억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계속 요구했고, 마침내 그것을 확보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그들이 은행에서 받자마자 나에게 가져오겠다고 약속한 다른 1천만원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들은 스스로 그 돈을 두 신문의 발간 비용으로 쓰려고 합니다. 나는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그들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그들의 이름을 어느 정도 알릴 수는 있겠지만 그 돈을 낭비하게 될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목적으로 사용할 것을 결정했고, 나는 더 이상 얘기할 것이 없었습니다. 미군정이 그들에게 나도 동의했으니 그들의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얘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저 사소한 사항일 뿐이고, 이에 관해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일 것까지야 없지만 미군정이 세세한 진상을 알고 싶어 하니 이 사항이 현재 어떻게 되어 있는지 당신에게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미군정이 내 해명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당신에게 알려주려고 전문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들이 내가 써준 초안대로 당신에게 전문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 내가 써준 초안의 사본 한 통을 동봉합니다.
열 사람은 그 돈이 미군정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일체 부정하는 기명 진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그들이 제공한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2천만원을 대출받을 수 있도록 당신이 미군정의 허락을 얻어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2년 안에 대부금을 갚고자 합니다.
나는 왜 미군정이 그들에게 ‘교육 활동’과 민주의원 지원을 위해 총액 2천만원을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그 기부자들은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한 기부였다고 진술서를 작성했습니다.
당신이 한국에서 출국하기 전에 내가 자필 서명이 들어간 진술서의 확보를 요구했다는 점을 당신은 기억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계속 요구했고, 마침내 그것을 확보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그들이 은행에서 받자마자 나에게 가져오겠다고 약속한 다른 1천만원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들은 스스로 그 돈을 두 신문의 발간 비용으로 쓰려고 합니다. 나는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그들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그들의 이름을 어느 정도 알릴 수는 있겠지만 그 돈을 낭비하게 될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목적으로 사용할 것을 결정했고, 나는 더 이상 얘기할 것이 없었습니다. 미군정이 그들에게 나도 동의했으니 그들의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얘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저 사소한 사항일 뿐이고, 이에 관해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일 것까지야 없지만 미군정이 세세한 진상을 알고 싶어 하니 이 사항이 현재 어떻게 되어 있는지 당신에게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 이승만이 운산금광 스캔들로 미국으로 돌아간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 그는 이 편지에서 경제보국회원들한테 받은 정치자금 1천만원에 대해 장황하게 해명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 이승만이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의 뒷장.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해방 직후 정치의 핵심 ‘정치자금’
복잡한 내용이고, 앞뒤 관계를 이해하려면 꽤 긴 설명이 필요하다. 이승만에게 ‘보고서’라는 제목의 진술서를 작성하고 그것에 서명한 사람들은 민규식, 전용순, 강익하, 최창학, 박기효, 하준석, 공진항, 장준섭, 김성준, 조준호 등이었다.
이승만이 수령한 1천만원이 마련되고 전달되는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대한경제보국회회원이었고 대부분 자산가였다. 경제보국회는 1945년 12월에 결성되었고, 부일(附日) 협력 경력이 짙은 경제인이 대거 참여했다. 그들이 내건 창립 목적은 미곡 수집 촉진이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표면적이었고 실은 보국기금(輔國基金), 즉 우익진영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정치자금 모집이 주목표였다.
해방 직후 정치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정치자금에 주목해야 한다. 정치자금의 동원과 흐름은 광장을 가득 메운 격렬한 구호나 거리에 난무한 폭력보다 당시 정치의 본질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치자금처럼 그것이 지향하는 현실적인 목표, 권력의 술수, 또 연루된 인간들의 욕망을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이승만의 편지에서 정치자금 내용이 눈에 쏙 들어온 이유다.
▲ 일제에 부역했던 인사들이 중심이 된 경제보국회원 10명은 은행으로부터 특혜 대출 받은 2천만원 가운데 1천만원의 정치자금을 이승만에게 ‘독립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제공했다. 연세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 경제보국회가 이승만에게 자금을 제공한 경위 등을 기록한 보고서. 연세대 한국학연구소 소장
경제보국회는 경제인들과 미군정, 그리고 이승만의 의도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945년 12월 조직되었다.
미군정은 식량 위기가 점차 격화하자 미곡 수집에 이승만의 도움을 연출하여 그의 정치적 명성을 제고하고, 그것을 계기로 그에 대해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싶어 했다. 그를 중심으로 우익세력의 통합을 모색하던 때였던 만큼 미군정으로서는 그의 정치적 명성 제고나 그에 대한 경제적 지원 모두 필요한 시점이었다.
경제보국회에 참여한 자산가들은 우익진영의 최고지도자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여 그 돈을 과거 자신들의 부일협력 행위를 불식하는 보험료로 활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 미군정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서 일제가 남긴 적산 매각에 참여하는 등 이권을 확보하거나 미곡 수집과 같이 식량이나 생필품의 배급권과 통제권을 확보하여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경제적 고려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1945년 말부터 미군정의 후광 속에서 정계 통합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이승만은 정치자금 확보가 절실했다. 그가 사실상 경제보국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그는 경제인들의 모임을 주선하는 데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미군정을 통해 조선은행에서 2억원을 대부받는다는 기금 모집 방안을 제시했다. 2억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어쨌든 경제보국회는 그가 제시한 방안에 따라 2천만원을 조선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았고, 그 가운데 1천만원을 이승만에게 제공했다. 그가 미군정의 후원을 받고 있는 대한경제보국회 회원들에게 이승만은 그들을 미군정과 연결하는 든든한 고리였다.
당시 은행 여신 한도는 10만원
미군정 승인 없인 불가능한 액수
특혜 대출-정치자금 흐름 배후엔
미군정 정치고문 굿펠로 있어
한국에 무기 판매 등으로 큰돈 벌어
이승만의 사설고문, 굿펠로
미군정과 이승만 사이를 오가며 그가 제시한 기금 모집 방안을 실천에 옮길 수 있게 해준 것은 굿펠로였다.
경제보국회가 창립되어 한창 기금을 모으던 시기에 굿펠로의 주선과 공작으로 우익의 대표기구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이 수립되었고 이승만이 의장, 김구와 김규식이 부의장이 되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1946년 3월 19일 돌연 민주의원 의장직을 칭병휴직(稱病休職)했다.
그 이튿날 미소공동위원회가 시작하는 만큼 그의 반소·반탁 입장을 고려해서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물러나 있게 하려던 미군정의 배려도 있었고, 더 직접적으로는 이승만이 해방 이전 미국에서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행세하며 미국인 광산업자에게 운산금광 채굴권을 넘겼던 스캔들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굿펠로 역시 이 광업권 매각 스캔들에 연루되어 5월 24일 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출국 하루 전인 5월23일 경제보국회는 대부금 가운데 1천만원을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 미군정의 정치고문이었던 굿펠로는 이승만의 개인고문으로 여겨질 정도로 이승만과 유착했다. 미군정에 고문으로 추천한 이도 이승만이었다. 굿펠로는 이승만 정부에서 한국을 상대로 한 무기 판매 등으로 큰돈을 벌었다. 굿펠로 부부와 이승만 부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자문기관으로 만들어진 남조전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 발족식(1946.2.14)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범우익진영이 결집한 민주의원은 남한 단독정부 구성 문제로 이승만 계열과 김규식 등 중간파들 간의 갈등으로 사실상 와해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 미 국무부 조사연구실이 1949년 ‘이승만의 사설고문단(Kitchen Cabinet)’에 관해 작성한 비밀보고서에서 굿펠로에 관한 부분의 일부. 정용욱 교수 제공
굿펠로는 이승만을 도와준 미국인 사설고문단(Kitchen Cabinet)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2차대전 중 미 전략국(OSS) 부국장으로 일했던 그는 해방 전부터 워싱턴의 정가·군부와 이승만을 연결해주는 구실을 했고, 이승만이 그를 하지의 정치고문으로 추천해서 1946년 초 남한에 들어왔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미군정 정치고문으로 다시 한국에 오는 것이 불편하면 그의 사설 고문으로 올 것을 제안했지만, 이미 그 전부터 그는 이승만의 고문인지 하지의 고문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이승만과 밀착되어 있다. 이승만의 사설고문단에 속한 미국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조사한 미 국무부 정보보고서는 이승만과 그들을 연결해준 것은 개인적 이해관계, 즉, 이권이었다고 암시했지만 굿펠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굿펠로는 이승만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했던 1946년에는 오지 못했지만, 한국 정부 수립 뒤에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한국 정부에 무기, 선박 등 온갖 물품을 파는 중개상이 되었고, 1950년대 한-미 간의 사업거래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이었다.
당시 금융기관이 2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대부한 것은 명백히 특혜이자 불법이었다. 미군정은 금융기관이 어떤 단체나 개인에게도 총액 10만원을 초과하여 여신을 확장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경제보국회원 10명은 1명당 200만원을 대출받았고, 그것은 미군정 최고 당국자의 정치적 결단 없이는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편지에서도 드러나듯 이승만은 2천만원을 독점하길 원했고, 그 돈의 운용 또한 자신이 전결하기를 원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경제보국회를 압박하여 자금의 분배상황을 진술한 ‘보고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승만이 받은 1천만원 외에 500만원은 미군정이 발간하던 <농민주보> 지원금으로, 100만원은 민주의원 지원금으로, 약 200만원은 독립촉성국민회의 등 우익계 단체들에 대한 지원금으로 제공되었다. 요약하면 이승만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조성한 정치자금 2천만원 가운데 일부는 미군정 통치자금으로, 일부는 우익단체의 활동비로 활용되었고, 그 절반이 이승만의 수중에 떨어졌다.
위 편지는 진술서에 서명한 경제보국회 회원들이 2년 안에 대부금을 상환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의로 대출받은 대부금을 자신들을 위한 보험료 내지 투자의 일환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농민주보>는 미군정이 농민 교화와 계몽을 목적으로 1945년 12월 22일 창간했고, 1948년 8월까지 미군의 점령 기간 내내 발행했다. 당시 간행된 신문 대부분이 용지 부족으로 1만~2만부 정도를 발행했고, 많아야 6만부 정도가 최대 발행 부수였던 것에 견줘 <농민주보>는 창간호로 80만부를 찍었고, 무료로 농민들에게 배포했다. 5·10 선거를 앞두고는 발행 부수를 150만부까지 늘렸다.
<농민주보>의 배급은 주로 미군정 행정 라인을 따라 군수·면장에게 일차 보급해서 지역의 가구로 배부하거나 각급 학교를 통해 학생들이 가정으로 가져가는 식이었다. 미군정 선전정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매체였고, 미군정이 자신의 정책을 농민들에게 홍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편지에서 언급한 신문과 ‘교육 활동’은 모두 <농민주보>를 의미했다.
▲ 농민에 대한 교화를 목적으로 미군정이 통치기간 내내 발간한 <농민주보>.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앞두고 발행된 지면.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천만원 사용처 안 밝혀져
이승만이 헌납받은 1천만원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였는지, 그가 장악한 우익 대중단체들의 활동자금으로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받은 1천만원은 당시 백미 2천석을 시세대로 한꺼번에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승만은 위 편지에서 자신이 1천만원 받은 것을 ‘사소한 사항일 뿐’이라고 말하면서도 경제보국회원들의 자금 제공 취지와 동원 과정, 상환 계획, 자금의 용처 등을 시시콜콜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노회한 이승만은 굿펠로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이 정치자금을 자신이 독점으로 사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미군정에 전달하는 한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자신이 받은 것은 미군정과 상관없이 경제인들이 조성하여 제공한 ‘독립에 필요한 운동자금’일 뿐이라는 점을 기록으로 남겼다.
위 편지를 쓴 때는 미군정이 조심스럽게 좌우합작운동 지원을 시작하던 무렵이었던 만큼 의구심이 가득 찬 눈초리로 그것을 지켜보던 이승만은 한층 더 세심하게 증빙서류를 챙길 필요성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출처 이승만, 미군정 특혜로 정치자금 1천만원 독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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