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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수가/정치·사회·경제

“우리가 해봐서 아는데…” 위험한 토착왜구당 ‘북풍의 추억’

“우리가 해봐서 아는데…” 위험한 토착왜구당 ‘북풍의 추억’
나경원-정용기 콤비의 좌충우돌 신북풍론
한반도 평화 통째로 부정하는 위험한 사고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 일정 의심스럽다”
모르고 주장하면 무지···알고도 하면 비양심
분단 기득권 세력 1996~1997년 ‘북풍’ 공작
북한에 대한 조사 불가능해 실체 규명 한계
언젠가 진실 밝혀 역사적 법적 책임 물어야

[한겨레] 성한용 선임기자 | 등록 : 2019-06-02 14:11 | 수정 : 2019-06-02 18:15


▲ 1996년 총선 직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진 북한군 무력시위 사건을 보도하는 <한국방송> 뉴스화면 갈무리.

토착왜구당정용기 정책위의장이 5월 31일 천안 우정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국회의원-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서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보다 지도자로서 더 나은 면이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언론 보도로 비판이 쏟아지자 정용기 정책위의장은 자신의 발언 전체를 페이스북에 동영상으로 띄웠습니다. 그리고 “악의를 가지고 왜곡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실 것”이라며 “인사권자로서 대통령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한 얘기를 왜 왜곡하는지?”라고 반문했습니다. 정용기 의장이 정확히 뭐라고 말했을까요? 영상을 그대로 풀어 봤습니다.

현 정치 상황과 관련해서 짧게 제가 말씀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조선일보에 난 기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나 모르겠습니다. 김영철 숙청했고 김혁철 처형했고 심지어 자기 동생 여동생 김여정까지 지금 근신하고 있다. 이 기사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참 북한은 인권이라는 게 없는 나라구나, 그리고 이 김정은이의 야만성 이런 것에 몸서리가 쳐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야만성 불법성 비인간성 이런 부분 뺀다면 어떤 면에서는 김정은이가 우리 문재인 대통령보다 지도자로서 더 나은 면도 있는 것 같다. 지도자로서 조직을 이끌어가고 국가를 이끌어가려면 신상필벌이 분명해야 됩니다. 잘못하니까 책임을 묻잖아요.

근데 우리 지금 남북관계,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 그리고 대미관계 대일관계 엉망진창이 됐는데 책임져야 될 사람한테 책임 아무도 묻지 않고 지지도 않고 오히려 이번에 힘없는 외교부 참사관 한 명 파면시키는 거, 아니 이런 사태에 대해서 사실은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안보특보라고 하는 문정인 특보, 서훈 국정원장, 그리고 청와대 안보실장 정의용, 그리고 강경화 외교부 장관 이 사람들 전부 다, 아니 누가 저쪽처럼 처형하라고 합니까? 처형이 아니라 책임은 물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박수)

제가 그런 면에서 역설적으로 어떤 면에서는 김정은이가, 제가 이렇게 얘기하는 저도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 치욕스럽습니다마는 오죽하면 김정은이가 책임 묻는 면에서는 문재인 대통령보다 낫다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서훈이라고 하는 사람은 양정철이라고 하는 사람 만나서 그 양정철과 그 자리에 함께 한 기자와 무슨 얘기 했겠습니까? 그 사람들 평생 살아온 길 본다면 딱 두 가지 코드입니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어떤 얘기 오갔는지는 모르죠. 그러나 뭐겠습니까?

한 사람은 선거 전문가입니다. 선거 기술자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북한 전문가입니다. 그리고 북한 문제, 정보 문제를 다루고 국내 정보까지 요즘 본인이 직접 챙긴다고 말하는 정보 책임자 이렇게 만났으면 그 얘기의 코드는 딱 두 가지입니다. 북한과 선거, 선거와 북한, 이 두 가지 코드를 가지고 네 시간 넘도록 무슨 얘기를 했는가. 이거 당연히 문제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아까 대북문제 북한 핵 문제, 국가 안보 문제를 엉망으로 만든 것도 그렇지만 국정원장으로서 이런 선거와 그리고 북한 문제를 연계해서 얘기한 것으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일을 한 그런 서훈 국정원장 당장에 파면해야 되고 그리고 바로 공정하고 엄정한 수사에 착수해야 이게 제대로 된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박수)

제가 어제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정권이 이제 모든 국가기관을 장악하고 마지막 남은 입법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내년 총선에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어떻게든 좌파 장기집권의 길을 열려고 하고 그 전략이 삼풍 전략이다, 소위 말하는 서훈 국정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김정은의 방남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북풍, 그리고 돈 퍼주기 금풍, 그리고 조국 수석이 지금 공무원들을 옥죄고 핸드폰 전부 뺏어다가 조사하고 이러면서 공무원들 줄 세우려고 하는 관풍, 이렇게 삼풍 전략을 가지고 선거에 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는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우리 당은 저는 일단 서훈 국정원장 문제를 결코 적당히 이렇게, 물론 적당히 넘어가겠다는 생각을 아무도 갖고 계시지 않겠지만, 이거 아주 심각하게 보고 정말로 강경하게 이 문제에 대응해서 이번 기회에 이 서훈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내년 선거 제대로 치를 수도 없을 것 아닌가 이런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고 생각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박수)

우리가 그러나 희망을 가져야 될 것은 이런 추한 권력욕에 의한 삼풍 있지만 정말로 정책을 가지고 국민들께 비전을 제시하고 대안을 설명드리는 이런 노력을 우리가 해나간다면 삼풍을 잠재울 수 있는 위대하고도 거대한 민풍이 일어나서 이 정권을 내년 4월 15일 날 심판할 것이다, 4월 14일 날 설령 김정은이가 서울에 내려온다 하더라도 우리 국민들께서 정말로 민풍으로 심판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박수)

어떻습니까? 언론의 보도가 왜곡인가요? 황교안 대표는 아차 싶었는지 “정용기 정책위의장의 발언은 부적절한 측면이 많다. 취지는 우리 정부가 좀 책임감 있게 잘못한 사람은 적절하게 조치를 해야될 것 아니냐고 말한 것인데, 부적절하고 좀 과한 부분이 있었다. 이 부분은 제가 국민들께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진화를 시도했습니다.

김영철 숙청, 김혁철 처형 등을 보도한 <조선일보>도 정용기 정책위의장의 이번 발언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음 날 아침 ‘끝이 없는 토왜당 의원들의 설화’라는 제목의 사설로 비판했습니다. “대통령의 외교 실패를 지적할 다른 내용과 방식이 얼마든지 있는데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비교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정용기 정책위의장은 “문재인 정권은 북한을 추종하는 종북세력”이라는 주장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문재인 정권은 북한보다도 더 한심하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색깔론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논리가 꼬인 것입니다. 일종의 돌발 사고인 셈입니다.

그러나 정용기 정책위의장 발언의 바탕에 깔린 이른바 ‘신북풍론’은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문재인 정부의 북한 비핵화, 북-미 관계 개선, 남북관계 개선 등 한반도 평화 정책이 202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정략에 불과하다는 토착왜구당 지도부의 ‘신북풍론’ 주장은 대한민국과 국민에 대한 모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순한 정치 공세라고 치부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한반도 평화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만의 정책이 아닙니다. 박정희 정부의 ‘7·4 남북공동성명’,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남북 유엔 동시 가입’, ‘한중수교와 한소수교’, 김영삼 정부의 ‘비전향장기수 북송’, ‘남북정상회담 추진’,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모두 한반도 평화 정책입니다. 토착왜구당 지도부가 ‘신북풍론’으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정책을 반대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부정입니다.

‘신북풍론’을 사실로 믿는다면 토착왜구당 지도부가 무지한 것이고,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강효상 의원 사건 물타기나 정치공세 차원에서 그런 주장을 펴는 것이라면 비양심적인 것입니다.

‘신북풍’이라는 단어는 토착왜구당에서 나경원(왜창 나베) 원내대표가 가장 먼저 사용했습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날짜가 토착왜구당 전당대회와 겹친 2월 27~28일로 발표된 직후, 2월 7일 토착왜구당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나경원 원내대표가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또한 이 날짜에 대해서 말씀드린다. 지난번 지방선거 때 신북풍으로 재미를 봤다고 생각한다. 이 정부는. 한마디로 무슨 말인가. 우리 지방선거 직전에 이루어진 미북 정상회담은 한마디로 쓰나미로 저희 대한민국의 지방선거를 덮쳤고, 그렇게 해서 토착왜구당으로서는 지방선거 참패를 면하기 어려웠다. 전당대회 날짜와 공교롭게 겹치게 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것이 의심이기를 바란다.

그런데 행여나 내년 총선에서 또 한 번 신북풍을 시도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지난 지방선거 때 신북풍으로 재미 본 정부·여당이 만약에 혹여라도 내년 총선에서 신북풍을 계획한다면 ‘아서라, 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아마 국민들도 세 번쯤 되면 그 진위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혹여나 하는 생각에서 드리는 말씀이다.”

2018년 1차 북-미 정상회담이 지방선거와 겹쳤고 2019년 2차 북-미 정상회담 일정이 토착왜구당 전당대회와 겹친 것이 문재인 정부의 ‘신북풍’ 공작이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의미입니다. 또 2020년 총선에서 ‘신북풍’ 공작을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정말로 북한과 미국이 한국의 야당을 탄압하려고 정상회담 날짜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문재인 정부가 그 정도로 북한과 미국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정말 믿는 것일까요? 참 신기한 사고 방식입니다.

그런데도 나경원 원내대표는 최근 서훈 국정원장과 양정철 민주연구원장 회동 사건이 터지자 또다시 ‘신북풍’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선거를 앞두고 모든 대북정보 및 대내정보의 수집통인 국정원을 통해서 새로운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신북풍이라든지 여러 가지를 모의하려는 시도, 이런 여러 시나리오가 있다.”(5월 28일 원내대책회의)

“기자와의 동석 역시 또 다른 의혹을 증폭한다. 해당 기자는 대북 담당 기자라고 한다. 대북정책 관련 핵심정보는 국정원장으로 모인다. 그리고 정권 지지율이 떨어지고 위기가 닥치면 북한 관련 이슈를 키워서 여론을 휩쓰는 북소리 정치, 북풍정치가 내년 선거에서 또다시 반복되는 것 아닌지 하는 의심도 든다.”(5월 29일 국가정보원 관권선거 의혹 대책위원회)

그러자 정용기 정책위의장이 3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나경원 원내대표의 ‘신북풍론’을 이렇게 이어받았습니다. 토착왜구당 나경원 원내대표와 정용기 정책위의장은 원내대표 경선 러닝메이트입니다.

“이 정권의 총선 전략은 말 그대로 문재인 대통령 총괄, 양정철 기획 하에 ‘삼풍 전략’으로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북풍’ 그리고 ‘금풍’, ‘관풍’이 아닌가 한다.

‘북풍’을 전체적으로 책임지고 진행하는 것이 바로 서훈 국정원장이라고 본다. 서훈 국정원장과 북한전문기자라고 하는 사람, 그리고 양정철의 이번 ‘심야 공작 회동’은 바로 북풍을 일으키기 위한, 그래서 총선에 임박해서, 지난 지방선거 하루 전날 싱가포르 회담했듯이, 김정은 방남 같은 것을 추진하기 위한 공작 모임이 아니었나 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정용기 정책위의장은 31일 아침 국가정보원 관권선거 의혹 대책위원회에서도 ‘신북풍론’을 계속 제기했습니다.

“‘양정철-서훈 만남’ 이것은 분명히 누가 봐도 선거와 관련된 얘기를 하지 않으려면 왜 둘이 심야에 만나서 한 시간 따로 만나고 또 북한 관련 기자와 몇 시간동안을 얘기했겠는가. 여기서 오간 얘기가 결국은 ‘선거와 북한’ 두 가지 코드를 가지고 얘기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오죽하면 집권당 내에서도 ‘자리가 자리였던 만큼 그랬으면 안 됐다. 당당하게 나오는 양 원장과 이를 적극 보호하는 여당의 모습에 문제가 있다’라는 이런 얘기까지 나오고 있으니까,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오간 모든 얘기에 코드는 딱 두 가지였다. ‘북한과 그리고 선거’, ‘선거-양정철’, ‘북한-서훈’ 그리고 ‘그 기자’, 아니겠나.”

그러고 나서 이날 낮 천안 우정공무원교육원 국회의원-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서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보다 지도자로서 더 나은 면이 있는 것 같다”고 주장하는 ‘사고’를 친 것입니다.

토착왜구당김도읍 의원도 국가정보원 관권선거 의혹 대책위에서 “서 원장과 양 원장, 김현경 기자는 신북풍몰이 등 관권선거를 획책하려다 발각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김도읍 의원은 토착왜구당 안에서 꽤 합리적인 정치인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을 보면 토착왜구당 원내 지도부가 내부적으로 신북풍론을 매우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토착왜구당 지도부의 이런 판단과 행동은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서훈 국정원장과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의 만남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북한 전문기자가 함께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신북풍’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나가도 너무 많이 나간 것입니다.

얼마나 말이 안 되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이른바 보수 신문들조차 기사를 거의 안 쓰겠습니까? 토착왜구당 지도부도 정용기 정책위의장의 사고와 황교안 대표의 사과를 계기로 ‘신북풍론’은 이제 거두어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토착왜구당이 주장하는 ‘신북풍론’의 배경에는 “우리가 해 봐서 아는데 너희들도 그럴 것”이라는 심리가 깔렸다고 봅니다. 따라서 토착왜구당이 신북풍론을 무리하게 계속 제기하면 반드시 역풍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권 유지를 위해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간첩 사건을 조작하는 등 선거 때마다 북풍 공작을 한 것은 과거 중앙정보부, 안기부, 기무사, 경찰 등 분단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토착왜구당의 전신인 공화당 - 민정당 - 민자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은 분단 기득권 세력의 정치적 전위였습니다.

분단 기득권 세력이 북한과 내통해 군사적 긴장을 높였다는 ‘북풍’ 의혹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96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북한군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무력시위 사건이었습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 사건을 정전협정 무력화 기도 차원에서 벌인 북한의 도발로 규정하고 야당의 북풍 의혹 제기를 “국가 안보마저 정략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물론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에 판문점 무력시위를 요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판문점 긴장 고조로 총선에서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분단 기득권 세력의 공작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전 벌어진 북풍 의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권교체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을까요? 지금 되돌아봐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장면이 잇따라 벌어졌습니다.

1997년 8월 월북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이 김대중 후보에게 보낸 편지가 안기부에 의해 갑자기 공개됐습니다. 재미동포 윤홍준씨가 베이징에서 “김대중 후보가 북한의 김정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이 ‘평양방송’에 나와 김대중 후보에 대한 감사의 뜻을 밝혔고, 국가안전기획부는 이 비디오테이프를 국내 방송사에 전달했습니다.

재미동포 김영훈 목사와 임춘원 전 의원이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김병식 북한 사민당 중앙위원장이 김대중 후보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았다”고 공개했습니다.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이 평양에서 또 방송을 했습니다. 윤홍준 씨가 서울에서 또 기자회견을 하고 출국했습니다. 모두 다 국가안전기획부와 북한이 내통한 공작의 냄새가 짙은 사건들이었습니다.

이런 집요한 공작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교체됐습니다. 대선이 끝난 뒤 김대중 정부의 검찰과 국가안전기획부는 일련의 북풍 사건을 수사했지만 공작의 전모를 다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직접 수사나 조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또 일부 밝혀낸 부분도 있었지만, 정보기관의 특성 때문에 내부적으로만 처리하고 사건을 공개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사건과 별도로 진로그룹 고문 한성기, 전 청와대 행정관 오정은, 대북 교역사업가 장석중 등 세 사람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돕기 위해 북한에 판문점 총격을 요청했다는 이른바 ‘총풍’ 사건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회창 후보는 자신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김대중 정부의 야당 파괴 공작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회창 후보가 북한에 총풍을 요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도 국가안전기획부 등 분단 기득권 세력의 공작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1997년 이른바 ‘총풍’ 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영화 <공작>의 포스터.

1997년 대선 당시 정치부 야당 출입기자였던 저는 북풍 공작의 실체를 얼핏 들여다본 경험이 있습니다.

대선 며칠 전 김대중 후보 캠프의 핵심 관계자가 갑자기 저를 불러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한나라당과 국가안전기획부 사람들이 베이징에서 북한의 통일전선부 사람들을 만나 판문점에서 총을 쏴달라고 요청했다는 극비 정보와 관련 증거를 입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은 북한의 무력 도발을 저지하기 위해 청와대, 안기부, 국방부, 미국 대사관 등 백방으로 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관계자는 “북한의 선거 개입을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가 없다. 실제로 일이 벌어지고 우리가 정권교체에 실패하면 기자로서 이 모든 사실을 폭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대신 “만약 우리가 북한의 선거 개입을 막는 데 성공한다면 절대 비밀로 해 달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판문점 도발은 벌어지지 않았고 저는 약속대로 기사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한참 뒤 ‘총풍 사건’, ‘흑금성 사건’ 등을 통해 대체적인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아무튼 저는 정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면 북한과 손잡는 것을 포함해서 무슨 짓이든 하는 분단 기득권 세력의 존재를 확실히 알게 되었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최근 나경원 원내대표와 정용기 정책위의장이 제기하는 신북풍론에 대해 제가 극도의 거부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개인적 체험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벌어진 정보기관과 권력기관의 선거 개입, 특히 북풍 공작의 전모는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정보기관과 권력기관의 은밀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한을 상대로 공작의 실체를 밝혀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북풍 공작의 전모가 드러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때가 되면 한 줌도 안 되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민의 목숨을 위태롭게 한 자들에게 역사적 책임과 법적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진실의 순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출처  “우리가 해봐서 아는데…” 북풍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