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민주묘지 뒤덮은 친일파의 흔적
친일파 김경승의 4월혁명기념탑
3·15 부정선거 동참한 이은상의 기념탑문이라니...
[오마이뉴스] 김종성 | 20.04.19 11:17 | 최종 업데이트 : 20.04.19 11:17
헌법 전문(서문) 첫 구절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구다. 헌법이 3·1운동의 민족주의 이념과 4·19혁명의 민주주의 이념에 얼마나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지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의 국립4·19민주묘지에 가보면, 4·19의 가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성의가 아직은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4·19를 부정하는 것들이 4·19 영령들을 억누르는 모습을 이곳에서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4·19 묘지의 핵심 공간들은 묘지와 유영봉안소 그리고 4월학생혁명기념탑이다. 아래 사진에서 동그라미 친 부분이다. 그중에서 기념탑은 묘지 중앙에 있다. 이 기념탑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살펴보면, 4·19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성의가 어느 정도인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념탑 앞에 놓인 것은 사월학생혁명기념탑문(文)이라는 비석이다. 4·19 묘지를 방문하면 여기서 참배를 하게 된다. 이 비석은 1963년 9월 20일 박정희 군사정권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의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세웠다. 재건국민운동본부 내의 4월학생혁명기념탑건립위원회가 실무를 담당했다.
5·16 쿠데타 다음달인 1961년 6월 발족한 재건국민운동본부는 ‘국가 재건’이란 구실 하에 군사 쿠데타를 합리화하는 국민운동을 벌인 단체다. 이 단체의 조직과 직능을 정할 목적으로 그해 6월 12일 제정된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에서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위 법률 제2조는 “본법에서 재건을 위한 국민운동이라 함은 전 국민이 청신한 기풍을 배양하고 신생활 체계를 견지하며 반공이념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하는 주로 다음 사항에 관한 범국민운동을 말한다”고 한 뒤 “1. 용공중립사상의 배격, 2. 내핍 생활의 려행, 3. 근면정신의 고취, 4. 생산 및 건설 의지의 증진, 5. 국민도의의 양양, 6. 정서 관념의 순화, 7. 국민체위의 향상”을 열거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대한민국의 정신세계를 5·16 이념에 맞게 개조하는 곳이었다. 이 단체가 국립4·19민주묘지를 조성했을 뿐 아니라 4월학생혁명기념탑도 세웠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4·19를 부정하면서 등장한 정권이다. 이들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4·19 이후의 상황을 혼란과 무질서로 규정했다. 그런 군사정권이 4·19를 기린다면서 4·19 묘지를 세우고 기념탑문을 세웠다. 위 법률 제2조에 열거된 취지에 따라 4·19 혁명을 재해석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의 필요에 부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재건국민운동본부가 간여했다는 사실 외에, 2가지의 추가적 사실이 4·19에 대한 모독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중 하나는 친일파 김경승(1915~1992)이 4월학생혁명기념탑을 설계하고 조각했다는 점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 따르면,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관립 도쿄미술학교와 가와바타미술학교를 졸업한 김경승은 태평양전쟁 중인 1942년 조선미전에 ‘여명’이란 작품을 제출했다. 젊은 남성 노동자가 망치를 어깨에 메고 노동 현장에 가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여명’은 제목에서부터 동아시아 건설주의를 웅변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이 작품으로 그는 총독상을 수상했다.
<친일인명사전>에 인용된 1942년 6월 3일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김경승은 수상 소감을 밝히는 기회에 “더 중대한 문제는 재래 구라파의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이라면서 “나는 이 같은 중대한 사명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1939년부터 조선미전에서 매년 수상한 그는 마지막 대회인 1944년에는 상체를 드러낸 여성 노동자가 작업 도구를 어깨에 메는 모습을 담은 ‘제4반’을 출품했다. 여성근로정신대를 형상화하는 작품을 냈던 것이다.
그의 친일은 예술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 조선미술가협회의 평의원과 조각분과 역원으로 참여했고, 1944년 결전미술전람회 심사원으로 참여하여 ‘대동아 건설의 소리’를 출품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친일단체의 행정에도 간여했던 것이다.
김경승은 일제가 한국의 인력과 물자를 착취하고자 만든 국민총력조선연맹에 참여했다. 일제의 승리를 기원하며 작품을 조각했던 그 영혼과 그 손길이 4·19 기념탑에도 묻어 있는 것이다.
2가지의 추가적 사실 중에서 또 다른 하나는, 기념탑문의 문장을 지은 이가 시조시인 이은상이라는 점이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가고파’의 작사가로 유명한 이은상은 친일 논란은 있지만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돼 있지 않다. 하지만 4·19라는 세 숫자를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3·15 부정선거와 관련됐기 때문이다.
3·15 부정선거는 4·19 혁명을 촉발시킨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범죄를 저지른 자유당은 1960년 1월 21일 ‘정·부통령선거 중앙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해 1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 ‘범여 선거대위 발족’에 따르면, 30명으로 구성된 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 명단에 이은상이 있었다.
이은상은 단순히 명의만 빌려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유세 현장에 직접 나가 연설원 활동까지 했다. 그는 혼탁하고 부조리한 자유당 유세 현장에서 시인의 명성을 내걸고 선거 연설을 토해냈다. 그가 참여한 그해 2월 27일 대구 유세의 현장 분위기를 2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 ‘대구에서 시민 20만 동원’은 이렇게 전한다.
자유당은 청중 20만 동원을 위해 대구시의 대형 시장 2곳을 강제로 폐쇄했다. 공무원들 역시 관청이 아니라 유세장에 출근하도록 했다. 이때 이은상의 활약에 관해 위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은상을 비롯한 선거 유세원들은 한결같이 이승만을 칭송했다. 특히 이은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는 2001년 4월 20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4·19와 이은상은 공존할 수 없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는 1960년 5월호 <사상계> 기사 ‘부정선거와 예술인의 지성’을 인용해 이렇게 전한다.
“3월 초 어느 날, 대구와 부산에서 열린 자유당의 유세 강연회에 이은상이 등장했다. 그는 시국을 임진란에 비교하면서 ‘성웅 이순신 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 ··· 그리고 그 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고 말했다.”
그해 3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 ‘10개 도시 추가 자유당 유세’에 따르면, 이은상은 3월 9일 경남 마산, 3월 10일 경남 진주, 3월 12일 경북 경주에서도 유세를 했다.
그중에서 마산은 김주열 열사가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인 뒤 실종됐다가 4월 10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바다에서 발견된 곳이다. 김주열을 비롯한 마산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데 이은상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이은상은 자유당 부정선거의 최첨단에서 이승만을 찬양했다. 그가 찬양한 이승만을 몰락시킨 사건이 바로 4·19 혁명이다. 이는 이은상이 내심으로 4·19를 좋아할 수 없음을 명백히 증명한다. 그런데도 4·19 묘지의 기념탑문에 이런 글을 썼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세웠고,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성웅 이순신 같은 분은 오로지 이승만밖에 없다고 했던 이은상이다. 그런 그가 이승만과 싸우다 희생된 185위를 거룩한 수호신으로 떠받들었다. 절대로 진심일 리 없는 글을 썼던 것이다. 4·19의 적(敵)인 그가 이런 글을 쓴 것은 4·19에 대한 모독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박정희가 이 나라를 5·16 이념에 맞추고자 조직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4·19 묘지를 건립하고, 일제의 강제동원을 미화한 친일파 김경승이 4월혁명기념탑을 세우고, 3·15 부정선거에 적극 동참한 이은상이 기념탑문을 지었다는 것은 너무도 어이없는 장면이다. 재건국민운동본부와 친일파 조각가와 4·19의 적이 합작해서 4·19 영령들을 억누르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이런 부조리를 오랫동안 방치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헌법 전문의 4·19 이념에 대해 온전히 성의를 다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4·19민주묘지 뒤덮은 친일파의 흔적
친일파 김경승의 4월혁명기념탑
3·15 부정선거 동참한 이은상의 기념탑문이라니...
[오마이뉴스] 김종성 | 20.04.19 11:17 | 최종 업데이트 : 20.04.19 11:17
헌법 전문(서문) 첫 구절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구다. 헌법이 3·1운동의 민족주의 이념과 4·19혁명의 민주주의 이념에 얼마나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지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의 국립4·19민주묘지에 가보면, 4·19의 가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성의가 아직은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4·19를 부정하는 것들이 4·19 영령들을 억누르는 모습을 이곳에서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4·19 묘지의 핵심 공간들은 묘지와 유영봉안소 그리고 4월학생혁명기념탑이다. 아래 사진에서 동그라미 친 부분이다. 그중에서 기념탑은 묘지 중앙에 있다. 이 기념탑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살펴보면, 4·19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성의가 어느 정도인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친일파 김경승이 세운 4월혁명기념탑
▲ 국립4·19민주묘지의 구조. ⓒ 국립4·19민주묘지 홈페이지
▲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그 아래의 기념탑문. ⓒ 김종성
기념탑 앞에 놓인 것은 사월학생혁명기념탑문(文)이라는 비석이다. 4·19 묘지를 방문하면 여기서 참배를 하게 된다. 이 비석은 1963년 9월 20일 박정희 군사정권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의 재건국민운동본부가 세웠다. 재건국민운동본부 내의 4월학생혁명기념탑건립위원회가 실무를 담당했다.
5·16 쿠데타 다음달인 1961년 6월 발족한 재건국민운동본부는 ‘국가 재건’이란 구실 하에 군사 쿠데타를 합리화하는 국민운동을 벌인 단체다. 이 단체의 조직과 직능을 정할 목적으로 그해 6월 12일 제정된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에서 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위 법률 제2조는 “본법에서 재건을 위한 국민운동이라 함은 전 국민이 청신한 기풍을 배양하고 신생활 체계를 견지하며 반공이념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하는 주로 다음 사항에 관한 범국민운동을 말한다”고 한 뒤 “1. 용공중립사상의 배격, 2. 내핍 생활의 려행, 3. 근면정신의 고취, 4. 생산 및 건설 의지의 증진, 5. 국민도의의 양양, 6. 정서 관념의 순화, 7. 국민체위의 향상”을 열거했다.
재건국민운동본부는 대한민국의 정신세계를 5·16 이념에 맞게 개조하는 곳이었다. 이 단체가 국립4·19민주묘지를 조성했을 뿐 아니라 4월학생혁명기념탑도 세웠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4·19를 부정하면서 등장한 정권이다. 이들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붕괴시킨 4·19 이후의 상황을 혼란과 무질서로 규정했다. 그런 군사정권이 4·19를 기린다면서 4·19 묘지를 세우고 기념탑문을 세웠다. 위 법률 제2조에 열거된 취지에 따라 4·19 혁명을 재해석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의 필요에 부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재건국민운동본부가 간여했다는 사실 외에, 2가지의 추가적 사실이 4·19에 대한 모독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중 하나는 친일파 김경승(1915~1992)이 4월학생혁명기념탑을 설계하고 조각했다는 점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행한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 따르면,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관립 도쿄미술학교와 가와바타미술학교를 졸업한 김경승은 태평양전쟁 중인 1942년 조선미전에 ‘여명’이란 작품을 제출했다. 젊은 남성 노동자가 망치를 어깨에 메고 노동 현장에 가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여명’은 제목에서부터 동아시아 건설주의를 웅변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이 작품으로 그는 총독상을 수상했다.
<친일인명사전>에 인용된 1942년 6월 3일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김경승은 수상 소감을 밝히는 기회에 “더 중대한 문제는 재래 구라파의 작품의 영향과 감상의 각도를 버리고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 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이라면서 “나는 이 같은 중대한 사명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다하여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1939년부터 조선미전에서 매년 수상한 그는 마지막 대회인 1944년에는 상체를 드러낸 여성 노동자가 작업 도구를 어깨에 메는 모습을 담은 ‘제4반’을 출품했다. 여성근로정신대를 형상화하는 작품을 냈던 것이다.
그의 친일은 예술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 조선미술가협회의 평의원과 조각분과 역원으로 참여했고, 1944년 결전미술전람회 심사원으로 참여하여 ‘대동아 건설의 소리’를 출품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친일단체의 행정에도 간여했던 것이다.
김경승은 일제가 한국의 인력과 물자를 착취하고자 만든 국민총력조선연맹에 참여했다. 일제의 승리를 기원하며 작품을 조각했던 그 영혼과 그 손길이 4·19 기념탑에도 묻어 있는 것이다.
3.15 부정선거 도운 이은상이 쓴 4.19 기념탑문
2가지의 추가적 사실 중에서 또 다른 하나는, 기념탑문의 문장을 지은 이가 시조시인 이은상이라는 점이다. “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로 시작하는 ‘가고파’의 작사가로 유명한 이은상은 친일 논란은 있지만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돼 있지 않다. 하지만 4·19라는 세 숫자를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3·15 부정선거와 관련됐기 때문이다.
3·15 부정선거는 4·19 혁명을 촉발시킨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범죄를 저지른 자유당은 1960년 1월 21일 ‘정·부통령선거 중앙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해 1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 ‘범여 선거대위 발족’에 따르면, 30명으로 구성된 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 명단에 이은상이 있었다.
이은상은 단순히 명의만 빌려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유세 현장에 직접 나가 연설원 활동까지 했다. 그는 혼탁하고 부조리한 자유당 유세 현장에서 시인의 명성을 내걸고 선거 연설을 토해냈다. 그가 참여한 그해 2월 27일 대구 유세의 현장 분위기를 2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 ‘대구에서 시민 20만 동원’은 이렇게 전한다.
“27일 하오 야당 도시인 당지(當地) 수성천변에서 개최된 자유당의 제1차 선거 강연회에는 약 20만의 시민이 동(洞·반(班)과 관(官)의 조직적인 간섭에 의하여 강연 시간보다 일찍 강제 동원되었는데, 강연회가 시작되자 동원된 시민들은 강연을 듣지 않고 돌아가기 시작하였으며 연설을 경청하는 시민의 수는 불과 수만명 정도이었다.”
자유당은 청중 20만 동원을 위해 대구시의 대형 시장 2곳을 강제로 폐쇄했다. 공무원들 역시 관청이 아니라 유세장에 출근하도록 했다. 이때 이은상의 활약에 관해 위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날 연설회를 통하여 한희석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황성수 의원 및 이은상(시인), 김말봉(소설가) 양(兩) 선거대책 지도위원 등 연사들은 자유당의 정·부통령 후보인 이 대통령과 이 의장의 업적을 한결같이 칭송하는 반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에 대하여는 인신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이은상을 비롯한 선거 유세원들은 한결같이 이승만을 칭송했다. 특히 이은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는 2001년 4월 20일자 <오마이뉴스> 기사 ‘4·19와 이은상은 공존할 수 없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는 1960년 5월호 <사상계> 기사 ‘부정선거와 예술인의 지성’을 인용해 이렇게 전한다.
“3월 초 어느 날, 대구와 부산에서 열린 자유당의 유세 강연회에 이은상이 등장했다. 그는 시국을 임진란에 비교하면서 ‘성웅 이순신 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 ··· 그리고 그 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고 말했다.”
그해 3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 ‘10개 도시 추가 자유당 유세’에 따르면, 이은상은 3월 9일 경남 마산, 3월 10일 경남 진주, 3월 12일 경북 경주에서도 유세를 했다.
그중에서 마산은 김주열 열사가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인 뒤 실종됐다가 4월 10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바다에서 발견된 곳이다. 김주열을 비롯한 마산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데 이은상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 4·19 묘지에 있는 김주열 열사의 묘비. ⓒ 김종성
이은상은 자유당 부정선거의 최첨단에서 이승만을 찬양했다. 그가 찬양한 이승만을 몰락시킨 사건이 바로 4·19 혁명이다. 이는 이은상이 내심으로 4·19를 좋아할 수 없음을 명백히 증명한다. 그런데도 4·19 묘지의 기념탑문에 이런 글을 썼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세웠고,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 기념탑문. ⓒ 김종성
성웅 이순신 같은 분은 오로지 이승만밖에 없다고 했던 이은상이다. 그런 그가 이승만과 싸우다 희생된 185위를 거룩한 수호신으로 떠받들었다. 절대로 진심일 리 없는 글을 썼던 것이다. 4·19의 적(敵)인 그가 이런 글을 쓴 것은 4·19에 대한 모독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박정희가 이 나라를 5·16 이념에 맞추고자 조직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4·19 묘지를 건립하고, 일제의 강제동원을 미화한 친일파 김경승이 4월혁명기념탑을 세우고, 3·15 부정선거에 적극 동참한 이은상이 기념탑문을 지었다는 것은 너무도 어이없는 장면이다. 재건국민운동본부와 친일파 조각가와 4·19의 적이 합작해서 4·19 영령들을 억누르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이런 부조리를 오랫동안 방치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헌법 전문의 4·19 이념에 대해 온전히 성의를 다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4·19민주묘지 뒤덮은 친일파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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